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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악보 -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 ㅣ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1
최정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사유의 악보』,
이 책에 대해 내가 쓰는 모든 말은 변죽이거나 불협화음이거나 삑사리다.
1. 변죽
이 책『사유의 악보』를 받아들고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사유악부>였다. <사유악부>는 정조 때 의 인물 김려의 글이다. 그는 이옥, 강이천의 친구로 당대 최고의 소품작가였다고 한다. 김려는 강이천 사건에 연루되어 부령과 진해로 두 번 유배를 갔다. 부령에 유배되었을 때 만나 사랑에 빠졌던 기생 연희를 그리워하는 글이 남아있다. <사유악부>가 온통 연희에 대한 그리움을 적은 글인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소품문을 쓴다는 것이 그가 귀양을 가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지만 당시에 이렇게 감각적인 글을 쓰고도 정조에게 찍히지 않았으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다.
其. 1
問汝何所思 묻노니, 그대 무얼 생각하는가
所思北海煝 내가 그리는 건 북쪽 바닷가
眼中分明城東路 눈 감아도 뚜렷한 성 동쪽 길
第二橋邊蓮姬住 그 곳 두 번째 다리 옆에 연희가 살았지
屋前一道淸溪流 집 앞에는 길이 있고 맑은 시내 흐르고
屋後亂石顚山周 집 뒤엔 암석이 즐비하고 산은 병풍을 두른 듯
溪上楊柳數十株 시냇가엔 늘어진 버들이 수 십주가 자라고
一株堂門映粉樓 문 앞에 서면 한그루 나무와 고운 누각
樓上對牕安機杼 누각에선 창을 마주하여 앉아 베를 짜고
樓下石臼高尺許 누각 아래는 한자쯤 되는 고상한 절구가 있었지
樓南小井種櫻桃 누각 남쪽 작은 우물가엔 복숭아와 앵도가 있고
樓外直北會寧去 누각 밖의 북쪽으로 곧장 난 길은 회령 가는 길..
其. 二
問汝何所思 묻노니, 그대 무얼 생각하는가
所思北海湄 내가 그리는 건 북쪽 바닷가
全樹桃花結訌萼 복숭아 꽃망울 나무에 온통 어지럽게 엉켜 있고
一花先坼明綽約 그 중에 먼저 피어난 예쁜 꽃 한 송이 보여
我手攀枝摘花來 나는 손으로 가지를 잡고 꽃을 따서는
恰似蓮姬寶靨開 연희가 웃을 때 보조개랑 닮았구나 하면서
聊將投擲蓮姬前 슬쩍 연희에게 던져 주니
蓮姬雙擎玩一廻 연희는 두 손으로 받아 들고 살피다가
笑彈纖指捻一捻 웃으면서 고운 손으로 꽃잎을 하나씩 따서 내게 던지며
道似阿郞醉紅頰 술에 취한 서방님 붉은 뺨 닮았네요, 하며 대꾸 했지
我今老醜還喫笑 나는 지금 늙고 추한걸 하니 연희 뒤돌아서 깔깔 웃고
强把花鬚較霜獵 난 억지로 연희를 붙들고 꽃술을 수염대신 붙이곤 했었지.
<사유악부>와 <사유의 악보>는 글의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극과 극이다. <사유의 악보>를 읽다가 갑갑해지면 <사유악부>를 소리 내어 읽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비슷한 이름을 가진 이 두 글을 한 이불 속에 재우고 싶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2. 불협화음
작가의 이력이 다채롭다. 작곡가, 비평가, 기타리스트. 작가의 이력 때문인지 이 책은 음악적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 본문 혹은 프롤로그 에필로그가 아니라 서곡 악장 변주 종곡 등 낯선 이름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형식이 내용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지는 않다. 다행이다. 왜? 나는 악보를 볼 줄 모르니까. 다행이다. 왜? 나는 음악적 형식의 책을 읽는 것이지 책의 형식을 가진 음악을 듣거나 연주하는 것은 아니니까.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책을 읽을 때 비교적 서문을 꼼꼼히 읽는 편이다. 대부분의 서문에는 저자가 책을 쓰게 된 동기나 의도 각 챕터별 내용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책의 맥락을 잡고 나면 내용파악이 훨씬 쉽고 내가 꼭 필요한 부분을 더 집중해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책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기준으로 또 기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서문에 해당하는 서곡을 들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것이 한번 연주로 끝나는 음악이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다시 읽었다. 그래도 잘 모르겠다. “이건 악보가 아니라니까 이 등신아!” 자학하며 곁가지들을 마구 잘라냈다. 잘라내면서 보니 한 문장이 평균 대여섯 줄이다. 길기는 하지만 문장에 리듬이 있어서 무슨 말인지 몰라도 줄줄 읽힌다. 음악가의 특성이 글쓰기에도 적용 되는군, 재미있는 경험인데 주절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런데 한참 저자의 리듬을 따라 가다가 술어를 맞닥뜨리면 갑자기 당혹스럽다. 왜 이런 술어가 나왔는지 모르겠는 거다. 문장이 너무 길어서 주어가 무엇이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샤프를 이불 꿰매는 대바늘처럼 놀려 주어를 찾아 술어와 꿰고 문맥을 다시 짚어본다.
서곡의 첫 문단은 시대에 대한 진단으로 시작된다. “우리의 시대는 주어진 쾌락 속에서 우울하며, 강요된 안정 속에서 불안하다.” 상당히 멋지다. 그런데 나는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주어진 쾌락’은 무엇이고 ‘강요된 안정’은 또 무엇을 뜻하는지. 아무튼 이러한 시대에 “이론과 사유가 다시 촉발되고 가동되어야만 하는 필요성이 절박해진다.”고 저자는 적었다.
