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로 참말하기 시작시인선 101
유안진 지음 / 천년의시작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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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력 40년. 삶의 나이 마흔이 아니라 시의 나이 마흔이다. 끔찍하고 아득하다. 여자 나이 마흔이면 팽팽하던 근육의 긴장이 풀리고 조금은 느슨해진 곡선이 안면 근육을 편안하게 하는 나이다. 시의 나이 마흔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지거든 유안진의 『거짓말로 참말하기』를 펴 볼 일이다.

편두통이 생기더니
한 눈만 쌍꺼풀지고 시력도 달라져 짝눈이 되었다
이명도 가려움도 한 귀에만 생기고
음식도 한쪽 어금니로만 씹어서 입꼬리도 쳐졌다
오른쪽 팔다리가 더 길어서 왼쪽 신이 더 빨리 닳는다
모로 누워야 잠이 잘 오고 그쪽 어깨와 팔이 자주 저리다
옆가리마만 타서 그런지 목고개와 몸이 기울어졌다고 한다

                                                  -그림자도 반쪽이다- 부분


거울 속 앞머리 한줌이 허옇다
머리카락이라도 흰색이라서 다행이라 했는데
머리의 검정이 몸으로 흘러내리는 게 아닌가
주근깨와 기미가 늘어나고
마음까지 검정에 빠지면서
밤이 더 편해져 늘 밤이 더 좋다

                               -검정에 빠지다- 부분

시의 나이 마흔이니 몸의 나이는 그보다 강산이 두어 번은 더 변했을 터. 몸의 나이를 짐작하는 일이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시의 구절들은 이런 짐작을 확인하게 한다. 그러나 몸의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또 시의 나이를 마흔이나 먹었어도 시인은 아직 ‘할 말이 남아있다고’ 한다.

섣달, 모과나무에 모과 두 알이 달려있다

정월, 플라터너스 잎새 몇 장을 붙잡고 안 놓는다

 

2월, 응달진 산자락에 잔설이 희끗희끗하다

중략

10월, 영어 일어 이태리어 간판들 틈에 한글 간판 하나가 한사코 끼어들었다

동짓달, 일주일이 멀다하고 손톱 발톱은 키가 큰다

                                    -할말이 남아 있다고- 부분

일년 열두 달 각각의 사물을 불러들이고 계절의 테두리에 가까스로 남아있는 그 안쓰러움을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다고’하는 그의 시는 시의 나이 마흔, 시집을 열권이상 출간했음에도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다’는 시인의 말에 다름 아니다. 시인에게 할 말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낮잠 자다 손가락을 베인 꿈을 꾸는 모습을 그린 <파란 피>에는 아직 소녀같은 천진함과 귀여움도 남아 있다. 손가락에 흐르는 파란 피를 보고 "길상(吉祥)의 청천(靑天) 벽해(碧海)의 그 파란색이다/새 하늘과 바다가 비로소 열렸다/태허의 신창세기를 쓰게 되었다/지금의 여기를 벗어나는 신출애굽기를 쓰게 되었다/기어코 계통발생과 개체발생에서 탈출했다"는 그녀는 꿈속에서도 무언가를 계속해서 쓴다. 신이 나서 쓰면서 쓰고 있는 자신을 즐기고 있다. 그리고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파란 핏물은/ㄱ형?ㄴ형?또는 ㄱㄴ형? "하고 혈액형을 한글 자음으로 재명명하기까지에 이른다. 그러나 그것은 꿈. 이쯤에서 깨어나야 마땅하다. "잠 밖에서 혀차는 소리/'낮잠에 잠꼬대까지--'". 소리같지 않은 소리, 혀차는 소리에 깨어나는 꿈은 그래서 꿈으로 유효하다. 혼자 파안대소하고도 씁쓸하지 않았다.  

시인은 나이를 먹어 몸이 부실(?)하지만 시인의 시는 나이를 먹어 오히려 모든 사물과 소통하면서 팽팽해지고 있다.       


