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기
목수정 글, 희완 트호뫼흐 사진 / 레디앙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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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다’라는 문구를 어디선가 눈동냥한 적 있었다. 문장을 곱씹으며 돌이켜보니 나는 부모가 원하는 딸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고, 시어머니와 남편이 원하는 아내가 되려고 부단히 노력하며 살고 있었다. 내가 그들의 욕망만큼 완벽한 딸, 며느리, 아내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삶을 산다는 것(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것)이 나의 행복과 직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했다. 생의 가을에 들어서야 라캉의 저 말에 가슴을 베인 나는 내 방식대로 저 말을 이해해버렸고, 그때부터 나는 삶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행복을 위해 나의 불편을 자초하지 않았고 나의 행복을 위해 그들의 양보를 정당하게 요구하기도 했다.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 한 사람의 행복을 위해 다른 한 사람이 불편해지고 불행해진다면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행복은 누군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었다.

목수정. 당차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말을 찾을 수 없는 여성이다. 자신을 옥죄는 제도와 관습의 끈을 모두 끊어버리고 프랑스로 떠난 그녀는 스스로 사랑을 선택하고 자신의 미래를 꿈꾼다. 프랑스에서의 생활은 문화, 예술, 정치, 사회 등 많은 부분을 우리의 문화와 비교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녀는 문화와 예술이 한 사회를 지탱하는 커다란 버팀목이 된다는 것을 알았고 문화정책이라는 제도적 뒷받침을 위한 대안 모색에 나선다.

 

 

 제도권을 벗어났지만 그 제도권 속에서만 수정 혹은 수립이 가능한 문화정책을 위해 그녀가 선택한 곳은 민주노동당이었다. 인기몰이 공약보다도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진정성에 승부를 거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는 것이 그녀의 선택 이유였다. 문화정책 연구원이라는 그녀의 직업은 그러나 이곳에서 크게 펼쳐볼 사이도 없이 좌절되고 그녀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녀가 신념과 열정으로 뚫기에는 아직도 너무 두꺼운 벽이 이 사회일반에 포진해 있고 야들야들한 그녀의 상상력들을 담아내기에는 정치집단이 너무 경직되어있다.

프랑스로 돌아가는 것이 그녀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아마도 그곳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녀가 선택한 자유에 날개를, 그녀가 선택한 사랑에 달콤한 향기를 재충전하기 바라는 마음 크다. 그런데 왜 이 나라는 삶의 에너지를 충전할 만한 장소가 되지 못하는가.

그녀는 프랑스와 대한민국이라는 지리적 국경을 넘나들고 제도, 관습 등 보이지 않는 문화적 국경도 넘나든다. 사랑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녀는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다. 그녀의 당당한 이런 월경(越境)이 책을 읽고 있는 내게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살아보기는 커녕 아직 가보지도 못한 프랑스라는 나라와의 문화적 차이를 느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좌표를 설정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기술, 자본주의의 세계화 시대에 자신의 삶과 영혼을 세계의 무대에서 옹골차게 펼쳐 보이며  문화의 세계화에 앞장선 이 여성에게 따뜻한 박수와 응원을 보낸다. 발칙한 상상력과 정치적 소신을 가진 제2의 목수정 같은 이 나라의 당찬 여성들 모두에게도.


덧붙여, 글 중에 그녀가 다니던 여학교 화장실의 낙서 이야기가 나온다. “슬픔은 공기 중에 있고, 나는 호흡을 멈출 수가 없다.” 그녀는 ‘누구인지 모르지만 사랑의 슬픔, 혹은 실연의 슬픔에 온몸을 떨면서 이 한 줄의 문장을 적었을 것’이라고 썼다. 이 문장은 누군가의 화장실 낙서이기도 하지만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에 나오는 주인공의 고백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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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소리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2
미시마 유키오 지음, 이진명 옮김 / 책세상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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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읽기 위해 그의 전작들을 먼저 읽고 있는 중이다. 절판되어 없는 <가면의 고백>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가면의 고백>에서 미시마 유키오의 언어의 맛을 워낙 세게 맛본 탓인지 <파도소리>는 간이 덜된 음식을 먹는듯 했다. 인간의 삶에서 욕망이 제거되면 이런 맛이 나는걸까 생각해보게 된다.

