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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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책 읽는 것에 대해 계획을 잘 안 잡고 그때그때 눈에 걸리는 책을 읽곤 하는데, 이번에 연속해서 읽은 <백석 평전>,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일곱 해의 마지막>은 약간 계획해서 읽은 것이란다. 백석에 관련된 책 몰아읽기. 백석 특집이라고나 할까?^^ 그 백석 특집의 마지막, 김연수 님의 <일곱 해의 마지막>을 읽었단다.

아빠가 김연수의 책은 <꾿빠이 이상>이라는 책, 한 권만 읽었단다. 소설가 이상과 그의 시집에 관한 이야기를 김연수 님의 상상력이 더해진 소설인데 재미있게 읽은 기억 있구나. 이번에 읽은 <일곱 해의 마지막>이 아빠가 읽은 김연수 님의 두 번째 소설이란다. 처음에는 이 책이 백석에 관한 책인 줄 몰랐어. 그런데 우연히 다른 분의 북플을 통해서 이 책이 백석에 관한 소설이라는 것을 알고, 구해서 읽게 된 것이란다.

일곱 해의 마지막. 지난 번에 이야기한 것처럼 그는 1962년을 끝으로 더 이상 시나 글을 쓰지 않았고 북한의 삼수군이라는 시골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96년에 돌아가셨다고 했잖아. 그러면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일곱 해의 마지막은 언제일까. 예상했듯이 1962년 이전 일곱 해에 관한 이야기란다. 북한에서 비주류 인사로 분류되어, 그와 친했던 이들, 특히 남쪽에서 온 이들은 숙청되어 죽던 시절이었지. 백석은 삶의 목적으로 체제에 순응하면 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글을 못쓰게 되는 지경까지그 시절의 이야기를 소설가 김연수 님에 의해 복원된 것이 이번에 읽은 <일곱 해의 마지막>이란다.

 

1.

백석의 어릴 적 이름은 백기행인데, 이 책에서는 백석이 아닌 백기행으로 부르고 있단다. 그의 청춘을 함께 했고 삶의 전성기 때 부르던 백석이 시절 암울하게 살 수 밖에 없고, 우울하게 살 수밖에 없던 시절이라서 지은이 김연수 님은 그래서 백석의 이름이 아닌 백기행이라는 이름으로 하셨나 싶구나. 이 소설은 백석의 화려했던 시절은 나오지 않는단다. 자신의 글을 숨기고, 자신의 생각을 숨기고, 당이 원하는 글을 쓰고, 당이 원하는 생각을 하는 그 시절에 관한 이야기란다.

백석 시인에게 감정 이입을 해 보았단다. 모던 보이로 살았던 젊은 시절을 뒤로 하고, 사랑에 관한 서정시와 향토색 풍기는 시를 마음 놓고 쓰던 이가 그런 것을 억제 당하면서 당이 원하는 시와 글을 써야 할 때의 좌절감어떻게 견뎌냈을까. 집에 와서 몰래 원하던 글을 마음 놓고 썼을까. 그것도 쉽지 않을 거야. 조금만 당의 노선과 어긋나면 자아비판을 해야 하니, 잘못하면 집 수색을 당할 수도 있으니 말이야. 백시행은 동시 <기린>을 쓴 적이 있는데, 조선의 동물이 아닌 기린으로 시를 썼냐고 비판을 받았다고 하는구나. 아프리카의 동물에 붉은 깃발을 단 시를 썼다는 것은 주체성이 떨어진다면서 사상 비판을 받았으니 말이야.

 

2.

순수 북한의 혈통들만 중시를 했던 시기였어. 무서운 시절이구나. 남한에서 온 인사들이 모두 숙청 당하고, 소련에서 온 인사들도 숙청 당했어. 특히 소련에서 온 인사들은 국빈급으로 모셔왔던 이들인데 말이야. 백기행과 번역 일을 함께 하던 옥심이라는 이의 아버지도 소련에서 온 사람이었던데 좌천 당했단다. 북한은 편협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스스로 무너진 것이 아닌가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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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91)