토막 난 낙지다리가 접시에 속필로 쓴다
숨가쁜 호소 같다

장어가 진창에다 온몸으로 휘갈겨 쓴다
성난 구호 같다

뒤쫓는 전갈에게 도마뱀꼬리가 얼른 흘려 쓴다
다급한 쪽지글 같다

지렁이도 배밀이로 한자 한자씩 써 나간다
비장한 유서 같다

민달팽이도 목숨 걸고 조심조심 새겨 쓴다
공들이는 상소 같다

쓴다는 것은
저토록 무모한 육필이란 말이지
몸부림쳐 혼신을 다 바치는 거란 말이지.

                   -겁난다- 전문




그는 모든 사물의 몸짓에서 글을 쓰는 행위를 보게 된다.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은 오롯하게 시를 쓰는 일뿐이다. 시의 나이 마흔에 이르러 오로지 시만이 그의 전부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참말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시인은 ‘거짓말로 참말하기’까지 나아간다.




지금은 없어진 공산주의 시대였다.
루마니아의 초등학교 교실에서 선생님과 아이들의 공부였단다
여러분의 아버지는 누구죠? 
   니콜라이 차우세스쿠요
여러분의 어머니는 누구죠? 
   엘레나 차우세스쿠요
잘 대답했어요. 여러분은 나중에 무엇이 되고 싶어요? 
   고아요
(한 신문에 실린 이 풍자로 관련자들 모두 체포되었다고 한다)

소련의 아이들과 어른들의 대화였단다
생일 선물로 무엇을 받고 싶니?
한 아이가 얼른 대답했다 
   투르먼 대통령한테 빰 맞고 싶어요
깜짝 놀란 어른이 까닭을 묻자, 그 어린이는 
   내가 미국 아이이거나 투르먼이 우리 대통령일 테니까요
(이 풍자만화의 관련자들은 전원 체포되었다고 한다)

어느 위성국가에서 모스코바로 가는 기내 방송이었단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 비행기는 곧 모스코바 공항에 도착합니다
담뱃불을 끄고 의자를 바로 세우고 안전벨트를 매어주세요
그리고 손목시계를 10년 뒤로 돌려주세요
(이 풍자만화로도 관련자들은 체포되지 않았다. 체포할수록 풍자의 인기가 급상승할뿐더러, 포화상태의 수용소 비용을 줄이려고 기 수감자들도 다 석방했는데, 이는 후로시쵸프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놀랍고 기발한 발상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오는가?

                       -거짓말로 참말하기- 전문




처음 몇 편을 읽으면서 긴장 없는 편안함 때문에 자칫 수다로 전락하나 하던 생각은 기우였다. 읽어갈수록 편안함 속에 묻혀있는 시의 나이 마흔의 눈 밝음과 재치가 공들여 읽는 시간을 보상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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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2-01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유안진씨의 '축복을 웃도는 것' 이라는 에세이집을 인상깊게 읽은 기억이 새록한데 님의 글을 읽으니, 이 분의 시집도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군요^^

반딧불이 2009-02-01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글이 남을 부추기는 성격은 전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은근 걱정되네요.^.^
 
전광수커피 / 콜롬비아 수프리모 200g - 원두(빈)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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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무래도 커피를 너무 마시는 것 같다

쓰는 글씨마다 검정색이 되고

입는 옷도 모두 검정색이다

구두와 핸드백도 검정색 뿐이다

커피를 줄이면 나아질까 했지만

긁적이고 보면 검정글씨고

무심히 입다보면 검정 옷이다

 
   

 

시인 유안진의 시 <검정에 빠지다>의 첫 연이다. 시인이 커피를 무척 즐기는 모양이다. 자신의 글씨도 옷도 악세서리도 모두 검정색인 이유를 커피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보니 대체 커피를 얼마나 마시나 또 그 커피가 어떤 종류인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머그잔 절반을 커피가루로

나머지 절반은 냉수로 채우지

캄캄한 잔 속에 풍덩 뛰어들면

케냐 에콰도르 에티오피아의 어느

커피농장으로 직행하게 되지

                      <커피 칸타타> 부분

 
   

 시인은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는듯도 하고 남미의 커피를 즐기는것도 같다. 내 경험으로 보면 남미의 커피가 좀 부드럽고 순한 맛이 나는 것 같다.

