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로 참말하기 시작시인선 101
유안진 지음 / 천년의시작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시력 40년. 삶의 나이 마흔이 아니라 시의 나이 마흔이다. 끔찍하고 아득하다. 여자 나이 마흔이면 팽팽하던 근육의 긴장이 풀리고 조금은 느슨해진 곡선이 안면 근육을 편안하게 하는 나이다. 시의 나이 마흔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지거든 유안진의 『거짓말로 참말하기』를 펴 볼 일이다.

편두통이 생기더니
한 눈만 쌍꺼풀지고 시력도 달라져 짝눈이 되었다
이명도 가려움도 한 귀에만 생기고
음식도 한쪽 어금니로만 씹어서 입꼬리도 쳐졌다
오른쪽 팔다리가 더 길어서 왼쪽 신이 더 빨리 닳는다
모로 누워야 잠이 잘 오고 그쪽 어깨와 팔이 자주 저리다
옆가리마만 타서 그런지 목고개와 몸이 기울어졌다고 한다

                                                  -그림자도 반쪽이다- 부분


거울 속 앞머리 한줌이 허옇다
머리카락이라도 흰색이라서 다행이라 했는데
머리의 검정이 몸으로 흘러내리는 게 아닌가
주근깨와 기미가 늘어나고
마음까지 검정에 빠지면서
밤이 더 편해져 늘 밤이 더 좋다

                               -검정에 빠지다- 부분

시의 나이 마흔이니 몸의 나이는 그보다 강산이 두어 번은 더 변했을 터. 몸의 나이를 짐작하는 일이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시의 구절들은 이런 짐작을 확인하게 한다. 그러나 몸의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또 시의 나이를 마흔이나 먹었어도 시인은 아직 ‘할 말이 남아있다고’ 한다.

섣달, 모과나무에 모과 두 알이 달려있다

정월, 플라터너스 잎새 몇 장을 붙잡고 안 놓는다

 

2월, 응달진 산자락에 잔설이 희끗희끗하다

중략

10월, 영어 일어 이태리어 간판들 틈에 한글 간판 하나가 한사코 끼어들었다

동짓달, 일주일이 멀다하고 손톱 발톱은 키가 큰다

                                    -할말이 남아 있다고- 부분

일년 열두 달 각각의 사물을 불러들이고 계절의 테두리에 가까스로 남아있는 그 안쓰러움을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다고’하는 그의 시는 시의 나이 마흔, 시집을 열권이상 출간했음에도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다’는 시인의 말에 다름 아니다. 시인에게 할 말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낮잠 자다 손가락을 베인 꿈을 꾸는 모습을 그린 <파란 피>에는 아직 소녀같은 천진함과 귀여움도 남아 있다. 손가락에 흐르는 파란 피를 보고 "길상(吉祥)의 청천(靑天) 벽해(碧海)의 그 파란색이다/새 하늘과 바다가 비로소 열렸다/태허의 신창세기를 쓰게 되었다/지금의 여기를 벗어나는 신출애굽기를 쓰게 되었다/기어코 계통발생과 개체발생에서 탈출했다"는 그녀는 꿈속에서도 무언가를 계속해서 쓴다. 신이 나서 쓰면서 쓰고 있는 자신을 즐기고 있다. 그리고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파란 핏물은/ㄱ형?ㄴ형?또는 ㄱㄴ형? "하고 혈액형을 한글 자음으로 재명명하기까지에 이른다. 그러나 그것은 꿈. 이쯤에서 깨어나야 마땅하다. "잠 밖에서 혀차는 소리/'낮잠에 잠꼬대까지--'". 소리같지 않은 소리, 혀차는 소리에 깨어나는 꿈은 그래서 꿈으로 유효하다. 혼자 파안대소하고도 씁쓸하지 않았다.  

시인은 나이를 먹어 몸이 부실(?)하지만 시인의 시는 나이를 먹어 오히려 모든 사물과 소통하면서 팽팽해지고 있다.       


토막 난 낙지다리가 접시에 속필로 쓴다
숨가쁜 호소 같다

장어가 진창에다 온몸으로 휘갈겨 쓴다
성난 구호 같다

뒤쫓는 전갈에게 도마뱀꼬리가 얼른 흘려 쓴다
다급한 쪽지글 같다

지렁이도 배밀이로 한자 한자씩 써 나간다
비장한 유서 같다

민달팽이도 목숨 걸고 조심조심 새겨 쓴다
공들이는 상소 같다

쓴다는 것은
저토록 무모한 육필이란 말이지
몸부림쳐 혼신을 다 바치는 거란 말이지.

                   -겁난다- 전문




그는 모든 사물의 몸짓에서 글을 쓰는 행위를 보게 된다.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은 오롯하게 시를 쓰는 일뿐이다. 시의 나이 마흔에 이르러 오로지 시만이 그의 전부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참말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시인은 ‘거짓말로 참말하기’까지 나아간다.




지금은 없어진 공산주의 시대였다.
루마니아의 초등학교 교실에서 선생님과 아이들의 공부였단다
여러분의 아버지는 누구죠? 
   니콜라이 차우세스쿠요
여러분의 어머니는 누구죠? 
   엘레나 차우세스쿠요
잘 대답했어요. 여러분은 나중에 무엇이 되고 싶어요? 
   고아요
(한 신문에 실린 이 풍자로 관련자들 모두 체포되었다고 한다)

소련의 아이들과 어른들의 대화였단다
생일 선물로 무엇을 받고 싶니?
한 아이가 얼른 대답했다 
   투르먼 대통령한테 빰 맞고 싶어요
깜짝 놀란 어른이 까닭을 묻자, 그 어린이는 
   내가 미국 아이이거나 투르먼이 우리 대통령일 테니까요
(이 풍자만화의 관련자들은 전원 체포되었다고 한다)

어느 위성국가에서 모스코바로 가는 기내 방송이었단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 비행기는 곧 모스코바 공항에 도착합니다
담뱃불을 끄고 의자를 바로 세우고 안전벨트를 매어주세요
그리고 손목시계를 10년 뒤로 돌려주세요
(이 풍자만화로도 관련자들은 체포되지 않았다. 체포할수록 풍자의 인기가 급상승할뿐더러, 포화상태의 수용소 비용을 줄이려고 기 수감자들도 다 석방했는데, 이는 후로시쵸프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놀랍고 기발한 발상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오는가?

                       -거짓말로 참말하기- 전문




처음 몇 편을 읽으면서 긴장 없는 편안함 때문에 자칫 수다로 전락하나 하던 생각은 기우였다. 읽어갈수록 편안함 속에 묻혀있는 시의 나이 마흔의 눈 밝음과 재치가 공들여 읽는 시간을 보상해주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9-02-01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유안진씨의 '축복을 웃도는 것' 이라는 에세이집을 인상깊게 읽은 기억이 새록한데 님의 글을 읽으니, 이 분의 시집도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군요^^

반딧불이 2009-02-01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글이 남을 부추기는 성격은 전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은근 걱정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