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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해 뱃길로 백두산에 다녀왔다. 서울-속초-러시아 세관- 중국 장영자 세관을 통과해서 훈춘에 이르기까지 가는 시간만 꼬박 하루가 걸렸던 것 같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 다다른 곳이지만 그곳에서 만난 사람은 노랑머리에 꼬부랑말을 쓰는 외국인이 아니라 나와 똑같은 모습의 우리말을 쓰는 사람들이었다. 훈춘에서 다시 백두산으로 가는 차창 밖으로는 옥수수 밭과 해바라기 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노란 물감을 쏟아놓은 듯한 해바라기 밭이 듬성듬성 보이지 않았다면 8월의 간도지방은 오직 녹색, 한 가지 색 뿐이다. 생각 없이 따라 부르던 노래 ‘선구자’가 가슴에 얹혔고 ‘광활하다’라는 단어의 의미를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용정의 윤동주 시인의 생가가 있는 명동촌에서 마대 자루에 가득 삶아놓은 옥수수와 단고기로 큰 대접을 받고 다음날 그의 묘소를 찾았다. 물어물어 찾아간 시인의 묘소에 절하고 둘러본 주변에는 봉분만으로 그것이 묘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뿐 비석도 없는 사람들의 묘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독립운동 하다 죽은 사람들,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간도로 이주해왔다가 까닭도 모르고 죽어간 사람들의 묘라고 했다. 아마도 지금쯤 무성히 자란 풀들로 봉분마저 사라진 곳도 많을 것이다.
『밤은 노래한다』는 1930, 40년대 간도(동만, 연변이라고도 한다)지방을 배경으로 일제의 토벌대에 쫓기는 조선 공산당원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간도는 중국 땅이지만 조선인들이 개척한 곳으로 조선인들이 더 많은 곳이다. 또 일본제국주의와 중국공산당, 그리고 조선공산당이 격돌하던 최전선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일어난 민생단 사건은 조선인들의 치열한 항일 혁명의지와 조선공산당 내에서 이념적으로 분열된 사람들의 피폐한 모습을 보여준다.
‘민생단 사건’을 박사논문으로 쓴 한홍구 박사는 ‘논문을 쓰는 내내 이건 논문이 아니라 소설로 써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논문의 주제에 담을 길 없는 그러나 빼놓기에는 또 너무나 암담하고 깊은 이야기들이 많다는 뜻이리라. 이 민생단 사건으로 처형된 항일 혁명가가 최소 500여명이라고 하는데, 일제의 토벌대에 의해 죽은 사람보다 항일혁명조직 내에서 서로가 서로를 죽인 숫자가 더 많다고 한다. 초기에는 혁명, 투쟁, 독립운동 등 정치적인 이유로 숙청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는 거의 신경증적 발작으로까지 보여질 정도이다. 밥을 설익게 하거나 태워도 민생단, 밥을 물에 말아 먹어도 용변을 자주 보느라 혁명과업을 게을리 한다고 민생단, 동지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려도 패배주의를 조장한다고 민생단으로 몰려 처형되었다니 말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김해연은 조선인으로서는 드물게 만철(남만주철도주식회사) 용정지사에 근무하는 측량기사다. 그는 혁명조직의 일원이었던 이정희를 사랑하게 되면서 잔인한 운명에 휩싸이게 된다. 이정희는 토벌대의 정보를 빼내다 발각되자 자살한다. 그 충격으로 해연은 아편에 빠지기도 하고 그녀가 죽은 곳에서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심리적 후유증으로 말을 잃은 해연이 용정의 사진관에 일하다가 혁명조직의 또 다른 일원인 여옥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여옥과 경성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할 무렵 토벌대의 습격으로 여옥은 한쪽 다리를 잃게 되고 해연은 민생단 혐의자로 체포된다. 같은 혁명조직원들이지만 중국공산당이 우선이냐 조선 공산당이 우선이냐로 서로를 죽고 죽이는 와중에도 해연은 살아남는다.
소설을 읽으면서 전반부에서는 내내 최인훈의 『광장』이 떠올랐고, 후반부에서는 캔 로치 감독의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오버랩 되었다. 전반부에는 보들레르, 바쇼, 푸쉬킨 등이 등장하면서 시적인 문체의 아름다움이 읽는 이를 매료시킨다. 후반부는 이정희를 중심으로 혁명도 사랑도 이루지 못한 채 어두운 역사속으로 사라져간 사람들의 기록으로 읽는 이마저 격랑에 휩쓸리는 느낌이다. 내가 다녀왔던 용정의 그 이름 없는 무덤들 중에 이정희의 무덤도, 그녀를 사랑했으나 혁명에 치여 서로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무덤도 함께 있을 것만 같다.
* 어디서 눈동냥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작가가 꼭 붙이고 싶어한 제목이 있었다고 했다. <사랑하라, 아무런 희망없이> 인지 <사랑하라, 희망없이>인지 그것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밤은 노래한다>보다 <사랑하라, 아무런 희망없이>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