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송재학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홑치마 같은 풋잠에 기대었는데

 

치자향이 수로水路를 따라왔네

 

그는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무덤가 술패랭이 분홍색처럼

 

저녁의 입구를 휘파람으로 막아주네

 

결코 눈뜨지 말라

 

지금 한쪽마저 봉인되어 밝음과 어둠이 뒤섞이는 이 숲은

 

나비 떼 가득한 옛날이 틀림없으니

 

나비 날개의 무늬 따라간다네

 

햇빛이 세운 기둥의 숫자만큼 미리 등불이 걸리네

 

눈 뜨면 여느 나비와 다름없이

 

그는 소리 내지 않고도 운다네

 

그가 내 얼굴 만질 때

 

나는 새순과 닮아서 그에게 발돋움하네

 

때로 뾰루지처럼 때로 갯버들처럼

 

 

 

 

 

홑치마 같은 풋잠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사람, 치자향을 흘리며 오는 사람, 그 사람은 눈뜨면 사라질 사람. '결코 눈뜨지 말라'에 이르러 절로 눈이 감기는 순간, 어디선가 흘러나오던 음악이 시에 포개어졌다. 반도네온이 애절하게 음을 끌고 가면 피아노가 스타카토로 뒤를 따랐다. 양철지붕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같은 피아노소리는 시 속의 꿈꾸는 어떤 이와 꿈속의 어떤 이를 어루만지듯 했다. 코끝이 찡하더니 눈시울이 수평선처럼 넘실거렸다. 나는 더 이상 시를 읽을 수 없었다. 눈물이 넘치지 않도록 급히 수습해야했으므로. 아름다운 음악의 선율과 애틋한 시의 한가운데서 나는 수평저울처럼 떨었던 것도 같다. 음악의 제목도 내용도 모르는 채로 시간이 제법 흘렀다.

 

누군가와 춤을 추다가 이 곡을 다시 듣게 되었다. 몸과 마음에 나도 모르게 파동이 일었다. 음악의 제목을 알게 되었고, 아름다운 그는 내게 못 잊을 사람이 되었다. 음악의 제목은 Lagrimas Y Sonrisas. 슬픔과 기쁨 혹은 눈물과 미소라는 뜻인 것 같다.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음악과 시와 사람.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되었던 우연의 가면을 벗기면 필연의 맨 얼굴과 맞닥뜨릴 수 있을까

.

http://youtu.be/m809ivwfgyI

 

음악을 들으면서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 느낌, 하지만 그것이 영화였는지 클래식 음악이었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오래 헤맸다. 결국 나는 영화도 클래식 음악도 모두 찾아냈다. 영화는 <번지점프를 하다>였고, 클래식 음악은 쇼스타코비치의 왈츠였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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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용인문학 2012년 하반기

 

 

 

 

 

 

 

 

영화 페인티드 베일은 섬머셋 모옴의 <인생의 베일>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사랑이 없으면서도 결혼을 선택한 여자, 그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노력으로 사랑을 얻으려는 무모한 남자의 이야기다. 불행을 잉태한 채 결혼한 아내는 곧 불륜을 출산한다. 아내의 출산을 조용히 받아들인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콜레라가 번지고 있는 중국의 오지 마을로 의료 봉사를 자청하여 떠난다. 부부간의 불화, 이질적인 문화의 충돌, 거기에 창궐하는 콜레라까지....... 불행의 한계령에서 그들이 선택한 자발적 고립은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될까? 그들은 서로에게서 없는 것만을 찾다가 마침내 한 생명을 불행의 제단에 바치고서야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이 영화는 무더운 여름의 중국 장가계가 배경이다. 인간의 근접을 사양한다는 듯 수직에 가까운 산봉우리들과 계곡을 흐르는 깊고 푸른 물이 음양의 조화는 이런 것이라는 듯 화면을 가득 채운다. 주인공들의 불화가 깊어질수록 자연은 상대적으로 아름다워 보였다.