둘레가 4백미터도 되지 않는 조그만 우타섬에서 신지와 하쓰에의 사랑을 그린 <파도소리>는 바닷가 풍경을 그린 한편의 수채화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스 소설 <다프니스와 크로에>를 읽고 그리스 시대의 이상을 일본에도 이식시키고 싶은 의도로 이 소설은 씌여졌다고 미시마는 밝히고 있다.

'이상'이라는 것이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갈구하는 것이라면 그리스 시대에 미시마가 살고 있고, 이 소설이 쓰여진 1954년은 어떤 의미에서 같은 상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파도소리>에서 그려내는 주인공은 그리스 조각상 같은 아름다운 몸을 가졌지만 지적 호기심이나 지식같은 것은 아예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의 성적 욕망을 절제할 줄 안다. 혼전 성교가 금지되어있다는 도덕이 그들을 그 욕망으로부터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육체적 아름다움과 선한 마음을 가지고 누군가 만들어놓은 도덕적  질서에 잘 순응하는 인간상을 <파도소리>에 그려낸 미시마 유키오.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언어의 진창을 뒤굴었던 <가면의 고백>에서의 미시마 유키오.  할복자살하는 자신의 운명을 그려낸 <우국>의 미시마 유키오. 어떤 모습이 가장 그의 실제의 모습에 가까운지 모르겠지만 이 낱낱의 모습이 또한 모두 그의 모습인것 같다.

이 책은 '책세상'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문고판이다. 오늘 문득 어딘가 낯익은 느낌이 들어 찾아보니 <파도소리>외에도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개>,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귀향>이 있다. 책꽂이 앞에 서서 민음사판 세계문학전집과 얼핏 비교해보니 나는 왠지 이 '책세상'의 문고판이 훨씬 마음에 든다. 표지의 색감도 민음사 판보다 깊이있고 표지에 작가의 사진을 실어 놓아 작가와 작품을 연결짓는데도 도움을 준다. 특히 책의 뒷부분에는 번역자와 작가와의 가상 인터뷰를 실어놓았는데 작가의 사상을 엿볼 수 있어 여간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다. 민음사판에서 자주 보이던 오탈자도 이 책에서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민음사판에 비해 훨씬 문학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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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시대
에릭 홉스봄 지음, 이원기 옮김, 김동택 해제 / 민음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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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릭 홉스봄은 올해 91세, 1917년 생이다. 지난여름 용정에 가서 안 사실이지만 문익환 목사와 시인 윤동주가 모두 1917년생이었다고 한다. 정치적 환경 탓인지 우리나라에는 이 나이의 세계적인 학자가 없는 듯하다. 영국계 유대인인 저자는 한 세기를 살면서 『극단의 시대』,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미완의 시대』등 시대 시리즈를 썼다. 그러나 이 책의 원제목이 『Globalisation, Democracy and Terrorism』인데 이것을 『폭력의 시대』로 번역한 것을 보면 편집자의 의도가 제법 개입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다른 ‘시대’ 시리즈 책들의 원제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극단의 시대』에서 20세기를 분석했던 홉스 봄은 『폭력의 시대』에서 21세기를 분석한다. 그는 긴 역사의 터널에서 공시적으로 21세기를 선택하고 다양한 정치적 주제들로 탐구한다. 전쟁과 평화에 대한 문제, 과거 영국과 현재의 미국으로 대표되는 제국의 성격과 미래, 민족주의의 성격과 변화, 자유민주주의의 앞날 그리고 정치적 폭력과 테러의 문제 등이 그것이다. 가속화 되고 있는 세계화에 힘입어 홉스 봄이 선택한 이러한 주제들은 힘을 얻는다. 결국 이 책의 원 제목인 세계화, 민주주의 그리고 테러리즘은 홉스 봄이 21세기를 요약하는 말이다.

