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데이비드 베일즈.테드 올랜드 지음, 임경아 옮김 / 루비박스 / 200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펼치십시오.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에는 물음표가 아니라 느낌표가 붙어있다. 저자들은 예술가들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들을 위로하고자 한다. 저자들은 예술가들이 그들의 지난한 창작과정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면서 만나는 많은 질문을 스스로 만들고 그 질문에 대해 답한다. 그들은 진정으로 묻고 진실하게 답했다. 과장되거나 미화된 구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저자들이 예술가이기 때문에 더 진정성이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당신이 예술가라면, 아니 예술가라는 표현이 부담스럽다면 바꾸어보자. 당신이 만약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고 어느날 예고도 없이 절망이 찾아오거든 이 책을 펼쳐라.  당신은 저자들의 질문과 그에 대한 답으로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술과 두려움은 서로를 살게하면서 동시에 서로를 죽이려 한다. 어쩌면 저자들이 하고싶었던 이야기는 예술과 두려움의 조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가 또 얼마나 많은가.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와 헨리 제임스의 단편 「융단속의 무늬」가 떠올랐다. 둘 다 예술가와 비평가의 관계를 다룬 것이다. 전자는 비평가의 무성의한 한마디에 죽음으로까지 자신을 몰고 가는 예술가의 이야기를, 후자는 소설가가 작품 속에 마련해둔 ‘융단 속의 무늬’를 비평가들이 밝혀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쥐스킨트와 제임스는 왜 이런 소설을 썼을까?  한번쯤 생각해보아야하는 문제다.

  
 




밑줄긋기


이 시대에 예술을 한다는 것은 불확실성에 맞선다는 의미이다.

예술가가 되는 것은 자신을 감수하는 법을 배워 작품에 개성을 싣는 것이며, 자신의 목소리를 따름으로써 자신만의 작품을 창조할 수 있다. 분명히 이러한 특성들은 학습이 가능하다. 결국 재능이란 것도 불굴의 인내나 노력과 다른 이름이 아닌 것이다.

결점 없는 존재는 예술을 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반어적으로 말해, 이상적인 예술가는 이론상 절대로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예술창조에 있어 중요한 것은 난관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방식으로 작업해 나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예술창조는 하고자하는 것과 해낸 것 간의 피할 수 없는 간극을 그대로 보여주어 심기를 불편케 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창작자 자신을 제외한 모든 감상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결과물, 즉 완성된 예술작품일 뿐이다. 반면, 과정, 다시 말해 창조의 경험은 오직 창작자 자신에게만 중요하다.

예술가들은 작업을 하지 않는 고통이 작업의 고통을 넘어서야만 작업에 임하는 법이다.

예술작업을 해나가는 사람들은 지속하는 법을 배운 자들, 좀더 정확히 말해 중지하지 않는 법을 배운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작품이 실패할 것이라는 두려움은 예술작업 주기에서 반복되는, 정상적이며 건강한 일반현상이다.

포기는 중단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중단은 늘 하는 것이지만 포기는 그것으로서 마지막이다. 포기한다는 것은 다시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작하고 또 시작해야 하는 것이 예술인 것을.

완성된 작품은 상상과 실천사이의 조화를 검증하는 수단이 된다

머리 속의 시는 언제나 완벽하다. 문제는 그것을 글로 옮기고자 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수많은 실패작을 만들어 가면서 좋지 않은 부분, 자신의 개성이 살아나지 않는 부분들을 제거해 나감으로써 점차 좋은 작품을 창조해내게 된다.

자신에게 있는 능력은 자신이 최고의 작품을 만드는 데 충분하다. 자신이 가진 재능이 얼마나 되는지 걱정하는 것보다 더 쓸모없고 흔한 에너지 소모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예술은 그 끝을 알지 못하면서 문장을 시작하는 것과 같다

예술창작에서 진정 특별한 순간은 개념이 현실로 전환되는 순가, 즉 그 강을 건너는 순간이다.

만일 어느 때 어떤 한 작품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바로 그것이 그 순간에 창작해야할 작품이다. 
 

은행가들이 모이면 예술을 논하고, 예술가들이 모이면 돈을 논한다.

예술에 관한 책, 심지어 예술가에 관한 책들조차 그 특성상 실제 작품창작에 관해서는 별로 말해주지 않는다.