영화 속의 그 아름다운 장소를 찾아갔다. 팔월의 무더위 속에서도 땀은커녕 서늘한 기운에 수시로 겉옷을 챙겨 입어야 했다. 그러나 그 인상 깊었던 풍경은 생각했던 것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영화 속 풍경이 훨씬 아름다웠던 까닭은 비록 엇갈린 사랑이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못 잊을 사람을 가진 시 속의 화자는 폭설에 갇히는 고립을 꿈꾼다. 발이 묶이고 동시에 운명이 묶이는. 한계령에서 만난 뜻밖의 폭설에서 화자는 상상의 한계령을 넘는다. 온통 흰 것뿐인 동화 속 나라가 공포의 나라로 변해도, 조난자들을 구조하기 위해 헬리콥터가 나타나도, 포탄을 뿌려 살상을 일삼던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짐승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뿌리며 생명을 구하는 헬리콥터로 상황이 변하고 세월이 흘러도, 끝내 손 흔들지 않고 옷자락도 보이고 싶지 않다.

 

그것은 행복의 한계령에 갇히는 눈부신 고립! 차라리 구조되고 싶지 않은 사랑의 조난. 결과는 전혀 궁금하지 않다. 짧지만, 아니 짧아야 할 아름답고도 행복한 이 조난은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일. 그건 나도 마찬가지. ‘못 잊을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나 역시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겠지. 하지만 꼭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어도 나는 마음 쓰지 않겠다. 아니 온 마음을 다해 미워하던 사람이라도 기꺼이 묶이겠다. 그리하여 인간의 몸을 빌어 잠시 왔다 가는 필멸의 생을 절감하기로 하자. 여력이 닿는다면 태양으로 향하는 창을 하나 내야지. 못 잊을 사람과 나는 세상의 볼록렌즈가 되어 빛을 수렴하겠지. 마음에 창궐하던 고드름도 녹이고 아마도 이 눈부신 고립으로 인해 한계령의 겨울도 녹아내리겠지.......

 

속절없는 꿈인 줄 알면서도 이런 감정은 피임하지 않기로 한다. 그건 어느 누구도 안부를 물어주지 않는 이 겨울을 견디는 셀프 힐링 프로젝트의 하나니까. 더불어 이것이 지도상의 한계령뿐만 아니라 생의 굽이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한계령을 넘을 때도 유효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것이 시인이 바라는 일이고 이 시를 쓴 이유이기도 할 테니까

 

《문학과 의식》 201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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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04-04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과의식,을 가끔 보는데 봄호에 실린 반딧불이님의 글인가봐요. 글이 참 반갑습니다. 인생의베일도 페인티드 베일도 만났었는데 이렇게 님의 좋은 글로 떠올려보게 되네요. 이 봄 어찌 지내시는지요^^

반딧불이 2013-04-05 01:59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저 역시 프레이야님도, 댓글도 반가워요. 여전하시지요? 쉬지 않고 읽으시고 차분하게 쓰시고....하시는 일도 열심히 하시고....언제부터인가 한결같은 분들이 제일 부러워요. 저도 알라딘에 자주 못오는 것만 빼면 그럭저럭 지낸답니다. 댓글은 못남기지만 책주문 하러 올때면 즐찾해놓은 서재들은 꼭 둘러보고 간답니다. 봄내음 가득한 시간이시길....

blanca 2013-04-06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인티드 베일의 배경이 장가계였군요. 예전에 읽어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반딧불이님의 안부가 궁금했는데 이제서야 나타나시다니요^^;;

반딧불이 2013-04-08 11:58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주말을 이용해 담양에 다녀오느라 답글이 늦었어요. 죄송~
블랑카님 잘 지내시지요? 따님도 많이 컸겠네요.
저는 예전처럼 책을 가까이하지는 못하지만 잘 지내고 있답니다. 가끔 인사 여쭐께요. 남쪽에 벚꽃이며 매화, 동백이 절정입니다..블랑카님 일상에도 봄빛이 가득하시길 바래요.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 / 유홍준

 

 내 친구 재운이 마누라 정문순 씨가 낀 여성문화 동인 살류쥬 홈페이지에 들어갔더니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 동국대학교 사회학과 강정구 교수에 대한 기사가 있었다 어이쿠, 했다 나도 앉아서 오줌 눈지 벌써 몇 년, 제발 변기 밖으로 소변 좀 떨구지 말아요 아내의 지청구에, 제기랄 앉아 오줌 싸는 거 습관이 된 지 벌써 수삼 년, 날마다 변기에 걸터앉아서 나는 진화론을 곱씹는다. 이게 퇴화인가 진화인가 퇴행인가 진행인가 언젠가 여자들이 더 많은 모임에 가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박서영은 배를 잡고 웃고 강현덕은 그것이야말로 진화라고 웃지도 않고 천연덕스럽게 되받았다 역시 여자는 새침데기들이 더 무섭다 그건 그렇고 강정구 교수 전화번호라도 알아내어서 수다 좀 떨까 난 앉아서 오줌 싸니까 방귀가 잘 꾸어지던데, 낄낄낄 캑캑캑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끼리

 

 

                                                             『상가에 모인 구두들』실천문학사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황정산

 

 

앉아서 오줌 누눈 남자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녀도 내가 앉아서 오줌 누기를 바란다고 한다.

