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비싼 독> 제3권 ~제4권

칼을 숨겨놓은 지점에 다다르기 전에 난 뒤처졌고, 들판 출입구에서 다시 따라잡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끔찍한 싸움이벌어지고 있었다. 겨우 시간에 맞춰 도착한 것이다. 그림블의 개만 남은 상황이었다.
우리가 다가갈 때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가 그림블의 개를묶는 데 성공한 것이다. 곧바로 함성이 또 터졌다. 그리고 개에게 목을 물린 그의 모습(오, 내 사랑!)이 내 눈에 들어왔다. - P231

내가 그림블의 어깨를 움켜쥐며 말했다.
"개를 떼어내!"
그림블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일 초만 더 그러고 있으면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이 끊어질 것이었다.
난 앞으로 뛰어나갔다. 지금껏 어떤 생명도 일부러 해한 적이 없는 나였지만, 그리고 그 커다란 짐승이 그 사람의 목에 이빨을 박은 채 뒷발로 일어섰지만, 난 달려가 그 심장 깊숙이 칼을 찔러 넣었다. - P232

말로 설명하는 시간보다 더 빠르게 불이 타올랐다. 생명의 불꽃을 유지하기 위해 케스터의 입속으로 브랜디를 약간 흘려 넣은 뒤 캠릿 씨가 물린 상처를 불로 지졌고,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며 케스터가 깨어났다. 까무러친 상태라 마음의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 P232

"자, 자. "내가 말했다. 고통스러운 비명이 내 심장을 관통했다. "자, 다 되었어요! 이제 누구도 당신을 건드리지 않을 거예요"
캠릿 씨가 그의 상처에 붕대를 감았고, 난 찬물로 그의 얼굴을 닦아준 뒤 브랜디를 좀 더 주었다.
"상처가 깊진 않아요." 캠릿 씨가 말했다. "하지만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늦었을 리가 없어요." 내가 말했다. "오늘 내가 이 사람의수호천사니까요." - P233

"네가 그 사람 목숨을 살렸어. 정말이야, 프루. 
그런 일은 살면서 본 적이 없어! 우리가 들판 출입문을 막 들어섰는데, 저멀리 네가 보이는 거야. ‘말도 안 돼!‘ 내가 말했지. 그 말과함께 막 뛰었어. 잰시스도 뛰고, 근데 우리가 닿기 전에 네가그 개를 끝장내버렸어 상 받을 만해, 프루!" - P233

"얘야, 그 사람이 널 만난다면, 그리고 내가 생각한 그런 사•람이라면, 분명 널 좋아할 거야." 어머니가 딱 잘라 말했다.
이불을 덮어드리는데 어머니가 내 손을 붙잡았다.
"프루. 만약 그 사람이 다리나 팔이 하나뿐이거나 천연두로 얼굴이 다 얽었다면 그게 싫겠니?"
"싫겠냐고요, 어머니?" 난 생각할 필요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당연히 싫지 않죠. 오히려 더 사랑할 거예요!"
"그럴 줄 알았다, 얘야." 어머니가 아주 흡족하게 말했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줄 알았어. 참 기쁘구나. 그에게서 숨지마, 프루, 코스틀리 컬러 놀이를 했을 때처럼 용기를 내서 모든 걸 다 걸어." - P243

"뭐야? 도망가는 거예요? 왜 그래요. 프루 사른?" 그가 물었다.
난 고개를 푹 숙였고, 차라리 잠자리가 되었으면 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몸을 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그냥 웃었다.
"목숨을 구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러 온 사람을 대하는 방식치곤 아주 독특한데요, 프루 사른! 호수로 뛰어들 것처럼 도망치려 하다니." 여름을 만들어내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의 손을 통해 전해진 두근거림이 나를 뚫고 지나가 난 서있기도 힘들었다. - P288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가 집 밖으로 나가자마자 내 눈에 들어온 광경이란. 세상의 종말도 그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때는 가을걷이할 필요도, 힘겹게 돈을 모을 필요도 없이 다마련되었을 테니까. 그때는 누구에게나 상황이 똑같겠지만,
이것은 우리만의 일이었고 마차 바퀴가 밀 이삭을 짓밟듯 우리를 짓밟는 것이었으니까. - P338

