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 서평단 알림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 問 라이브러리 2
도정일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하나의 유령이 전 유럽을 떠돌고 있다.” 이것은 마르크스 <공산당 선언>의 첫 문장이다. 마르크스가 <선언>을 발표하던 160년 전의 자본주의는 아직 미약한 세력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선언 발표 160주년을 맞아 <공산당 선언>을 새로 번역한 강유원은 역자후기에 “2008년 오늘, 공산주의는 전 세계 어디에도 자리 잡지 못한 채 떠돌고 있는 유령이다.”라고 덧붙여 두었다. 그렇다면 공산주의 유령이 어디에도 발붙일 틈이 없는 전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는 이미 160년 훨씬 이전부터 전 지구를 자신의 무대로 삼아왔다. ‘세계화’, 혹은 ‘지구화’라는 말은 이런 자본주의의 거대한 빛이면서 동시에 그림자이다. 오랜 전개의 과정을 거쳐 냉전의 양극체제 붕괴이후 자본주의는  ‘세계화’라는 새로운 질서로 세계를 재편했다. 자본주의의 세계화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의 세계화'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그런데 미국의 상업주의 문화가 세계적으로 확산되기는 했지만 ‘세계화’가 반드시 미국화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세계화는 미국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약화시키면서 동시에 ‘세계의 하나 됨, 모든 문화의 뒤섞임과 혼성, 문화 품목의 탈국경적 유통과 소비, 새로운 21세기적 문명을 향한 변화의 시작, 정보화 사회의 대두, 탈중심적 세계와 신인류의 등장, 근대성 벗어나기’ 등 세계화는 전 지구적 현상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렇게 보면 세계화의 물결에서 예외적인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도정일은 이러한 현상을  루쉰의 소설에서 따와 ‘아Q 현상’이라 이름 붙였다. 온전히 한자이름도 영어이름도 아닌 잡종성, 혼합성의 이름이 의미하듯이 백 퍼센트 온전한 한국인, 백 퍼센트 온전한 미국인은 더 이상 없다. 한국인이든 미국인이든 아침식탁에 나온 자기 그릇은 그 기원이 중국이고, 포크는 이탈리아가 기원이고, 커피는 아랍인들이 세계에 퍼트린 기호식품이고, 설탕은 인도 발명품이다.  문득 오늘 내가 입었던 옷을 살펴보니 태국산 실크 블라우스, 미국 국적의 디자이너 네임 태그가 붙어있긴 하지만 메이드 인 홍콩의 엘리 타하리 반코트를 입었고 우리나라에서 만들었다는 소가죽 구두를 신었지만 아마도 이 가죽은 어딘가에서 수입 해온 것이 분명할 터이다. 이런 현상은 단지 식탁이나 생필품에 그치지 않고 정치 문화 교육 등 우리의 삶의 전 영역을  속속들이 지배하고 있다. 아니 삶 그 자체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자각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다.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은 자각없는 이런 우리의 삶에 대한 '답이 아닌 질문의 절실함을 위하여'  기획된 책이다. 이러한 기획에서 그의 질문은 자신이 인문학자라는 특성, 특히 교육에 몸담고 있어서인지 교육, 문화 등 인문학 범주를 다루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모순을 보지 '않으려는' 적극적인 의지, 많은 경우 무의식적이면서도 적극적인 '무지에의 의지'가 팽배해있다. 또 세계화와 경쟁 시대의 구호가 등장한 이래 학교교육은 대학을  전문적 직업 준비 기관으로 내몰고 기업은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인력의 공급을 대학에 주문한다. 경쟁력과 창의성을 강조하는 공교육은 퍼붓기와 받아먹기의 교육방식으로 창의력과는 전혀 무관한 지적 무기력과 호기심 상실을 유발하고 있다. 이런 시장의 지배와 논리에 소멸의 위기로 내몰린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이야기하면 '돈에 대한 터무니 없는 경멸'로 잘못 알아듣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인문학은 돈을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 돈밖에 모르는 사회를 경멸한다. 인문학이 문제삼는 것은 시장이 아니라 '시장 전체주의'이고 시장논리가 아니라 '시장논리의 유일한 논리화'이다. 인문학이 경고하는 것은 교육영역에서의 시장 원리의 '전면 도입'이고 학교의 전면적 '시장화'와 그로 인한 교육의 비틀림이라는 문제이다.

  

 

자본은 끊임없이 사회적 비판 세력을 혐오하고 비판력을 마비시키기 위해 타락한 방식으로  타락을 부추기며 최대의 소득을 얻는다.  어떤 경제학자는 연소득 6천만원 이하이면 적극적으로 이민을 검토해보라고 권한다. 조금의 차이는 있겠지만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삶에 대한 자본주의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어차피 우리가 뼈 속까지 스며든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어떤 질문을 해야하고 어떤 답을 구해야 하는가? 다양한 영역에서 많은 학자들이 이런 질문을 해왔고 또 나름대로의 답을 위한 대안까지 제시해왔다. 최근에는 '인터넷 경제 대통령 미네르바'라는 유령까지 떠돌고 있다. 그러나 사회는 손놓고 앉아있다. 국가는 국가 자신이 그 병리현상을 촉발한 원인제공자이자 그것을 부추긴 나팔수이고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없는 정책파산자이다.  마르크스가 160년 전에 진단한 자본주의의와 지난 1990년대 중후반 도정일이 진단한 우리의 현실은 2008년 오늘과 다른 것이 없다.  이런 사실들을 책을 읽으며 확인하는 일은 곱배기로 씁쓸한 일이다. 정작 책을 읽어야할 사람들이 읽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야하기 때문이다. 절실한 질문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내재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도정일 역시 비판적 시민사회의 형성, 존재의 대상화 거부 등으로 답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질문의 답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해야하는가가 더욱 큰 문제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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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2-12 0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준만씨가 '조선일보에 글 기고 안하기' 운동을 전개했을 때, 정작 그걸 실천에 옮긴 몇 안되는 지식인 중의 한명이 도정일씨라고 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도정일이라는 이름은 제게 무척 인상적이고 호의적으로 다가옵니다.

반딧불이 2009-02-13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년도 더 전에 도정일의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를 읽고 늘 그의 글에 갈증내고 있었죠. 이 책을 읽고 이런 사회비판적 글보다 문학평론이 훨씬 더 제게는 와 닿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