 

 

 20세기는 두 번의 세계대전 그리고 40년에 걸친 미․소간의 냉전시대로 요약될 수 있다.  이시기의 전쟁은 주로 국가들 간에 벌어졌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붕괴이후 전쟁의 성격은 변해가고 있다. 국가는 더 이상 전쟁의 주체가 아니며 내전이 증가하고,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경계가 불분명해졌다. 전쟁의 피해자 역시 군인에만 그치지 않고 무고한 민간인으로 확산되고 있다. 또 반사회적으로 간주되는 국내외적 활동 역시 전쟁으로 몰아붙이는 상황이어서 전쟁의 성격은 더욱 복잡해졌다. 실체가 분명치 않은 ‘마피아와의 전쟁’, ‘테러와의 전쟁’, ‘범죄와의 전쟁’ 등이 그 예다. 

 

 

 19세기의 영국과 21세기의 미국은 세계적인 제국이다. 두 나라는 세계적인 정책뿐만 아니라 군사력, ‘세계의 공장’이라 할 만큼의 자산, 영어의 세계화 등 제국으로서의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나 영토의 규모, 제국으로서의 사명감과 국가권위의 유무 등 차이점 또한 적지 않다. 미국은 팍스 브리타니카를 모델로 팍스 아메리카나를 꿈꾼다. 그러나 영국이 자국의 한계와 시대의 변화를 인정한 것과는 달리 미국은 정치 군사적 힘만 믿고 세계의 패권을 유지하려고 억지를 쓰고 있다.

 

 

 민족과 민족주의의 개념 역시 변화하고 있다. 냉전이 종식된 후 세계는 자유민주주의의 독재시대가 되었고 경제, 기술, 문화, 언어 등 다양한 영역의 세계화가 이루어졌다. 이런 영역에서는 지리적 개념의 국경이 점점 사라지고 있고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신분증은 출생증명서나 주민등록증이 아니라 패스포트가 되었다.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는 세계화는 자본과 무역의 이동은 성공적이었던 반면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의 확립은 실패로 드러났다. 소련의 붕괴와 세계화 이후에도 외국인 혐오증은 민족과 민족주의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홉스 봄이 축구를 세계화와 국가적 정체성 그리고 외국인 혐오증이 가장 적나라하게 표출되는 것으로 들고 있지만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편견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기술과 군사력에서 가장 앞서있는 미국은 민주주의를 강압적으로 전 세계에 전파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아무리 바람직한 제도라고 해도 세계 전체에 해당하는 문제나 초국가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효과적인 수단은 아니다. 오늘날 가장 명백한 전쟁의 위험은 통제할 수 없는 비이성적인 미국 정부의 세계적 야망에서 비롯된다. 국제사회의 가장 시급한 정치적 과제는 미국이 이런 과대망상증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정책으로 돌아가도록 돕는 일이다.   

 

 

 홉스 봄의 책을 읽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계지도의 퍼즐 맞추기처럼 시간과 에너지를 요구하는 작업이다. 미국의 폭력 뒤에 감추어져 있는 경제논리가 빠져있는 이 책을 읽는 것은 마치 섹스 씬이 빠져있는 허리우드 멜로 영화를 보는 것처럼 밍밍하다.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재미있게 느껴지던 것은 책을 통한 나의 변화다. 경제관련 책은 나를 다분히 감정적으로 만드는 반면 정치서적은 나를 상당히 이성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물론 역사학자로서의 객관적 서술이 단단히 한 몫을 했을 터이지만 왠지 감당할 수 없는 적과 부딪쳤을 때 순간적으로 긴장하는 것과도 같은 심정이 되는 것 같다. 내게는 만만치 않은 책이었다. 그래서인지 표지에 실린 홉스 봄의 사진이 책을 덮고 나자 눈에 들어온다. 조금은 높은 곳에서 얕잡아 보는 듯한 시선과 오른쪽으로 살짝 비틀린 입술이 나를 비웃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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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
김훈 지음 / 푸른숲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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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시간 가까이 배를 타고 열시간 가까이 버스를 타고 여행에서 돌아온 날. 집에 도착해서 메일을 확인하니 알라딘에서 온 메일이 있었다. 이주의 마이리뷰에 당선되어 5만원이 적립되었다는 것이다. 알라딘에 로그인을 하니 하루 평균 10여명 남짓 드나들던 사람들이 갑자기 5,6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런데 그 리뷰가 뭔가 찾아보니 내가 별로 좋아하지도, 또 별로 쓰고싶어하지도 않았던 김훈의 책 <밥벌이의 지겨움>에 관한 것이다.  즐겁지도 않고 그렇다고 딱히 기분이 나쁘다고 할 수도 없는  뭔지 모르지만 묘한 기분이 되었다. 아마도 자기 아이를 잘 부탁한다고 학부모가 몰래 들이민 촌지를 뒤늦게 확인했을 때의 선생님의 기분이 이럴까 싶었다.
 
