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시로
나쓰메 소세키 지음, 최재철 옮김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0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 후』, 『문』과 함께 소세키 초기 삼부작으로 불리는『산시로』는 1908년 아사히신문에 연재 되었다. 소세키가 도쿄제국대학의 교수직을 그만두고 아사히신문의 문학기자로 옮긴 다음해다. 1904년부터 발표되기 시작한 소세키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이름이 없었다. 명료하게 이름이 등장하고 그것이 책의 제목이 된 경우는 『산시로』가 처음이다.

산시로는 구마모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제국대학 문과생으로 진학한다. 그는 일본의 최남단 규슈의 후쿠야마에서 기차를 타고 혼슈의 도쿄로 간다. 기차에서 만난 여자와 나고야에서 하룻밤을 함께 지내게 되는 23세의 오가와 산시로. 한 모기장 속에서 잠을 자게 되지만 깔려있는 시트를 둘둘 말아 여자와 자기 사이에 흰 경계선을 만들고 수건 두 장을 깔고 반듯하게 잠을 잔다. 다음날 산시로는 여자로부터 ‘어지간히 배짱 없는 분’이라는 말을 듣는다.

‘어지간히 배짱 없는 분’은 도쿄에 처음 도착해서 전차의 땡땡 울리는 소리,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모습, 큰 빌딩이 줄지어선 모습, 어딜 가나 목재가 방치되고 돌이 쌓여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란다. 도쿄의 대단한 활력에 놀라고 불안해하면서도 그는 차츰 도시 생활에 적응해 간다. 고향의 연고로 알게 된 이과대학원생 물리학자 노노미야와 그의 여동생 요시코, 같은 강의를 듣는 돈키호테형 청년 요지로, 세속을 초월한 듯 아무런 욕망이 없는 ‘위대한 어둠’이라는 별명의 히로타 선생, 아름다운 신여성 미네코, 실물크기의 미네코 그림을 그리게 되는 화가 하라구치 등이 산시로가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이다.

교내 연못에서 처음 만난 미네코를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만나게 되면서 산시로는 그녀를 마음에 두게 된다. 마음을 온통 그녀에게 빼앗기고 있지만 산시로는 어떤 행동을 하기에는 ‘어지간히 배짱 없는 분’이다. 결국 그는 미네코에게 사랑을 고백하기는커녕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흔히 『산시로』를 풋풋한 사랑소설, 청춘 교양소설이라고 부른다. 어느 곳에 중점을 두느냐의 문제겠지만, 둘 다 옳고 또 둘 다 그르다고도 할 수 있다. 사랑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사랑고백은커녕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는 산시로의 담백한 사랑 때문에 답답함을 너머 화가 날지도 모르겠다. 당시에 일본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아직 생기기 전이었나 회의하면서 나는 이 답답함을 그동안 보고 읽은 영화적, 문학적 사랑에 내가 너무 오염된 탓을 했다. 하지만 소세키가 산시로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대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아름다운 미네코는 교육받은 여성이고 교회에 다니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자신 명의의 소액당좌예금통장을 가지고 있다. 당시는 호주인 남자가 생활비를 책임지고 여자로부터 가사활동이나 육아를 제공받고, 성적 욕망을 충족 하던 시기였다. 남자가 여자를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권력구도 속에서 미네코는 경제적 주체로 등장하는 예외적 여성인 셈이다. 미네코에 비하면 산시로는 고향의 어머니로부터 교육비와 하숙비를 송금 받고 있다. 학문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자립하지 못한 상태이다. 산시로뿐만 아니라 『산시로』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정신은 살아있지만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모두 독신자이거나 미혼이다.

『산시로』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사랑이야기뿐만이 아니다. 도쿄와 지방도시와의 현격한 발달의 차이, 대학의 강사나 연구원인 노노미야의 잦은 이사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당시의 경제 상황, 요지로와 히로타 선생의 입을 통해서 전하는 문학과 사회에 대한 소세키의 생각 등. 근대문학의 갖가지 요소들이 보석처럼 박혀있다.

