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 통합적 사유를 위한 인문학 강의 1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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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을 심심찮게 듣는다. 그러나 위기를 체감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어느 날 읽히지 않는 책과 맞닥뜨렸을 때 문득 스스로 무식하다는 것을 절감한 것이 내 개인적인 위기라면 위기였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수잔 손택의 『사진에 관하여』에는 ‘플라톤의 동굴 속에서’라는 글이 있다.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를 읽으려 시도했지만 포기했다.  언젠가는 ‘파놉티콘’이라는 제목을 가진 시 한편을 놓고 도대체 파놉티콘이 뭔지 몰라 시가 읽히지 않은 적도 있다. 우연히 「책 세상 문고」뒷날개를 훑어보다가 같은 제목을 가진 제러미 벤담의 책을 발견했고, 그것이 지금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감옥’이라는 뜻이라는 걸 알았지만 옮긴이의 ‘들어가는 말’만을 읽은 채로 있다. 여러 곳에서 고전에 대한 자극을 받고 고전의 담 너머를 기웃거리며 고전의 담벼락 밑을 배회해왔다. 

 

이후 고전읽기를 나름대로 시도하면서 느낀 것은 고전을 읽기위해서는 역사, 정치, 경제, 사회 등 당시의 상황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읽는다는 것은 줄거리 따라가기이거나 멋진 문장을 채록하는 일에 그치고 마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안다고 해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하는지 막막하기만 했다. 마치 이런 나의 암담함을 알고라도 있었던 듯 강유원의 저작들은 내게 빛이 되어주었다.     

문학, 역사, 철학 등으로 이루어진 것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저자가 말하듯이 대학에서 교양으로 배우는 것이지만 언제부터인가 대학은 교양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취업을 위한 전문지식인 양성소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고 졸업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뒤늦게 인문학 공부를 하려면 어찌해야하는지 도대체 막막한 것은 나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이런 현실이 바뀌기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내 무덤을 파는 일이 빠르지 싶다. 스스로 자기에게 맞는 책이나 스승을 찾는 일 외에 달리 방법이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통합적 사유를 위한 인문학 강의 1’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는 고전 읽기와 읽은 책에 대한 글쓰기를 아우르는 방법서이다. 저자는 먼저 고전을 읽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두었는데 이런 방법을 토대로 정치사상의 맥락에 따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마키아벨리, 로크의 주요저작을 읽는다.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와 텍스트로 삼은 고전을 함께 펴놓고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고전이 가지고 있는 형식과 내용, 고대에서 근대로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사유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당시의 의미와 현재의 의미가 어떻게 다른지, 이러한 저작들은 후대에 어떻게 연결되는지 등 총체적인 맥락을 짚을 수 있다. 흔히 해설서들은 해설자의 주관적 의도대로 독자를 끌고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강유원은 자신의 의도대로 독자를 끌고가지 않는다. 당시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고전을 해설하고 해석의 여백은 독자에게 남겨둔다. 이것이 저자의 미덕이다. 내가 제대로 읽은 책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한 권뿐이지만 고대와 근대를 다 섭렵해버린 것 같은 만족감이 든다. 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만족감을 경계하면서 ‘통합적 사유를 위한 인문학 강의 2’를 기대해본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내내 책의 내용과는 전혀 무관한 것을 반성해야했다. 막무가내와 무대뽀로 살고 있는 내 모습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운전을 할 때도 신호 떨어지는 대로 움직이고, 여행을 가도 오직 떠나야한다는 한 가지 계획만이 있을 뿐이다. 또 가다가 삼천포로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생활이 이런 까닭에 독서에도 두서가 없으며 글을 쓸 때도 미리 계획하고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최근 저자의 책을 읽고 강의를 다운받아 들으면서 그가 아무리 5단락 글쓰기의 형식을 강조해도 ‘시대에 따라 형식도 변하고 외형률이 있으면 내재율도 있는데...’얼버무리며 속으로 궁시렁 거렸었다. 나의 이런 궁시렁과는 무관하게 그는 책을 읽고 요약을 하거나 보고문을 쓰는 일은 창조적인 글쓰기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수없이 강조한다. 이 책을 읽고나니 그가 왜 그렇게 형식을 강조해왔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을 견디고 아직까지 널리 읽히는 고전은 내용 못지않은 형식의 견고성을 가졌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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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2-17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치 '책과 세계'의 확장 심화판인거 같네요. 이 책도 점찍었습니다~

반딧불이 2009-02-17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과 세계>는 총론, 이 책은 각론으로 보심이 어떠실지....