어마어마한 굉음은 불타오르는 곡물에서 나는 소리였다.거둬들인 곡물이, 수년의 노동으로 거둬들인 전부가, 기디언의 영혼 자체이자 우리의 미래가 활활 타고 있었다. 만물의 종말을 초래할 거대한 혜성이나 별똥별이 하늘을 가르는 것도 아니고, 덜덜 떠는 세상 위로 암흑 같은 밤하늘에서 대천사가 요란하게 나팔을 불어대는 것도 아니었다. 고작 곡물이었다. 다만 우리가 가진 전부였을 뿐! 다만 그것을 가짐으로써 기디언이 밤낮으로 노예처럼 일하고 가족을 노예처럼 부리는 일을 그만두고 보통 사람들처럼 일할 수 있을 그것, 그래서 그를 사랑 넘치는 상냥한 남자로 만들어줄 그것.  - P330

수확이 오로지 탐욕이라면 씨뿌리기는 오로지 베푸는 일이다. 아주 세심하게 모아서 쭉정이를까불러 내버리고 소중하게 모셔두었던 것을 들고 너른 들을누빈다. 가진 것이라고는 그것뿐이지만 개의치 않고, 쟁여둘생각이라곤 없이 양손에 가득 담아 모두 뿌려버린다. 앞으로나아가며 이리저리 뿌리는데, 손이 크면 더 기분이 좋다. 이지역의 방식을 잘 모르는 사람은 아마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 P332

조용하게나마 오가던 어머니가 안 계시니 사른은 더욱 조용했다. 내가 어머니에게 의지했더라도 그럴 수 없게 어머니가 그리웠다.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에게 의지했던 사람이 가장 그렇게 마련이니까. 그래서 어머니들은 치맛자락에 매달리는 자식들이 있을 때보다 오히려 없을 때 누가 방해라도하는 듯 일이 더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다. 그땐 일할 마음이없으니까. 어머니가 손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며, 저녁에 기진맥진해서 돌아온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시던 모습을 떠올리며 난 해가 길어지는 4월 내내 문득문득 주저앉아 울었다. 이따금 찾는 티비를 빼면, 이제는 기디언과 나 둘뿐이었다. 어디에나 슬픔이 가득했지만 일은 예전처럼 이어졌다.  -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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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비싼 독> 제 2권




우리가 다가가자 노인들이 각자 잔을 손에 든 채로 움직임을 멈추고, 노래를 부르다가 입을 벌린 채로 나를 뚫어지게•쳐다보았다. 최신 인형극에서 쇼맨이 인형에서 손을 떼면 인형들이 한순간에 동작을 멈추듯이. 혈관이 드러난 불그레한 늙은 얼굴에, 차가운 햇빛을 받으며 여관을 등지고 앉은 그 얼굴에 겁먹은 표정이 어렸다. - P108

우리가 그들이 앉은 의자 앞을걸어가는 동안, 새끼 올빼미들이 고개를 돌리며 어깨 너머로빤히 쳐다보듯 고개들이 하나같이 천천히 돌아가며 스무 개정도의 시선이 술잔 위로 비스듬히 따라왔다.
감옥 문처럼 못이 박힌 문으로 들어가 어둑한 통로를 거쳐 실내로 들어서니 좀 더 지체 높은 사람들이 앉은 그곳에서도시선들이 내 얼굴에 꽂혔다. 그래도 바깥에서처럼 대놓고 보지는 않았다. 농부들과 그 아내들, 이른 아침 사륜마차를 타고 가다가 잠시 쉬면서 요기를 하는 사람 두세 명, 그리고 실버턴의 목사로 크리스마스를 맞아 집으로 가는 길에 말발굽이 빠져서 잠시 쉬고 있는 영주의 아들, 그들이 말없이 조심스럽게, 하지만 호기심에 찬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들 모두, 실내의 지체 높은 사람들이나 실외의 노인들이나 모두 내 언청이 입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난 불현듯 깨달았다. 각자의 지위와 학식에 따라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 P109

