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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에 가기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카프카의 『변신』을 처음 읽고 책을 덮었을 때 나의 첫마디는 “아니 그레고르 잠자는 계속 잠이나 자지 왜 깨어나서 날 이렇게 피곤하게 만드나?”였다. 알랭 드 보통도 나한테는 도통 인연이 닿지 않는 그야말로 보통이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검색하다가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이라는 책을 마주쳤는데 그 책의 저자가 알랭 드 보통이었다. 그의 작품을 검색해보니 상당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작가였고 목차를 훑어보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침 알라딘 헌책방에 『동물원에 가기』,『우리는 사랑일까』가 있어 준비해두었었다. 『동물원에 가기』가 옮긴이의 이름이 낯익고 책이 얇아서 먼저 집어 들었다.
아홉 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는 이 책은 얇다. 처음 한번 읽고 책 뒤에 붙어있는 가격표를 보고 헌책사길 잘했다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가 8500원짜리를 3830원에 샀다. 내가 읽으면서 밑줄을 긋기 전에는 새 책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비록 3830원에 샀지만 8500원의 값이 궁금해 다시 읽어보았다. 얇은데다가 만화 같은 그림도 중간 중간 끼어있어 가벼워 보이기까지 한다. 책 표지를 홀딱 벗기고 보니 책은 제법 고급스러워 보인다. 고흐가 즐겨 마셨다고 해서 나도 마시고 러시아의 가루비누인지 자루비노항인지로 가는 뱃바닥에 널브러졌던 압셍트 빛보다 좀 진하고 고흐의 그림에 자주 등장해서 나를 한숨짓게 하는 딥 블루 빛이다. 책값 때문에 별 얘기가 다 나왔지만 정작 알랭 드 보통이 내게 더 이상 보통이 아니게 된 건 책 표지 때문은 아니다.
내게는 지적 사치 혹은 허영심이 있는 것 같다. 좋게 얘기하자면 지적 호기심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굳이 미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또 내게는 감각적인 것들을 무시하려는 경향도 있어왔다. 어디서 학습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고치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다. 이로 인해 늘 생각이 몸을 지배한다고 믿어왔는데 최근 들어 몸이 내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내가 가진 지적 허영심과 감각적인 것에 대한 경시경향을 알랭 드 보통은 교묘한 방식으로 건드리고 간다. 그가 <일과 행복>에서 정리해놓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노동의 의미변화는 지적 허영심을 만족시켜 주었다. 마르크스를 이렇게 경쾌하게 인용하는 글을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진정성>은 클로이를 만나 저녁을 먹고 키스에 이르기까지,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상황에 따른 유혹자의 심정적 층위를 그려놓았다.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거짓말도 불사하지만 과연 그녀는 그의 거짓말 때문에 그를 더 사랑하게 되었을까? 그가 아무리 계획을 짜고 ‘피하기 위한 거짓말과 사랑받기 위한 거짓말’을 해도 결국 사랑은 계획에 의해서라기보다 우연에 의해 목표에 이른다. 그러나 과연 아무런 노력이 없었더라도 그 우연이 일어났을까는 생각해볼 일이다.
알랭 드 보통은 그가 읽은 다양한 영역의 책과 선인들의 말을 적재적소에 인용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펼쳐나간다. 그의 글에는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이면에 있는 비가시적인 것들을 찾아내어 보여주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또 너무나 사소해서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들을 우리 앞에 되살려내 보여주기도 하고, 인간이 오감으로 느끼는 감정의 층위들을 낱낱이 해부해 언어화하는 능력 또한 탁월하다. 감각적이면서도 동시에 지적인 글이 매력적이다. 그의 다른 글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