평론가에게 예술은 그저 하나의 명사에 불과하다. 반면 예술가에게 예술이란 하나의 동사이다.  

 

 작품을 창작하는 예술가에게 최고의 글은 분석적이지도, 연대기적이지도 않다. 대신 자서전적이어야 한다. 결국 예술가는 거기에 존재했던 것이므로. 
 

대작이란 창조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창조하는 힘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최고의 예술관련 글은 단지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그것을 창조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술과 공예의 차이는 어떤 도구를 들고 있는가가 아니라, 어떤 정신적 지침을 따르는가에 있다. 공예가에게는 공예기술 그 자체가 존재이유이지만, 예술가에게 손재주는 자신의 비전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사물을 보는 것은 단순한 자신의 경험과 변화무쌍한 모든 경험 모두에 대한 호기심을 강화시키는 행위로, 이 모든 것은 예술창조에 유용한 접근방식을 제시한다. 즉 보고 있는 사물에 주목하기. 다른 말로 대상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그 말에 귀 기울이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09-03-31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오래전에 사 놓고 아직도 안 읽었네요.
소개하신 밑의 책 두 권도 한번 봐야할 것 같습니다.
추천해 드리고 가겠습니다.^^

반딧불이 2009-03-31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문 고맙습니다. 스텔라님. 두권 모두 제가 읽은 판본은 아니지만 내용은 같은거라 링크해두었어요. 저도 사놓고 오래 묵혀두었드랬어요. 최근 어느 평론가에게 한방 먹고 중간점검 차원에서 읽었는데 도움이 되었어요.
 
카프카, 권력과 싸우다 - Kafka Franz
박홍규 지음 / 미토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가장 싫어하는 장르 중의 하나가 자서전이다. 이 부류를 싫어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10여 년 전에 읽은 스콧 니어링 자서전이 가장 최근 기억으로 남아있다. 나는 평전도 자서전과 유사한 느낌을 가지고 싫어했다. 누군가에 대한 한 권의 책을 써야한다면 그 대상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이 담보되어야 가능한 것이 평전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사랑과 동족인 애정은 언제든 제 눈에 씌울 콩깍지를 예비해두지 않는가?

이 책의 저자 역시 ‘들어가는 말’에서 “변신을 꿈꾸는 내 친구 카프카”라고 카프카에 대한 살가운 애정표현을 하고 있다. 저자는 자신이 카프카를 사랑하는 몇 가지 이유를 들고 자신이 카프카를 친구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있다. 카프카에 대한 사랑을 500쪽이 넘는 분량의 한 권 책으로 묶어낼 정도라면 사랑의 증거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러니 용서 하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으랴. 오히려 마음껏 사랑하시라고 눈감아 주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나는 눈감아도 저자는 눈 크게 뜨고 올곧게 사랑하기를 바라고 싶다. 왜냐하면 저자는 지금까지 우리에 게 알려진 모습과는 다른 카프카의 모습을 보여주려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카프카에게 붙여진 ‘불안과 고독’이라는 규정이 영 못마땅하다. 그는 카프카에게 ‘권력과의 투쟁’이라는 새로운 이름표를 붙여주고자 한다. 그는 이 새로운 이름표를 위해 카프카의 대부분의 작품과 카프카에 대한 많은 연구서적을 동원했다. 쉽게 접할 수 있는 영화와 연극 등도 언급해두었다. 카프카의 생애에 대해서는 유년기 성장기 등 시간적인 순서 외에도 그의 생애에 두드러진 사건 또는 주제별 접근도 잊지 않았고 각 작품에 대한 다른 연구자들의 견해도 꼼꼼히 요약 정리해두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카프카의 성장 배경뿐만 아니라 카프카에게 중요한 인물이 아버지 이외에도 두 사람이 더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이나 약혼을 하고도 끝내 결혼에 이르지 못한, 그러나 사귀던 5,6년 동안 오백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던 펠리체라는 여성과 평생 카프카의 친구이고 문학 동료이자 조언자로서 카프카 살아생전 단 한번도 거절을 몰랐던 친구 브로트이다. 그러나 브로트는 자신의 모든 작품을 불태워버리라는 카프카의 마지막 부탁을 처음으로 거절함으로써 우리에게 더 많은 카프카를 알려 주었다. 저자가 참조한 책들 중에서 구스타프 야누흐가 지은 『카프카와의 대화』는 따로 읽어두고 싶다.