‘희한하고 색다른 존재가 아닌가!‘
‘저 여인은 분명 기형으로 태어난 인물이군!‘
‘밤새 산토끼가 된 처자구먼.
‘마녀일세. 언청이가 된 추한 마녀.
그전에 럴링퍼드에 두세 번 간 적이 있었고 그때도 아마 다•들 이렇게 빤히 바라봤겠지만, 그땐 어렸을 때라 의식하지 못했다. - P109

술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고, 난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싶었다. 무척 추운 날씨에 옷도 얇고 벽난로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지만 진땀이 솟으며 숨이 막혔다.
정말이지 난 마을 사람들을 사랑했고 그들도 나를 사랑해주기를 바랐고, 가축 몰이꾼이든 영주든, 주인이든 그 부인이든모두에게 애정이 있었으니까. 그들은 내 소풍의 일부이자 럴링퍼드와 세상의 일부고, 아이의 손안에 잡힌 작은 새가 한편으로 두려우면서도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듯 내 마음이 그들의 손안에 있었으니까. 난 먼 곳으로 가서 새로운 사람들과새로운 길, 아이들이 뛰노는 새로운 마을을 만났으면 했다. - P109

아, 정말이지 그런 곳에 가고 싶었다. 다만 그런 바람의 핵심은 그들이 내가 지나가는것을 보면 상냥한 표정을 보이고, 아이들은 미소 지으며 내게 꽃을 따서 던지고, 내가 여관이나 술집에 들어가면 ‘밤이 깊었으니 불 가까이로 와‘ 하고 말을 건네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 P110

그래서 실제 세상이 나를 대하는 방식이 내게 훨씬 더한 충격을 주었다. 워낙 외딴곳에서 살아서 그전에는 나의 비통한 처지를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성경 구절처럼 쇠사슬에 매이듯 고통에 단단히 묶인 내 처지를 이제는 깨달았다.
아, 난 문 건너편에 갇혔고, 커다란 못이 박힌 여관 문은 그문에 비하면 한갓 종잇장이었다! - P111

앞서 말했듯이 내가 분노한 기디언을 본 적은 몇 번 안 되는데, 그때가 그중 하나였다. 얼굴빛이 어두워지고 눈은 그속에서 호수 물이 출렁이는 듯 차가워졌다. 시리도록 차가웠다. 그런 눈빛으로 내려다보자 상대는 움찔했다. 그가 아주 느릿느릿 말했다. - P114

"이 애는 내 여동생입니다. 내가 마녀들과 함께 다이어폴산에서 춤출 마음이 있다면 그럴 겁니다. 그리고 위층 무도회에서영주 양반들과 춤출 마음이 있다면 그렇게 할 거고요. 하•지만 당신에게 춤을 추자고 청하지는 않을 겁니다. 영주님에게 표를 던지게 될지 그것도 잘 모르겠네요. 집안 여자들 관리도 제대로 못 해서 여식이 거장을 치고 돌아다니게 놔두는분께서 과연 땅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을는지? 회초리가 좀더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만."
"도라벨라!" 여동생이 그런 분쟁에 휘말려 무척 언짢아진그녀의 오빠가 소리쳤다.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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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어머니, 어머니!" 난 애원했다. "어차피 우리가 고칠 수도 없는 일인데 한탄은 그만하세요. 어머니가 우시는 건 못 견디겠어요. 어머니! 봐요!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자, 자, 어린양!"(어머니는 참 작고 허망해 보여서 난 어머니를 그렇게 부르곤 했다). "자, 그런 건 마음에 두지 말아요. 내가 하는 말 잘 들어요!난 차라리 언청이인 것이 더 좋아요!"  - P67

