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혼란 - 지성 세계를 향한 열망, 제어되지 않는 사랑의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서정일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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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을 읽었단다. 평론가로 많은 활동을 했던 슈테판 츠바이크는 소설도 많이 썼더구나. 아빠가 즐겨 찾는 북플이라는 알라딘 책 관련 SNS에 슈테판 츠바이크를 좋아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 분들이 소개해 준 책들 중에 하나 <감정의 혼란>이란 소설을 읽었단다. 나중에 그의 다른 소설들도 좀 찾아봐서 읽어봐야겠구나. 그 동안 슈테판 츠바이크라는 사람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지 않았는데, 이번 <감정의 혼란>에 지은이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어. 아내와 함께 자살을 하셨더구나. 왜 그랬을까. 이 책에 그의 유서가 실려 있는데, 유서를 봐도 그 이유를 아빠는 잘 이해를 못하고, 그의 작품들이 그의 유서와 함께 중단되었다는 사실에 안타깝더구나. 그렇지 않았다면 더 많은 작품들을 남겨주셨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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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나의 자유로운 의지와 명료한 정신으로 삶으로부터 이별하기 전에, 나의 마지막 의무를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나와 나의 창작 활동에 이렇게 훌륭하고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해 준 아름다운 나라, 브라질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나는 매일 이 나라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언어의 세계가 몰락했고 나의 정신적 고향인 유럽이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은 이후, 나의 삶을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데 이 나라 이외에 다른 곳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60년이 넘는 삶을 살다보니 다시 한 번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정신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고향을 잃고 떠돌다보니 나의 정신력은 완전히 소진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적절한 때에 그리고 당당한 자세로 삶을 마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나의 삶에서 정신적인 활동은 언제나 가장 순수한 기쁨이었으며 개인의 자유야말로 이 땅에서 가장 고귀한 재산이었습니다.

나의 모든 친구들에게 인사를 전합니다. 바라건대 그대들은 이 긴 밤이 지나면 떠오를 아침노을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너무 성급한 이 사람은 여러분보다 먼저 떠납니다.

슈테판 츠바이크

페트로폴리스, 브라질 1942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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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럼, 소설 <감정의 혼란>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꾸나. 롤란트란 노학자가 가족들에도 숨기고 있던, 오늘날 자신의 위치에 오게 하는데 큰 영향을 준 젊은 시절의 한 교수와 인연을 이야기해주는 그런 소설이란다.

롤란트가 19살일 때 베를린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 나이 때 대부분 그렇듯이 롤란트도 방탕하고 게으른 생활을 하고 학업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어. 어느 날, 자취방으로 들이닥친 아버지. 아버지는 화를 참고, 롤란트에게 독일 중부 지방의 다른 학교를 추천해 주었어. 롤란트는 베를린에 미련이 없어서 그러겠다고 하고 독일 중부 지방의 작은 대학으로 전학을 갔단다. 도착해서 처음 우연히 들은 영문학 수업. 어떤 교수의 열정 넘치는 셰익스피어 강의에 롤란트는 영혼이 빨려 드는 듯했어. 그야말로 감동을 제대로 먹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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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45)

우리는 언제나 모든 현상, 모든 인간을 그 불꽃의 형태로만, 정열을 통해서만 인식할 뿐입니다. 모든 정신은 피 속에서 끓어오르고, 모든 사상은 정열에서, 모든 정열은 영적인 감동에서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셰익스피어와 그 시대 사람들에게 먼저 눈길을 돌려야 합니다. 여러분들을 진실로 젊게 만들어 줄 셰익스피어를 말입니다! 먼저 감동하고, 그 다음에 공부하시오! 언어를 공부하기 전에 먼저, 가장 찬란한 세계의 교과서인 그 사람, 그 고귀한 그 사람, 최고의 인물인 셰익스피어에 대해 연구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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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끝나고 그 교수님을 찾아갔단다. 그 교수님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은 것으로 기억되어 그냥 교수님이라고 할게. 롤란트 교수님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하였고, 그런 롤란트를 잘 본 교수님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주택의 하숙집까지 소개해 주었어. 그렇게 롤란트와 교수님은 인연이 시작되었단다. 첫 인상에 감동을 준 교수님이었지만, 그 교수님은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어. 음성학 강의를 할 때는 무미건조하고 지루한 수업을 하셔서 같은 사람인가 싶다가도 다시 영문학 강의를 하게 되면 그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셨단다. 그리고 다른 교수님들과도 교류가 거의 없고 주로 혼자 공부를 했어. 아름답고 젊은 아내가 있었지만, 아내와 사이도 좋아 보이지는 않았어. 괴짜다운 모습도 보였는데, 기분의 기복이 엄청 심했고, 어느 날은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다가 한참 후에 나타나기도 했어.