읽다만 『마르크스 평전』이 책꽂이에서 벌겋게 빛나지만 나는 평전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평전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이 책을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이 책을 구입하는데도 또 읽는데도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다. 그것은 순전히 이 책을 쓴 저자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책은 카프카에 대한 저자의 사랑을 확인하는 데는 모자람이 없는 책이다. 저자는 “권력을 위한 투쟁”이라는 피켓을 들고 "불안과 고독, 절망과 소외의 작가”라는 기존의 카프카에 대한 평가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에 나도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구석들이 있다(유태인, 결혼, 정신적 왜곡 - 출근못할까봐 보류). 저자가 대부분 부정한 카프카에 대한 해석들은 모두 카프카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나는 기존의 해석에 저자의 주장을 보태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만의 이름표를 붙이고 싶은 것은 당연한, 또 사랑받아 마땅한 욕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천명의 독자가 읽고 억지가 아닌 천 가지 다른 해석이 나온다면 그건 당신이 사랑하는 작가의 천재성에 다름 아니잖은가.  

 

사족이지만, 저자에게 “화풀이”로 책 쓰지 마시기를 부탁드리고 싶다. 짧지도 않은 글의 재인용, 내가 읽는 책이 번역문인가 싶어 저자를 다시 확인하게 하는 비문, 수많은 오탈자들이 마치 말더듬이 변호사의 변론을 듣는 것처럼 답답하다 못해 화가 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여우 2009-03-29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객관적인 자서전이란 없고 냉정한 평전이란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만
한국의 슈테판 츠바이크라 불리는 박홍규 선생도 카프카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아서
반딧불이님에게 지적을 당하는군요.ㅎㅎㅎ
근데 오탈자는 출판사 교정팀에서 교정을 하지 않은 책임도 있다 봅니다.

반딧불이 2009-03-30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근이죠. 파이프 담배를 비껴 문 멋진 턱수염의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공연히 마음이 뒤틀려서 한마디 덧붙여버렸네요~

소나무 2012-01-30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전을 쓰기위한 필요조건이 그 인물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만...객관적인 시각을 잃고 자칫 찬양조가 되기 쉽습니다. 그런 글은 균형이 없어져 버리니깐요... 작가가 그 인물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평전의 기본이 된다는 이야기나 또한 카프카를 읽고 천개의 해석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천재라는 생각또한 진부하군요.

반딧불이 2012-01-31 00:28   좋아요 0 | URL
어떤 인물에 대해 최소한의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 평전을 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애정이 균형을 읽고 자칫 찬양조가 되지 않을까 싶어 평전을 읽지 않았었구요. 그럼에도 이 평전을 읽었던 것은 저자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죠.

저의 오독인지 모르겠으나 저자의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해서 카프카에 대한 다른 의견들을 무시하는 듯 여겨졌습니다. 저는 저자의 의견이 중요하듯이 다른 사람의 의견도 존중되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의미로 적었습니다.

어떤 신선함을 보여드릴 생각으로 리뷰를 쓸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제 글의 진부함을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산에 다녀왔습니다. 우수 경칩 지났지만 산속의 계곡은 겨울의 흰 복면을 아직 벗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직립의 소나무가 빼곡한 숲을 한참 오르자 산 중턱부터는 칡넝쿨이 부스스 엉켜있었습니다. 산도 헝클어진 제 속은 숨기고 사나 봅니다. 능선을 따라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서 봉우리를 넘지 못한 바람의 성난 따귀를 더러 맞아야했습니다. 올랐기 때문에 내려가야 하는 곳, 정상에서 고동산 표지석과 까마귀 가족을 만났습니다. 까마귀 가족을 모두 보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목소리가 모두 달랐으므로 단출한 가족임을 알 수 있었죠. 
 

당신의 이름 카프카가 까마귀를 뜻한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자꾸 입에 올리다보니 카프카와 까마귀가 정말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인적이 드문 산 정상에 사는 까마귀가족과 쉬이 접근하지 못하는 당신의 세계 역시 닮은꼴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쓴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읽은 지금 나는 당신이 왜 아버지께 이 편지를 썼는지 마치 오작교위에 서있는 것처럼 발밑이 깜깜합니다.