한 가지 덧붙여야 할 것은 이 책의 내용이 아니라 책 자체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 것으로 2007년 9월 21일 발행 수정판 2쇄다. 수정판이라는 말을 적어놓지나 말던가. 수정까지 거쳤는데도 내 눈에는 오자가 모래알처럼 박힌다. 18-19쪽에는 오탈자 3개가 몰려있다. 종이 질은 좋은지 모르겠으나 스탠드 밑에 어떤 각도로 놓아도 반사가 되어 눈이 너무 피로 했다. 주석을 책 뒤편에 모아두지 않은 것은 좋았지만 45번 주석은 똑같은 번호가 세 번이나 나온다. 내 독서량이 극히 미약한 탓인지 이런 주석처리는 아직 보질 못했다. 출판 관계자분, 오자를 직접 찾기 불편하시거든 언제든 연락하시기 바란다.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0-01-31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오랜만에 주신 글이어서.. ^^
일본 영화 중에 '좋아해' 라는 영화가 있는데 알고 계실 수도 있겠다 싶어요. 반딧불이님. 그 영화에 등장하는 두 남녀는 약 15년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수끼다.. 일본어로 '좋아해' 라는 말을 하지 못하다가 결국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는 걸로 영화가 끝나는데 정말 한편의 수채화 같이 아름답거든요. 산시로의 담백한 사랑 처럼 답답함을 너머 화가 날만도 한데 저는 너무 아름답고 소중하게 본 영화로 남아서 글을 읽어가며 그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언급하신 소설처럼 그렇게 사회상을 많이 읽어낼 수 있는 영화는 아니었어요.
그나저나 건강하셨지요?!...반딧불이님.
날도 많이 푸근해졌습니다. ^^

반딧불이 2010-01-31 22:51   좋아요 0 | URL
그간 평안하셨는지 저도 궁금했습니다만 안부를 여쭙지도 못했네요. 새해 첫날부터 이상하게 들락거릴 일이 많아서 잠시 소원했어요. 날짜를 보니 꼬박 한달만에 리뷰를 올리는 거네요. 영화는 아직 못봤는데 현대인들님이 주신 정보가 있으니 화가 나진 않을거에요. 꼭 챙겨 볼께요. 건강하세요.

라로 2010-02-04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져요!!!!"출판 관계자분, 오자를 직접 찾기 불편하시거든 언제든 연락하시기 바란다."라니!!
저도 종합편 기대할께요,,,,님 덕분에 소세키에 대해 조금 알게 되어 기뻐요,,,하지만 아직 읽을 엄두는 안나고 님의 리뷰나 앞으로의 종합편으로,,,^^;;;;

근데 요즘 많이 바쁘세요???

반딧불이 2010-02-05 00:12   좋아요 0 | URL
나비님~ <도련님> 읽어보세요. 금방 반하실거에요~
바쁘자고 작정하고 바쁜건 아니구요. 이상하게 새해 첫날부터 나가게 되더니 바깥일이 너무 많아요. 이렇게는 살수 없다!!! 제발 설날까지만이다.. 혼자 빌고 혼자 다짐하고있답니다.

바밤바 2010-02-21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네요. 글 정말 잘 쓰시는 듯^^

반딧불이 2010-02-22 16:19   좋아요 0 | URL
과찬의 말씀을....저도 바밤바님의 글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있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4-07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주류에 들고자 길을 떠난 근대의 청년으로 <산시로>를 읽었는데요. 물론 여성을 찾아 떠난 길이기도 하구요. 그런 면에서 모리 오가이의 <청년>속의 고이즈미 준이치와 매우 비슷하죠. 소설도 물론 비슷하구요. 실제 <청년>속엔 나쓰메를 닮은 강연자가 나오기도 합니다. 연구자들은 그가 나쓰메라고 하죠.
'반딧불이'님의 나쓰메 소세키 서평을 죽 읽으며 가졌던 생각을 좀 써 볼게요. 중세적 교양 혹은 감정과 힘겹게 싸우는 나쓰메의 주인공들이 그걸 벗어나 근대적 주체로 섰을 때 묘하게도 천황, 아버지, 선생님 같은 인물들에 다시 등을 기대죠. 애국주의 혹은 순결주의에 시선을 빼앗기는 그들을 보며 전 불편함을 가졌습니다. 그런 면에서 나쓰메가 근대에 대해 갖는 생각의 안일함을 지적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나쓰메가 좋은 작가란 건 인정하지만 그가 식민주의와 천황의 존재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를 묻자면 생각을 달리 할 수밖에 없네요.

반딧불이 2010-04-07 16:51   좋아요 0 | URL
파고세운닥나무님. 우선 반갑습니다.
문학작품은 읽는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것 같아요. 모리 오가이의 작품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어요. 소세키 읽기가 끝나면 당대의 작품들을 찾아볼까 해요.

사실 저는 아버지, 선생님, 천황이 근대의 일본인들에게나 소세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몹시 궁금해요. <마음>의 리뷰를 쓸 때 생각을 보태볼 작정이에요. 그런데 '나무'님과는 좀 다른 생각이 드는군요. 나무님께서는 '근대적 주체로 섰을 때 묘하게도 천황, 아버지, 선생님 같은 인물들에 다시 등을 기'댄다고 하셨는데 저는 어느 작품에서도 그런 느낌은 받지 못했어요.