알라딘 서점에는 독자들을 유지하기 위한 여러가지 기능들이 있는 것 같다. 책을 살 때 책값으로 대치 할 수 있는 포인트를 적립해준다거나, 다른 사람의 리뷰에 thanks to를 눌러주면 리뷰를 쓴사람과 책을 사는 사람에게 약간의 적립금을 주는 것 등 말이다. 이제 겨우 50여편 정도 올라 있는 허접한 나의 리뷰들도 심심찮게 누군가가 thanks to를 눌러 주고 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고마운 분들(경제적 의미는 아닌 다른 의미로)에게 감사드린다. '즐겨찾는 서재' 에 등록해둔 서재의 글들을 읽기 위해 매일 아침 로그인을 하게 되는데 껌값도 안되는 돈이지만 어떤 분이 이걸 눌러주고 간 날은 오색풍선을 든것처럼 마음이 즐겁고 혹시나 오탈자나 잘못된 정보가 있지나 않았을까 싶어 그 리뷰를 다시 읽어보게 된다.
 
알라딘에서 마이리뷰를 뽑는 기준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 thanks to 를 눌러 책 판매에 도움을 준 것이 기준이라면 명백하게 이 책은 아니다. 이 책의 리뷰에 추천은 고사하고 thanks to를 누른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없으니 말이다. 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선택이 되었지만 작은 기쁨 하나는 남는다. 그것은 알라딘 관계자들이 아직까지 그렇게 상업적이지 않다는 것을 증거해 주었기 때문이다.

 집에 있는 김훈의 책들을 다 찾아 보았더니 이제 안 읽은 책은 <자전거 여행> 한권만 남는다. 읽지도 않으면서 책은 왜이리 사다 쟁여놓았는지...... 하여간 빚 갚는 심정으로 <개-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을 읽었다. 배앓이로 뒤틀리는 창자를 기침이 다시 곧추 세워놓는 바이러스 하치장 같은 몸둥이를 방바닥에 뒹굴리면서 그나마 멀쩡한 눈이 있어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읽은 김훈의 모든 소설에 등장하는 '냄새'에 대한 천착 때문에 나는 김훈 소설에서 냄새의 알레르기 반응이 생기는 것 같다. 그런데 집어든 책이 후각이 가장 발달한 개에 대한 이야기니 극약처방이 아닐 수 없었다. 먼 여행에서 돌아와 며칠째 방바닥과 소파위를 번갈아 뒹굴고 있는 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낱낱이 냄새맡던 우리집 강아지를 생각하며, 또 스토커처럼 내 곁을 맴도는 이 작은 강아지의 발바닥을 끌어다 냄새를 맡으며 <개>를 읽는 시간은 생각외로 나쁘지 않았다. 최소한 김훈의 다른 소설처럼 냄새가 나를 괴롭히지는 않았으니까.
 