그래야 환경과 여성을 모두 생각할 수 있는

완전 소중한 남자가 된단다.

유홍준이라는 잘나가는 이름을 가진 어떤 시인이

진보적이고 문제적인 강정구 교수를 언급하며

자신들의 앉아 쏴!에 사회적 미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그래도 난 못한다.

내 핏속에 들어있는 단 한 방울의 기억 때문에라도

할 수가 없다.

내 고조할아버지의 고조할아버지의 또 그 고조할아버지는

어디 풀숲에 서서 오줌을 갈기다

얼핏 풍기는 여인네의 비릿한 냄새에

제대로 털지도 못하고 쫓아갔을 것이고

돌칼을 든, 그 고조할아버지의 고조할아버지는

짐승과 열매를 찾아 들판을 달리다

당당히 오줌을 지려 표식을 남겼을 것이다

오줌은 유랑의 기록이고 수컷의 운명이다.

라면 봉지에 떨어지는 오줌발 소리에

부르르 몸 떨며 즐거워하고

사람 없는 평일이면 산에 올라

봉우리마다 오줌 줄기를 날리기도 한다.

사랑하는 나의 여자여,

그대의 생활에 포섭되지 못하는 

조금의 나를 남겨주면 안되겠니?

 

 

                                『문학과 의식』 2012 겨울

 

 

 '앉아서 오줌누는 남자'라는 문구를 명함에 넣어다닌다는 공무원이 있다고 한다. 앉아서 오줌 누는 것이 요즈음 예비 신혼부부의 新혼수 라는 신문기사 타이틀을 본 적도 있다. 일본남자의 40%는 앉아서 오줌을 눈다고 한다. 남자들이 서서 오줌 누는 것이 이렇게 문제가 되고 있는 줄 몰랐다.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의 모습이 나는 잘 그려지지 않는다. 여자가 서서 오줌 누는 것만큼이나 불편할 것 같기도 하고 급한 나머지 서서 오줌 누는 것보다 더 낭패를 보게 되는 경우도 생기지 않을까 싶다. 

 

앉아서 오줌 누는 시인은 변기위에 마치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앉아있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것이 퇴화인지 진화인지, 퇴행인지 진행인지......

 

아직 완소남이 되지 못한 서서 오줌누는 남자는 오줌 누는 행위에 동물성과 남성성을 부여한다. 그에게 앉아서 오줌 누는 행위만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것으로 그도 완소남이 되고 있다. 완전 소외된 남자? 마지막 3행에서는 안타까움 마저 느껴진다.

 

 그런데 언제부터 남자는 서서, 여자는 앉아서 오줌을 누었을까? 태초부터? 갑자기 궁금해진다. 수다쟁이 헤로도토스는 아이귑토스(이집트)에 관해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기술하면서 아이귑토스의 기후가 특이하고 강이 다른 강과 다르듯이 아이귑토스인들의 풍속도 다른 민족의 그것과 정반대라는 이야기를 한다.

 

 

아이귑토스에서는 여자들이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고 남자들은 집안에서 베를 짠다. 베를 짤 때 다른 민족들은 씨실을 위로 쳐 올리는데, 아이귑토스인들은 아래로 쳐 내린다. 짐을 남자들은 머리에 이는데, 여자들은 어깨에 멘다. 오줌은 여자들이 서서 누고, 남자들이 앉아서 눈다. 배변은 집 안에서 하고, 식사는 노상에서 한다.그들의 설명인즉 혐오스럽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은 몰래 해야하고, 혐오스럽지 않은 일은 공개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신들을 위해서든 여신들을 위해서든 사제직은 남자가 맡아 보아양 하고 여자가 맡으면 안 된다. 아들들은 싫으면 부모를 봉야하지 않아도 되지만, 딸들은 싫어도 부모를 봉양해야 한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182쪽 

아이귑토스인들의 다른 풍속은 이것만이 아니다. 그들은 반죽은 발로 이기고, 진흙은 손으로 이기며, 똥도 손으로 수거한다. 그들은 할례를 받는데 그 목적이 청결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아이귑토스인들은 아름다움보다 청결함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할례나 남자가 앉아서 오줌을 누는 행위가 청결을 유지하기 위함이라는건 이해가 간다. 그런데 여자들이 서서 오줌누는 것은 청결과 무슨 관계가 있나?