수령이 문학에서 낡은 사상 잔재를 반대하는 투쟁에 나서라고 교시를 내린 뒤, 전국의 도서관과 도서실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이 소장중인 책들 가운데 반당 반혁명 작가의 책들을 회수해 공개적으로 불태우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거기서 불타는 한 권 한 권은 저마다 하나의 세계였다. 당연히 서로의 주장은 엇갈리고, 지향점은 다르고, 문체는 제각각이다. 그렇게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이고, 현실은 그 무수한 세계가 결합된 곳이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세계가 있고, 또 추악한 세계가 있다. 협잡이 판치는 세계가 있고, 단아하고 성실한 세계가 있다. 어떤 세계는 지옥에, 또 어떤 세계는 천국에 가깝다. 이 모든 세계가 모여 다채롭고도 영롱하게 반짝이는 빛을 발하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 한 권이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인 한 명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현실 전체가 몰락하는 것이다. 당과 수령, 그리고 그들의 충실한 대리인인 병도는 자신들이 조립한 언어의 세계만이 리얼하다고 말하지만, 수많은 세계를 불태우고 남은 단 하나의 세계라는 점에서 그들의 현실은 한없이 쪼그라들다가 스스로 멸망하리라. 언어와 문자는 언어와 문자 자신의 것이다. 그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리얼리즘이란, 그런 언어와 문자가 스스로 실현되는 현실을 말한다. 거기에는 당과 수령은 물론이거니와 기행의 자리마저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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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에서 온 벨라라는 작가가 조선작가동맹이라는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에 온 적이 있었어. 그리고 이 때 그를 통역해준 사람이 백기행이었어. 백기행은 그 전에 벨라의 시를 번역해서 북한에 소개하고 했었어. 행사를 마치고 백기행은 자신의 시집을 벨라에게 선물해 주었단다. 북한에서 출간할 수 없는 그의 시집그리고 조선의 단어들이 죽어간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북한의 체계에서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는 시인은 말이 죽었다고 할 수밖에 없던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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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165)

전쟁은 인류가 행할 수 있는 가장 멍청한 일이지만, 그 대가는 절대로 멍청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나요? 전쟁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평화를, 상처를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회복을 노래할 수 있나요? 전 죽음에, 전쟁에, 상처에 책임감을 느껴요. 당신 안에서 조선어 단어들이 죽어가고 있다면, 그 죽음에 대해 당신도 책임감을 느껴야만 해요. 날마다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아침저녁으로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러지 않으면 제대로 사는 게 아니에요. 매일매일 죽어가는 단어들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게 시인의 일이에요. 매일매일 세수를 하듯이. 꼬박꼬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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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백기행은 당이 원하는 것, 수령이 원하는 글만 쓰게 된단다. 삶을 위한 선택이지..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봄이 올 것을 기다렸는지 몰라그렇게 모진 겨울을 지내고 나면 다시 자신의 시를 쓸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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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229)

아무리 준비해도 모자란 겨울나기에 비하자면, 봄 준비는 마냥 기다리는 게 일이었다. 봄은 아기 걸음이고, 먼빛이고, 올동말동이니까. 4월 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사흘이 지나면 강에서는 쩍쩍 소리 내며 버그러지는 얼음장 위로 흙탕물이 넘실거렸다. 새벽이면 골짜기 안으로 안개가 부잇하게 감돌아 돈사(豚舍) 네모 등의 가스불빛이 까물거렸고 아침햇살이 빗살처럼 번져나면 새들의 노랫소리가 흥겨웠다. 겨우내 얼어 있던 흙으로 틈이 생겨 봄볕이 스며들면 오랑캐꽃과 살구꽃과 진달래가 피어나 단조롭던 흑백의 구릉을 환한 빛으로 물들였다. 마을에 물레방아가 내걸리고 소달구지가 지나갈 즈음이면 개울가로는 처녀들이 바구니를 들고 둥글레며 쑥 따위를 캐러 다녔다. 그렇게 삶은 다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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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그런 시절은 오지 않았단다. 지난 <백석 평전>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독서 편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는 1962년을 끝으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았어. 그가 죽은 것으로 알려진 1996년까지 말이야. 시인이 시를 쓰지 못하고 글을 쓰지 못한 시절이 30년이 넘는구나. 그렇게 평생 오지 않은 봄을 기다리는 심정이 어땠을까. 감정이입을 할수록 울컥하게 되는구나. 환생이 있어 그가 다시 태어났다면, 자유로운 나라에 다시 태어나서 원 없이 시를 쓰는 이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PS:

책의 첫 문장 : 벨라와 빅토르는 시인이다.

