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 시인선 86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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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우리 육체의 집을 지어도 그 문가에서 서성거리는 것
은 마음의 집이 멀리 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의 집을 찾
아가도 그 문가에서 머뭇거리는 것은 우리가 집이라 부르
는 그것도 제 집을 찾아 멀리 떠났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비울수록 무겁고 다가갈수록 멀어라!








숨길 수 없는 노래 2


아직 내가 서러운 것은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
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봄하늘 아득히 황사가 내려 길도
마을도 어두워지면 먼지처럼 두터운 세월을 뚫고 나는 그
대가 앉았던 자리로 간다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
우지 못하면 서러움이 나의 사랑을 채우리라

서러움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너무 빠르거나 늦은
그대여, 나보다 먼저 그대보다 먼저 우리 사랑은 서러움
이다





샘가에서


어찌 당신을 스치는 일이 돌연이겠습니까
오랜 옛날 당신에게서 떠나온 후
어두운 곳을 헤매던 일이 저만의 추억이겠습니까
지금 당신은 저의 몸에 젖지 않으므로
저는 깨끗합니다 저의 깨끗함이 어찌
자랑이겠습니까 서러움의 깊은 골을 파며
저는 당신 가슴속을 흐르지만 당신은
모른 체하십니까 당신은 제게 흐르는 물을
주시고 당신은 제게 흐르지 않는 중심입니다
저의 흐름이 멎으면 당신의 중심은 흐려지겠지요
어찌 당신을 원망하는 일이 사랑이겠습니까
이제 낱낱이 저에게 스미는 것들을 찾아
저는 어두워질 것입니다 홀로 빛날 당신의
중심을 위해 저는 오래 더렵혀질 것입니다





그 여름의 끝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
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
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
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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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 창비시선 286
문인수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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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말 가죽



법원 앞 횡단보도 도색은 늘
새것처럼 엄연하다. 흑, 백, 흑, 백의 무늬가
얼룩말 가죽, 호피 같다. 법이 실감난다.
이걸 깔고 앉으면 치외법권,
산적 두목 같을까, 내 마음의 바닥도 때로
느닷없는 뿔처럼
험악한 수괴가 되고 싶다. 나는,
이 거대한 늑골 같은 데를 지날 때마다 법에
덜커덕, 덜커덕 걸리는 느낌이 든다.
인간이 참 제풀에 얼룩덜룩한 것 같다.

저 할머니는 이제
법이란 법 다 졸업한 ‘무법자’일까. 신호등
빨간 불빛 따위 아랑곳없이
무인지경의 횡단보도에 들어선다. 까마득한
계단 같은 것,
강 건너듯 골똘하게 6차선 도로를 횡단해간다. 흑, 백, 흑, 백
생사의 숱한 기로를 이제 흐릿하게 천천히 지우나니
정지선 앞에 선 사람들도 몇몇 운전자도 그만
씨익 웃는다. 어려 보이는 한 교통경찰이 냉큼 쫓아가
할머니를 부축해 정성껏 마저 건너간다.
빨래판처럼 덜컹거리는 법감정이, 시커먼 길바닥이
문득 흰 젖 먹은 듯 고요하다
풍금처럼 흐르는 모법(母法)이 있다.



아프리카



비닐봉지 하나가 시꺼멓게 떴다, 비스듬히
기운다, 길쭉하게 처진 저
빈 젖, 허공을 빨다만 아이의 입가엔
쇠파리떼가 소리도 안 나는 울음을 빤다.


 

 

 

이것이 날개다

 

뇌성마비 중중 지체․언어장애인 마흔두 살 라정식 씨가 죽었다
자원봉사자 비장애인 그녀가 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
조문객이라곤 휠체어를 타고 온 망자의 남녀 친구들
여남은 명 뿐이다.
이들의 평균수명은 그 무슨 배려라도 해주는 것인 양
턱없이 짧다.
마침, 같은 처지들끼리 감사의 기도를 끝내고
점심식사중이다.
떠먹여주는 사람 없으니 밥알이며 반찬, 국물이며 건
더기가 온데 흩어지고 쏟아져 아수라장, 난장판이다.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정은 씨가 그녀를 보
고 한껏 반기며 물었다.
#@%, 0%․$&*%ㅒ#@!$#*? (선생님, 저 죽을 때도 와주
실거죠?)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왈칵, 울음보를 터트렸다.
&#․&@\․%, *&#…… (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어
서……) 
 

입관돼 누운 정식씨는 뭐랄까, 오랜 세월 그리 심하게
몸을 비틀고 구기고 흔들어 이제 비로소 빠져 나왔다, 다
왔다, 싶은 모양이다. 이 고요한 얼굴,
일그러뜨리며 발버둥치며 가까스로 지금 막 펼친 안
심, 창공이다.