 

아이귑토스인이나 앉아서 오줌누는 남자들이나 모두 청결과 환경을 생각하는 지극한 마음을 가졌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명함에 문구를 새기고 돌릴만한 일인가?

남자들이여, 서서 당당하게 오줌 눠라. 그리고 수컷임을 날마다 하루에 몇 번씩 확인하라. 하지만 튄 오줌은 좀 씻어내면 안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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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1-07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글이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진화라기 보다는 적응쪽에 가깝지 않나 생각합니다. 아..적응도 진화의 일종인가요?

오랫만에 글을 보니 반갑네요. 새해 행복한 한해 되세요.^^ 즐거운 책읽기, 시읽기도 하시구요. 아..그리고 건강도 챙기시구요.

반딧불이 2013-01-08 18:56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 평안하시지요? 잊지 않고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새해 첫글이 오줌이라 좀 그렇지만 그냥 재미있자고 적어봤어요.

책읽기도 시 읽기도 건강하지 못하면 어려운 일이 되어버리고 더구나 즐기기는 더욱 요원한 일인것 같아요. 건강하고 행복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자주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맥거핀님께도 늘 행복과 건강의 여신이 함께하길 빌겠습니다.
 

 

지난 일요일 오전 6시가 조금 지난 시간. 세곡동에서 택시를 타고 사당역까지 갔다. 이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대중교통편도 모르고, 7시에 출발하는 창녕행 답사버스에 늦을세라 불안한 마음 때문에 탄 택시였다. 날씨가 잔뜩 흐려 있어서 일기예보가 궁금했던 나는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라디오 소리는 정말 작았다. 하지만 채널을 확인하지 않아도, 내용을 듣지 않아도 그 격앙된 어조만으로도 금방 그것이 특정 종교 방송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기독교 방송인가요?’라고 조심스레 물었다. 기사는 “예, 작게 듣고 있다가 손님이 싫어하면 바꿔요.”라며 볼륨을 조금 높였다. 일기예보를 듣고 싶어서 물어보는 나를 기사는 기독교에 관심 있는 것으로 오해했던 모양이다. 교회 다니느냐고 묻는다. 나는 안 다닌다고 했다. 절에 다니느냐고 재차 묻는다. 안 다닌다고 했다. 일요일마다 가서 ‘좋은 말씀’을 들어야하는데 일 때문에 더러 빠진다고 했다.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이렇게 라디오로 ‘말씀’을 듣는다고 하며 볼륨을 더 높인다. 나는 기분이 좀 안 좋아졌다. 나는 오늘 비가 올지 안 올지 좀 궁금할 뿐 그가 신앙인으로서 ‘말씀’을 듣는 것에 내가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돈 내고 택시를 탔지만 라디오채널 선택권까지 내 몫으로 챙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기사가 두 번씩이나 볼륨을 높이면서 자기는 몸에는 성령이 들어있고 그것이 주는 기쁨으로 충만하고.......교회에 안다니는 사람은 그런 것을 모르고....... 블라블라...

 

나는 입을 딱 다물어 버렸다. 지난밤 늦게까지 『언더그라운드』를 읽으면서 찾아보았던 옴진리교 교주의 모습이 떠오르며 혐오감이 확 밀려왔다. 기사는 자신의 신념을 내게 계속해서 불어넣느라 내가 불쾌하든 말든, 혐오감을 느끼든 말든 개의치 않고 목소리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수양이 부족한 내가 언제까지 참을 수가 있었겠는가. 차가 예술의 전당을 지날 무렵, 지갑에서 돈을 꺼내며 말했다. 나는 종교인은 아니지만 가끔 불경도 보고 성경도 본다. 나는 예수님을, 성경을 마주하고, 아주 개인적으로, 1대1로 만나고 있으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시라고. 택시비가 9300원인가 나왔는데 내게 만 원짜리가 없었다. 미안해하며 오만 원 짜리를 내밀자 잔돈을 거슬러주면서 계속 무어라 ‘말씀’중이시다. 문 열고 내린 내 손으로 만 원짜리가 먼저 건너오고 천 원짜리가 건너오고 동전이 마지막으로 내 손에 건너오기까지 아저씨의 ‘말씀’은 계속되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는 일용할 양식을 내려달라고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일용할 환상을 내려 달라고 기도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댓가로 자아의 일정부분을 지불했을 것이다.