당신이 아버지께 이 편지를 쓴 나이는 서른여섯 살이었습니다. 그때 당신 아버지의 연세는 칠순을 바라보는 67세입니다. 멀리 계신 아버지의 안부를 여쭙는 평범한 아들의 편지는 아니더군요. 경제적인 도움이 필요하다거나 결혼을 허락해달라거나 작품을 발표했다거나하는 근황을 전하는 내용은 더더욱 아니고요. 이때의 당신은 이미 「판결」「변신」「시골의사」등 당신의 대표작들이 책이나 잡지를 통해 세상에 알려져 있었고 나이로나 문학으로나 원숙한 시기였습니다. 청소년기도 까마득히 지난 중년의 사내가 왜? 어쩌자고 이런 편지를 써야했습니까?

당신의 편지에는 어릴 적부터 당신이 보아온 아버지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담겨있습니다.  당신이 묘사하는 당신의 아버지는 당신이 닮고 싶은 아버지의 모습은 아니더군요. 당신의 아버지는 사진에서 보이듯이 지나치게 건강해보이고 생의 의욕으로 충만해 보입니다. 반면 당신은 깡마르고 허약하고 거기다 키까지 커서 털갈이를 앞둔 까마귀처럼 꺼칠하고요. 사실 나는 “아버지를 상대로 제기한 전대미문의 ‘소송’”, “카프카 문학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결정적인 열쇠, 너무도 강하고 권위적인 당신”등의 광고카피를 보고 당신보다도 당신의 아버지가 몹시 궁금했습니다.

유태인인 당신의 아버지는 유태인에 대한 적대감이 충만한 프라하에서 자수성가하셨죠. 강한 생활력, 왕성한 사업욕, 끊임없는 정복욕을 가진 아버지 덕분에 당신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배울 수 있었고 걱정이라는 단어가 이 세상에 있는지도 모른 채 자랐더군요. 우람한 체격의 아버지. 깡마르고 허약한 당신.  생의 의욕이 흘러  넘치는 아버지. 턱없이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인 당신. 이 육체적 정신적 괴리 앞에서 당신은 한없이 초라해지는 당신의 모습을 본 듯싶습니다. 당신의 아버지는 당신에게 노골적인 욕설을 퍼붓거나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에게 아버지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죠. 또 자신이 아들에게 내린 계율을 스스로 지키지 않음으로써 아버지는 당신을 짓누르는 권력으로 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두려움의 대상이며 세상 만물의 척도가 된 아버지로부터 당신이 탈출을 꿈꾸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에게 글쓰기와 결혼은 탈출 시도의 한 방법이었습니다. 글쓰기가 내면으로의 도피라면 결혼은 외적인 도피죠. 그러나 당신은 “가장 대단하고도 가장 희망적인 탈출의 시도”이고 “더없이 통렬한 자기 해방과 독립에 대한 보장”인 결혼에서 실패합니다. 세 번씩이나 약혼을 하고도 말입니다. 그 실패의 원인을 당신은 아버지에게서 찾습니다. 당신에게 결혼은 “ 강인함과 타인에 대한 경멸, 건강과 어느 정도의 무절제, 뛰어난 언변과 불충분한 설명, 자기 신뢰와 모든 것에 대한 불만족, 세상에 대한 우월감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억압, 인간에 대한 이해와 불신, 거기에다가 근면, 끈기, 침착, 대담성과 같은 완벽한 장점들까지 두루 갖추고서, 이 모든 것들이 함께 어우러져 아버지에게서처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가능한 것이었죠. 하지만 당신은 저 모든 것을 갖출 수가 없었고 그러므로 결혼은 아버지의 고유한 영역이었습니다. 당신이 저것들을 다 갖추었다하더라도 당신은 결코 결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결혼은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가 더없이 밀접한 관계로 맺어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죠.

