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쾌한 유랑 문학과지성 시인선 389
이재무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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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게는 그만이 쓸 수 있는 시가 있는 듯하다. 랜드 마크처럼 시인을 대표하는 시가 시인마다 있다. 정지용 하면 ‘향수’가 떠오르고, 김소월의 이름은 자동적으로 ‘진달래꽃’을 불러오고 서정주 하면 ‘애비는 종이었다’는 첫 구절이 저절로 시작되면서 ‘자화상’이라는 제목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 시인은 이상하다. 이재무 하고 부르면 나는 가장 먼저 ‘밥’ 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위대한 식사’라는 시 때문일까? 얼마 전 펴낸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이라는 산문집 제목 때문일까? 
 



위대한 식사



산그늘 두꺼워지고 흙 묻은 연장들

허청에 함부로 널부러지고

마당가 매캐한 모깃불 피어오르는

다 늦은 저녁 멍석 위 둥근 밥상

식구들 말없는, 분주한 수저질

뜨거운 우렁 된장 속으로 겁 없이

뛰어드는 밤새 울음,

물김치 속으로 비계처럼 둥둥

별 몇 점 떠 있는 냉수 사발 속으로

아, 새카맣게 몰려 오늘 풀벌레 울음

베어 문 풋고추의 독한,

까닭모를 설움으로

능선처럼 불룩해진 배

트림 몇 번으로 꺼뜨리며 사립 나서면

태지봉 옆구리를 헉헉,

숨이 가쁜 듯 비틀대는

농주에 취한 달의 거친 숨소리

아, 그 날의 위대했던 반찬들이여
 


시골의 저녁식사 풍경이다.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깃불을 곁에 두고 멍석 위의 두리반에 모여 앉은 가족들. 반찬은 우렁된장찌게, 풋고추, 물김치가 전부다. 기름기 없는 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트림 몇 번으로 꺼지는 것으로 보아 밥은 보리밥이었을 게다. 물김치는 열무김치가 어울리겠다. 냇가에서 하루 종일 물장난 치며 놀다 잡아온 우렁으로 막 된장찌개를 끓여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장이 반찬이라 모두들 말없는 가운데 수저질만 분주하다. 고기냄새는 명절 때나 간신히 맡을 수 있을 뿐 푸성귀뿐인 풍경을 그려내며 시인은 ‘위대한 식사’라 부르고 있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음식에 온 가족의 노동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일까? 사발의 이가 빠지듯 그 때의 가족들이 듬성듬성 사라진 지금 온가족이 모여 앉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까? 물김치에 뜨는 별, 풀벌레 울음소리가 맛을 더해주던 그 정경 때문일까? 지금은 도무지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기 때문일까? 허청, 모깃불, 멍석, 사립 같은 어휘들이 잘 버무려져 투박한 듯 하면서도 정겹고, 사람냄새 가족냄새가 나는 시다. 그의 시어들은 도회적이고 세련된 시어들보다 이렇게 사투리와 투박한 단어들이 많다. 그리고 그것들이 시에서 힘을 얻는다.  


장갑들



벙어리장갑으로 하늘의 눈 자주 불러 내렸지
하루가 노루 꼬리만큼 짧았지

털장갑 때문에 외출할 일 많았지
읍내 빵집과 만두집이 깻잎 머리와 상고머리로 붐볐지

가죽장갑만 끼면 까닭 없이 배짱 두둑해져
차부 앞이나 극장 뒷골목 단물 빠진 껌 질겅질겅 씹다가
잇새로 찍, 침 뱉고 휘파람 불어대며 뜨거운 피 식히곤 했지

오늘은 빨간색 페인트로 코팅된 목장갑 끼고
입술 담배 연기 내뿜으며 일터에 가고 있지
콜타르처럼 끈적끈적, 목에 잠긴 가래 긁어 뱉으며
 


가죽장갑하나로도 세상을 다 얻은 듯 우쭐대는 시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차부 앞이나 극장 뒷골목 단물 빠진 껌 질겅질겅 씹다가/잇새로 찍, 침 뱉고 휘파람 불어대’는 시인의 모습을 떠올리면 시인과 기가 막히게 어울린다는 느낌이 든다. 어떤 영화배우도 흉내 내지 못할 것 같다. 배우에게 그것은 연기이지만 시인에겐 생활이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이 시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땡깡을 부리거나 깡짜를 놓거나 어깃장을 놓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런데 야단치거나 때려주거나 하지 못하고 왠지 다 받아주어야만 할 것 같다. 
 


