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학파와 엠마뉘엘 라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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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타이유 - 중세말 남프랑스 어느 마을 사람들의 삶, 역사도서관 005 ㅣ 역사도서관 5
엠마뉘엘 르루아 라뒤리 지음, 유희수 옮김 / 길(도서출판)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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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부의 랑그독 지방은 알비 카타리즘, 카타르파에 감염되었다. 1208년 알비파 이단에 대한 십자군 전쟁이 있었고 카타르파 최후의 보루였던 몽세귀르 성이 함락된 뒤에 이단재판이 맹위를 떨쳤다. ‘약속된 탈선의 땅’이라 불리는 이 지역에는 그 뒤에도 끈질기게 이단이 창궐한다. 도시에서 쫓긴 이단들은 이곳 산골 농민세계로 퇴각해 생존의 땅을 얻었다. 그러나 교황청은 이단자들을 좇아 이곳에 새로운 교구를 신설하고 재판을 통한 이단척결공세를 퍼붓는다.
파미에 지방에 새로 부임한 자크 푸르니에 주교는 이단 심문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힌 인물이었다. 그는 카타르파 이단을 색출하거나 가톨릭 교리에 어긋난 일탈행위를 색출하기 위해 이단재판관의 공격, 가택수색, 일제점거 등 모든 일을 불사했다. 특히 그는 250여명의 마을주민들을 장시간에 걸쳐 모조리 심문했다. 그는 이것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 심문 내용은 카타르파에 대한 추적을 넘어 이 마을 사람들의 삶과 농민문화 등을 이해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된다. 우리는 확대경으로 땀구멍을 들여다보듯 피레네 산 해발 1300미터의 고원지대에 위치한 한 마을주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
자크 푸르니에의 재판기록에 등장하는 가타르파 이단은 교황을 첫 번째 악마 즉 마왕으로 불렀고 프랑스 국왕을 두 번째, 파미에 주교를 세 번째, 카르카손 재판관을 네 번째 악마로 불렀다. 이러한 호칭은 당시 98%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앙시앙 레짐기 프랑스 사회의 제3신분이었던 시민, 노동자, 농민들의 권력층에 대한 성향을 잘 보여준다. 이들은 증가하는 십일조에 대한 부담, 입으로 진리를 외치면서도 비대하게 살진 성직자들을 악마로 규정했던 것이다.
랑그독 지방의 사람들은 재판소의 이단 색출에 쫓기면서도 피에를 클레르그 본당신부를 중심으로 ‘완덕자’ 혹은 ‘선한 사람들’이라 불리는 카타르파의 모임을 꾸준히 가졌다. 이들은 식사를 하거나 양을 치거나 길을 오가며 대부분 구전으로 포교활동을 했다. 가난한 농민과 양치기들이 대부분이었던 그들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 결혼도 집안끼리 했고, 귀족이라 해도 산간마을 귀족의 상대적 빈곤 때문에 귀족과 비귀족 간의 갈등도 하찮았다. 이단자로서 쫓기는 신세였으므로 정주보다는 이동목축을 하는 양치기 직업이 많았다.
양치기들은 열악한 생활을 했지만 재산을 축적하지 않았으며 영주제로부터 자유로웠고 심지어는 결혼까지도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랑그독 지방의 농민 대부분은 글도 몰랐고 촌수를 헤아릴 줄도 모를 정도로 무지했다. 그들은 인간이 죽으면 영혼은 수평적으로 동물과 인간 속에서 윤회를 하고 수직적으로 맨 마지막인 저승으로 올라간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구원은 최고의 가치였고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에 제3자가 개입하면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의 교리는 별 특별한 것이 없다. 고기는 먹지 말고 생선만을 먹을 것, 결혼은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과 할 것, 육체적인 관계를 갖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므로 절대적으로 금욕할 것, 십일조라는 강제적 개념과는 달리 선을 이해하는 사람과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정도였다. 그러나 교리가 그대로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다.
본당신부 피에르 클레르그는 달변과 권력과 협박을 이용해 마을의 모든 여성들과 자유로운 성관계를 가졌다. 언니와 동생, 엄마와 딸, 늙은이와 젊은이, 미혼녀와 유부녀 등 신분과 나이와 결혼 여부를 가리지 않았고 장소 또한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자식은 낳지 않았고 이 모든 행위에 대해 더없이 당당했다. 피해자들도 그에게 나쁜 감정을 갖지 않았고 암묵적으로 용인되기까지 했다. 그는 오히려 아내를 두지 않고서 연애행각을 벌여 독신을 유지하고 재산을 축내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은 착한 아들이라고 자부했다. 그는 교회에서 치르는 결혼식을 ‘세속적 사치’라고 혹독하게 비난했다.
양치기들은 주인과 한 집에서 생활하면서 양치기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집안의 막일은 도맡아 했고 여주인의 정부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피레네 산맥을 넘나들며 이동목축을 했던 유능한 양치기 피레네 모리 역시 자신의 가난에 대해 불평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그들이 가난을 이상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부에 대한 반감이 있었지만 그것은 세속적 부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성직자들의 부에 대한 반감이었다. 엄청난 부를 축적한 교황권에 대한 그들의 분노는 정당한 것이었다.
특별한 교리도 없고 위계적이고 강력한 집단을 형성하지도 못한 알비 카타리즘이 민중의 지지를 받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세속귀족 즉 영주나 귀족에 저항하기 보다는 교회의 재산을 비난했다. 성직자가 토지 세력으로 군림했고 반박할 수 없는 논리로 십일조에 대한 의무를 강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몽타이유 사람들이 증오했던 것은 사악한 부자인 성직자들과 탁발 수도사들의 흉측한 비곗덩어리였던 것이다. 성직자의 지배와 십일조 징수에 반대하는 이들의 저항은 카타르파에서 칼뱅파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단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프랑스 아날학파3세를 이끈 역사가 엠마뉘엘 르루아 라뒤리에게 몽타이유는 예외적 공간이었다. 그는 이 예외적 공간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주목했고, 이 예외를 역사에서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고민했던 것 같다. 재판기록으로 남아있던 몽타이유 지역의 카타르파 이단의 심문기록이 라뒤리에 의해 중세의 한 마을사람들의 삶으로 되살아나는 것을 보면서 사료들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재생산되는 것을 확인했다. 예외가 보편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몽타이유』를 통해 보편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었다. 사마천의 사기가 세가와 열전을 통해 입체적으로 살아나는 것을 경험했던 것처럼 미시사가 동반되지 않은 거시사를생각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