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광인 - 상 - 백탑파白塔派, 그 세 번째 이야기 백탑파 시리즈 3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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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직접 읽어본 적은 없었다.  고작해야 열하일기에 대해 정민 님과 고미숙 님이 쓰신 책을 서너 권 읽어 본 것 밖에 없다.  그렇게 한 다리 건너 만나 본 연암의 열하일기인데도 시대의 틀을 깨어버리는 장쾌한 맛이 풍겨오는 듯해서 좋았었다.  김탁환 님의 소설 <열하광인> 소식을 접하고 읽고 싶다는 욕심을 부린 것도, 열하일기를 직접 맞댈 용기가 없는 내가 소설을 통해서라도 연암의 열하일기가 가진 그 장쾌한 향을 다시 맡고 싶다는 무모함이 나를 독촉했기 때문이었다.

“단 한 권의 금서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p.11)는 열하일기에 대한 찬미의 글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의금부도사 이명방이 작중화자인 까닭에 소설의 문장 자체가 꽤 예스럽다. 그것이 소설을 읽는 흐름을 방해하는 동시에 역사소설의 맛을 더 풍부하게 해주기도 했다.  511까지 번호가 붙은 각주들 또한 이 소설의 특이한 점 중 하나다.  모르고 있던 국어 낱말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고 작가의 풍부한 어휘능력을 감탄하게도 만들었다. 

그러나 연암 박지원을 중심으로 모였던 백탑파들에 대한 정조의 문체반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그린 역사추리소설이라는 이 작품을 읽으며 좀 애매한 곳에 어정쩡하게 서있는 기분이 들곤 했다. 내가 추리소설 영역에 워낙 낯선 탓도 있겠지만 어쩐지 ‘추리’에 해당하는 부분이 자꾸 거치적거렸다.  오히려 ‘추리’부분을 거둬내고 ‘역사소설’ 부분만 말끔하게 읽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재미는 있었다.  이 <열하광인> 전에 나온 <방각본 살인사건>과 <열녀문의 비밀>을 읽어보지 못했는데도 작중화자인 이명방의 존재에 익숙해지자 속도에 탄력이 붙으면서 소설의 재미에 밤새워 빠져들었다.  청정관 이덕무가 규장각 검서관 일을 하게 되면서 “빛을 보지 않아도 좋다. 버려진 물건처럼 이리저리 구르던 우리들의 삶도 이제 쓰일 데가 있다는 것이 감격스럽기만 했다.  규장각 서고에 가득한 책들 속에서 좀벌레로 늙어 간다고 해도, 이 세상 어딘가에 나의 자리가 있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책만 보는 바보, 210쪽, 안소영, 보림)며 행복해하던 글이 떠오르기도 했고, 안의 현감으로 머무는 연암이 등장할 때에는 “어른께서는 벌써 사흘째 끼니를 거르고 계셨다.  마침 맨발에 맨상투로 창턱 위에 다리를 걸치고서 문간방의 아랫것과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이었다.”(비슷한 것은 가짜다, 295쪽, 정민, 태학사)던 이서구의 글이 떠올라 연암의 가난하고 쓸쓸한 말년이 겹쳐지기도 했다. 

정확하게 맞물려 돌아가며 실감나게 잘 짜여진 사건전개와 사건의 미궁 속에서 집요하고 정확하게 실마리를 찾아가는 긴박감은 추리소설로서 좀 부족하지 않았나 싶지만, 조선시대 제 2의 르네상스라고 불려지는 정조시대를 살았던 백탑파 인물들에 대한 성격묘사나 문체반정에 대한 백탑파들의 고민은 세심하게 그려낸 것 같다. 

