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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부장들 - 개정 증보판 ㅣ 남산의 부장들
김충식 지음 / 폴리티쿠스 / 2012년 11월
평점 :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5/0211/pimg_7351811964600367.jpg)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2024년 12월 3일. 40여 년만의 비상 계엄 선포. 그것은 단순히 불법 비상 계엄이 아니었고, 치밀하게 준비된 친위쿠데타이자
내란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단다. 비상 계엄의 핑계거리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북한을 자극했다는 사실도
밝혀지고 있는데, 북한이 그런 자극에 반응을 했다면 우리는 지금 전쟁 속에서 끔찍한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소름 끼치면서도 무섭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런데도 아직도 그를 옹호하고 있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 더욱 열 받고 화가 나는구나. 윤은 실패한 전두환이었어. 전두환을 따라 하려고 했으나 실패했어. 전두환이 쿠데타에 성공을
했지만, 결국 사형 선고를 받은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윤은
왜 전두환을 따라 하려고 했을까. 알코올중독자이자 정신병자라서 할 수 있는 판단이 아닐까 싶구나.
이런 시국에 문득 떠오른 책이
한 권 있단다. 김충식 님의 <남산의 부장들>이란 책이란다. 아빠가 몇 년 전에 <남산의 부장들>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그 영화가 김충식
님의 <남산의 부장들>이라는 책을 바탕으로 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 책을 구입했단다. 책이 생각보다 엄청 두꺼워서 읽기 망설이다가 이번 12.3 내란을 겪고 나서 이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10.26 사건의 전후를 다룬 영화였는데, 책 <남산의
부장들>은 1961년 군사 쿠데타부터 1980년 5공이 세워질 때까지의 이야기를 박정희와 중앙정보부의 부장들의
중심으로 이야기를 꾸려나는 책이란다. 당시 중앙정보주가 남산에 위치하고 있어서 책의 제목이 <남산의 부장들>이라고 한 거야. 또한 이 책은 박통 시절의 우리나라 역사라고 할 수 있단다.
역사는 권력자의 중심으로 쓰여지다
보니,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잡고 있던 박정희와 그 측근들의 이야기는 곧 그 시절의 역사가 되니까
말이야. 아빠가 이 시절의 현대사를 다룬 책들을 여럿 읽은 적이 있고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굵직한 내용들은 익히 알고 있는 내용들이었단다. 그러나 상세한 내용들과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들은
아무래도 아빠가 직접 겪은 시절이 아니므로 새롭고 놀라운 것들도 있었단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책을 읽으면서 새삼 깨달은 것은 민주화되지 않은 당시는 억압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답답하고 억울했겠다는
사실이야. 그런데 자칫 잘못 했으면 그런 시절로 다시 돌아갈 뻔했으니,
큰일 날 뻔했구나.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관련자들은 모두 중형으로 엄벌에 처해야
할 것이야.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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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
71년 12월 6일 대통령 박정희는 돌연 국가비상사태라는 것을 선포했다. 특별담화 형식으로 발표된 ‘비상사태’는 북의 위협을 빗대 체제 강화를 꾀한, 말하자면 제1차 유신이었다.
놀랍게도
이는 헌법적 근거가 박약한 것이었다. 청와대측은 궁색한 나머지 당시 대통령 취임선서의 ‘나는 국가를 보위하고…’라는 구절에 비상사태 선포의 근거가 있다고
우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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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이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인데, 놀랍게도 2024년 12월 3일에 일어난 일과 너무 유사하구나.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아빠는 깜짝 놀랬어. 역사는 반복된다고… 1971년이면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지 10년이 된
시점이란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 친위쿠데타를 벌인 거야.
…..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군사 쿠데타로 그가 정권을
잡는 과정도 이야기해주고, 그의 측근들이 한 짓들도 이야기를 해 주는데, 그의 측근들, 그러니까 그의 똘마니들은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알력
다툼하는 것처럼 보였단다. 김형욱, 김종필, 이후락, 김재규 등. 이
책에서는 이름의 영어 알파벳으로 쓰기도 하고 이름으로 쓰기도 했는데, 이름으로 통일 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 시절에 익숙하지 않는 독자들도 있으니까 말이야.
1대 중앙정보부장인 김종필은 정치를 한다면서 그만 두고, 이후 짧은 시간 동안 김용순, 김재춘이 맡았다가 김형욱이 중앙정보부장이
되면서, 60년대 박정희 공포 정치가 극성을 부리게 되었단다. 김형욱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이자 극우주의자였단다. 그는 법보다 주먹과 총칼이 앞섰던 사람으로, 박정희의 3선 개헌을 완성하는데
(박정희 입장에서 보면) 공을 세운 사람이었어. 하지만, 박정희는 애완견을 오랫동안 곁에 두지 않았어. 70년대 버림을 받고
중앙정보부장에서 물러나고, 김계원이라는 사람이 1년 정도를
하다가 이후락이란 사람이 바통을 이어받았단다. 이후락이라는 자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나쁜 놈이었단다.