파란여우 2009-02-17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유원의 마키아벨리를 또 읽을 수 있는 책인가 봅니다. 목차를 확인했어요.
[책과 세계]에서 <군주론>은 도덕은 거추장스런 장식품이라는 틀 위에서 쓰여진 책이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얇지만 이 책도 만만하게 봐선 안될 책이군요. 담았슴다.^^

반딧불이 2009-02-17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평안하신가요? 저에게 <책과 세계>는 애물단지입니다. 저자의 세계관이 보일듯 말듯하면서 언어화가 안되는 탓이죠. 그래서인지 <서구정치사상 고전읽기>는 <책과 세계>보다 훨신 편하게 읽었습니다. 여우님 리뷰읽자마자 준비한 <춘향전>은 책상위에 뒹굴고 있어요. 이번 남명조식에 관한 글도 잘읽었습니다. 댓글을 막아버리셔서 여기다 주절주절 떠드네요.
 
내면의 침묵 -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 찍은 시대의 초상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지음, 김화영 옮김 / 열화당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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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에두아르 부바의 사진에 미셀 투르니에의 글을 덧붙인 사진첩을 본 적이 있다. <뒷모습>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사진첩에는 '찍히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찍힌 자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 모습들은 아름다워보이고자하는 가식적인 모습이나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아 오히려 자연스럽고 아름다웠다. 부바의 사진과 사진을 읽어내는 미셀 투르니에의 글과 김화영의 번역이 잘 어우러져 가끔 꺼내보게 된다. 

최근에 '자연스러운 모습'의 사진을 파일로 보내야하는 일이 가끔 있다. 더러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었다고 생각되어 모조리 뒤져보고나서야 혼자 찍은 사진들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고 사진관을 찾기도 뭣하고 새로 찍기도 우습고 해서 직장동료의 결혼식장에서 '찍힌'사진을 대신 사용하고 있다. 이날 찍힌 사진들은 모두 의도되지 않은 사진들이다. 나중에 사진찍은 동료에게 물어보니 카메라를 새로 장만한 김에 성능테스트 차원에서 보일때마다 나를 찍어댔다고한다. 희한하게도 나는 이날 찍힌 몇장  안되는 사진들이 모두 마음에 든다. 

나는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것이 질색이다. 햇빛을 등지고 서면 어둡게 나온다고 쏟아지는 햇빛 앞에서 찡그림을 참고 있는 거북함이 싫고, 나도 모르게 긴장하는 안면근육도 싫고,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억지 웃음을 지어야하는 순간도 싫다. 이런 마음탓인지 찍은 사진들이 마음에 드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반면 우연히 찍힌 사진들 혹은 일상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찍힌 사진들을 보노라면 더러 정이 가기도 한다. 정이 가는 사진 속의 내 모습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나는 무언가 다른 세계에 빠져 있다. 아이를 돌보거나 책을 읽거나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여행지에서 무언가를 유심히 살펴보는 등. 그 속에는 나의 몸을 가졌지만 무언가 다른 깊은 세계에 빠져있는 또다른 모습의 내가 있다. 내 모습이지만 나는 결코 볼 수 없는 나의 모습. 누군가 나 모르게 찍어서 보여주어야만 볼 수 있는 내 모습들을 보면서 객관적으로 자신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내가 사진과 관련하여 싫어하는 모든 요소를 거세하고 사진을 찍었다. 뿐만아니라 그는 모델이 자신만의 다른 세계에 몰입하고 있는 순간들을 포착했다. 이 사진들을 모아서 <내면의 침묵>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이것은 내면의 침묵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의 아우성이다. 그들은 침묵하는 방법으로 모든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브레송의 사진 속에는 두개의 직선이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다. 모델을 쏘아보는 브레송 카메라의 시선과 모델이 쏘아보고 있는 그 자신만의 세계를 향한 몰입의 시선. 두 직선이 주는 긴장감이 이 사진첩의 가치를 결정짓는다.  

