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풀베개 ㅣ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28
나쓰메 소세키 지음, 오석륜 옮김 / 책세상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
|
|
|
산길을 올라가면서 생각했다.
이지(理智)에 치우치면 모가 난다. 감정에 말려들면 낙오하게 된다. 고집을 부리면 외로워진다. 아무튼 인간 세상은 살기 어렵다.
살기 어려운 것이 심해지면, 살기 쉬운 곳으로 옮기고 싶어진다. 어디로 이사를 해도 살기가 쉽지 않다고 깨달았을 때, 시가 생겨나고 그림이 태어난다.
|
|
|
|
|
『풀베개』의 시작 부분이다. 화가인 화자는 산길을 올라가면서 시와 그림, 즉 예술에 대해 생각한다. 산을 올라가다가 비를 만난 화자는 비를 피해 들어간 찻집에서 주인 노파로부터 가까운 온천장에 시집을 갔다가 돌아온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부모의 강권으로 인해 원치 않는 남자와 결혼을 했고, 전쟁으로 인해 남편이 다니던 은행이 망해버리자 남자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 있다는 것이다.
그림 도구를 들고 여행을 온 남자는 온천장으로 찾아들고 주인공 나미를 만난다. 나미는 늙은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며칠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나미와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나미의 주변 인물들을 알게 된다. 주변 인물 이래봐야 골동품을 수집하는 그녀의 아버지, 그림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달마의 족자를 걸어놓고 잘 됐다고 득의양양해하는 관해사의 주지, 입대를 앞두고 있는 나미의 사촌 동생 규이치가 전부다. 화자는 자신이 머물고 있는 여관 주변의 절과 연못 등을 둘러보면서 그림을 그리려고 하지만 이곳에 머무는 동안 단 한 장의 그림도 그리지 못한다. 이야기는 나미의 조카 규이치를 요시다의 정거장까지 마중하는 것으로 끝난다.
『풀베개』는 산길을 올라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기차역에서 끝을 맺는다. 이 독특한 구성 속에 소세키는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론을 담았다. 산길을 올라가 그가 머물렀던 곳은 예술의 세계이고 규이치가 전쟁에 나가기 위해 몸을 실은 기차역은 문명의 세계이다. 산속에서 그가 대하는 모든 사물들은 섬뜩하리만큼 아름답지만 문명의 대표주자인 기차에 대한 그의 묘사는 자못 비판적이다. “풀로써 베개를 삼는다.”는 제목이 말해주듯이 그의 예술론은 문명과 충돌하고 개조하려는 의지보다는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는 있지만 문명과 일정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데 있다.
그에 의하면 예술가는 “네모난 세계에서 상식이라고 부르는 한 모퉁이를 마멸하고 세모꼴 속에 사는”사람이다. 또 “예술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인간 세상을 느긋하게 만들고, 사람의 마음을 풍성하게 해주는 까닭에 소중”한 사람이다. 그는 예술가가 어떤 사람인지 예술가가 왜 소중한 사람인지 단지 정의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마치 그의 글은 자신의 이런 정의를 보여주듯이 동백, 목련, 모과, 차, 모든 감정을 다 담고 있는 인간의 얼굴 등에 대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은 듯하다.
개미대가리 만한 글자들을 모아서 그가 만들어 내는 언어의 그물을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십세기 문명을 대표하는 것으로 기차를 꼽은 그가 현대 문명의 위험에 대해서도 토로하지만 무지개로 옷감을 짠 듯한 그의 아름다운 글 앞에서 그것은 뜨거운 물에 죽어 떠오르는 해파리 같다. 그가 펼치는 예술론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개성’이다. ‘개성’은 그의 작품 전편에 떠오르겠지만 남은 작품들에서 어떻게 변주되는지 지켜 볼 문제다.
* 책속에는 일본의 고유어들이 많이 나온다. 책 뒷편에 '주'로 모아 두었는데 책 읽는데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읽다가 의미가 통하지 않아 찾아보다보면 감동과 의미의 맥이 툭툭 끊어지는 것을 여러번 경험했다. 혹 관계자들께서 보시면 참조해주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