 

 

 

 

굿모닝

 

 

 

어느 날 저녁 퇴근해오는 아내더러 느닷없이 굿모닝!
그랬다. 아내가 웬 무식? 그랬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후
매일 저녁 굿모닝, 그랬다. 그러고 싶었다. 이제 아침이
고 대낮이고 저녁이고 밤중이고 뭐고 수년째 굿모닝, 그
런다. 한술 더 떠 아내의 생일에도 결혼기념일에도 여행
을 떠나거나 돌아올 때도 예외없이 굿모닝, 그런다. 사랑
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수고했다 보고 싶었다 축하한다
해야 할 때도 고저장단을 맞춰 굿모닝, 그런다, 꽃바구니
라도 안겨주는 것처럼 굿모닝, 그런다. 그런데 이거 너무
가벼운가, 아내가 눈 흘기거나 말거나 굿모닝, 그런다.
그 무슨 화두가 요런 잔재미보다 더 기쁘냐, 깊으냐. 마
음은 통신용 비둘기처럼 잘 날아간다. 나의 애완 개그,
‘굿모닝’도 훈련되고 진화하는 것 같다. 말이 너무 많아
서 복잡하고 민망하고 시끄러운 경우도 종종 있다. 엑기
스, 혹은 통폐합이라는 게 참 편리하고 영양가도 높구나
싶다. 종합비타민 같다. 일체형 가전제품처럼 다기능으
로 다 통한다. 아내도 요즘 내게 굿모닝, 그런다. 나도 웃
으며 웬 무식? 그런다. 지난 시절은 전부 호미자루처럼,
노루꼬리처럼 짤막짤막했다. 바로 지금 눈앞의 당신, 나
는 자주 굿모닝! 그런다.

 


배꼽

 

 외곽지 야산 버려진 집에
한 사내가 들어와 매일 출퇴근 한다.
전에 없던 길 한가닥이 무슨 탯줄처럼
꿈틀꿈틀 길게 뽑혀 나온다.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이 있구나.
그 어떤 희망에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부지기수다.
마당에 나뒹구는 소주병, 그 위를 뒤덮으며 폭우 지나 갔다.
풀의 화염이 더 오래 지나간다.
우거진 풀을 베자 뱀허물이 여럿 나왔으나
사내는 아직 웅크린 한 채의 폐가다.

폐가는 이제 낡은 외투처럼 사내를 품는지.
밤새도록 쌈 싸먹은 뒤꼍 토란잎의 빗소리, 삽짝 정낭
지붕 위 조롱박이 시퍼렇게 시퍼런 똥자루처럼
힘껏 빠져나오는 아침, 젖은 길이 비리다.


 

 

동백 씹는 남자


한 이레 일찍 온 셈이 되어버렸다.
남해 이 섬엔 아직 동백이 활짝 피지 않았다.
완전 헛걸음했다. 꽃샘바람이 차다.

일행 중 좌장께서
이제 겨운 눈뜬, 쬐끄맣게 핀 동백 한 송이를 꺾어
들고 다녔다. 들여다보고, 향기 맡고, 어린
속잠지만한 것에 혀 대보고 하더니
어, 먹었다. 아직아작아작 씹어 꿀꺽, 삼켰다.
나도, 둘러앉은 일행도 낄낄낄 웃었다.
동백독이 올랐는지 그의 안색이, 잠시
붉어졌다  

 

“선생님, 방금 걔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이거든요.”
“알아요.”
“그럼, 신문사에 제보해도 될까요?”
“이왕이면 대서특필케 해주시오.”

한 장면,
즉흥 퍼포먼스가 수평선 멀이 넘어가고 여러 섬들이
주먹만한 활자처럼 시커멓게 몰려와 박히는 뱃길이여.
봄이 오는 사태만큼 사실 큰 사건은 없다.