그 말을 내뱉은 뒤 난 집에서 뛰어나가 엉엉 울면서 쪽문을 지나 숲길까지 달려갔다.
내가 얼마나 큰 소리로 울었는지 여기저기에서 윙윙거리는날갯짓 소리가 들렸고, 숲속 위쪽 빈터에서 토끼 한 마리가내 울음소리를 듣고 길 중간에 꼿꼿이 앉았다. 축복을 내리는 목사님처럼 앞발 하나를 올린 모습이 마치 기독교인 같았다.
그의 사촌인 산토끼가 내게 준 것은 저주였을 뿐인데. - P67

왜 내게 그런 저주를 내렸는지 궁금했다. 산토끼가 원해서자유의지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악마가 그렇게 몰아댔을까?
내게 남편과 골풀 요람을 주기 싫어서 신이 그렇게 하라고내버려둔 것일까? 실없는 산토끼가 망쳐놓은 것을 바로잡는데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앞으로 오랫동안 주중이든 주말이든 매일 일해야 한다는 것이 내게는 참 기이한 일로 여겨졌다. - P67

언청이 수술이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은 알았다. 생각하면쓴웃음이 나왔다. 매서운 습지에서 날아오른 들꿩이 시든 헤더와 얼어붙은 하늘 사이를 가르며 요란하게 웃는 거무죽죽한 가을 저녁이 떠올랐다. 냉혹한 늙은 남자들이 쓰러지는 적을 보면서 그렇게 웃겠지. 떳떳한 자식을 둔, 빳빳한 꽃무늬 실크를 잔뜩 두른 지체 높은 부인들이 어여쁜 창녀가 태형을 당하는 것을 구경하러 가서 입을 부채로 가린 채
그렇게 웃겠지. ...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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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의 즐거운 하루‘ 중에서
여학생들의 대화가 온통 그것으로만 채워지는.. 학교에서의 즐거운 하루이다.


"아침에 보자." 아버지는 이렇게 말할 거고, 아버지가일하러 나간 뒤 곧바로 엄마와 엘리너는 잠자리에 들 것이다. 침대에 누운 엘리너는 하얀 드레스 차림으로 교회에서 결혼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남편이 될 남자는 자기를아프게 하지 않을 섬세한 사람, 오직 그를 위해서 오랜 시간 동안 간직해 온 순결을 좋아할 섬세한 사람일 거라고 상상할 지도 몰랐다.

엘리너는 런던의 나뭇잎들이 황갈색으로 물든 어느 가을날 오후, 투피스를 차려입고서 여행을 떠날지도 몰랐다. 함께 비행기에 오를 남자는 갸름하고 부드러운 손으로엘리너의 손을 잡을 테고, 둘은 함께 에어프랑스를 타고서 비아리츠로 날아갈지도 몰랐다. 여행을 마친 엘리너는 벽과 빛깔이 같은라벤더색 커튼이 드리워진 집으로 돌아올지도 몰랐다. 가스난로 속의 불꽃은 활활 타오르고, 자연목을 깐 바닥에는 카펫이 펼쳐져있고, 전화기는 연한 푸른빛을 띠고 있을지도 몰랐다.
"왜 그래?" 수지 크럼이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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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게으른 달‘이라니...
호텔 이름이 참 희한하기도 하다.
그런데 이야기는 더 희한하다.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도 정말 예사롭지 않다.
평범한 전개가 하나도 없다.
특별히 충격적인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특이하고 특별한 뭔가가 있다.

‘달은 게으르지 않아‘ 크로닌은 생각했다.
‘달은 보고 싶어서 조바심을 낼 거야. 달은하늘에서 구름을 걷어 낼 거고, 별들은 피범벅이 된 베개를 보면서 생각에 잠길 거야.‘
"댄커스 씨, 이곳을 게으른 달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뭐죠?"
댄커스가 소리 내어 웃었다. "집사람의 묘한 취향 때문이죠. 그 어감이 좋다는군요.
제법 인상적인 이름 아닌가요?"
"맞습니다." 달은 그녀의 소리를 좋아할것이 분명했다. 잘린 목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소리를, 고통에 겨운 울부짖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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