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이기선

 

 

바다는 오랜 세월 모래밭을 일구었네

하루도 거르잖고 그 밭에 물 대었네

 

가슴 깊은 곳에서 곱게 바순 모래알들,

마음은 언제나 그 밭을 거닐었네

 

하얗게 부서지던 나날들이었네

기다리고 기다려도

푸른 싹 돋지 않는 세월이었네

 

 

 

 

 

 

밑 빠진 독에 물 붙기, 모래밭에 물대기, 지나온 시간들이 몽땅 이런 식이었다는 걸 깨달을 때가 있다. 아베 코보는 모래의 불모성이 물기 없음이 아니라 모래의 유동성에 있다고 했지만 불모를 견디는 자의 입장에서는 똑같다. 시인에게도 불모를 견디는 시간이 길었던 모양이다. 과거형의 시제에서 한시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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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폭포

 

 

 

맨처음 당신이 내게

폭포를 보여주었을 때

나는 절벽만을 보았어요

그 절벽 아래서

수상쩍은 여름을 보내고

나는 절벽의 고독을 보았어요

 

절벽이란

세계를 향해 첫발을 대디딘 채

그대로 굳어버린

수직의 고독.

 

계절은 깊어가고

깊어진 꼭 그만큼의 깊이로 다가선

당신의 절벽에서 마침내

나는 투신하는 물의

푸른 발목을 보았어요

 

폭포란

고독의 차가운 입술을

혀가 온몸이 물이 핥고 가는 짧은 입맞춤.

 

멍들어 절룩거리는

내 생의 발목을 쓰다듬는 당신

그 여름 장마 뒤의 폭포처럼

우리는 만났지만

정말 우리는 만났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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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돌을 놓으며

 

 

물속에 돌을 내려놓았다

동쪽도 서쪽도 생겨난다

돌을 하나 더 내려놓았다

옆이 생겨난다

옆에 아직은 없는 옆이 생겨난다

눈썰미가 좋은 당신은

연이어 내려놓을 돌을 들어올릴 테지만

당신의 사랑은 몰아가는 것이지만

나는 그처럼 갈 수 없다

안목이여,

두번째 돌 위에 있게 해다오

근중한 여름을 내려놓으니

호리호리한 가을이 보인다

 

 

 

 

문태준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이다. 시집의 제목이 '먼 곳'인데 시인은 세속과는 아주 먼 곳에 있는 듯하다. 인적없는 소나무 숲을 오래 걸어들어가서 만나는 사찰같다고 해야할까.

 

시인은 왜 세번째 돌을 놓을 수 없는가. 두번째 돌에 연이어 세번째 돌을 놓으면 중심이 생겨나고 주변이 생겨난다. 시인이 추구하는 것은 수평? 두번째 시집에 이어 수평에의 지향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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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소장 도서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아마존에서 살아남기

사막에서 살아남기

빙하에서 살아남기

화산에서 살아남기

초원에서 살아남기

바다에서 살아남기

시베리아에서 살아남기

동굴에서 살아남기

남극에서 살아남기

......

 

  - 사는 게 장난이 아닌가봐

 

 

 

 

 

 

내 생의 가장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살아남았다. 만신창이가 된 심신으로 며칠을 앓고 삭정이만 남았다. 정말 '사는 게 장난이 아니'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어릴 때부터 저런 책을 읽었더라면 좀 덜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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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2-03-21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보고 제가 잠깐 착각했어요. 저는 반딧불이님의 아드님이 읽고 있는 소장도서에 대한 글인줄 알았거든요. ^^;;

그런데 시가 짧으면서도 요즘 사회의 한 단면을 제대로 지적하고 있군요. 생각해보니 어린이들이 읽어야 할 책들이 대부분 '~~에서 살아남기'라니,,
아이러니하네요. 경쟁사회를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사회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하고요 ^^;;

반딧불이 2012-03-22 01:15   좋아요 0 | URL
시집에 실린 시인의 말을 보면 '개와 꼰대는 읽지 마시오. 언니야, 풍자가 아니면 자위다.'라는 말이 있어요. 시인이 의도한 것도 바로 cyrus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 싶어요.

맥거핀 2012-03-21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가 재밌네요. 근데 저런 책을 읽어서라도 살아남으면 다행인데, 요새는 그것마저도 쉽지 않은 세상이라는 사실이 서글프군요.

반딧불이 2012-03-22 01:17   좋아요 0 | URL
저는 저 시의 말미에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를 한 줄 더 보태고 싶었어요. 정말 사는 게 장난이 아니죠.
 

 

이랴/신원철

 

 

고조선 때쯤?

아사달 살던 암팡진 궁둥이의 여자

소를 몰고 산길을 홀로 걷고 있는데

도무지 소란 놈이 느릿느릿 말을 안 듣더란 말이지

화가 치민 여자

그놈을 번쩍 들어 머리에 이었단 말야

뾰족한 머리가 배를 깊이 치받으니

창자가 터질 지경이어서

눈물 콧물 흘리며 소가 애걸복걸 했다는군

그때부터 느릿느릿 제 버릇 나오면

 

너 이놈 또 머리에 "이랴?"

 

쪽진 머리, 목, 어깨, 허리, 작지만

딱 벌어진 궁둥이로

못난 역사를 떠받치고 온

 

 

 

서걱거리는 삶을 다독이듯 봄비가 내렸다. 젖은 마음을 더이상 축축하게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이 눅눅한 마음을 가볍게 해줄 즉각적인 무언가를 찾게 된다. 하이킥 몇 편을 다운 받아 보고 계간지를 펼쳤더니 이 시가 눈에 띄었다. '이랴'라는 말이 저렇게 생겨났구나.

문태준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는 매일 게으른 내 손을 반성하면서, 또 어쩔 수 없다고 자위하면서 이 봄을 견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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