<뒷모습>에서는 사진 못지않게 투르니에의 글이 빛났다. <내면의 침묵>에는 브레송 재단의 이사장이자 큐레이터라는 아네스 시르의 글과 철학자 장 뤽 낭시의 글이 실렸다. 이들의 글 때문에 사진이 더욱 빛난다. 90여편이 넘는 초상화의 주인공들은 낯익은 얼굴들이 많다. 얼굴은 모르더라도 이름이 내로라하는 사람들이다. 표지에 실린 베케트의 포스가 느껴지는 모습, 시몬느 드 보부아르, 싸르트르, 마리린 먼로의 얼굴은 낯익은 얼굴이지만 생경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늘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수잔 손택이나 롤랑 바르트의 젊은 날의 얼굴들을 만나게 될줄은 미처 몰랐다. 이들은 생경스럽지만 반갑고 친숙했다.  다만 Thames&Hudson이라는 프랑스 출판사에서 펴낸 탓인지 책값이 비싸다. 하지만 사진첩을 두어번만 뒤적이다보면 만족감이 책값을 뛰어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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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2-16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전공이 영화인지라 항상 카메라 뒤에 서서 인물을 어떻게 프레임안에 효과적으로 가두어야 할 건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앙리 카르디에 브레송은 저에게는 하나의 전설이자 아이콘 같은 대(大)존재이지요;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되었던 평전은 정작 사진들이 없어서 아쉬웠던 기억이 있는데 이 책은 그러한 갈증을 해소해주겠군요~

반딧불이 2009-02-16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전공이시라구요?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군요~ Thames&Hudson이라는 프랑스 출판사에서 펴냈다고해요. 비싼것 말고는 흠잡을 곳이 없네요.
 
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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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로 그를 알게 된지 다음달이면 2년이다. 매달 그가 읽어주던 시들을 기다리는 시간은 어찌나 더디던지 두 번 세 번을 읽고 베껴 쓰기를 하고 난 후에도 한 달은 다 지나가지 않았다. 그런 그가 첫 번째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를 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놀랐다. 반가움보다도 700쪽이 넘는 분량 때문이었다. ‘김현의 현현’이라는 항간의 상찬을 나는 <시 읽어주는 남자>를 읽으면서 그것이 한국비평의 황제라는 김현의 명망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비평이 가진 문학에 대한 애정에 더 가깝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이는 ‘비평은 고작 취향에 개입하는 권력일 뿐’이라고 했다. 욕먹어도 싸다 싶을만큼 비평이 문학권력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게 비평은 권력보다는 해석의 여지를 열어주는 또 하나의 언어였고, 모르고 지나쳤던 새로운 작품들을 소개해주는 안내자였다. 누렇게 변색되어버린 김현의 책들이 그랬고, 달랑 한 권뿐인 도정일의 책이 그랬다. 이제 나는 이 벽돌만큼이나 두껍고 무거운 신형철의 첫 평론집을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해야 할 것 같다. 그의 글에서 나는 시에 대한 촉촉한 애정과 새로운 감각과 언어에 대한 진단을 보았다. 그리고 일찌기 그가 고은이나 신경림 등 문단의 어른들에게 휘두른 공손한 회초리를 기억하고 있다. 

“내가 옹호하려 한 것은 난해한 시가 아니라 다른 언어, 다른 세계, 다른 삶을 말하는 시였고, 내가 비판하고자 한 것은 쉬운 시가 아니라 관습적이고 태만하고 타협적인 시였다” 라거나 “나에게 비평은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아름답게 말하는 일이다.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할 때 나는 절박하다. 나는 부조리하고 이기적이며 무책임한 사람이다. 많은 상처를 주었고 적은 상처를 받았다.”라는 말은 그가 쓰고자하는 글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그가 문학에 대해 가진 아름다운 마음을 생각해보게 해준다. 문학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문학을 사랑한다는 그의 땡깡 같은 열정을 나는 오래 지켜 볼 것 같다.  

