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0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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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새벽, 첫차, 첫인상, 첫키스, 첫사랑. ‘첫’으로 시작하는 단어들에서는 아련함이 묻어난다. 녹슨 기억을 더듬어야 할 만큼 나이가 든 때문일까, 그래도 여전히 ‘첫’자가 붙은 단어들에 대한 미련 때문일까? ‘첫’을 몇 번 발음 해보니 입이 열려 발음이 되는 순간 이미 윗니 안쪽에 혀가 달라붙고 가슴께까지 숨이 막힌다. ‘첫’이라는 글자 하나만으로도 이러할진대 오감을 통째로 뒤흔드는 사랑이라는 말과 합해진 첫사랑은 지구 밑을 지나가는 거대한 용암의 뒤틀림처럼 한 인간의 삶에 덮친 황홀한 재앙일지도 모른다.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다. 투르게네프 자신이 『첫사랑』은 ‘창작이 아니라 나의 과거’라고 말했고, 어머니의 하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아이가 하나 있었을 뿐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고 하니 말이다. 『첫사랑』은 나이 마흔이 된 독신남자의 입을 빌린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는 열여섯 살,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어머니와 함께 칼루가 관문 근처 별장에 살고 있다. 어느 날 별채의 허름한 곁채로 몰락한 자세키나 공작부인이 스물한 살의 딸 지나이다와 이사 온다. 아름답고 자유분방한 성격의 지나이다 알렉산더로브나 곁에는 백작, 의사, 시인, 경기병 등 젊은 청년들이 몰려다닌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반해버린 주인공 역시 이 무리에 합류하게 된다. 그녀의 곁에 있는 많은 남성들이 그의 경쟁자가 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지나이다는 그들의 열정을 유치하리만큼 즐길 뿐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허락지 않는다. 그녀는 주변의 남성들에게 당당하게도 “내게는 나를 정복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요....... 그렇지만 그런 사람하고 맞닥뜨릴 것 같지는 않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죠. 난 누구의 손아귀에도 잡히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라고 말할 뿐이다. 

자신을 정복할 수 있는 남성의 출현을 기대하는 지나이다는 자신의 곁에 있는 지위, 부, 열정, 권력 등을 상징하는 백작, 의사, 시인, 경기병 등이 자신을 추종하게끔 만든다. 그러나 결코 그녀는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추종자의 일원이면서 이것을 곁에서 지켜봐야하는 블라디미르에게는 이중 삼중의 고통이 따른다. 질투에 몸을 떨면서 사랑의 무모함에 휘둘리는 블라디미르는 자신이 사랑하는 지나이다의 꿈 이야기를 통해 그녀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진 것을 알아버린다. 

물보라가 치는 분수 옆에서 내가 사랑하고 날 지배하고 있는 사람이 서서 날 기다리고 있어요. 그 사람은 화려한 옷도 입지 않았고, 보석도 지니고 있지 않고, 아무도 그를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날 기다리며 내가 나오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물론 나는 갈 겁니다. 내가 그에게 가서 그이와 함께 머물려고 하고, 그이와 함께 정원의 어둠 속으로, 바스락 대는 나무 아래로, 물보라 치는 분수 아래로 사라지려고 할 때 나를 제지할 수 있는 힘이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자신을 완벽하게 지배하는 사랑, 그 사랑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는 없다는 지나이다의 사랑의 주인공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것은 지위도 부도 열정도 권력도 아니다. 어린아이 같은 블라디미르는 더더욱 아니다. 그녀의 사랑은 ‘정원의 어둠속으로’ ‘물보라 치는 분수 아래로 사라지’는 사랑이다. 블라디미르는 지나이다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아버린다. 집안으로 날아든 익명의 편지와 오랜 염탐을 통해 스스로 현장을 목격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블라디미르는 아버지에게도 지나이다에게도 나쁜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 때로 광적인 발작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하고 신중한 아버지가 오히려 더욱 커 보이기까지 한다.

자신의 아버지와 사랑에 빠진 지나이다를 사랑하는 블라디미르는 그녀의 모습에서 진정한 사랑을 배운다. 공작이라는 어엿한 신분을 가진 여자가 백작이나 의사 시인 등 많은 선택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자신의 장래가 파멸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부남을 사랑한다는 것. 채찍질을 당하면서도 비명을 삼키고 그 상처로 입술을 가져가 천천히 핥는 것 등을 보면서 블라디미르는 사랑은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열정과 헌신이라는 것을 배운다. 그리고 그에게 학습된 첫사랑은 평생 동안 그를 지배한다. 첫사랑은 그 ‘첫’이라는 그 발음이 주는 찰나적 속성에도 불구하고 용암처럼 한 사람의 생을 영영 덮어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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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09-06-28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마디 남기고 싶지만 그냥 추천만,,,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