커피에 대한 정보들이 다양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도 나는 굳이 커피만은 오로지 내 입맛으로만 느껴보려고 한다. 한동안은 코스타리카 커피를 즐기다가, 또 한동안은 이가체프만을 마시다가 요즈음은 콜롬비아를 마신다.

커피는 같은 종류라도 마시는 장소와 분위기에 따라 천차만별로 맛을 달리한다. 그래도 이 콜롬비아 커피는 늘 깔끔하고 쌉쌀한 맛으로 내게 남아있다. 육식을 즐기지는 않지만 어쩌다 삼겹살이라도 먹은 날 입안의 느끼함과 복부의 지방이 걱정될때 마시면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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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지 2010-03-31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 주문하실 땐, 여기도 한 번 들려주세요. http://www.ebohemian.co.kr/ 이 집 커피 맛있습니다. 유명한 곳이어서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혹시나해서요.


반딧불이 2010-03-31 20:11   좋아요 0 | URL
아직 모르고 있었습니다. 다음에 커피살 때 이용해볼께요. 그나저나 오늘 아침 커피 갈다가 분쇄기의 손잡이 떨어져버렸는데...마치 알고 오신듯 합니다.
 
안토니오 그람시 살림지식총서 179
김현우 지음 / 살림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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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그람시는 1891년 이탈리아 남부의 큰 섬 사르디니아에서 태어나고 북부의 신흥공업도시 토리노의 대학에서 수학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해이자 토리노에서 거대한 프롤레타리아 봉기가 일어난 1917년, 당시 26세였던 그람시는 경제적으로 후진국이었던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난 예외적인 상황을 묘사한 「‘자본’에 반한 혁명」이라는 글을 이탈리아 사회당 일간지 『전진』에 발표했다. 이로써 공식적인 사회주의자로서의 길을 걷게 되는 그람시는 그가 무솔리니의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경험하게 되는 제2차 세계대전과 파시스트체제, 자본주의 국가의 복잡성과 견고성에 대한 간파 등을 담은 그의 이론의 정수인 『옥중수고』를 남겼다.

그람시가 태어난 사르디니아는 가난에 찌든 소작농 사회였으나 그람시는 비교적 여유 있는 알바니아인 후손 집안의 7형제 중 넷째로 태어났다. 금발의 잘생긴 아기였지만 네 살 때 하녀가 실수로 떨어뜨려 평생을 키 152센티미터를 넘지 못하는 곱사등이로 살아야했다. 그의 이런 신체적인 조건과 아버지의 투옥 등은 그람시를 독서와 지적인 추구에 몰입하게 하였고,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던 그의 형 젠나로 그람시와 이탈리아 국가형성기 말미의 사르디니아의 지리적 위치 등은 그람시가 정치적 자각을 하는데 큰 몫을 하였다. 그람시가 언어학자를 꿈꾸며 대학생활을 보낸 토리노는 북부의 신흥공업도시로서 피아트 자동차 공장과 테일러 방식의 근대적인 생산 공정에서 일하는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있었다. 토리노 노동자들의 전투적인 가두시위, 파업투쟁 등을 지켜본 그람시는 그 모습 속에서 북부 산업자본가들을 위협할 수 있는 잠재력과 남부의 농민대중을 이끌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경제적 육체적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람시는 이론적인 탐구와 저술활동에 열정적으로 몰두했고 1917년 <자본에 반한 혁명>이라는 흥미로운 글을 발표하게 된다.