지금은 쓸쓸한 춘궁, 그래도 봄날은 올 것이며
씹어먹어도 먹어도
굽은 등 떠밀며 또 봄날은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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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2-17 0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모닝, 참 좋으네요.
반딧불이님 리뷰들 따라 읽다 여기까지 왔어요.
첫방문이네요, 반갑습니다. 좋은 글 읽고 찜도 몇개 해갑니다.^^

반딧불이 2009-02-17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모닝..저한테 하시는 아침인사인줄 알았어요. 문단의 어른이신데 초심을 잃지 않고 서늘한 시선을 그대로 간직하고 계시는 것 같아요. '굿모닝'에서는 외람되지만 장난꾸러기 같아 귀엽기까지 했습니다. 혜경님, 방문도 댓글도 감사드려요.
 
견자 문학.판 시 14
박용하 지음 / 열림원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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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최악을 다하겠습니다

 

답변기계들처럼
답변기계들처럼
말끝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악수기계들처럼
악수기계들처럼
말끝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운동기계들처럼
운동기계들처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뭐, 이런
개대가리들이 다 있나!  

 

 

 

 

 





뒤는 절벽이고
앞은 낭떠러지다

돌이킬 수 없는 허공에서
너는 뛰어내린다
너는 그처럼 위험하고
너는 그처럼 아슬아슬하다

돌이킬 수 없는 생처럼
한 번 가버리는 생처럼
뒤돌아봐도 그만인 사람처럼
너는 절대 난간에서 뛰어내린다

아마도 너의 뿌리는
너도 대부분 모를 것이고
너의 착지도 너의 얼굴은 영영 모를 것이다



 

구름이 높아 보이는 까닭



내일 고치러 가겠습니다
하루가 금가고 이틀이 깨져도 오지 않는다
이번 주말에 들러 꼭 수리하겠습니다
그래놓고 꼬옥 오지 않는다
주말만 발바닥에 매달린다
거짓말을 끼니처럼 하는 자들도
그걸 뻔히 알면서도 묵묵히
듣고 있는 자들도 다같이 서러운 자들이다
서로가 가해자이며 서로가 피해자다
태연히 거짓말하는 얼굴에도
두근거리는 한 근 심장이 올라와 있기는 하다
그 광경을 안쓰럽게 쳐다봐야 하는 사람의 비애가
거짓말하는 자의 얼굴에도
드문드문 새털구름처럼 높이 떠 있기는 하다
약속을 못 지키게 돼 미안합니다
전화 한 통만 해도 그는 큰 사람이다
금방 고치러 가겠습니다
곧 전화할게 그래놓고
곧 한다니까 그래놓고
날밤을 까도 오지 않는다
이쯤되면 속이는 기술보다
속아주는 기술이 먼저다
속이는 자의 산술보다
속아주는 자의 아량이 더 커야 한다
곧 전화할게 그래놓고
금방 간다니까 그래놓고
계절이 바뀌었는데도 오지 않는다
골 빈 듯이 하는 빈말 세상에서
이쯤 되면 속아주는 것도 사랑이다
속아주는 것이 속이는 것이다
담에 만나면 술 한잔 합시다
담은 무슨 다음? 그냥 가!



 

성욕


1
수줍음과 난폭함이
늘 양날의 칼처럼 맞대고 있다
평생 동안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며
귀하다고도 천하다고도 할 수 없는
우리들 우글거리는 모든 악의 원천!
지상이고 천상인 그대는
노래 없는 얼굴로 나타나
늘 정체 모를 시간과 함께
삶의 의젓한 얼굴을 급습하는구려

2
말은 통하는데 몸이 안 통한다
비애다
말은 안 통하는데 몸은 통한다
그것도 비애다
말도 안 통하고 몸도 안 통한다
비애도 그런 비애가 없다


 

성교


그대와 처음 눈을 맞췄던 날
반했던 날
눈이 맞았던 날
그게 빛으로 하는 성교란 걸
알게 된 건 아주 훗날의 일이지요
빛이 맞으니 입도 맞추게 되었죠

처음 동해와 눈을 맞췄던 날
야--했던 날
하늘 깊이 푸르렀던 날
그게 무한과의 성교란 걸
알게 된 건 아주 훗날의 일이지요
지금처럼 훗날의 일이지요


 

虛平線


만고의 밤낮을
별은 빛나기만 할 뿐
지배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빛날 뿐이다