요즘의 역사소설에 대한 인기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  좀 더 손쉬운 방법으로 지적 자극을 받고 싶다는 독자들의 욕구가 반영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역사는 오늘의 삶과 자기 정체성을 되비쳐 볼 수 있는 유력한 준거들이다.  소설가들이 역사를 빌려오는 것은 얼크러진 현실의 복잡한 정황 때문에 그것을 전체로서 그러쥐고 통찰하기 어려울 때다.”는 한 기사의 글이 떠오르기도 한다.  역사소설이 독자들의 손쉬운 지적 자극의 수단이 되거나 또는 작가들의 복잡한 현실문제에서의 도피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천자로서 서인까지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담아 시문을 짓는 자라면 누구나 선비”(상권 211쪽)라는 글처럼 책 속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진솔한 삶을 만나는 것이 책 읽기를 즐기는 사람들의 가장 큰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연암이 문체반정에 굴하지 않고 열하일기를 통해 자기의 생각과 삶을 온통 드러내었던 것처럼 말이다.  오늘날에도 백탑 아래로 모여드는 사람들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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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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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해지고 뻔해진 사랑이야기, 드라마나 가요나 모두 그 흔한 사랑타령이다.  하지만 백설공주와 신데렐라, 라푼젤과 잠자는 숲 속의 공주까지 두루두루 섭렵하며 낭만적이고 완벽한 사랑을 위한 조기교육을 참 일찍부터 받았건만 정작 그 흔한 사랑에 대해서 정확하게 아는 건 없고 그저 누적된 환상들만 확인할 뿐이다. 실전에 들어가면 꼬이고 엉키고 뒤틀려 “내 마음 나도 몰라”가 되기 일쑤거나 도무지 정신을 못 차리고 헤매다가 결국은 “내 눈에 덮인 콩꺼풀” 탓으로 돌려버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 사람, 알랭 드 보통이라는 이 프랑스 남자는 참 대단하다. 남들은 그 거세고 난폭한 ‘사랑’이라는 감정의 파도에 한 번 휩쓸리면 허우적거리기도 바빠 죽겠는데, 이 사람은 그런 사람들을 약올리듯 날렵하고 능숙하게 파도타기를 하며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조금 얄밉다.)

이 책을 읽는 초반에는 “아, 보통이라는 사람, 좀 나이도 지긋하게 먹어서 사랑을 좀 더 높은 곳에서 조망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은 연륜을 지닌, 그런 사람이겠구나. 철학이며 심리학,문학, 예술 분야까지 망라하는 지식을 가졌을 뿐 아니라, 그걸 어떻게 창의적으로 세련되게 써먹을 수 있는지도 아는, 쌓인 지식이 고지식하게 자기를 가두게 하지 않고 세상과 인간을 향해 열려진 창문으로 그 가지를 뻗어가게 할 줄 아는 멋진 사람이네~!!!”하고 감탄했었다.  그런데 책 마지막 역자 후기에서 이 책이 그가 스물다섯 살 쯤에 내놓은 처녀작이라는 글을 읽고는 참담했다.  그저 겨우 한 마디 “이 사람, 보통이 아니라 천재네...”

진부한 사랑이야기를 보는 저자의 진부하지 않은 시각이 이 책의 매력이라 할 수 있겠다. 사랑의 시작부터 이별까지 그 세부 절차에 대한 철학적인 진단과 묘사는 놀라우리만큼 정곡을 찌르고, 사랑을 미화해서 대책 없는 환상을 품게 하는 이야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흥미진진하다.  ‘운명적’이라고 믿었던 만남이 일생일대 최악의 ‘실수’로 변질되어버리는 추한 단계까지는(내 생각에 그 단계까지 가려면 주인공이 결혼에 성공해야 할 것 같다.) 아니지만 실연의 쓰라린 상처를 안고 지구 종말을 맞이한 듯 자포자기의 절망과 비애감에 시달리다가 회복하는 과정까지가 이 책이 분석한 사랑의 과정이다.  그 과정마다 철학자들의 이야기가 등장하는가 하면 알베르티라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가가 나오기도 하고, 레닌, 폴보트, 로베스 피에르가 사랑의 정치인라고 상징되기도 하고, 심지어 그루초 마르크스라는 희극인과 페기 니얼리라는 전문조언가까지 언급하면서 집요한 통찰력과 매서운 분석력을 과시한다.