술이나 빚어볼거나




올가을엔 만사 제치고

내 고향 부여군 석성면 현내리에 가서

철없던 유년 소풍 갔다가 보물찾기로 받은

호루라기 종일 불다가 잃은 뒤로

빛과 색 더욱 무성해진 풀밭에 빈 항아리로 누워

산그늘 덮고 한 달포 자다 깨다 하면서

저 잘난 세월에 농이나 걸까

그러다 여우비 내리걸랑 고스란히 아껴두었다

한량 같은 구름 몇 살 오른 별 몇

동동, 동치미처럼 띄워놓고

산달 앞둔 여자 둥근 배 같은 달도 푹 담가 띄우고

떼로 몰려오는 풀벌레 울음 삼태기로 쓸어 담아

꾹꾹 눌러 쟁이고

오명가명 수박씨인 양 툭툭,

내뱉는 누룩 내 나는 사투리도 몇

함께 절여서 도수 높은 술이나 빚어볼거나

명리에 밝은 샌님들 불러들여

인사불성 될 때까지 대작할거나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져볼만한 생각이 아닐까 싶다. 김사인의 시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남자가 되어>는 그 질탕함에서 이보다는 한 수 위다. 김사인의 시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나도 그 앞에 퍼질러 앉아 울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러나 이재무의 시는 잘 다독거려 달래면 곧 착한 사내로 다시 돌아올 것 같다. 그래서인지 미워 할 수가 없다. 이렇게 가끔 땡깡을 부리던 시인이 정색하고 이런 시도 쓴다.



펜에 대하여



마른 땅 파 들어가는 삽이여,

묵은 논 갈아엎는 쟁기여,

고랑 타고 앉아 풀매는 호미여,

돌멩이에 날(刀) 찍혀 우는 쇠스랑이여,

이마에 한 톨 두 톨 돋는 땀이여,

경작의 노고보다 헐한 소출이여,
 


시력 30년이다. 30년 동안 시집, 수필집, 시평집, 공저 등을 모두 합쳐 15권 남짓이다. 쉬지 않고 시를 써온 세월과 노고에 비하면 결코 넉넉한 작황이라 할 수 없다. 그의 말대로 ‘경작의 노고보다’ 턱도 없이 헐한 소출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땅을 일구지 않고 언어의 밭을 가꾸었으니.



불의 지청구



배화교도 되어 타오르는 불 숭배한 적 있다

주황빛 속에 청색의 손 적시며 축축한 생각

꼬들꼬들 말리다 보면 영혼의 동굴 안쪽에까지

비단실 같은 빛 새어 들어오곤 하였다

온갖 잡념의 비린 생선 던질 때마다

불은 고양이의 혀 되어 날름 삼키곤 했다

생의 궁극은 완전한 소진에 있는 것

화구 앞에서 생의 완주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씨름 기술이 부족한 사람

번번이 샅바 놓쳐 허둥지둥 나가떨어지기 일쑤였지만

아직 시간의 끈 놓아서는 안 된다

타다 만 흔적처럼 추한 것 어디 있으랴

불 속에 덜 마른 아집의 생목 한 짐 던져 넣으니

검붉은 손톱 불쑥 나타나 눈 찌르고 얼굴 할퀸다

불의 지청구 달게 받은 뒤

자세를 고쳐 앉아 젖은 신발 벗어 말린다
 


아무리 소출이 적어도 또 돈이 되지 않아도 그만 둘 수 없다. 어차피 시인은 경작의 기술도, 씨름 기술도 없다. ‘시간의 끈’ 놓을 수 없다. ‘타다 만 흔적’보다 추한 것 없으니 ‘불의 지청구’들으면서 신발 말리는 동안 잠시 쉬어가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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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4-06 0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간에 밥과 술 얘기라니... 늘어가는 살들은 대체 어쩌란 말인가요ㅋㅋ^^

반딧불이 2011-04-06 11:15   좋아요 0 | URL
괜히 엄살 부리시는거죠? 후와님은 이런 글을 읽었다고 해서 밥이나 술이 당기지도 않을 뿐더러 살집이 넉넉한 사람은 아닐 것 같은데요.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건가요?

비로그인 2011-04-06 12:55   좋아요 0 | URL
음, 최소한 마른 체형은 아닙니다. 그 이상은.... 비밀임닷!ㅋㅋ^^

양철나무꾼 2011-04-07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재무의 시는 잘 다독거려 달래면 곧 착한 사내로 다시 돌아올 것 같군요...
전 김사인의 시들이 너무 단정해서 감히 범접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들곤 했는데 말이죠~^^


반딧불이 2011-04-07 23:46   좋아요 0 | URL
단정하기로 말하면 덜 단정한 까닭에 사람냄새가 나는거 아닐까해요. 때묻지 않은 시골총각같다고 해야할까요. 김사인의 시는 모두지 빈틈이 없잖습니까.

루쉰P 2011-04-07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 쪽은 워낙 읽는 것도 잼병이고, 잘 보지를 않아서요. 이렇게 반딧불이님이 올려주신 시를 감상하고 가요. '펜에 대하여'란 시는 참 너무 좋네요. ^^ 단어를 맛깔나게 저렇게 쓰는 힘들은 어디서 나오시는 건지 감탄만 하고 가요.

반딧불이 2011-04-07 23:49   좋아요 0 | URL
저도 그냥 마음에 와 닿는 시 위주로 봐요. 안읽히는 시들도 많고 읽어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 시들이 얼마나 많던지요. 오가며 귀동냥 눈동냥 한 것들에 기대어 시집을 더러 찾아보기도 하고 그러는거죠. 뭐.

릴케 현상 2011-04-18 0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오랜만에 들어왔네요^^ 마감이라 밤새는 중 ㅜㅜ

반딧불이 2011-04-18 10:58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어디 멀리 가신줄 알았습니다. 별일 없으시죠? 밤새워 쓰시는 원고가 궁금해지는데요. 곧 볼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