언젠가 딸아이가 물감을 묻혀 찍어낸 강아지 발바닥 무늬를 보고나서야 나는 강아지의 발바닥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앙증맞은 강아지 발바닥에서는 누룽지 사탕 냄새가 난다. 피곤한 날 소파에 뒹굴 때 묘하게도 이 강아지의 발바닥 냄새가 내겐 위안이 된다. 만져보면 폭신폭신한 것이 제법 탄력적이기도 하다. 김훈의 소설에 등장하는 개는 우리집 강아지보다 훨씬 큰 진돗개 숫놈 '보리'다. 그의 소설 <화장>에 잠깐 등장했던 개 이름도 '보리'였던 것 같다. '보리'는 댐이 건설되는 어느 산간마을의 노인 부부의 집에서 태어났다. 댐에 점점 물이 차올라 살던 집과 논밭을 버리고 떠날 때 보리는 노인 부부의 둘째 아들이 사는 서해안의 바닷가 마을로 가게된다. 주인부부와 초등학교 5학년생인 영희, 두살박이 영수와의 삶을 살아가는 보리의 이야기가 이 책의 줄거리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이라는 부제에 붙어있는 '가난한'에 주목했었다. 개에게 있어서의 가난함이란 무엇일까가 내 궁금증이었는데 책을 다 읽을때까지도 이에 대한 해답은 주어지지 않았다. 책을 덮고 나니 이것은 개를 위한 수식어가 아니라 김훈 자신을 수식하는 말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자전거를 친구삼아 곳곳을 떠돌 때 주인없는 마을에서 울부짖는 개들을 만났을 것이다. 그는 발딛고 선 어느 곳에서나 만나는 모든 사물들과 혼자 노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다. 버림받은 개들은 굶주리고 상처입었을 것이고 그런 개들과 그는 또 한 몸이 되었을 터이다. 그리하여 그는 기꺼이 개가 되었고 이 소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품종 좋은 진돗개다. 어찌나 영특하고 부지런하고 사람의 마을을 잘 읽어내는지 웬만한 사람보다 낫다. 보리가 바라보는 인간은 아름답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아름답다는 것을 모르는 것같아 보리는 안타깝다. 내가 보는 보리는 어찌나 학구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이고 관념적인지 무섭기까지 하다.  

나와 동거하는 인간들은 나보다 짐승들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돌이켜보니 개구리, 열대어, 꿩, 닭, 개 등 살다간 동물의 종이 다양하기도하다. 말 그대로 꿩먹고 알먹던 꿩이야기, 어린 아들이 학교 앞 육교 위에서 건강한 놈이라고 골라잡아와 장닭이 되도록 키웠더니 새벽마다 동튼다고 고래고래 울어제쳐 15층 아파트 사람들의 새벽을 흔들다 쫓겨난 우리집 '계두',  집안에다 오줌싼다고 신문지를 말아 몽둥이 찜질을 했더니 내가 외출에서 돌아오는 서너시까지 오줌을 참던 풍산개 '백구', 오줌은 참아줘도 내가 채팅하는 꼴을 못보겠던지 실리콘으로 발라놓은 전화모뎀선을 잘근잘근 씹어놓던 놈.  한번만 더 개를 집에 데려오면 내가 집을 나가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나는 성질 드러운 여자가 되고 말았다. 그후에 우리집에 와서 아직까지 살고 있으면서 날마다 내게 침을 발라놓는(?) '해피'. 서울 한 복판에 살면서 겪은 짐승과의 좌충우돌 이야기는 의외로 많다. 더 궁금하신 분들은 개인적으로 문의하시압!
 