책의 끝 문장 : 그때까지도 기행은 어디에서도 오지 않고,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는 천불에 휩싸여 선 채로 타오르는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깝다면 가까운 곳에 운석이 떨어졌는데 십 년이 지나서도 기행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연해주의 시골 마을에 불덩어리 같은 운석이 떨어질 무렵, 그는 평양에서 조선민주당을 이끌던 고당 선생을 모시고 있었다. 고당 선생과는 인연이 깊었다. 선생은 오산학교에 재직하던 시절 기행의 집에서 하숙을 했고, 몇 년 뒤 그가 오산고보에 입학했을 때는 교장을 맡고 있었다. 해방이 되어 소련인들을 상대할 일이 많아지자 고당 선생은 고향 정주에 머물던 기행을 평양으로 불러들여 통역 겸 비서로 삼았다. 그때만 해도 기행은 고당 선생이 곧 남쪽의 인사들과 함께 민주공화국을 만들면 소련군과 미군이 철수하리라고 생각했다. 이제 돌이켜보면 순진한 생각이었지만, 그땐 다들 그랬다. 모두가 모두의 선의를 믿었다. - P40

시대의 눈보라 앞에 시는 그저 나약한 촛불에 지나지 않는다. 눈보라는 산문이며, 산문은 교시하는 것이다. 당과 수령의 말은 눈보라처럼 휘몰아치는 산문이다. 준엄하고 매섭고 치밀하다. 하지만 시는 말하지 않는다. 시의 할일은 눈보라 속에서도 그 불꽃을 피워 올리는 데까지다. 잠시나마 타오르는 불꽃을 통해 시의 언어는 먼 미래의 독자에게 옮겨붙는다. - P81

그 때에도 보름이면 이 세상은 달빛으로 가득차지 않겠나? 달이야 거기 사람이 있든 없든 찼다가 이지러지는 그 자연의 법칙을 반복하겠지. 그런 무심한 것이 자연이라는 것도 모르고 인간들은 거기게 정을 둔단 말이지. 마치 해와 달이 자기 인생을 구원해주기라도 하듯이 말이야. 오로, 우리의 태양이시여, 영원한 달님이시여, 라고 찬양하면서. 하지만 해와 달은 그 누구의 인생도 구원하지 않아. 우리도 그런 자연을 닮아 노래는 들리는 대로 들으면 되고, 춤은 보이는 대로 보면 되는 거지, 좋으니 나쁘니 마음을 쏟았다 뺏었다 할 필요는 없었던 거야. - P85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있는 것, 어떤 시를 쓰지 않을 수 있는 것, 무엇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사람이 누를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능력은 무엇도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었다. - P85

사전에서 ‘세상’의 뜻풀이는 이렇게 고쳐야 해요. 영원한 것은 없는 곳이라고.

숲이 비어 있는 것을 보는 사람도 시인이고, 폐허가 꽉 차 있는 것을 보는 사람도 시인이지요. 저는 모든 폐허에서 한때의 사랑을 발견하기 위해 시를 씁니다. 괴링이 이끄는 독일 폭격기가 육백 대나 날아와 포탄을 쏟아부었을 때, 스탈린그라드는 영원히 불타는 줄 알았어요.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죠. 밤은 낮처럼, 낮은 밤처럼. 물은 불처럼, 불은 물처럼. 악은 선이 되고, 선은 악이 됐죠. 그게 바로 전쟁, 지옥의 풍경이에요. 그렇게 몇 달 뒤 꺼지지 않을 것 같았던 불이 꺼졌을 때, 도시는 완전한 폐허가 됐죠. 그 폐허를 응시하는 일이 시인의 일이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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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5-29 12:27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백석 시 좋아해서
길상사에도 가봤죠^^
김연수의 소설이 백석과 관련된 것이었군요
감사합니다~

bookholic 2021-05-29 15:17   좋아요 4 | URL
저는 법정스님을 좋아해서, 오래 전에 길상사를 가 본 적이 있는데, 백석 시인과도 이렇게 인연이 이어져 있었군요~~^^

미미 2021-05-29 11:25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는 백석 시집과 함께 읽어야겠어요! *^^* 몇몇 인용문도 담아갑니다.

bookholic 2021-05-29 17:58   좋아요 3 | URL
백석 관련된 책들을 함께 읽었더니,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즐독하시길...^^

mini74 2021-05-29 16: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고 싶어지는 리뷰입니다. *^^*

bookholic 2021-05-29 18:00   좋아요 4 | URL
^^ 고맙습니다~~
읽어야할 책들은 많지만, 두번씩 봐도 좋은 책들은 분명 있는 것 같습니다~~^^

나탈리 2021-05-29 21:2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백석에 관한 작품인지 모르고 읽었다가, 알고나서 더 흥미롭게 읽은 작품이에요! ㅎㅎ
김연수 작가님은 문장과 구절을 참 아릅답게 쓰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백석시인과 묘하게 더 잘어울리는거 같다는 기억이 남았던 책이네요!

bookholic 2021-05-30 07:00   좋아요 1 | URL
저는 김연수 님의 작품은 <꾿빠이 이상>과 <일곱 해의 마지막>만 읽어보아서 잘 모르겠지만, 두 작품 모두 말씀하신 것 것처럼 한 문장 한 문장 정성이 담긴 듯했습니다.
김연수 님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