<자본에 반한 혁명>의 ‘자본’은 칼 마르크스의 『자본』을 말한다. 마르크스는 발전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발발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후진 농업국가인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이루어졌으니 이것은 『자본』의 주장에 거스르는 혁명이라는 것인데, 그람시에 의하면 마르크스의 이론이 틀린 것도 아니고 러시아 혁명이 잘못된 사회주의 혁명도 아니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적인 사고에서는 역사 속의 개인들과 인간의 의지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 그람시의 의견인데 이는 마르크스 이론을 당대의 상황에 맞게 창조적으로 적용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은 그람시에게 고도의 조직되고 규율 잡힌 혁명정당이 필요하다는 것과 러시아 소비에트에 조응할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권력기구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하는 관심을 갖게 하였다. 그람시의 이러한 관심은 이후에 그가 몇몇 사람들과 창간한 ‘사회주의 문화비평’주간지 『신질서』에 잘 드러나고 있다. 그람시의 실제적인 관심은 언제나 노동계급을 교육하고 문화적인 기반을 건설하는데 있었지만, 정치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실천 덕에 그는 언제나 사회당 토리노지부의 지도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전국적인 좌파정치인이었으며 지도부중의 한명이었던 아마데오 보르디가와 그람시는 당과 대중의 관계에 대한 입장차이로 서로 대립하게 된다. 보르디가는 당이 올바른 정책을 견지한다면 노동계급은 당의 지도를 따르게 되리라는 것이었고 그람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만드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외에도 두 사람에게는 또 하나의 대립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파시즘의 위협에 관한 것이었다. 보르디가는 파시즘의 위협에 대해 크게 평가하지 않았으나 그람시는 파시즘이 자본주의가 낳은 위기상황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와 노동계급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는 반동의 시기를 불러올 수 있음을 알고 경계했다. 이러한 예측과 경계에도 불구하고 좌파의 선전선동 기법과 내용을 우파의 것으로 능란하게 재가공하여 등장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은 그람시를 체포하고 “우리는 이 자 두뇌의 작동을 20년간 중지시켜야 한다.”는 논고와 함께 20년 4개월 5일 형을 선고했다. 두뇌의 작동을 중지시켜야할 만큼 파시스트 정권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던 그람시는 그러나 10년의 수형생활 동안 『옥중수고』를 써서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는 혁명 전략가로 새로 태어났다.

『옥중수고』는 감옥에서 손으로 쓴 원고라는 뜻으로 그람시가 무솔리니의 감옥에 갇혀있을 당시 쓴 대학노트 32권 분량의 글이다. 이 글은 이탈리아의 역사, 정치, 교육, 문화, 철학, 여성, 종교 문제 등 방대한 영역을 다루고 있지만 마르크스 이론의 개발이라는 그람시의 일관된 주제로 집약된다. 이 원고는 그람시의 옛 동료 톨리아티에 의해 최초로 출간된 이후 크게 ‘정치편’과 ‘철학․역사․문화편’으로 나뉘어 출간된 판본이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저작의 재구성과 번역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옥중수고』에 실려 있는 그람시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기본적인 개념들을 반드시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다. 실천철학, 그람시에 있어서의 정치의 개념, 유기적 지식인, 진지전 등이 그것이다. 무솔리니의 감옥에서 그람시는 검열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은유적 표현들을 많이 사용했는데 마르크스주의는 ‘현대의 이론’ 또는 ‘실천의 철학’으로 기술되었다. ‘실천의 철학’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그람시의 가장 독창적이고 중요한 이해를 보여주는 부분으로 사적이고 맹목적인 실천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의식적, 집단적 실천을 의미한다. 그람시에게 있어 ‘실천의 철학’은 ‘정치’와 동의어였으며, 변화시키려는 입장에서 상황 속의 여러 세력들의 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였다. 그람시에게 있어 ‘정치’는 단순히 정치제도 혹은 사회변혁의 리더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환경의 변화 또는 인간의식 행동의 변화 등 행동일반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일반적 의미의 정치보다 훨씬 넓은 범주로 확장된다. 이러한 변화를 위해서 즉 ‘정치’를 위해서는 지식인을 겨냥한 투쟁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며 그람시는 ‘유기적 지식인’이라는 새로운 존재를 제시하여 이를 보완하려하였다. 유기적 지식인은 계급적 자각성을 가지고 실천적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지식인을 일컫는다. 투쟁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전복, 해체, 폭동, 혁명 등 파괴적인 측면을 넘어서는 새로운 질서를 강조하는 그람시에게는 유기적 지식인의 항상적인 설득이 요구된다.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지배체제에 있어서의 혁명은 ‘짓쳐 들어가서 결정적인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일회적 전술로서의 ‘기동전’보다 다양한 투쟁전선을 가로질러 지속적으로 수행되어야하는 ‘진지전(war of position)으로 수행되어야하는데 유기적 지식인은 이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곱사등이라는 신체적 결함을 가진 혁명가였고, 이탈리아 공산당의 아버지였으며, 마르크스주의에 자양분을 공급한 이론가였다. 그의 이론과 개념은 에릭 홉스봄, 루이 알튀세르, 스튜어트 홀, 에드워드 사이드 등 다양한 학문영역의 전 세계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수용과 변용, 오용되면서 현재적 의미로 재창출되고 있다. 이는 우리가 현대세계에서 마주치는 복잡한 사회현상들을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을 형성하게 해주는 것으로 그의 저작은 미래를 보는 망원경으로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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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2-12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번으로 출간되었던(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사라져버리고 그 자리에 릴케의 '말테의 수기'가 그 번호목록을 차지한), 그람시의 '감옥에서 보낸 편지'를 읽은적이 있는데 무척 어려워서 거의 의무감에 완독을 한 기억이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그람시에 대한 이해를 하고 나서 다시 읽으면 한결 도움이 될거 같군요.ㅎ 아직 '옥중수고'는 엄두를 못내고 있는 실정인데;