1971년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불법을 저질렀으며, 공작을 부렸고, 상대 진영 후보를 협박하였다고
하는구나. 그들은 야당인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이기기 손쉬운 유진산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김대중이
후보가 되자 박통이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하는구나. 아빠가 예전에
<김대중 자서전>을 읽고 쓴 독서 편지가 있는데 그 편지를 참고해도 좋을 것
같구나. 암튼 이후락은 온갖 불법을 저지르고, 지금도 큰
돈인 600억원을 쓰고, 지역 감정을 유발하는 비겁한 행태를
부려서 결국은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었다는구나. 그런데 아주 근소한 차이로 이겼다는구나. 그런데 그것을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그 선거 이후 박정희가
종신 집권을 마음먹지 않았을까 싶구나.
….
이후락이 벌인 일 중에 의외에
일이 있는데 바로 평양에 잠입하여 김일성을 만나 7.4공동성명을 이끌어낸 것이란다. 반공을 일삼던 박정희 독재 정권이 갑자기 햇볕 정책을 하다니…. 아빠도
학창 시절 이 부분을 배울 때 좀 의아해했단다. 하지만 남북의 관계 개선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어. 1970년대는 이후락의 전성 시대라고 할 수 있었지. 그래서인지
이후락은 선을 넘는 행동을 하게 된단다. 1973년 김대중 납치극을 벌인 거야. 일본에 망명중인 김대중을 납치하여 일본 바다로 데리고 가서 죽이려고 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CIA에서 만류해서 살아난 사건이란다. 이 이야기도 아빠가 예전에 <김대중 자서전> 이야기할 때 했었단다. 오늘은 <김대중 자서전>에서
한 이야기랑 겹치는 부분이 많은데, 그 때 쓴 독서 편지를 다시 한번 읽어도 좋을 것 같구나. 김대중 납치 사건은 박정희의 지시가 있었는지 결국 확인되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누군가는 박정희가 시킨 일이라고 하지만, 이 책의 지은이 김충식 님은 정황상 박정희의 지시
없이 이후락이 단독으로 벌인 사건이라고 하였단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과 관계가 악화되고, 남북관계도 깨지고, 일본과 관계도 악화되었단다. 무엇보다 이 일로 이후락은 버림받게 되고 몰래 출국했다는구나.
2.
박정희는 이후락 후임으로 1973년 12월부터 신직수를 중앙정보부장에 선임했어. 이 때에는 박정희 독재에 항거하는 학생 운동이 점점 심해지던 시절이었단다. 그래서
긴급조치가 발령되었어. 1974년 1월 발령된 긴급조치 1호는 이후 9호까지 이어지는데 독재 정권을 강화하는데 쓰이는 악법
중에 악법이었단다. 그것을 신직수가 주도하였단다. 이렇게
시국은 점점 불안정해지는 가운데 재일동포 문세광은 박정희를 시해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육영수 여사가 피살당하였단다.
이 일로 박정희는 큰 충격에 빠진 듯 했고, 한국 정부는 일본에 강력하게 항의를 했지만, 이번 사건은 김대중 납치 사건의 연장 선상에 있는 것으로 한국인이 한국에서 저지른 범죄라면서 자신들과 무관하다고
했단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박정희를 14년간 경호했던 경호실장 박종규가 물러나게 된단다. 박종규 후임으로
온 경호실장이 그 유명한 차지철이란다. 국내 정세는 점점 불안정해지기만 하고, 남북 관계에도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벌어진단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일어난단다. 북한군이 도끼로 미군을 살해한 사건인데, 박정희는 이 사건에 열불을 내고 강경 대응을 했단다. 전쟁까지 일으키려고
했는데, 미군이 강하게 자제시켰단다. 1976년 재미 동포
박동선이라는 사람이 미국 의회에 불법 로비를 한, 일명 코리아 게이트 사건이 발생하여 박정희 정부와
미국의 카터 정부는 관계가 악화되었어. 이 코리아 게이트로 인해 신직수가 물러나고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이
되었단다.
…
1977년에는 미국으로 망명을 간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박정희의
비리를 폭로하기 시작했어. 김형욱은 미국 의회 청문회에 참석하기도 하고, 회고록을 통해서 박정희의 비리를 폭로하려고 했어. 박정희는 사람을
보내서 협상을 했고, 돈을 받고 회고록 원본을 받아 오기도 했단다. 그런데
그 전에 유출된 사본이 있었던 거야. 그 유출된 사본으로 인해 김형욱의 회고록이 출간되었고, 김형욱은 파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단다.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 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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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제4대 중앙정보부장은 김형욱이었다. 79년 프랑스 파리에서 증발해 지금까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조차 ‘확정’되지 않은 인물. 누군가에 의해 영원히 ‘제거’됐을
것이라는 추측만 김형욱의 운명은 박정희 정권의 영욕을 상징하는 듯하다. 김형욱의 별명은 ‘뚝심의 돈까스’였다. 이
별명은 남재희 정치부 기자가 지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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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호실장 차지철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갈등은 점점 심해지고, 박정희는 차지철의 의견에 많이 치우쳐 있었단다. 차지철의 권력이 정점을 이루고 있던 시절이었어. 심지어 차지철의
말 한마디에 민간 기업의 건물 높이까지 조정했다는구나. 1979년 여름부터 김재규는 박정희로부터 신임을
점점 잃게 되고, 이런 불만들과 차지철의 오만과 어지러운 국내 상황들이 어우러져 그가 결국 박정희를
제거하게 되었단다.