그러나 ‘반드시 사유해야 한다는 당위성 같은 것은 애초에 없다.’ (나도 동의한다.) 오히려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왜 사유해야 하는가’이다. (사그라지지 않는 시덥잖은 내 반항정신과 맞아떨어지는 면도 있다.) 이 책에 적힌 글들은 그러니까 왜 사유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극단까지 밀고 가서 그 끝을 확인하고자 하는 작업이며 그 극단에서 그가 내린 ‘오답’이거나 또 다른 질문이고 동시에 ‘오문(誤聞)’이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시작된다는 믿음을 저자가 가지고 있다고 내 멋대로 해석한다.
저자가 이 글을 쓴 목적은 모두 저 극단을 ‘증폭’시키거나 ‘심화’시키거나 ‘악화’시키거나 심지어는 ‘폭발’시키기 위해서다. 오사마 빈 라덴이 저격되었다는 소식 때문인지 모래바람 부는 아프가니스탄이나 전쟁터에 서 있는 느낌이다. ‘설득’하거나 ‘해명’하는 글이 아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책읽기의 방식은 잠시 잊어버리자. 내가 나를 다독거리며 읽는데 저자는 이 글을 소수의 어떤 이들만을 위한 글이라고 명시해두었다. 갑자기 짜증이 확 밀려온다. 내가 저 소수에 편입되기 위해 이 화사한 봄날 머리 싸매고 앉아서 잘라내고 재해석하면서 꿰어 맞추고 있는 것이란 말이냐! 그건 아닐 것이라고 믿기로 한다. 어떤 특권의식을 가지고 ‘소수’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또 내가 나를 다독인다.
3. 삑사리
저자의 글을 읽으며 나는 ‘증폭’되거나 ‘심화’되거나 ‘악화’되기로 마음먹는다. 심지어 ‘폭발’도 피해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아무것에도 미치지 못하는 불치병을 앓고 있는 내게는 정말 다행이지 않은가. 이미 폭발은 저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면에서 두어 번 했지만 말이다. 독자들을 흩트려 놓기로 작정한 저자 앞에 내가 정색하고 글을 쓰는 것은 농담을 다큐로 받는 것과 다름 아니다. 또 악보도 읽을 줄 모르는 내가 기타리스트 앞에서 박자를 맞추려고 하는 것은 한 쪽 굽이 떨어진 하이힐을 신고 계단을 내려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나는 그저 들어오는 것만큼만 읽기로 한다. 내 기분 내키는 대로이니 아마도 삑사리가 틀림없을 것이다.
서문보다는 아니 서곡 보다는 훨씬 잘 읽히는 아니 들리는 변주와 악장들이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일반적인 생각을 거침없이 뒤집는 저자의 문장들을 만날 때 나는 분명 증폭되었다. 지하철 안의 맹인 걸인이 애절한 ‘비가’로 청각을 자극하여 시선을 구걸하는 것에서 ‘감정과 변용의 문제’를, 그리고 거기에서 윤리의식보다 미학적 감수성을 떠올리는 저자를 보면서 내가 왜 지하철에서 맹인들을 만날 때 그토록 마음이 불편했는가를 깨달았다.
그런가하면 증조부의 제삿날 ‘산 사람도 살게 해줘야 죽은 사람도 잘 얻어먹는 것입니다.’ 라고 구시렁거리던 저자가 ‘제사라는 형식에 대해 역전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고 고백할 때 그리고 그 우월감이 어디에서 연유되었는가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즐거우면서도 질투에 떨었다. 바쁜 일상에도 불구하고 참석해야하는 집안의 제사라는 행위에서 기독교에 대한 역전된 우월감을 간파하고, 거기에서 다시 전근대적인 공자의 유물론으로, 또 다시 속고 속이는 환상의 매커니즘 속에 단순히 빠져있는 것과 알면서 이용하는 것의 차이를 꿰뚫어보려는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면서 바로 이런 것이 사유의 즐거움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문학전집 출간의 변속에 감추어진 문학적 이데올로기를 언급할 때, 작가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다룬 『아톰의 철학』이라는 책이 철학코너에,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이 레저 코너에,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가 스포츠 코너에 분류되는 현상을 본 그가 단순히 분류법을 문제 삼지 않고 거기에 끝없이 질문을 던지며 회의할 때, 소설을 쓰자고 말하는 시와 가지고 있는 시를 다 내놓으라고 말하는 소설을 들어 그 곳에서 조롱의 문법을 찾아내고 비평을 위치시킬 때, 나는 심화 되었다. 가금류에게 강제로 음식을 퍼먹이듯이 우리에게 교육되고 주입된 모든 것들, 그리하여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들에 대해 그는 끊임없이 다시 묻고 또 대답하고 있었다. 이 책은 단번에 읽히지 않는다. 저자의 생각의 결이 겹겹이어서 그것들을 벗기지 않으면 좀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시간을 두고 생각을 더듬고 차근차근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면 지적 유희가 샘물처럼 고여 있다. 물론 글의 목적이 유희가 아님은 당연하다.
저자의 아름다운 문장들, 겉모습이 아닌 사유의 힘으로 얻어진 문장들에 사로잡힐 때, 그리하여 그 문장이 대체 어떤 사유를 거쳐 만들어졌을까를 되짚어 생각하는 것은 녹녹한 일이 아니었다. 나 같은 무지한 독자로 하여금 참으로 많은 노력과 인내를 요구하는 책이다. 내게는 언젠가 통독하고 또 정독해야할 책으로 남을 것이다. 저자가 이미 서곡에 ‘소수’를 위한 책이라고 밝혀두었으니 내말은 그저 뱀발에 불과하겠지만 한 가지 저자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독자를 증폭시키거나 심화시키거나 악화시키기 위해서는 방법적으로 고민을 더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