반딧불이 2009-02-13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살림지식총서'를 참 좋아하는데 강유원의 '책과세계' 와 이 책 때문에 작은책이라고해서 만만히 볼게 아니라는걸 절감했죠. 옆에서 도와주시는 분이 없었다면 책 집어던져버렸을거에요.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 서평단 알림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 問 라이브러리 2
도정일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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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유령이 전 유럽을 떠돌고 있다.” 이것은 마르크스 <공산당 선언>의 첫 문장이다. 마르크스가 <선언>을 발표하던 160년 전의 자본주의는 아직 미약한 세력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선언 발표 160주년을 맞아 <공산당 선언>을 새로 번역한 강유원은 역자후기에 “2008년 오늘, 공산주의는 전 세계 어디에도 자리 잡지 못한 채 떠돌고 있는 유령이다.”라고 덧붙여 두었다. 그렇다면 공산주의 유령이 어디에도 발붙일 틈이 없는 전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는 이미 160년 훨씬 이전부터 전 지구를 자신의 무대로 삼아왔다. ‘세계화’, 혹은 ‘지구화’라는 말은 이런 자본주의의 거대한 빛이면서 동시에 그림자이다. 오랜 전개의 과정을 거쳐 냉전의 양극체제 붕괴이후 자본주의는  ‘세계화’라는 새로운 질서로 세계를 재편했다. 자본주의의 세계화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의 세계화'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그런데 미국의 상업주의 문화가 세계적으로 확산되기는 했지만 ‘세계화’가 반드시 미국화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세계화는 미국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약화시키면서 동시에 ‘세계의 하나 됨, 모든 문화의 뒤섞임과 혼성, 문화 품목의 탈국경적 유통과 소비, 새로운 21세기적 문명을 향한 변화의 시작, 정보화 사회의 대두, 탈중심적 세계와 신인류의 등장, 근대성 벗어나기’ 등 세계화는 전 지구적 현상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렇게 보면 세계화의 물결에서 예외적인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도정일은 이러한 현상을  루쉰의 소설에서 따와 ‘아Q 현상’이라 이름 붙였다. 온전히 한자이름도 영어이름도 아닌 잡종성, 혼합성의 이름이 의미하듯이 백 퍼센트 온전한 한국인, 백 퍼센트 온전한 미국인은 더 이상 없다. 한국인이든 미국인이든 아침식탁에 나온 자기 그릇은 그 기원이 중국이고, 포크는 이탈리아가 기원이고, 커피는 아랍인들이 세계에 퍼트린 기호식품이고, 설탕은 인도 발명품이다.  문득 오늘 내가 입었던 옷을 살펴보니 태국산 실크 블라우스, 미국 국적의 디자이너 네임 태그가 붙어있긴 하지만 메이드 인 홍콩의 엘리 타하리 반코트를 입었고 우리나라에서 만들었다는 소가죽 구두를 신었지만 아마도 이 가죽은 어딘가에서 수입 해온 것이 분명할 터이다. 이런 현상은 단지 식탁이나 생필품에 그치지 않고 정치 문화 교육 등 우리의 삶의 전 영역을  속속들이 지배하고 있다. 아니 삶 그 자체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자각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다.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은 자각없는 이런 우리의 삶에 대한 '답이 아닌 질문의 절실함을 위하여'  기획된 책이다. 이러한 기획에서 그의 질문은 자신이 인문학자라는 특성, 특히 교육에 몸담고 있어서인지 교육, 문화 등 인문학 범주를 다루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모순을 보지 '않으려는' 적극적인 의지, 많은 경우 무의식적이면서도 적극적인 '무지에의 의지'가 팽배해있다. 또 세계화와 경쟁 시대의 구호가 등장한 이래 학교교육은 대학을  전문적 직업 준비 기관으로 내몰고 기업은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인력의 공급을 대학에 주문한다. 경쟁력과 창의성을 강조하는 공교육은 퍼붓기와 받아먹기의 교육방식으로 창의력과는 전혀 무관한 지적 무기력과 호기심 상실을 유발하고 있다. 이런 시장의 지배와 논리에 소멸의 위기로 내몰린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이야기하면 '돈에 대한 터무니 없는 경멸'로 잘못 알아듣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인문학은 돈을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 돈밖에 모르는 사회를 경멸한다. 인문학이 문제삼는 것은 시장이 아니라 '시장 전체주의'이고 시장논리가 아니라 '시장논리의 유일한 논리화'이다. 인문학이 경고하는 것은 교육영역에서의 시장 원리의 '전면 도입'이고 학교의 전면적 '시장화'와 그로 인한 교육의 비틀림이라는 문제이다.