이제 당신에게 남은 것은 글쓰기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글을 쓸 때면 당신은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고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글쓰기를 통해 아버지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합니다. “제 글은 아버지를 상대로 해서 씌어졌는데 글 속에서 저는 평소에 직접 아버지 가슴에다 대고 원망할 수 없는 것만을 토로해댔지요. 그건 오랫동안에 걸쳐 의도적으로 진행된 아버지와의 결별과정이었습니다. 그건 아버지에 의해 강요된 것이었지만 제가 정해놓은 방향으로 진행되어 갔지요.” 이제 당신은 “글을 쓰고 또한 그와 연관된 일을 하면서 소박하나마 독립과 탈출을 위한 시도를 했고 너무나 하찮은 수준이지만 약간의 성공도 거두었지요.” 그런데도 당신은 아버지께 이 편지를 썼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당신의 편지는 내용뿐만 아니라 분량, 형식 등 모든 면에서 제게는 의문투성이입니다. 당신의 말대로라면 아버지는 가해자이고 당신은 일방적인 피해자입니다. 당신 편지의 거의 대부분은 피해자의 고발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는 가해자인 아버지의 변도 마련해두었더군요. 이것은 아무리 당신의 전공이 법학이라고 하더라도 정말 재미있게 여겨지는 부분입니다. 사실 부모 자식간에 전공을 살려 대화 하지는 않잖아요? 더구나 당신의 고발은 이성적인 듯하지만 다분히 감성적입니다. 거기에서는 아버지가 이 편지를 읽고 또다시 노여워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마저 느껴집니다. 반면 당신이 아버지의 입장을 대신해서 쓴 짤막한 아버지의 반론 부분은 너무나 간결하고 이성적이고 총체적인 시각으로 당신의 모든 고발을 일축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말하죠. “남들에 대한 아버지의 불신조차 제 자신에 대한 저의 불신만큼 그렇게 크지는 않습니다.” 다분히 자학적으로까지 들리는 이 말에 저는 당신에 대한 연민으로 하마터면 눈시울이 젖을 뻔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한권의 책은 우리들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는 당신의 말을 실천합니다. 바로 다음문장이죠. “아버지께서 저를 그렇게 길러주셨지요.” 자신의 모든 결함을 인정하면서도 단 하나의 힘없는 듯한 읊조림으로 그것을 아버지에 되돌려주는 당신. 나는 당신이 그토록 두려워한 아버지만큼 당신이 두렵습니다.

그러니까 이 편지는  당신의 긴 고발, 아버지의 짤막한 반론, 그 반론에 대한 당신의 단 한 줄의 반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편지라는 형식은 그 편지를 받는 사람을 일차적 대상으로 하는 것 아니던가요? 그런데 당신은 아버지가 이 편지를 읽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아버지의 반론 부분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또 아버지가 이 편지를 읽을 경우를 대비하여 아버지의 반론에 대한 반론까지도 준비해두셨더군요. 치밀한 당신. 이것은 편지가 아닙니다. 이것은 편지의 형식을 빌어서 쓴 한 편의 소설입니다.  무서운 당신. 이것은 편지가 아닙니다.  이것은 젊은 당신이 늙은 아버지에게 내미는 유언장입니다. 애처로운 당신. 이것은 편지입니다. 증오도 사랑의 한 부분이라면 이것은 아버지에게 드리는 당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의 고백입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여우 2009-03-29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레가 된 카프카가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이므로 약간 이해해주세요.ㅋㅋ

반딧불이님의 보르헤스에 이은 카프카 때문에 제가 살짝 조바심이 날라 그럽니다.
-문학에 영 시원치 않은 여우 드림-

반딧불이 2009-03-30 0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프카의 아버지는 카프카를 낳아주고 그 창작의 동기부여까지 일생을 책임진 셈이지요. 이래서 부모를 잘만나야 한다는 말에 공감안할 수가 없게 되었어요.
 

변신.시골의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 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변신』의 첫 문장이다. 그런데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그것에 대해 놀라지 않는다. 놀라기는커녕 자신이 벌레로 변한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매일 하던 일을 계속하려고 안절부절이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 복무(?)해온 습관 때문이다. 그레고르는 부모가 진 빚을 갚아야 하고 바이올린 연주를 하는 누이동생을 음악학교에 보내고 싶어 한다. 오전 7시 전에 문을 여는 매장의 외판사원인 그레고르는 새벽 다섯 시 기차를 타고 출근해야한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는 것도 힘든 벌레로 변해버렸다.  7시가 지나자 지배인이 직접 집으로 찾아오고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한 사실을 온 가족이 알게 된다.

그레고르는 이제 자신의 방에 갇혀 누이동생이 가져다주는 벌레의 음식을 먹고 벽을 기어 다니며 시간을 죽이고 있다. 가족들은 처음 그를 동정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를 혐오하고 거추장스러워한다. 아들이, 오빠가 벌레로 변해버렸지만 가족들은 그레고르라는  한 인간의 존재에 대한 관심은 일체 없다. 다만 그가 벌레로 변해버림으로써 야기된 경제적 어려움만이 그들의 관심사일 뿐이다.