대추나무 가시가 박힌 듯 움직일 때마다 왼쪽 이마를 쑤셔오는 통증 가운데서도 함께했던 동물들과의 시간을 추억하는 동안은 각성제를 먹은 것처럼 잠시 맑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머리의 통증이 가시면 가슴 한구석이 아파오고 무언가 따듯한 것이 눈시울을 적셔왔다. 서울에 도착하기 전날 고흐가 즐겨마셨다는 압생트 한잔을 마시고 선실에 널부러졌을 때 내 몸을 낱낱이 핥고 지나가던 파도의 혓바닥처럼 김훈의 <개>를 읽으며 내 기억의 한 모퉁이에 숨어있던 말 못하는 짐승들의 눈빛과 몸짓들이 나를 핥고 지나갔다. 김훈에게 빚갚으려고 읽었는데 또 빚을 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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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고백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올김 / 동방미디어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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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도 해마다 여름이면 게이 퍼레이드가 있다. 올해도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때 남장여자 혹은 여장남자의 게이 퍼레이드를 보았다. 이들 중 일부는 사진 찍히기를 거부하는 표시로 손목에 빨간 리본을 달고 있었다.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커밍아웃을 했지만 널리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 이도 있을 것이고, 여러 가지 이유로 아직 커밍아웃을 하지 못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퍼레이드에 적극적인 참여를 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행사들을 통해 성적 소수자에 대해 일반인들이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들의 성적취향은 그들의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생래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남자로 태어날 것인가 여자로 태어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동성애자가 될 것인가 이성애자가 될 것인가에 대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얘기다. 성장하면서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달아야했고 또 받아들여야했다. 그들에게 그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커밍아웃까지 한 이들의 삶은 훨씬 당당하고 아름답고 풍요로워 보이는 반면, 그렇지 못한 많은 이들이 이중의 고통스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을 더러 보게된다.

『가면의 고백』은 이런 동성애자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나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유약한 몸을 지녔다. 나는 마술계의 왕좌를 차지했던 여자 서양마술사, 클레오파트라 등을 동경하면서 여장(女裝)에 빠지며 미칠 듯한 기쁨을 느낀다. 열세 살이 된 나는 어느 날, 아버지의 서재에서 구이도 레니의 <성 세바스찬>을 보고 최초의 수음을 한다. 이차성징이 나타나는 중학교시절 그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오우미라는 학생에게서 강렬한 사랑을 경험한다. 오우미는 나와는 비교가 안 되게 건강하고 아름다우며 조숙하기까지 하다. 나는 이런 오우미의 겨드랑이에 난 검은 숲과도 같은 체모를 보며 강한 질투심과 아픈 사랑을 동시에 느낀다. 이후 나는 동정을 떼기 위해 사창가를 찾아도 보고 이성과의 사랑에 빠지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러나 나는 이성에게서는 아무런 감정도 성적 충동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을 확인해야한다. 주인공 나는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이성을 사랑하고 싶은 정신과 동성을 통해서만 성적 충동을 느낄 수 있는 육체와의 갈등 속에서 주인공은  지성이 결여된 야만스러워 보이는 수컷 같은 남자에게서만 성적 충동을 느끼는 자신을 확인한다.

미시마 유키오는  <저자의 말>에 “이 소설은 나의 섹슈얼리스이며, 가능한 한 정확하게 쓰려고 애쓴 성적(性的)인 자서전이다. 앞부분은 자기 분석에 의한 성 도착과 사디즘의 연구에 바쳐졌고, 뒷부분은 세상에 다시없이 기묘한 아르망스적 연애의 고백과 그 길고도 치열한 회한의 서술로 채워졌다.”라고 적어두었다. 미시마 유키오의 자전적 소설이 되는 셈인데 어디에서도 그가 동성애자라는 얘기는 보지 못했다. 소설 속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그는  결혼도 했고 아들도 둔 탓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는 철저하게 가면을 쓰고 살아간 셈이다. 그 가면은 너무나 철저해서 그의 얼굴이 되어버렸다. 그는 그렇게 동경해마지 않던 죽음을 스스로 택해 흰 장갑을 끼고 오른쪽 옆구리에 칼을 찔러넣어 왼쪽까지 좌악 그어 할복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 할복은 실패했고 그의 동료는 두번이나 그의 머리를 베어야 했다.  그가 남긴 『가면의 고백』, 어디까지가 가면이고 어디까지가 고백이란 말인가?

 

책을 읽는 내내 롤랑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이 오버랩 되었다. 바르트는 “사랑에 대해 쓰고자 하는 것은 언어의 진창과 대결하고자 함”이라고 했다. 미시마 유키오의 동성애에 대한 글은 언어의 진창을 뒹굴면서도 참담하도록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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