<도련님>에서는 늙은 하녀 하나가 있을 뿐 고아나 마찬가지죠. <산시로>에는 어머니만 있을 뿐 아예 아버지는 등장도 하지 않아요. <그 후>에서는 아버지가 소중히 여기는 덕목을 거스르는 인물로 나오구요. <마음>에서는 생물학적인 아버지는 병으로, 정신적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선생님은 자살을 하죠.

소세키 작품의 어떤 주인공의 어떤 점을 애국주의, 순결주의로 빠지는 걸로 보셨는지....
사실 저는 소세키의 정치적 입장이 어떠한지가 몹시 궁금해요. 다만 <만한 이곳저곳>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배가 아프다는 말이 제국주의로 뻗어가는 자국에 대한 불편한 소세키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건 아닌가 짐작해보고 있을 뿐이에요.

이론서나 비평을 가능하면 아직 읽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저 나름대로의 생각을 모아보고 나중에 참고하려구요. '나무'님의 댓글 덕분에 이것저것 생각해볼 거리가 생겼네요. 고맙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4-08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선 <마음>을 놓고 얘기해 볼게요. 선생의 죽음이 일개인의 죽음으로 그치지 않는 건 우선 노기대장과의 관련성이겠죠. 노기대장의 죽음을 순사라 일컫는 선생은 곧 죽음을 결심하잖아요. 노기대장과 선생은 메이지 신민으로서의 일치감을 갖는거죠. 두 자살을 우선 천황에 대한 충성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버지 역시 곧 죽음을 맞는데, 천황과 노기대장을 언급하며 ‘뒤를 따르’니 ‘면목이 없’니란 말을 되뇌죠. 세 죽음의 모습이 모두 다르지만 그 안엔 국가란 이데올로기가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세 죽음을 그리는 작가의 태도 속에 비판적 거리를 저는 찾지 못합니다. 물론 전적으로 긍정하지도 않구요. 그건 나쓰메답지 않으니까요. 이것을 애국주의로 해석하는 게 무리일까요? 순결주의는 세 죽음의 이유가 친구에 대한 배신, 천황에 대한 배신, 결국은 국가에 대한 배신 때문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구요. <그 후>의 다이스케가 국가에 별무관심인 듯 하지만 이런 말을 내뱉어요. “문학자도 공로병(恐露病)에 걸려있는 동안에는 아직 멀었다. 일단 일러전쟁을 경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애국주의-전쟁의 현장에선 제국주의가 되겠죠-가 보이는 모습이 아닐까요?
나쓰메의 소설을 꼭 사회적 혹은 정치적으로 읽을 필요는 없겠죠. 하지만 누구나 심리소설로 읽을 까닭도 없을테구요. 그리고 정치적 언설이 아니더라도 그의 정치 의식, 사회 의식이 소설 속에 충분히 드러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걸 챙겨보는 게 적어도 식민 경험을 지닌 우리가 갖는 일종의 책임 아닐까 합니다.
나쓰메를 꼼꼼하게 읽고 계시는 ‘반딧불이’님을 만난 반가움을 이런식으로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못 본 나쓰메의 여러 구석들을 ‘반딧불이’님이 꼼꼼이 보고 계셔서 리뷰를 고맙게 보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반딧불이 2010-04-09 23:08   좋아요 0 | URL
닥나무님께서 말씀 하신 애국주의와 순결주의가 어떤 뜻에서 하신 말씀인지 이제 이해되었어요.
<마음>은 거의 죽음의 향연이라고 해야할 만큼 죽음이 많이 나오지요. 말씀하신 것처럼 아버지와 선생님은 죽음은 노기대장과 천황의 죽음으로 연결되고 있고 그리고 K의 죽음은 도와도 관련이 있구요. 이것은 말씀처럼 애국주의나 순결주의로 보시는 것이 마땅한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이러한 죽음들이 남아있는 주인공 '나'에게는 과연 어떤 의미인지에 더 관심있어요. 그러니까 쇼군이나 천황에게 죽음(할복)으로 충성을 확인하던 사람들 세대가 모조리 죽게되는 이 상황이 과연 남아있는 주인공에게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이제는 번, 막부, 천황 등의 공통항으로 묶이던 끈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생각해보는거죠.

<그후>의 다이스케가 하는 말은 러시아문학을 좋아해서 없는 돈으로 신간서적을 사 나르는 친구에게 한 말이죠. 그대로 옮겨보면 "그가 러시안 문학에 너무나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다이스케가 문학가라도 공로병에 걸려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며, 일단 러일 전쟁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야기가 안된다고 비꼬아준 적 있었다." 저는 이말을 서양문물(외국문학포함)을 무조건 좋은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으로 이해했어요.