 

평론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내가 이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독파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이런 탓에 나는 관심 가는 작가에 대한 글과 시에 대한 글들을 먼저 읽었다. 새로 읽게 되는 작품들은 그것을 읽을 때마다 신형철의 글을 꺼내 읽으면 될 것이다. 나는 오래전에 김수영의 사랑에 대해 관심가진 적 있었다. 그의 사랑에 대한 잔인한 정직성 때문이었다.  단 한편의 시만을 대상으로 삼아 내게 아쉬움을 주었지만 신형철의 '김수영의 사랑에 대한 단상'은  여미지 못한 나의 미련을  다독다독  여며주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적지 않은 시인들에 대한 그의 작품론은 해당 시의 해설이나 해독이라기보다 오히려 또 하나의 시처럼 아름다웠다. 그의 글에도 문학이론들이나 철학이 등장하지만 이러한 등장이 시나 소설위에 군림하지 않는다. 그가 문학을 사랑하는 것 맞다. 신형철의 글을 읽으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두근거림은 옥타비오 파스의 『활과 리라』를 읽었을 때 느껴본 적 있다. 





마지막에 할애된 김소진에 대한 글은 아프다. 그에 대해 ‘쓰지 않고 버티면서 그를 잊지 않겠다’는, 그리하여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는 나를 되비추는 우물이거나 내 발목을 잡아 찢는 덫이 될 것이’라는 그의 각오에 공감하고 싶지 않다. 이유가 어찌하던  눈물마른 허수아비의 눈으로 그의 ‘울음 없이 젖은 눈’을 지켜보는 것은 못할 짓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파헤치면서 사랑하기‘를 바라는 나의 소망을 외면하지 않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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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2-09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현의 현현'이라는 말에 눈이 확 뜨이네요~~

반딧불이 2009-02-11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고하세요. http://h21.hani.co.kr/arti/COLUMN/68/?ing=y

비로그인 2009-02-11 22:4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잘 읽겠습니다~ㅎ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1
소포클레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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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프로이드의 이론을 통해 오이디푸스를 먼저 접했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의 성적 결합을 꿈꾼다는 무의식적 욕망에 대한 그의 이론은 인간의 발달단계를 설명하는 데에도 문학작품을 해석하는 데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내게 주입되었다.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이 내게 메타 텍스트가 되어 버린 까닭은 바로 이런 이유였다.

가끔 나는 나의 침착한 글쓰기가 지겨울 때가 있다. 오늘도 그렇다.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Kreutzer"를 들으며 식은 커피로 입술을 적시며 껌벅이는 커서를 들여다보고 있는 내가 못마땅하기 짝이 없다.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던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주고받는 조화로움마저 짜증이 난다. 바이올린의 화려하고 격정적인 부분만을 골라 듣고 싶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리필이 되지 않는 커피도 싫다. 거기다가 쉬지 않고 껌뻑거리는 커서는 말 안 듣고 깐죽거리는 애들 같다. 이런 날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같은 종류의 책 부분 부분을 골라 읽으면서 소파 위를 뒹굴면 제격이련만. 
 

 

이렇게 온 신경이 짜증으로 부풀어올라있는 상황에서 오이디푸스를 읽으니 폭발직전까지 다다랐다. 아무 죄도 없는 오이디푸스에게 저주를 퍼붓고 뒷다마나 까는 그리스 신들의 쪼잔함에 치를 떨다가, 그리스 신을 꼭 닮아있는 내 주위의 인간들을 떠올리며 저주를 퍼붓다가, 비극이라는 장르를 만들어낸 그리스 작가들을 싸잡아 욕하다가, 카타르시스 어쩌구를 떠들어대던 아리스 할아범을 비웃다가 결국 제 성질에 겨워 제 풀에 나가떨어졌다.