1976년 10월 26일 김재규가 일을 벌인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그로 인해 오랜 독재 정권이 끝나게 되었단다. 하지만 또 다른 괴물이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박정희 아래서 때를
기다리며 성장하던 괴물 전두환에게 10.26 사건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거야. 그보다 직책이 높은 이들도 있었지만,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은 10.26 사건의 조사를 주관하면서 세력을 넓혀 갔고, 12.12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서 또다시 군사 정권을 세워버리고 말았단다. 누가 봐도 사악하고 불의의 악마 같은 사람이란다. 그런데 2024년 12.3 내란을
저지른 윤이 전두환을 흠모했었다고 하니, 머릿속을 열어 보고 싶구나.
보나마나 알코올에 찌든 녹아 내린 뇌가 있겠지….
…
오늘은 박정희 정권과 중앙정보부장들의
이야기가 담긴 <남산의 부장들>에서 인상적인 부분들과
이야기를 해서 전체적인 맥락이 이어지지 않은 점 이해해 주길 바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아빠가 예전에 읽은 <김대중 자서전>이 자꾸 떠올랐단다. 너희들이 나중에 이 책을 읽게 된다면 <김대중 자서전>과 함께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나저나 헌법재판소에서
얼른 윤석열 탄핵 최종 판결이 얼른 났으면 좋겠구나. 아직도 복귀를 꿈꾸고 있는 윤석열과 그를 지키려고
하는 수구 정당들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구나.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한국 중앙정보부장
10명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책의 끝 문장: 5공의 팡파르가 울려 퍼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이낙선의 5.16혁명 데모는 대질이 이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강영훈 씨는 사실이 아니라고 증언한다. "군이 정치에 개입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육사생도를 정치에 끌어들이는 그런 짓은 쿠데타의 경우에도 금기로 되어야 한다. 그 당시 육사 출신 대위 몇 사람과 내가 대질했다는 말이 있는 모양이나 전혀 사실이 아니다. 분명히 기억하는 것은 4년제 육사 출신 셋을 복도에서 만났는데 그중의 하나가 전두환이었다. 하지만 내가 육본에 갔던 그날, 같은 11기 출신이라 해도 김성진(80년대 체신부장관) 등과 같은 장교는 지지 데모에 반대했고, 관망하는 사람도 많았던 것이다. - P47
정보부가 캔 미량의 석유는 유리병에 담겨 청와대에 올려졌다. 박 대통령은 너무 기쁜 나머지 국무회의 때 유리병에 담긴 원유를 탁자 위 재떨이에 붓고 불을 붙여보였다. 그러나 경제성이 없는 석유였다. 애당초 비서실장 김정렴과 오원철 등은 "탐사가 끝날 때까지 발표 않는 게 좋겠습니다"고 건의했다. 박 대통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유 노다지’를 기대하고 정치적 효과에 사로잡힌 듯 그것을 발표해 버렸다. 희망이 크게 부풀면 절망도 깊다. 보통 한두 구멍 뚫다 마는 석유 시추는 포항에서는 무려 12구멍이나 시추되었다. ‘석유 원년(元年)’이니 하는 성급한 기대는 무참히 깨져갔다. 그리고 탐사 과정에서부터 주민들의 방대한 토지를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어 놔 90년대까지도 민원의 대상이 되었다. - P629
그 무렵 박 대통령은 추가적인 미군 철수에 맞서 핵무기 개발을 꿈꾸고 ‘작전지휘권’을 지렛대 삼아 대미흥정을 벌였다. 그의 비공개 어록. "미국 사람들은 작전권 이양 문제에 신경과민이다. 주한미군이 적어도 현수준을 유지하면 미군이 지휘관이 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주한미군 수가 현수준 이하로 감축되면 다시 작전지휘권 문제를 협의하겠다. 여기에 대해 미국 측은 못마땅해 가고 있고 답변이 없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자기 나라 군대를 몇 명 없고 장군만 몇 있다든지 하는데 남의 나라 60만인데 4만밖에 안 되는 미군이 지휘관을 갖고 있는 것도 이상한 상태 아닌가. 그러나 전쟁이 나면 해공군과 병참지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6.25 때부터 이날 이때까지 작전지휘권을 미군한테 맡겨온 것이다. 이 문제는 휴정협정하고도 아무 관계가 없어." - P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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