 

창녕에 도착해서 관룡사에 올랐더니 여기도 ‘말씀’ 중이시다. 법당에서 조근조근 법문을 하시면 좀 좋으랴만,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말씀’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고 찌직 거리는 기계음 때문에 절간이 절간이 아니다. 잠시 스쳐가는 내 미간이 이렇게 찡그려지는데 산 속의 동식물은 어떠하겠는가. 어째서 도시나 산 속이나 이렇게 ‘말씀’은 넘쳐나는가? ‘말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다는 말인가? 나는 돌아와 아래와 같은 시를 몇 번씩이나 되풀이 읽으며 마음을 달래고 있다.

 

 

꾸오바디스/이영광

 

 

 

날 사탄이라 욕하고 행패 부렸던 택시를 다시 타고 말았다.

나도 점잖진 못했지만,

소규모 베드타운의 비극이다.

그자, ‘베드로맨’은 이제부터 잘 좀 지내보자고

아, 원수를 사랑하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웃었다.

나는 정신을 잃느니 그냥 사탄하겠다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촛불도 없이 헤매고 다니는

당신 교회의 ‘우리 장로님’이라는 이나 얼른 좀 사랑해주시라고 말했다.

서로 사랑해야 하는 원수들이 함께 사는 곳이야말로 지옥이고

원수를 만들고서야 사랑을 싸지르는 지복의 착란 속에 사느니

차라리 선량한 백치가 되겠으며,

당신이 순교자가 될지 안될지 알 도리는 없지만

날 지옥에서 내려준다면, 백번 지각을 하더라도

깁스한 다리를 끌고 걸어서 ‘로마’까지 가겠노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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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2-05-17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종교계에서 한번씩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터져 나오게 되어서 그런지
요즘 종교에 대한 대중의 인식과 시선이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는거 같아요.
그리고 너무 자신이 믿고 있는 교리를 타 종교와는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꼭 알아야 할 진리인 것처럼 말하는 것도 좋지 못하고요..
종교에서 강조하는 '말씀'이 옳은지 아닌지 구분해서 믿으면 좋을텐데 말이죠 ^^;;


반딧불이 2012-05-18 09:37   좋아요 0 | URL
종교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종교단체의, 또 몇몇 교인의 문제겠지요. 그것이 불교든, 기독교든...싸잡아서 문제삼을 수는 없다고 봐요.^.^

쉽싸리 2012-05-18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 종교의 장점을 얘기하면서 다양성을 많이 꼽는데요. 이것도 이제 한계에 다다른건 아닌지 싶어요.
교회와 절등이 너무 외세 확장에만 몰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교회와 절은 너무 가까이 있고, 어디 먼 산속에라도 들어가야지 싶어요...
다가오는 초파일에 연등이라도 제대로 바라 볼런지...

반딧불이 2012-05-19 00:5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절은 산속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지나다보니 교회처럼 마을 한복판에 내려와 있는 절도 있더라구요.
저는 연등도 바라보고 크리스마스 트리도 바라보고 다만 구원은 찌질한 저 자신에게서 구하려구요.

글샘 2012-05-18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국에 가면 술도 없고 여자도 없고... ㅋ 쾌락도 없을 거라고 지옥이 낫지 않을까? 하던 강유원 샘 유머도 있었는데...
요즘 높은 분들이 사시는 거 보면, 천국에 가면 더 고급 술집과 이쁜 여자들이 많을 거 같아요. ㅋ 천국으로 갈까봐~~

반딧불이 2012-05-19 01:00   좋아요 0 | URL
ㅎㅎ 글샘님께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가 있는 '아픈 천국'을 권해드리고 싶은뎁쇼!

oren 2012-05-25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강권하는' 신앙인들을 만나는 건 딱 질색인데, 여전히 주변에는 교회에 다니는 분들이나 성당에 다니는 분들이나 절에 다니는 분들이 참 많기도 많더군요. 저 역시 개인적으로는 성당이나 교회나 절이나 스스럼없이 들락거리는 편인데, 그래도 고즈녁한 풍광 속에 자리잡은 사찰에 조금 더 마음이 끌리는 느낌도 가지고 있답니다. 올해 봄에는 영월 법흥사와 양양의 낙산사를 '여행길에 잠시' 들른 적이 있었는데, 얼마 전에 낙산사에 가서는 난생 처음으로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연등'을 밝혀달라고 5만원권 2장을 기꺼이 쓰고 왔답니다.('연등 접수'도 낙산사 원통보전은 벌써 마감되었기 때문에 보타전에 1년간 달아준다고 하더군요.)