녹다운 되고, 카운트다운도 끝난지 며칠이 지나서야 이 글을 쓴다. 오이디푸스가 안쓰럽기 때문이다. 아니 인간이 안쓰럽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안쓰럽기 때문이다. 반인반수의 스핑크스가 내는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맞힌 것은 오이디푸스였고 그 답은 인간이었다. 스핑크스의 답을 맞힌 오이디푸스에게 또 하나의 질문이 놓여있다. 라이오스 왕을 죽인 범인이 누구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 질문의 답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러니 이 비극의 질문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이다.

오이디푸스의 답은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둘과 딸 둘을 둔 자기 자신이다. 이런 저주받은 사실을 인정하고 싶은 자가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또한 인간이라는 것이 소포클레스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 일까. 내가 욕을 퍼부었던 그리스의 신들도 결국은 그리스인들이 만들어낸 것이니 그리스인들은 애초에 신의 구원 같은 것은 믿지도 않았는지 모른다. 그리스인들이 생각하는 신이란, 지들은 하고 싶은 대로 온갖 파렴치한 행동은 다하고 인간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구원 같은 게 이 세상에 있을 것 같으냐고 쌩까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들이다. 그리스인의 잔인한 인간관에 무릎을 꿇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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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박물학
다이앤 애커먼 지음, 백영미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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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킹슬리와 시고니 위버가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영화가 있었다.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 (찾아보고 싶은 의욕도 없다). 여주인공은 학창시절 운동권에 몸담고 있을 때 자신을 성고문한 의사를 기억한다. 그녀는 눈이 가려진 채 묶여있었으므로 그를 보지 못했다. 십수 년이 지난 후에도 그녀는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라는 음악과 의사의 목소리 그리고 체취를 기억하고 있다. 오로지 이 기억만으로 그녀는 우연히 자기 집에 오게 된 사람이 범인임을 밝혀낸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도 냄새에 관한 이야기이다. 파리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주인공(그의 이름이 그루누이였던가)은 체취가 없다. 대신 그는 냄새의 귀재다. 나뭇가지를 거쳐 온 바람 냄새를 맡고 나무이름까지도 알아맞힌다. 그는 향수를 만드는 일에 광적으로 매달리면서 향기를 얻기 위해 살인도 아무런 죄의식 없이 해치운다. 책을 덮으면서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맨 것이 결국 살아 움직이는 동물인 인간이 내뿜는 몸 냄새 혹은 서로의 체취뿐만 아니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냄새가 아니었나 싶어 씁쓸하고 허탈했다. 도대체 사람냄새란 어떤 것일까 생각하면서 허탈함을 달랠 즈음 영화가 개봉되었고 개봉첫날 심야극장에서 영화를 보았지만 그 해답은 아직도 찾고 있는 중이다.


인간의 특정 감각을 소재로 한 예술작품들이 많지만 감각에 대한 백과사전 같은 책은 처음이다. 『감각의 박물학』은 내게도 있었던가 싶은 모든 감각을 정밀하게 생각해보게 해준다. 책 속에 가득 찬 감각에 대한 과학적 탐구는 설득력으로 작동하고, 문화적 차이는 신기함을, 문학적 표현은 읽는 즐거움으로 포만감을 준다. 그러나 인종이 다르고 시대가 달라도 인간이 느끼는 감각은 모두 같다. 다만 문화의 차이에 따라 감각의 확장과 속박이 다를 뿐이다. 감각의 향연을 벌였던 로마인들이나 감각을 부정한 기독교 구원의 교리는 인간이 감각의 동물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어떤 이는 자신의 감각을 고양시켜 예술작품을 생산하고 타인과 공유하기도 한다.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450여 쪽에 이르는 이 책의 말미는 공감각에 할애되어있다. 이 부분에는 독특한 감각을 마음껏 향유한 예술가들의 이야기다. 글을 쓰기 전에 관 속에 들어가 눕는다거나, 적당한 단어가 필요할 때마다 서랍에 넣어둔 썩은 사과를 꺼내 냄새를 맡았다거나, 감기에 걸린 상태의 출렁이는 의식 속에서 감기 바이러스를 강장제로 활용한 이야기들은 짧지만 재미있다.      