‘낭만적 운명론’, ‘마르크스주의’(물론 칼 마르크스가 아니라 그루초 마르크스를 말한다.), 또 ‘낭만적 테러리즘’이나 ‘예수 콤플렉스’ 같은 용어들이 기존에 쓰이던 전문용어인지 아니면 저자가 이 책을 쓰면서 새롭게 만들어낸 용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용어들과 그에 따른 설명은 유머러스하면서도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유머러스의 압권은 보봐르 부인이 페기 니얼리 박사에게 현대적 해결책을 조언받는 장면이다.)  한편으로는 이 책의 여자 주인공 클로이의 입장에서 사랑을 조망하고 분석해서 사랑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의 통찰을 볼 수 있으면 참 재미있을 것 같다는 욕심을 부려보기도 했다. (벌써 그런 책이 나와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통해 사랑에 대한 분석과 통찰을 접하면서 ‘왜 사랑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해당하는 답을 이 글에서 찾았다.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p.143)  온전하게 살아있으려면 사랑을 해야 한다.  이 책에서 묘사한대로 우리는 한 마리 아메바라서 누군가가 나에게 형태를 부여해주기를 목말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왜 하필이면 너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잘 모르겠다.  어쩌면 ‘너’가 내 앞에 나타났을 때 우연히 호르몬의 화학작용이 일어난 건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억압하고 있던 내 무의식의 일부가 ‘너’를 통해 불쑥 모습을 드러낸 건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부터 교육받은 낭만적 사랑에 대한 환상이 가끔씩 느닷없게 조기 교육의 효과를 입증하려는 건지도..  어쨌든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에서처럼 ‘인간은 사랑 없이는 살 수가 없다.’는 건 맞는 말인 것 같다.  이 말을 증명하려는 듯 이 책의 주인공도 결국 새로운 여인과 새로운 사랑에 빠져든다.  “아무리 확고부동한 확실성에 이르려고 몸부림을 쳐도[그 결론에 번호를 붙여서 단정하게 배치해놓는다고 해도] 분석에는 절대로 결함이 없을 수 없다는 교훈, 따라서 아이러니로부터 절대로 멀리 벗어날 수 없다는 교훈”(p.273)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그러니 이제 좀 현명하게 사랑해보자.  알랭 드 보통처럼 나름대로 열심히 내 사랑을 조망하고 통찰해가면서, 적어도 사랑하던 사람과의 만남이 일생일대 최악의 실수가 되는 일만은 일어나지 않도록.  사랑의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은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내 삶을 온전하게 만들어주는 고마운 사랑에게 기꺼이 무릎을 꿇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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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어록청상 푸르메 어록
정민 지음 / 푸르메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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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주목을 받고 있는 정조의 시대는 발군한 걸출한 인물들이 유난히 많았다는 것도 관심의 이유가 되는 것 같다.  북학파의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과 같은 인물들 뿐 아니라 추사 김정희,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과 같은 예술가들, 그리고 촉망받는 인재였던 다산이 있다. 그 중에서 특히 다산과 연암은 묘한 양립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어쩐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정조의 문체반정에서 연암은 50대의 배후조정자로 지목된 데 반해 다산은 전도유망한 젊은 관료로서 정조의 입장 편에서 문체반정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것을 보면 연암과 다산은 그 삶에서나 문학적 취향과 견해에 있어서나 대조적인 상반된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다산의 긴 유배생활과 연암의 권력 외부에서의 쓸쓸한 삶이 겹쳐지면서 같은 그늘 아래에서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서있는 고독한 두 선비를 보는 것만 같기도 하다,

한편 다산이 아무리 서학에 관심이 있었고, 그 형제들이 천주교에 심취했으며, 실학과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개선하기 위해 골몰한 인물이었고 정조가 죽은 후 유배의 길에 오르는 불운의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일단 중앙정계의 성공한 인물이었던 경력은 그가 극히 체제에 순응하는 성품을 가졌을 거라는 심증을 갖게 한다.  (정도를 걸어 출세한 인물보다는 조금 삐딱한 인물에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관심을 두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나를 정당화하고 싶다.)