롤란트는 교수님과 만난 이후에는 저녁 6시마다 매일 같이 교수와 만나 공부를 하고 토론을 했단다. 2주 동안 주말도 없이 쉬지 않고 공부를 하고 나서 교수님의 제안으로 하루 쉬기로 했어. 롤란트는 주변에 호수인가 강가인지 수영하러 갔다가 한 아름다운 여인을 보게 되어 수작을 부렸는데, 알고 보니 교수님의 아내분이어서 무척 당황하고 창피하고 이젠 교수님을 어떻게 보나, 이런 생각을 했단다. 그런데 교수님의 아내분은 교수님한테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 오히려 그 만남 이후 롤란트가 힘든 일이 있으면 위로해 주고 보살펴 주시고 했단다.


2.

교수님은 글이 안 써질 때는 신경이 날카로워지기도 했어.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기분의 기복이 장난 아니었거든. 그럴 때 롤란트가 글쓰기에 대한 조언을 해 주었는데, 그게 마음에 들었나봐. 다시 글이 잘 써지게 되었어. 그래서 글쓰기 작업을 같이 하자고 제안을 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단다. 하지만, 교수님의 기분이 좋았나 나빴다 하다 보니, 롤란트는 힘들어했어. 교수님의 아내분은 그런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했고, 롤란트를 공감해주면서 위로해 주었단다.

그러던 어느날 교수님이 또 연락도 없이 사라졌단다. 한 번 사라지면 언제 돌아올지도 몰랐어. 기분 전환이라도 한다면 롤란트는 교수님의 아내분과 소풍을 갔어. 수영도 즐기고그런데 결국 롤란트와 교수님의 아내분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단다. 순간의 분위기와 감정에 이끌린 행동이었지만, 그 이후 롤란트는 당황하고 혼란스러워 그 집을 떠나려고 했단다. 그런데 그때 교수님이 예고도 없이 돌아왔어. 이를 어쩌나. 안 계실 때 몰래 떠나려고 했는데교수님은 떠나려는 롤란트를 잡고, 떠나더라도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라며 저녁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단다.

그리고 그날 저녁, 교수님은 자신의 아내와 썸씽이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 챘어. 하지만 상관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어. 그러면서 자신도 롤란트를 사랑한다는 폭탄발언을 했단다. 교수님은 동성애자였던 거야동성애자라고 하면 오늘날도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옛날에는 얼마나 심했겠니.. 자신은 그런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그런 감정을 숨기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까. 교수님은 홀란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었어. 그 교수님은 어렸을 때부터 이중생활을 했어. 낮에는 평범한 학자로 살았고, 밤에는 어둠 진 클럽을 찾아 다니면서 욕구를 해결한 거야. 교수님이 되어서도 낮에는 학생들과 열정적인 수업을 하고, 밤에는 클럽에 가고그런데 그런 학생들 중에 자신이 마음에 드는 학생들이 있을 때는 참아내야 했어다행인지 불행인지 친척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했고, 그 결혼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데 좋은 장치였지.

그러던 어느날 롤란트가 자신을 찾아왔고, 교수님은 롤란트에게 푹 빠져 버린 것이란다. 곁에 있으면서 마음껏 사랑하지만,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했어. 그러니 그렇게 감정의 기복이 심했던 것이고, 그 괴로움을 잊고자 가끔씩 집을 떠나기도 한 것이었어. 이 모든 것을 롤란트에게 이야기했단다. 롤란트는 이 이야기를 모두 듣고, 매몰차게 내칠 수만은 없었던 것 같아. 그때 휘몰아치는 감정의 혼란을 롤란트도 느꼈을 테고교수님이 원하는 작별 키스를 해주었단다. 그 순간에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일 수도 있겠다 싶었어.

그 때 헤어진 이후로 교수님과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했어. 하지만 당시 교수님과 만남은 자신 인생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교수님의 학자로서의 열정은 자신의 삶의 등대가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지.. 롤란트는 평범한 가정을 꾸려 행복하게 살아왔지만, 젊은 날 한때 자신을 사랑했던 교수님과 추억이 늘 한 켠에 자리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구나.