  

 

자본은 끊임없이 사회적 비판 세력을 혐오하고 비판력을 마비시키기 위해 타락한 방식으로  타락을 부추기며 최대의 소득을 얻는다.  어떤 경제학자는 연소득 6천만원 이하이면 적극적으로 이민을 검토해보라고 권한다. 조금의 차이는 있겠지만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삶에 대한 자본주의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어차피 우리가 뼈 속까지 스며든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어떤 질문을 해야하고 어떤 답을 구해야 하는가? 다양한 영역에서 많은 학자들이 이런 질문을 해왔고 또 나름대로의 답을 위한 대안까지 제시해왔다. 최근에는 '인터넷 경제 대통령 미네르바'라는 유령까지 떠돌고 있다. 그러나 사회는 손놓고 앉아있다. 국가는 국가 자신이 그 병리현상을 촉발한 원인제공자이자 그것을 부추긴 나팔수이고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없는 정책파산자이다.  마르크스가 160년 전에 진단한 자본주의의와 지난 1990년대 중후반 도정일이 진단한 우리의 현실은 2008년 오늘과 다른 것이 없다.  이런 사실들을 책을 읽으며 확인하는 일은 곱배기로 씁쓸한 일이다. 정작 책을 읽어야할 사람들이 읽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야하기 때문이다. 절실한 질문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내재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도정일 역시 비판적 시민사회의 형성, 존재의 대상화 거부 등으로 답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질문의 답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해야하는가가 더욱 큰 문제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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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2-12 0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준만씨가 '조선일보에 글 기고 안하기' 운동을 전개했을 때, 정작 그걸 실천에 옮긴 몇 안되는 지식인 중의 한명이 도정일씨라고 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도정일이라는 이름은 제게 무척 인상적이고 호의적으로 다가옵니다.

반딧불이 2009-02-13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년도 더 전에 도정일의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를 읽고 늘 그의 글에 갈증내고 있었죠. 이 책을 읽고 이런 사회비판적 글보다 문학평론이 훨씬 더 제게는 와 닿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공중그네 오늘의 일본문학 2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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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부 종합병원의 지하실에는 신경과가 있다. 신경과 의사 이라부 이치로는 몹시 뚱뚱한 중년으로 살갗이 흰 바다표범 같고 스모 선수가 어울리는 용모를 지녔다. 그는 가슴이 크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상당히 육감적인 간호사 마유미와 함께 일한다. 그녀는 환자가 찾아오면 가슴의 계곡을 훤히 드러내놓고 비타민 주사를 놓는데, 의사 이라부는 이 주사 놓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 흥분된다고 하면서 몹시 즐긴다. 주사를 놓는 일 외의 시간은 소리내서 껌을 씹거나 벤치에 드러누워 책이나 뒤적이는 것이 그녀의 일이다.