그런 선입견 때문인지 <다산어록청상>을 펼치면서도 ‘고리타분함’이라든가 ‘경직성’과 같은 낱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다만 저자 ‘정민’이라는 이름에 신뢰를 보내며 그가 그 ‘고리타분함’과 ‘경직성’을 다루면서 내가 소화하기 쉽도록 요리과정에 심혈을 기울였기를 기대했을 뿐이다. 그나마 내가 다산에게 친근함의 끈 하나를 갖고 있는 것이라고는 몇 해 전 강진에 들렀을 때 아이들과 다산초당을 방문했던 기억, 그것 하나였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 생각해보니 그저 ‘무지몽매한 저를 용서하소서’하고 다산에게 사죄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참 당연하게도(?) 다산의 글들은 연암의 글과는 다른 분위기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연암의 글이 마치 한바탕의 거센 바람을 맞고 있는 듯한 느낌이라면(물론 내가 연암의 글을 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다산의 글은 마치 유리처럼 맑고 잔잔한 호수에 발을 담그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17년이라는 긴 유배기간을 다산은 학문의 대성기로 전환하는 업적을 세웠다던가.  그만큼의 막강한 자기관리능력이 글 곳곳에 배어나온다.  경세(정신을 맑게 하는 이야기), 수신(몸과 마음을 닦는 공부), 처사(대인접물의 바른 태도), 치학(공부의 방법과 태도), 독서(책을 어떻게 읽을까?), 문예(시문 창작과 문예론), 학문(학문의 엄정함, 토론과 연찬), 거가(거처의 규모와 생활의 법도), 치산(재산 증식과 경제활동), 경제(경국제세와 경세치용)로 분류된 글들은 말 그대로 청상淸賞하게 만드는 글인 동시에 무척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들이다. 

거가 편에서 집안 식구들 중에 누구라도 다섯 살이 넘으면 각자 할 일을 나눠 주라는 글이라든가 치산 편의 아들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채마밭을 가꾸고 뽕나무를 기르며 과수를 심어 경제활동에 보탬이 되도록 하라는 글은 양반 관료로서의 고리타분함과 체면의식을 벗어던지고 실용과 경제에 밝은 인물로서 그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그 뿐 아니라 연암과 상반된 인물로만 보았던 다산에게서 연암과의 동질적인 부분도 찾아낼 수 있었다. 그 한 예가 문예 편에서 “옛날에 글을 짓는 사람들은 글자마다 그 뜻을 헤아려 이치에 맞게 썼다.  하지만 후세에는 만들어진 구절을 외워다가 그대로 표절한다.  그래서 글이 예전만 못하게 되었다.”(p.146)라는 부분이 나온다.  또 “깨달은 바를 유추하여 이를 축적하고, 축적된 것을 펴서 글을 짓는다.  이를 본 사람이 문장이라고 여기니, 이것을 일러 문장이라 한다.  문장이란 것은 갑작스레 얻을 수가 없다.”(p.158)라고도 한다.  연암이 주장하던 심사心似와 형사刑似, 법고이지변法古而知變 창신이능전創新而能典과 비슷하게 통하는 것만 같다.


궁금한 김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고미숙 지음/그린비)이라는 책을 뒤적였다. 그 책 뒷부분에 연암과 다산을 비교하여 쓴 글이 있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그 책을 읽었을 때에는 다산의 글을 접해보지 않은 터라 공감하지 못했던 기억이 났다.  그 책에서 고미숙님은 “다산의 글은 투명하고 진지하다 못해 냉각수를 끼얹는 느낌이다”(P.376)라고 했고 또 ‘연암이 표현형식을 전복하는데 몰두한 데 반해 다산은 의미를 혁명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P.388)'였으며 “비장미를 특징”(P.393)으로 하고 “의미의 명징성을 추구한다.”(P.395)고 했다. <다산어록청상>을 읽고 나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다산도 연암만큼이나 혁명적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 예로 백성이 아들을 낳은 지 사흘만에 군보에 등록되어 이정이 소를 빼앗아가자 칼을 뽑아 자기의 생식기를 스스로 베어낸 이야기를 시로 지은 ‘애절양’이라는 시(이 시는 <다산어록청상>이 아니라 위에 인용한 책에서 나오는 시다) 는 다산의 비장함과 백성의 고통에 대한 안쓰러움이 절절히 묻어나온다.

이렇듯 중앙정계를 향해 서 있고 늘 그 곳에 흡수되기를 바랐지만, 그렇다고 올곧음과 백성에 대한 걱정과 측은지심을 버리지 않았던 청아한 선비정신을 이 책에서 만난 것 같다.  다산에 대한 나의 오해를 거둘 수 있어 흐뭇했다.  한편으로는 우리 옛 선비정신이 번득이는 이런 글들이 서양에 소개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외국 철학자와 문호들의 경구들도 좋지만 우리 옛선비들의 맑고 청아한, 그러면서도 정신이 곧게 살아 번뜩이는 글들은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세계화니 자유경제체제니 하는 것들의 부작용에 대한 대안으로 동양의 유교적 도덕관이 물망에 떠오르고 있는 마당에..