그레고르는 가느다란 다리를 여러 개 가진 벌레로 변해버렸지만 인간의 말은 모두 알아듣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사는 전달할 수 없다.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다른 사람의 말이 더욱 잘 들리는 법이다. 가족의 대화를 듣는 일 외에 그레고르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그레고르는 적기는 하지만 자신이 다달이 가져다준 돈이 모여 소자본이 되어있다는 것을 알고 안도한다. 비록 이 돈으로 사장에게 진 빚을 갚았더라면 자기의 고달픈 생활이 좀 더 빨리 끝날 수 있을 거라고 아쉬워하긴 하지만 말이다.

벌레가 되어 듣는 인간의 말, 그것은 또 다른 벌레의 말이다. 가족에게 그레고르가 벌레였듯이 그레고르에게 가족은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돈벌레에 다름 아니었다. 작가는 그레고르를 생물학적인 벌레로 변신시켜 우리에게 돈벌레로서의 가족의 모습을 명료하게 부각시킨다. 그리고 갑충으로 변해버린 그레고르 잠자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실존을 인정받지 못하는 삶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신』을 읽으면서 인간의 모습을 한  벌레와 벌레로 변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삶이 한마리 일벌레에 지나지 않았음을 무덤덤하게 보여주는 인간의 모습을 동시에 보게된다. 진짜 벌레는 어느쪽일까? 답을 내리지 않고 결말을 독자에게 열어두는 카프카의 글쓰기 방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 개정판 르네상스 라이브러리 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거용 옮김 / 르네상스 / 200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세기의 도서관’, ‘사상의 디자이너’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태생이다. 그는 할아버지의 도서관에서 태어나 도서관 사서로 첫발을 대딛고 책에 파묻혀 지냈으며 국립도서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보르헤스는 유전적인 요인과 지나친 책읽기로 시력을 완전히 상실했지만 강연과 저술 활동을 계속하다가 1986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간암으로 사망했다.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는 1967~68년 보르헤스가 시력을 상실하고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하버드대학교에서 원고 없이 진행한 여섯 차례의 특강을 묶은 것이다.  The Norton Lectures라고 불리는 이 강연은 30년이 지난 후에야 책으로 출간되었고 우리나라에는 2008년 10월 번역 출판되었다. 보르헤스는 스페인어보다 영어를 먼저 배웠고 프랑스어, 독일어 등을 배웠다고 한다. 그의 독서는 영어로 시작되었고 이 강연 역시 영어로 진행되었는데 그는 현대영어뿐만 아니라 고대영어 스페인어 등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것 같다. <시라는 수수께끼>, <은유>, <이야기하기>, <시 번역>, <사고와 시>, <한 시인의 신조>등 강연제목이 보여주듯이『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는 문학 일반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보르헤스의 시론에 더 가깝다. 

 <시라는 수수께끼>는 인생을 통째로 문학에 바쳐온 보르헤스가 여전히 시란 무엇인가를 묻는 시라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이다. ‘시는 교묘하게 함께 짜여진 언어를 매개삼아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애써 정의를 내리지만 이러한 정의는 사전이나 교과서에는 충분할지 몰라도 보르헤스 자신을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그는 우리의 삶 자체가 시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는다. 9세기에 일어났던 일상의 일을 기록했을 뿐이라는 아래의 구절들이 바로 시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눈은 북쪽에서 날아오고,
서리는 들판을 묶으며,
가장 차디찬 낟알,
싸락눈은 땅에 떨어진다.

보르헤스는 이미 시는 삶 자체라고 했지만 <시라는 수수께끼>의 제목을 가진 강연을 끝내기 위해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시란 무엇입니까? 만약 사람들이 ‘시가 무엇이냐’고 나에게 묻지 않는다면, 나는 안다. 만약 사람들이 ‘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모른다.”

