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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소소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난 일본문학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에 대해서도 문외한이다. 그런데 최근에 일본 단편 소설들을 몇 권 읽으며 비슷한 분위기를 느끼게 되었는데, 하나는 다소 엉뚱하고 황당하다 싶은 설정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부분 ‘아하~’하는 가벼운 탄성을 지를 정도의 반전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분위기가 자꾸 겹쳐지다 보니 자극에 둔감해진다고나 할까? 아니면 책을 덮고 나서 ‘재미있다, 기발하다’ 하는 정도의 느낌 외엔 남는 게 없다는 허무함에 질린다고나 할까? 일본 작가 특유의 묵직함이 덜한, 약간 간드러지는 듯한 문체의 글을 계속 읽다보면 좀 느끼해져서, 기름진 중국요리나 햄버거를 먹다가 김치 생각이 나듯, 우리 작가들의 글이 그리워지기도 했었다.
나의 일본 단편 소설에 대한 별로 좋지도 않은 그런 편견들은 이 책을 앞에 두고 자꾸 읽기를 미루게 만들었는데, 책꽂이에서 그야말로 썩소를 흘리며 비웃는 듯한 표지 속 여자의 얼굴이 자꾸 눈에 거슬렸다. 에이, 빨리 읽고 책꽂이 제일 높은 칸으로 이사시켜야지, 하는 마음으로 집어 읽었다.
예상은 비슷하게 맞아 떨어졌다. 그런데 이 작가, 여지껏 내가 읽었던 일본 단편 소설들과 비슷한 냄새를 풍기면서도 어딘가 달랐다. 좀 더 현실적인 감각이 살아있다고나 할까? 표지의 여자가 흘리던 썩소처럼 현실을 뒤틀고 비꼬는 이 꽤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연작 단편이라는 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 안에는 ‘문학상’이라는 소재로 이어지는 네 편의 소설(‘최종심사’, ‘불꽃놀이’, ‘과거의 사람’, ‘심사위원’)이 있다. 문학상을 주최하는 규에이샤라는 출판사와 작가들 간의 속물스러운 심리와 냉정하고 차가운 사회의 일면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네 편의 각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같은 인물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신데렐라 백야행’은 청순가련형 이미지의 신데렐라를, 야망을 위해 치밀하게 계산하고 야무지게 움직이는, 현실적인 섬뜩한 인물로 그려놓았는데 동화 신데렐라에서 왜 자기 딸이 모진 구박을 받는데도 신데렐라의 아버지가 새 부인에게 말 한 마디 못하고 등신처럼 굴었는지, 애가 둘 딸린 거야 새 가정을 이루는 데 결격요소가 되어선 안 된다 치더라도 성격상 치명적 결함이 있는 그 심술궂은 여자와 재혼을 할 정도로 그렇게 여자 보는 눈이 형편없었는지가 설명되는 걸 읽으며 즐겁기도 했다. 청순가련형의 이미지를 벗고 야멸친 이미지로 갈아입은,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지배하는 신데렐라도 꽤 매력적이고 신선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임계가족’의 이야기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깊이 공감하며 기꺼이 맞장구를 쳐줄 내용이었는데, 인기 애니메이션과 연관된 캐릭터 상품들 때문에 골치 아팠던 기억이 떠올라 그야말로 내 얼굴에 썩소가 피어났을 터...
남성의 성적 욕망이 위협당하는 ‘임포그라’, 여성 신체에 대한 남성의 과도한 망상을 담은 ‘거대유방증후군’, 반대로 여성들이 갖고 있는 주목받고, 관심 받고 싶은 욕망을 그린 ‘스토커 입문’ 등 현대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과 불합리한 인간 심리를 암팡지게 꼬집는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이 작가는 원래는 슬픈 이야기를 주로 쓰는 ‘눈물의 대가’란다. 그러니 나는 예외적 작품으로 이 작가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인데, 그나마 제목이 낯익은 작품은 <붉은 손가락>이 전부다. 다음엔 이 작가의 주류(?)작품으로 다시 만날 기회를 갖고 싶다. 기왕이면 장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