 

 

****  이 책에 연암에 대한 글은 단 한 줄도 없다.  내가 서평에 연암을 언급하는 바람에 이 책이 연암과 다산을 비교할 수 있는 책이라고 오해하지 마시기를..  그저 연암에 대한 책 몇 권 읽고서 다산의 글을 읽고 있자니 자연스레 연암과 견주어졌을 뿐이다.  이 책은 말 그대로 다산의 남긴 짤막한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정민 선생님의 짧은 해설이 있어 읽기에 더욱 편안하다. 

이 서평을 쓰면서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고미숙 지은/그린비)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정옥자 지음/현암사)를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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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밭
최인호 지음, 김점선 그림 / 열림원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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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설집’이라는 수사가 따라붙었지만 작가의 소소한 일상들, 가족에 대한 사랑, 좀 더 넓게는 우리나라와 문학 등등에 대한 생각들을 모아놓은 수필집이라 보는 편이 더 무방할 것 같다.  <별들의 고향>, <깊고 푸른 밤>, <겨울 나그네> 등의 작품은 영화화되기도 했을만큼 ‘최인호’라는 작가가 대중 속으로 파고 든 힘은 상당했다.  당시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고 할만 한데, 최근 <유림>등 역사를 되짚는 작품들이 출판되는 걸 보면서 ‘최인호라는 작가도 나이를 먹는구나..’했었다. 

<꽃밭>을 읽으니 새삼 그런 느낌이 더 진하게 다가온다.  환갑을 넘긴 지긋한 나이에 이르기까지 걸어온 인생길에서 만난 한 송이 꽃처럼 피어 있던 아름다운 친구와 지인들에 대한 추억, 그 길을 함께 걸어준 아내와 가족에 대한 고마움, 분단된 나라에 대한 안타까움과 서글픔, 사회 저변 구석구석까지 살펴보고 걱정하는 애정과 관심들이 책 속에서 곱게 피어나고 있었다. 

암투병 중에 그려낸 김점선님의 꽃그림도 책장을 넘길 때마다 어떤 때는 옆구리에서, 또 어떤 때엔 모서리에서, 때론 밑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마치 길을 가다 돌 틈에서 문득 피어난 꽃을 발견하고 바라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그러다가 중간 중간 페이지 하나 가득 펼쳐있는 꽃밭 그림을 만나기도 했는데, 마치 강물에 떠내려 오는 꽃을 따라 가다가 무릉도원을 만났다는 옛이야기를 책 속에 재현해 놓은 듯, 흐드러지게 또는 소박하게 피어있는 꽃 그림 앞에서 잠시 따스한 봄볕 아래 서 있는 듯한 황홀함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 안으로 노란 나비 한 마리가 날아들기도 하고, 새 한 마리가 종종대며 지나가기도 하고,  오리 두 마리가 고개를 디밀기도 하여 정겹기 그지없다.

나이가 들고 병이 들면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애착이 더 진해지나 보다.  젊음의 열정이 찬물을 맞아 푸시식 식어버리고 삶이 저만치서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다 싶을 때,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하고 느끼고 감동하는 감수성은 더 민감해지는 것 같다.  생명이라는 그 펄떡이는 눈부신 에너지를 만땅으로 재충전하고 싶다는 바람, 지난 삶에 대한 그리움이 글과 그림에서 느껴진다면 내가 너무 오버하는 걸까. 

너무 아름답고, 너무 긍정적이고, 너무 희망적인 이야기들을 나는 믿지 않는다.  난 꽃보다 사람이 더 아름답다고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꽃밭>을 읽은 지금만큼은 나도 내 살아온 나날들 속에서 꽃처럼 피어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보고 싶어진다.  만나는 사람마다 서로에게 아름다운 꽃이 되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로맨틱한 감상에도 젖어본다. 내 인생의 ‘꽃밭’이 좀더 꽃으로 울창해지기를, 나 또한 서슴없이 다른 이의 꽃밭에서 활짝 피어나는 꽃이 될 수 있기를, 떨리는 마음으로 바라게 되는 책이었다.