<은유>에서 보르헤스는 ‘암시된 것이 단호히 주장된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은유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어떤 설득이나 주장보다도 막강하다. “나는 밤이고 싶어라, 그래서 당신이 잠자는 것을 천 개의 눈으로 지켜볼 수 있게(I wish I were the night, so that I might watch your sleep with a thousand eyes).” 눈(眼)과 별의 은유는 꽃과 여자, 잠과 죽음, 시간과 강 등과 더불어 흔해빠진 은유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보고 싶어 하는 연인의 마음을 이보다 더 간결하면서도 범람하는 감동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으랴. 우리가 사용하는 은유들은 무한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10여개의 유형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보르헤스는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은유가 고갈된 것은 아니다. 주류의 새로운 변형을 시도해 보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며  그 유형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은유를 만들어내는 일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일이다. 
 

<이야기하기>는 서사시에 관한 강연이다. 보르헤스가 서사시로 언급하는 것은 『트로이 이야기』, 『오딧세이아』그리고 4대 『복음서』이다. 그는 서사시와 소설의 차이는 운문이냐 산문이냐 혹은 읊조리는 것이냐 진술하는 것이냐의 차이보다 더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서사시의 주인공이 모든 인간의 본보기인 영웅인 반면, 소설의 핵심은 인간의 파멸과 캐릭터의 타락을 다룬다는 것이다. 서사시의 주인공들은 패배의 쓰라림을 느낌과 동시에 행복과 승리를 진지하게 믿지만 소설 속 주인공들은 행복과 성공을 믿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시대의 빈곤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이야기를 하거나 듣는 일을 지겨워하지 않을 것이고 이런 이유로 시의 기품이 더해진 서사시를 쓰는 시인의 등장을 기대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시 번역>은 현대 영어와 고대영어, 스페인어와 영어 등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하는 데서 오는 간극 때문인지 의미가 명료하게 와 닿지 않는다. 매슈 아놀드와 뉴먼 사이에 오간 의역과 직역에 대한 논의들, 직역의 기원을 성경의 번역에 두는 보르헤스의 의견 등은 참고할 만하다. 

<사고와 시>에서 보르헤스는 단어는 도서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들판, 강, 바다, 강, 밤, 새벽으로부터 나왔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시에서 중요한 것은 문체라기보다는 그 시가 살아 있느냐 죽었느냐 이며 문체의 화려함 보다는 평범한 단어들을 이용하여 비범함을 드러내는 시가 더 지속적인 감동을 준다고 한다.

<한 시인의 각오>에서 보르헤스는 자신의 독서과정과 글쓰기의 과정을 되돌아본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그는 화려한 문체를 추구했고, 현대적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화려한 문체에 대한 노력은 허영심의 징후였고,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이미 충분히 현대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글을 쓸 때 독자를 의식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조차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만을 생각한다는 것. 또 사건이나 상황보다 꿈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다는 것, 지성은 작품과 큰 관련이 없으며 현대문학은 지나치게 자의식적이라는 것, 작품을 쓰고 나서는 가능한 한 적게 고치라는 조언도 잊지 않는다.    
 

보르헤스의 강연은 생각했던 것보다 쉽고 따뜻하다. 쉽게 읽었지만 소화시키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고 턱없이 높아진 눈높이 때문에 절망의 나락은 깊기만 하다. 움직이는 도서관에 다름 아닌 보르헤스가 하는 말들은 그가 평생을 통한 독서와 체험으로 얻은 것이다. 그런 만큼 그것이 주는 부피와 무게가 만만찮다. 책 한권을 통째로 기억 속에 넣어두고 혼자만 보고 싶은 책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라고 어느 시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폭포를 마셔도 가시지 않을 갈증으로 보르헤스 말의 피가 돌기를 갈망한다.



*2003년 12월 30일 초판 1쇄가 나왔었다. 2008년 10월 20일 본은 개정판 1쇄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여우 2009-03-19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보르헤스... 밀린 책 때문에 보르헤스 갈증이 더 심해지고 있는데 말이죠.
그렇게 목타게 고대하다가 만나면 저도 반딧불이님처럼 말의 피가 돌까요...
리뷰가 너무 멋져부러서 댓글 다는 일조차 번거롭게 여겨질 정도입니다.

반딧불이 2009-03-20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의 자극 받은거여요. 감사드려요. 저는 여우님의 글에는 이미 피가 돌고 있는걸로 아는데요. 이 대지가 초록을 수혈받아 새살이 오르듯이 여우님 아픈 몸도 곧 건강해지셔야죠. 시간의 응급실, 봄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