인간은 가지고 태어난 감각을 얼마나 활용하고 사는 걸까? 사라져가는 감각을 보완하기 위해 인간은 무수한 기구들을 개발하고 사용한다. 물론 가진 감각을 더 확장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안경, 망원경, 현미경, 카메라, 전화기, 보청기, 이어폰, 마스크, 방독면 등등. 주변에 널려있는 모든 것들이 감각의 보조기구들이다. 음식이나 약물도 인간의 감각을 마비시키거나 확장시키기 위해 사용된다. 자본주의가 세계에 범람하면서 감각은 문화라는 이름으로 소비되기 시작했다. 모든 매체는 인간의 감각을 향해 맹렬한 유혹의 사인들을 보내고 있다. 순식간에 감각의 귀족을 만들어 줄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감각을 예민하게 발달시키고 감각의 귀족처럼 살기 위해서는 그것을 향유할 현실이 뒷받침 되어야한다. 그렇지 못한 경우 감각은 우아한 아씨로, 현실은 비천한 몸종으로 살아야만 하는 것이 현실이다.


나는 타고난 감각을 얼마나 활용하며 살고 있나? 스스로에게 묻고 보니 감각을 활용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조절하고 억압하면서 살아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자발적이기보다는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맞춰 살다보니 그리되었다. 보라는 것만 보고, 들어야 할 것만 듣고, 먹어야 할 것만 먹고, 안전한 것들만 만지고, 반경 몇 킬로미터 이내의 것들만 냄새 맡으면서 살아왔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의 등장인물들에 다름 아니다.

때때로 평소에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들과 맞닥뜨릴 때의 낯설음은 당혹감과 신선함을 동시에 전해주기도 한다. 내게도 이런 감각이 있었던가 하는 신선함은 잠시이고 그것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몰라 당혹스러운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염려할 필요도 없다. 달팽이가 조심스럽게 더듬이를 내놓듯이 감각의 더듬이를 내밀라치면 그것을 짓뭉개버리는 인간들이 내 주위에는 포진하고 있으니까. 내가 가진 감각이 존중 받는 삶을 살았다면, 또 존중까지는 아니더라도 감각이 강제철거되지만 않았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어쩌면 우리의 삶은 감각의 유통기한  일지도 모른다. 감각이 나를 움직이고 나는 감각의 노예로 주어진 시간을 살 뿐인 것이다. 그러니 내가 살아 움직이며 감각을 활용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이제 폐기처분하자.

그런데 희한하게도 다른 모든 감각들은 폐기처분 할 수도 있고 공유도 가능하지만 통각(저자는 통각을 촉각으로 분류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만은 오롯이 가진 자의 몫이다. 자신의 상처를 푸욱 삭혀서 그것을 살아가는 힘으로 삼는 사람도 더러 있는 모양이지만 고통을 목적으로 사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엎어진 두부모처럼 으깨진 마음의 상처는 말하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다. 설사 말한다고 해도 대신 앓아줄 수도 없다. 그저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지켜봐야만 하는 고단함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 사랑은 인간의 모든 감각을 활성화 시키는 동시에 그것을 고통으로 통합시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아프다. 그래서 사랑은 천형이다. 그런데도 누구나 사랑에 빠지고 싶어 한다. 이 사태를 어찌할꼬. 누구나 사랑이 황홀한 지옥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섯부른 위로는 하지 말기로 하자. 그것은 마음에 붙이는 반창고에 다름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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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2-01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각의 박물관' 꼭 읽어보고 싶네요^^

반딧불이 2009-02-01 22:29   좋아요 0 | URL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일별 하신 후 사시기를 권합니다.

하이드 2009-02-01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너무 좋아하는 책이에요. 다이앤 애커먼의 통통 튀는 문장과 세상에 대한 그 참을 수 없는 호기심과 관심에 읽는 저까지 힘이 나곤 하죠! 그녀의 책은 꽤 많이 번역되어 있어요. 최근에 나온게 <미친 별 아래 집>이고요.

반딧불이 2009-02-01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한산한 제 서재까지 오신걸 보니 이 책을 정말 좋아하시는군요. 나무랄 곳 없는 책이었지만 저는 감각의 이방인처럼 보이는 제 모습이 너무 초라해보여 속이 편치 않았답니다. <미친 별 아래 집>참고할께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