지구의 낮과 밤을
해와 달은 비추기만 할 뿐
개입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비출 뿐이다 
 

가끔 비나 진눈깨비가
그 빛을 씻어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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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 - 젊은 세대를 위한 마르크스 입문서
강유원 지음, 정훈이 그림 / 뿌리와이파리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평면위에 찍힌 점의 좌표를 읽고 관계식을 세우듯 이 사회에서의 나의 좌표를 읽을 수는 없을까? 어느 누구도 나의 안부를 묻지 않는 요즈음 나는 나의 안부와 함께 내 좌표가 궁금하다. 잡목더미 위를 미친 듯이 포복해가는 8월의 하늘수박 넝쿨처럼 출발점이 어디였는지도 모를 만큼 생을 살고 나서 이런 궁금증이 생겨도 되는 걸까? 


나는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며 자랐다. 또 나는 죽을 때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며 죽어야하는 줄로만 알고 자랐다. 최루탄과 화염병이 날고 학교는 뻑하면 휴교령이 내렸지만 부모님은 등록금이 아깝다고 한숨조차 짓지 못하셨다. 북한에 산다는 빨갱이라는 괴물이 우리집안에 살았고 짭새들이 수시로 대문을 밀고 들어왔다. 나는 성동구치소, 영등포구치소, 남대문 경찰서 등에 흩어져있는 형제들을 면회하러 다니느라 일주일이 짧았다. 빨갱이, 김일성, 공산당, 마르크스는 모두 동의어로 쓰였고 이 모든 단어들은 집안의 금기였다. 자신의 몸을 화염병 투척하듯 하는 형제들의 이데올로기는 내게는  알레르기 그 자체였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월드컵 때, 빠진 사람 없이 챙겨 입은 붉은 셔츠의 be the reds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과거가 <공산당 선언> 읽기를 미루어둔 직접적인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미루어 둘 수 없는 이유들이 있다. 다윈만큼이나 모든 학문의 영역에서 다루어지고 있고 무엇보다도 최근의 시대상황이 마르크스를 다시 읽게 만든다. 한권도 제대로 읽지 않았으면서 책은 구색을 갖춰 네 권이나 있다. 시간이 갈수록 책은 크고 두꺼워졌다. 밑줄이나 낙서의 흔적으로 보아 여러 번 시도했던 것 같다. 백산서당 판 <공산당 선언>은 영문이 함께 있는데 머리말만 읽은 듯 하다. 박종철 출판사판 <공산주의 선언>은 머리말과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만 읽었다. 이론과 실천에서 강유원의 번역으로 나온 <공산당 선언>은 1998년 공산당 선언 출간 150주년을 기념하여 에릭 홉스봄이 쓴 “1998년 Modern Edition 서문”과 역자후기 “선언 160주년에 부쳐”만을 읽었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읽은 것이 하나도 없다. 큰맘 먹고 새로 시작한다.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은 저자가 대학 철학과에서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펴낸 것이다. 저자는 강의의 목적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강력한 힘인 자본주의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갖는’것이라고 밝혀두었다. 내가 책을 읽는 두 번째 이유와 일치한다. ‘『공산당 선언』은 제목만 보자면 공산주의 혁명을 촉구하는 팸플릿’이지만 이 책이 쓰인 ‘당시의 세계 자본주의의 상황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영향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해명하고 있다’고 한다. 강유원의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저자의 말은 한 치도 어긋남이 없다. 저자는 자신의 책을 읽으면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생각해야하는지 서문에 모두 밝혀둔다. 그는 또 밝혀두었다. ‘이 책은 『공산당 선언』전체에 대한 완전하고도 충실한 해설서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처한 상황을 돌이켜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본질, 즉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그 체제에 자신의 몸과 머리를 완전히 착취당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안내하는 일종의 약도에 불과하다고.’


공산당 선언』전체에 대한 해설서가 아니어서 못내 아쉬웠다. 원래 『공산당 선언』은 머리말과 네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러나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은 <선언>의 첫째부분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에 집중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중세 봉건사회에서 부르주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어떤 발전과정을 거쳐 어떻게 세계를 변화시켰는지 살펴볼 수 있다.  저자가 학생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현실에서 낚아챈 상황들은 집중력의 우물이다. 그 우물은 신선했고 감칠맛이 있기 때문에 그냥 빠져있다보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자본주의를 거리를 두고 새로 볼 수 있게 된다. 닭대가리 모이쪼듯 지독한 근시인 내가 고개를 들고  발 딛고 있는 현실의 좌표를 어렴풋이나마 확인해볼 수 있게 해주었다.  