반딧불이 2012-05-26 01:39   좋아요 0 | URL
저는 시어머니의 강권에도 오로지 할렐루야로 20년을 넘게 맞서고 있는 나쁜 며느리어요. 구원은 바란적도 없고 헌금도 시주도 한번 한 적 없는 저는 삶이 곧 지옥이고 천국이려니 생각하고 살려고요.
음...저도 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연등을 밝힐 날이 있을 것 같아요. oren님 말씀 참고삼아 일찍 신청해야겠군요.
 

 

동행/김기상

 

 

어디 갈 곳이 있어

칡넝쿨 바쁘게 허공을 기어오르는지

소나무는 알고 있었나

제가 일군 길을 내주었다

소나무가 죽고

칡넝쿨은 그만 길을 잃었다

치렁치렁 머리 풀고

가던 길을 되짚어 돌아와

정말 죽은 것이냐

뿌리 가까이 귀를 댄다

 

 

자기가 일군 길을 다른 사람에게 내주는 거 쉽지 않은 일이다. 칡넝쿨 때문에 소나무는 죽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길을 내주었던 소나무가 죽으면 길을 잃은 칡넝쿨은 다른 나무로 옮겨 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칡넝쿨은 ‘치렁치렁 머리 풀고/가던 길을 되짚어 돌아와 ’‘뿌리 가까이 귀를 대고’묻는다. ‘정말 죽은 것이냐’고.

시인은 인간중심주의의 사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칡넝쿨과 소나무 공생은 그래서 시인에게 보였던 걸까? 아니다. 시인에겐 인간이 동식물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이 없다. 그 겸손함이 이런 시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인간이 사물과 분리되지 않았을 때, 즉 자연의 일부였을 때를 나카자와 신이치는 ‘대칭성의 사회’라 부른다. 칡넝쿨과 소나무의 동행. 그것을 지켜보는 시인이 공생하는 대칭성의 사회가 10줄 시로 형상화되었다.

 

 

눈처럼  하얀 혹은 까만

 

 

염소가 새끼를 낳았다

어미의 가느다란 다리 사이로 빼꼼히 첫눈에 담았을 땅이

그를 받아낸 것이다

땅은 그랬을 것이다

정말 맘 푹 놓고 새끼는 나왔을 것이다

겨울의 언 땅인 줄도 모르고

김이 모락모락나는 몸을 무작정 던졌을 것이다

언 땅이 받쳐 든 새끼를 얼마나 부지런히 핥아댔는지

닳고 단 어미의 혀가 새끼의 까만 몸에서 반짝거린다

땅도 무던히 마음 졸였다보다 질펀하게 녹아있다

담장 옆 목련 꽃봉오리

보송보송한 털옷 한꺼풀 벗어주고.

 

 

엘리아데는 시간을 축적하는 삶이 아니라 매번 갱신하는 삶을 '영원회귀'라 불렀다. 원시인들은 카니발을 통해 자신의 과오를 모든 사람과 공유하고 새롭게 태어났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우주로부터 나왔다'를 살았다. 그것이 그들의 존재증명이었다. 인디언 세계에서 remember, 다시 멤버가 되는 것은 다시 우주의 멤버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어미 염소와 새끼 염소 그리고 맘을 졸여 질펀하게 녹은 땅, 더불어 목련

이처럼 아름답고 따스한 세계라니... 이곳에 수장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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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2-05-14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시집 읽기에 푹 빠져있는데 반딧불이님께서 소개한 시집들 꼭 읽어봐야겠어요 ^^
정말 시는 외국 시보다는 우리나라 말로 만들어 진 한국 시가 낫다는 생각이 들어요.

반딧불이 2012-05-16 13:57   좋아요 0 | URL
답이 늦어서 죄송해요. cyrus님의 경계를 넘나드는 책읽기... 앞으로도 쭈욱 계속되시기 바래요.
외국시도 외국어로 읽으면 더낫지 않을까요?

cyrus 2012-05-17 16:30   좋아요 0 | URL
민음사 세계시인선 시리즈로 읽어보긴 하는데,, 아무래도
우리말이 최고인거 같아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