신경과를 찾는 환자들은 다양하다. 젓가락, 이쑤시개, 연필, 심지어 꽁치대가리만 봐도 식은땀을 흘리고 현기증을 일으키는 선단공포증을 앓는 야쿠자 중간보스, 신일본 서커스에 입단한지 10년, 공중그네 플라이어가 된지 7년으로 최고자리를 지켜왔지만 최근 캐치미스를 하는 공중그네사, 장인이자 자신이 몸담고 있는 병원장의 가발을 벗기고 싶은 욕망 때문에 제멋대로 손이 움직이는 정신과 의사, 프로입단 10년째 베테랑 3루수임에도 송구를 두려워하는 야구선수, 작가로 데뷔한지 8년째로 나름 인정받는 작가이지만 새로운 작품을 쓸 때마다 언젠가 한번 써먹은 듯한 이야기 때문에 더 이상 작품을 쓸 수 없는 여류작가 등 모두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직업은 다양하지만 일종의 직업병을 치료하는 이라부의 처방은 간단하다.

그의 첫 번째 처방은 도저히 간호사라는 직업과는 어울리지 않는 마유미를 시켜 젖가슴의 계곡을 다 보여주면서 비타민 주사를 놓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라부 자신이 직접 환자들의 세계에 간섭하는 것인데 이 소설의 재미는 바로 이부분에 있다. 이라부는 야쿠자의 다른 조직과의 분규를 해결하는데 정체불명의 거물 청부인처럼 변장하고 나가거나, 표범무늬 무대의상을 입고 공중그네 쇼를 하거나, 클로로포름을 이용해 병원장의 가발을 벗기는데 앞장선다. 송구 공포증으로 찾아온 환자에게는 눈빛을 반짝이며 “하자, 하자, 캐치볼 하자.”고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고 “마유미짜~앙, 잠시 휴진이야.”를 외친다. 그러면 벤치 한쪽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잡지를 팔랑팔랑 넘기면서 “올 사람도 없어요.”라고 외치는 간호사. 두 사람은 찰떡궁합처럼 보인다. 여성 작가가 찾아오자 그는 단박에 소설을 써내고는 “해냈어, 나도 작가라구. 이제부터 인세 생활이야.”를 외치는 이라부. 환자를 치료한다는 생각보다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하기에 급급한 의사. 그러나 희한하게도 그를 찾아왔던 환자들은 모두 이 의사를 어처구니 없어하면서도 정상인으로 돌아간다. 도대체 이 엉터리 같은 의사를 통해 작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환자들은 모두 자기 직종에서 10여년을 전문가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현대세계는 점점 더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어간다. 이런 세계에서 나름대로 인정받고 살기위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즐거움이나 욕망을 돌볼 여유가 없다. 이렇게 억압된 욕망들이 병이라는 징후를 나타내기 시작한 후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혹시라도 남들이 알게 될까 두려워하게 된다. 작가는 이라부라는 신경과 의사를 통해 이 세상에는 자신만이 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이 세상을 크게 오염시키지도 않으며 오히려 다른 사람들까지도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려준다. 어쩌면 작가는 이라부라는 신경과 의사를 빌어 이 세상을 웃음 바이러스로 전염시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마음껏 웃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허름한 병원 건물 지하실의 이라부를 찾아가 상담을 받고 온 것 같은 만족감이 들기 때문이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가끔은 이런 유쾌한 소설을 읽어주어 체내에 웃음 바이러스가 번지는 느낌을 받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늘 이 소설을 끼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고, 또 읽지 않으면 금단현상이 나타나는 환자가 될 수도 없으니 주변을 휘돌아 이라부를 닮은 사람을 하나쯤 찾아두면 평생 가슴 뻐근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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