 

아쉬움 하나....
‘껍데기는 가라“(p.215)와 ’아직 오지 않은 평화‘(p.248)은 글과 내용이 거의 똑같다. 읽다가 출판사에서 실수로 같은 글을 제목만 바꿔서 두 번 실은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런 경우엔 둘 중 하나만 책에 싣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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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소소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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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일본문학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에 대해서도 문외한이다.  그런데 최근에 일본 단편 소설들을 몇 권 읽으며 비슷한 분위기를 느끼게 되었는데, 하나는 다소 엉뚱하고 황당하다 싶은 설정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부분 ‘아하~’하는 가벼운 탄성을 지를 정도의 반전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분위기가 자꾸 겹쳐지다 보니 자극에 둔감해진다고나 할까?  아니면 책을 덮고 나서 ‘재미있다, 기발하다’ 하는 정도의 느낌 외엔 남는 게 없다는 허무함에 질린다고나 할까?  일본 작가 특유의 묵직함이 덜한, 약간 간드러지는 듯한 문체의 글을 계속 읽다보면 좀 느끼해져서, 기름진 중국요리나 햄버거를 먹다가 김치 생각이 나듯, 우리 작가들의 글이 그리워지기도 했었다. 

나의 일본 단편 소설에 대한 별로 좋지도 않은 그런 편견들은 이 책을 앞에 두고 자꾸 읽기를 미루게 만들었는데, 책꽂이에서 그야말로 썩소를 흘리며 비웃는 듯한 표지 속 여자의 얼굴이 자꾸 눈에 거슬렸다.  에이, 빨리 읽고 책꽂이 제일 높은 칸으로 이사시켜야지, 하는 마음으로 집어 읽었다.

예상은 비슷하게 맞아 떨어졌다.  그런데 이 작가, 여지껏 내가 읽었던 일본 단편 소설들과 비슷한 냄새를 풍기면서도 어딘가 달랐다.  좀 더 현실적인 감각이 살아있다고나 할까? 표지의 여자가 흘리던 썩소처럼 현실을 뒤틀고 비꼬는 이 꽤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연작 단편이라는 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 안에는 ‘문학상’이라는 소재로 이어지는 네 편의 소설(‘최종심사’, ‘불꽃놀이’, ‘과거의 사람’, ‘심사위원’)이 있다.  문학상을 주최하는 규에이샤라는 출판사와 작가들 간의 속물스러운 심리와 냉정하고 차가운 사회의 일면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네 편의 각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같은 인물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신데렐라 백야행’은 청순가련형 이미지의 신데렐라를, 야망을 위해 치밀하게 계산하고 야무지게 움직이는, 현실적인 섬뜩한 인물로 그려놓았는데 동화 신데렐라에서 왜 자기 딸이 모진 구박을 받는데도 신데렐라의 아버지가 새 부인에게 말 한 마디 못하고 등신처럼 굴었는지, 애가 둘 딸린 거야 새 가정을 이루는 데 결격요소가 되어선 안 된다 치더라도 성격상 치명적 결함이 있는 그 심술궂은 여자와 재혼을 할 정도로 그렇게 여자 보는 눈이 형편없었는지가 설명되는 걸 읽으며 즐겁기도 했다.  청순가련형의 이미지를 벗고 야멸친 이미지로 갈아입은,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지배하는 신데렐라도 꽤 매력적이고 신선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임계가족’의 이야기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깊이 공감하며 기꺼이 맞장구를 쳐줄 내용이었는데, 인기 애니메이션과 연관된 캐릭터 상품들 때문에 골치 아팠던 기억이 떠올라 그야말로 내 얼굴에 썩소가 피어났을 터...
남성의 성적 욕망이 위협당하는 ‘임포그라’, 여성 신체에 대한 남성의 과도한 망상을 담은 ‘거대유방증후군’, 반대로 여성들이 갖고 있는 주목받고, 관심 받고 싶은 욕망을 그린 ‘스토커 입문’ 등 현대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과 불합리한 인간 심리를 암팡지게 꼬집는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이 작가는 원래는 슬픈 이야기를 주로 쓰는 ‘눈물의 대가’란다.  그러니 나는 예외적 작품으로 이 작가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인데, 그나마 제목이 낯익은 작품은 <붉은 손가락>이 전부다.  다음엔 이 작가의 주류(?)작품으로 다시 만날 기회를 갖고 싶다.  기왕이면 장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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