PS:

책의 첫 문장: 나의 학생들과 동료 교수님들, 여러분께서 내게 호의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책의 끝 문장: 그를 알기 전의 내 부모님과 그를 알고 난 후의 내 아내와 아이들, 그 누구에 대해서도 그보다 더 고마워하지도, 더 사랑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이 도시와 충동적 젊은이였던 나, 이 두 존재, 즉 우리는 흡사 불안과 초초함의 동력 발전기처럼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때처럼 그렇게 베를린을 이해하고 사랑한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도시는 높이 웅비하면서도 따사롭기 그지없는, 인간을 위한 달콤한 안식처와 같아서 내 몸 속에 있는 모든 세포가 갑작스럽게 확장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초조한 청춘들의 강렬함은 뜨겁고 풍만한 여인의 떨리는 품속과도 같은 베를린, 힘이 솟구쳐 오르는 이 도시 속에서 비로소 격렬하게 터져 나왔습니다. - P23

조용히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들어온 그는 그저 지치고 나이든 남자일 뿐이었습니다. 반짝반짝 비치던 눈의 초점은 사라지고, 맨 첫 줄 의자에 앉아 있던 내 눈에 비친 그는 푹 패인 주름살과 얼굴에 퍼진 상처들로 거의 환자처럼 생기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상처 자국이 있는 그의 얼굴은 움푹 파였고, 푸르스름한 그늘이 늘어진 회색 뺨에 흘러내리는 듯 했습니다. 책을 읽어 내려가던 그의 눈 위로 눈꺼풀 그림자가 드리웠으며, 창백하고 얇은 입술에서도 청랑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청아함, 저절로 환호성을 지르게 만든 넘치는 활력은 대체 어디로 가버린 걸까? 낯설게 느껴지는 목소리는 흡사 재미없는 문법 강의처럼 단조로웠고, 피로에 지친 발걸음으로 바짝 말라 딱딱해진 모래를 지나가는 기분이었습니다. 불안이 엄습했습니다. - P55

고귀한 남성의 우울은 늘 젊은이의 정신을 강하게 붙드는 법입니다. 자신의 심연 아래를 응시하는 미켈란젤로의 사상과 처절하게 내면을 향해 꾹 다문 베토벤의 입, 이렇듯 세계 고뇌를 가린 비극적인 가면들은 모차르트의 은빛 멜로디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물 주위에 밝게 퍼지는 빛보다 더 강력하게 청년을 감동시킵니다. 사실, 청춘은 그 자체로 아름다워서 아름다움을 꾸밀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청춘의 힘은 활력이 지나치게 넘쳐흘러서 비극적인 것으로 치닫기도 하고,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피를 달콤하게 흠뻑 빨아들이기까지 합니다. 또, 그런 이유로 정신적 고뇌 속에서도 청춘은 위험을 받아들이고 형제 같은 마음으로 내민 손을 잡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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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9-18 10: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북홀릭님 드디어 이 책 읽으셨군요. 곧 <초조한 마음>도 읽으시겠네요. 다른 분들하고 다르게 저는 초조한 마음 보다는 이책 <감정의 혼란>이 더 좋더라구요^^

북홀릭님 즐거운 추석 연휴 보내세요. 책도 많이 읽으세요 😄

bookholic 2021-09-18 18:59   좋아요 3 | URL
초조한 마음은 제가 좀 초조해지면 읽어보겠습니다~~^^
새파랑 님도 책과 미소와 음식과 여유와 음악이 함께하는 한가위 되시길...

mini74 2021-09-18 10: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교수와 교수아내 등 감정이입돼서 무지 함들게 읽은 기억이 ㅠㅠ 참 좋지요 *^^*

bookholic 2021-09-18 19:00   좋아요 3 | URL
저는 주로 주인공의 감정이입을 하는데요.. 롤란트 입장도 계속 불편했어요.^^

청아 2021-09-18 10:5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2차대전으로 유럽이 무너지자 충격때문에 우울증이 심하게 왔었나봐요. 전쟁이 끝난걸 봤으면 좋았을텐데..츠바이크의 아버지도 유대인이셨다고 하고요. 츠바이크는 1.2차대전을 다 겪으며 이곳저곳 망명하다가 독일이 승승장구하던 때에 유럽 상황을 절망적으로 본 듯 합니다.
다시는 고향땅을 밟지 못할거라 생각했을것도 같고요.ㅠㅇㅠ

bookholic 2021-09-18 19:01   좋아요 2 | URL
아, 그랬군요... 아무튼 전쟁은 예나 지금이나 없어져야 할 1순위입니다..
2순위는 코로나...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