닥나무님 말씀처럼 소설을 꼭 정치적 사회적으로 읽을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소세키를 읽다보니 저는 궁금해서 아니 답답해서 못견디겠어요. 소세키가 평생 다섯번이나 전쟁을 겪으면서, 더구나 최고교육을 받은자로서, 거기다 신문사에 있었잖아요. 이런 사람이 정말 교묘하게도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것(피안지날때가지 읽었습니다)이 신기할 정도에요.

'반가움을 이런식으로 해서 죄송합니다'<==천부당 만부당하신 말씀입니다. 오히려 감사하고 있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4-10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게 나쓰메의 모호함이라 생각됩니다. '과거와의 단절'이라 하셨지만 그것 역시 모호하죠. 그리고 그 뒤로 나쓰메와 그의 주인공들은 숨어버리구요. 그걸 '일본적'이라 일본인들이 말하며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리뷰에 강상중의 책들이 있던데요, 그의 책을 보며 아쉬웠던 건 그 역시 여느 일본인과 같이 나쓰메를 읽고 있어서에요. 전공인 정치학이 어찌 나쓰메를 만나면 쑥 들어가고 그저 작가와 인물의 심리만 찾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천황에 관해서도 그래요. 자이니치의 부당한 현실을 제공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천황에 관해 나쓰메가 선명한 시각을 보여주지 못하는데도 강상중은 정치학을 말할 때는 자이니치의 비참함을 얘기하지만 나쓰메에게선 또 제쳐두니까요. 그런 면에서 자이니치 서경식은 다르죠. 나쓰메에 대해선 일절 언급을 하지 않거든요. 모호함 뒤에 숨은 정치적 시선을 서경식은 아는듯 해요. 그것을 일본적이라 말하는 일본인들의 음흉함도 못마땅해하는 것 같구요.
나쓰메의 정치적 언설에는 그의 정치관이 좀 더 또렷이 드러납니다. 그가 다른 작가들에 비해 국가주의와 제국주의를 덜 드러냈을 뿐이지 없지는 않았죠. 없다고 믿고 싶은 사람-여기에 일본인들만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게 비극인듯 합니다-들이 많으니 언제부턴가 안 보이는 거겠죠. 늘 그게 아쉬워 이리 긴 댓글을 달아보았습니다. 나쓰메에 대한 다른 리뷰도 기다리겠습니다.

반딧불이 2010-04-10 16:58   좋아요 0 | URL
소세키 작품을 읽으면서 내내 견지했던 것은 근대에 대한 소세키의 입장과 그것을 어떻게 그려내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사실 자국에 대한 그러니까 일본의 제국주의에 관한 소세키의 입장은 크게 비중을 두지 않고 있었어요. 후기작으로 갈수록 그러한 면이 궁금해졌던 것이구요. 말씀처럼 '일본적'이라 말하면 달리 할 말이 없는듯 싶습니다.

강상중의 책은 조금 관점을 달리해서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가 글을 쓴 목적이 자이니치의 부당한 현실을 알리기 위해 쓴 책은 아니었으니까요.

지금까지 소세키의 작품만에 국한했지만 말씀하신 정치적 언설도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혹 궁금한 것이 생기면 여쭙도록 할께요. 도와주실거지요? 닥나무님께서 다른 리뷰를 기다린다고 하시니 갑자기 리뷰 쓰는 일이 부담스러워지는군요. 어쨌거나 성의껏 댓글을 달아주시고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4-10 21:42   좋아요 0 | URL
저 역시 '근대'를 밑절미 삼아 나쓰메를 읽고 있습니다. 일본이라는 근대 국가와 민족을 만드는 데 그가 한 역할에 관심이 많구요. 누구 말마따나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라면 그러한 상상을 하는 데 있어 나쓰메가 소설로서 누구보다 큰 역할을 했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강상중에게 과한 기대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전의 양식을 띠는 글속에 자이니치의 현실을 뉘엿뉘엿 말하지만 작가와 주인공이 부닥친 현실을 밑둥에서부터 정치하게 보지 못한 게 아쉬웠습니다. 적어도 그가 우리 사회에 일본의 극우세력으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는 자이니치 지식인이라는 이름을 갖는다면 말이죠.
제가 리뷰를 통해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부담을 드리는 말도, 입에 발린 말도 아니구요. 저도 배우는 처지라 잘 알지 못하지만 서로 같고 다름을 알아가는 가운데 배웠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