 

 

나는 ‘책에 대한 책’을 그리 신뢰하지 않았었다. 해설서는 언제나 또 하나의 텍스트로 나를 괴롭혔고 시간만 갉아먹었다. 그러나 강유원의 '책에 대한 책'은 신뢰감으로 나를 붙잡아둔다. 나는 그가 쓴 ‘책에 대한 책’을 두 권('장미의 이름 읽기'와 '공산당 선언') 읽었다. 고전에 대한 해석은 해석자의 시각에 따라 다양한 관점을 지니겠지만 무엇보다도 우선시 되어야할 것은 당대의 상황속에서의 이해일 것이다. 그러나 고전을 읽는 이유는 그것이 태어난 당대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내가 몸담고 있는 이 당대를 이해하기 위함이다.  이런 두가지를 강유원은 골고루 충족시켜주었다.  물론 내게는공산당 선언』이 주는 정치적 의도나 수사학적 특징이나 문학적 아름다움은 또 다른 과제로 남아있다. 이런 만족감으로 공산당 선언』전체에 대한 해설서를 기대하는 사람은 나 뿐일까? 고전으로 애둘러가는 길이라 여겼는데 지름길임을 깨달았을 때의 기쁨이라니. 나는 아무래도 고전으로 가는 자기부상 열차를 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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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2-01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을까말까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는데, 님의 글을 읽고나서 구해 읽어야겠다는 확신이 듭니다.^^

반딧불이 2009-02-01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보다 저자가 더 큰 만족을 드릴 것입니다.
 
여름의 흐름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춘미 옮김 / 예문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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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집이다. 중편소설 2편과 단편 4편이 수록되어 있다. 얼마전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를 읽고 실망했었다. 혹시나 이런 나의 실망이 오독이 아닐지 염려하는 마음으로 그의 등단작이자 최연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이라는 이 작품을 찾아 읽었다.  사서 읽고 또 실망하게 될까봐 가까운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다.  

<여름의 흐름>은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를 형 집행장까지 대동하는 간수의 이야기를 그렸다. 주인공 나는 두 아이를 두었다. 아내는 셋째 아이를 임신중이다. '나'에게는 사형집행일이 확정된 죄수를 집행장까지 인도하는 일을 함께하는 호리베라는 동료가 있다. 이번 집행일에는 나카가와 라는 새로 온 간수와 함께 일해야한다. 나카가와는 사형집행을 하는 일이 처음이다.  

'나'와 호리베에게는 사형집행을 하는 일은 단지 직업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의 일에 대해 아무런 감정의 흔들림이 없다. 그러나 나카가와는 다르다. 첫집행이라는 것도 문제이겠지만 그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극심한 회의를 갖는다.  

살인집행에 대해 세사람은 각기 다른 행동을 보인다. '나'에게는 익숙해져서 아무런 느낌이 없는 직업일 뿐이다. 호리베는'우리는 아무짓도 안 한 사람을 벌하는 게 아니야. 녀석들은 사람을 죽였다고'에서 처럼 그는 죄지은 사람을 자신이 벌한다고 생각하며  직업의식보다는 정의의 구현자처럼 얘기한다. 그러나 나카가와는 첫 집행을 행하지 못하고 끝내 사직을 하고만다.  

소나기가 쏟아지고 번개가 치는 날 사형은 예정대로 집행되고 '나'는 사형집행후  특별휴가를 받아 가족을 데리고 바닷가에 간다. 그리고 그는 바닷가에서 훗날 아이들이 자라서 자신의 직업을 알게되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한다. '나'라는 주인공을 세 아이와 아내의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발목을 비끄러매놓고 작가가 이소설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뭘까? 질척하게 온몸을 휘감는 여름도 한 철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입닥치고 맡은 일이나 하라는 것일까. 끝없는 질문으로 독자를 자신의 소설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작가의 의도였다면 그는 성공했다.  그가 이 작품을 쓴 해는 1966년이다. 그는 13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  <소설가의 각오>를 썼다. 딱 원고료만큼의 생활비만 쓰고 살겠다는 그의 직업에 대한 각오가 첫작품에서부터 일정정도 묻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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