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람의 행복
이사를 했습니다. 이 도시에서만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을 살면서 다섯 번째 집입니다. 첫 번째 집은 지금은 재개발이 된 임대아파트였습니다. 열 평짜리 아파트에서 남매를 낳아 기르면서 좁은 공간이니만큼 가족 서로가 많이 부대끼며 살았습니다. 그 때는 좀 너른 아파트가 생의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맨손으로 출발한 터라 아파트 평수를 넓혀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나이에 이르고 보니 그 때도 나름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합니다. 크레파스의 색깔이 열 가지이면 그 열 개로 그림을 그리면 된다는 것을 이제야 터득을 합니다. 열 가지 색으로 그린 그림은 더 단순하여서 많은 색깔로 화려하게 그린 것보다 그림이 주는 이미지가 더 강렬할 텐데 말입니다. 오년 만에 같은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열세 평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번에는 임대가 아니고 감격스럽게도 첫 내 집 마련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조그마한 거실이 있어서 얼마나 행복했던지요.

그러다가 삼 년 뒤 바로 옆 동네에 스물다섯 평 신축아파트를 분양받았습니다. 남편이 퇴근해서 오면 두 아이를 데리고 아파트 신축 현장에 가곤했습니다. 기초공사를 하기 위해 포클레인으로 땅을 파고 있는 곳에 가서 이미 신축된 아파트를 그려 보곤 했습니다. 11층 저 높은 곳에 우리의 보금자리가 있겠구나, 가슴 설레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파트가 완공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우리는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여 년 뒤, 우리 가족은 다시 이 도시로 내려왔습니다. 떠날 때는 네 명이 떠났는데 그 사이에 아이들은 자라서 학업으로 집을 떠나있어서 우리 부부만 돌아왔습니다. 다시 둥지를 튼 곳은 시 외곽에 있는 아담한 벽돌 주택이었습니다. 칠 년 동안 살았던 그 집은 앞뒤로 다른 집들에 둘러싸여 볕이 잘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봄도 제일 늦게 찾아오는 ‘키다리 아저씨네’ 집이었습니다.
새로 옮겨온 집은 앞뒤가 훤히 트인 아파트 3층입니다. 문을 열어 놓으면 햇빛도 바람도 머뭇거림 없이 들어와 거실을 가득히 채웁니다. 그 풍성함에 부자가 된 듯합니다. 이제는 편리하고 값비싼 살림살이들보다 한 줌의 햇빛, 한 줄기의 바람에 더 마음이 갑니다. 아무래도 물질은 오래 사람의 마음을 잡고 있지는 못하나 봅니다. 남이 볼세라 구겨 넣어 두었던 눅눅한 마음을 꺼내 햇빛과 바람 앞에 펼쳐놓습니다.
이사를 하면서 옷가지, 살림살이들을 많이 정리했습니다. 남편이 십 년을 봉직하던 일을 그만 두고 자리를 바꿔앉느라 낯선 도시들을 전전하며 살았습니다. 그 때마다 손수 짐을 꾸렸습니다. 짐을 꾸리면서 보니 더 편리한 전자제품, 모양이 다른 그릇, 유행하는 스타일의 옷, 시간이 나면 읽어야지 하며 사둔 책들로 집안이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탐욕과 경쟁 심리는 아무런 여과 없이 내 생활을 침범해 들어와서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사를 와서 커튼을 달았는데, 새로 장만하지 않고 쓰던 것을 그대로 달았습니다. 십 년도 넘게 쓴 광목커튼입니다. 거실은 한 단을 뜯어내리니 그런대로 맞았습니다. 그런데 서재방은 두 번 접힌 단을 뜯어내어도 깡총하니 이십 센티는 족히 짧아 보입니다. 그전 같으면 새로 해서 달았을 터이지만 이것도 괜찮아 보입니다.
좀 모자라면 어떻습니까?
며칠 전, 부부동반 모임에 갔습니다. 부인들끼리 모여서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나이가 들면 좁은 공간에서 좀 모자라는 듯이 살아야겠다고들 했습니다. 방도 여러 개, 텔레비전도 두 대 이상이니 부부가 각기 다른 방에서, 다른 프로그램을 본다는 겁니다.
평균수명이 많이 늘었는데 그렇게 삼사십 년을 어떻게 더 살 거냐고, 그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제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모두들 다소 난감한 얼굴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수록 부부가 서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물리적으로도 조금은 협소한 환경이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부부는 둘 다 책을 많이 읽는 편입니다. 이사를 다닐 때마다 추려내도 살림살이 중에 책이 으뜸입니다. 세 벽면에 책장을 놓고 책상은 방 한가운데 두었습니다. 저는 큰 책상을 좋아해서 남편의 책상에다 대학에 다니느라 집을 떠나있는 아들의 책상을 마주 붙여놓았습니다. 높이도, 크기도 조금 차이가 납니다. 그전 같으면 이 두 책상을 처분하고 다른 큰 책상을 사고자 마음을 끓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쓰기로 했습니다.


남편의 책상은 제가 컴퓨터 작업을 하고 글을 쓰는 공간입니다. 그 너머에 붙여놓은 아들의 책상에는 프린터기와 읽어야 할 책 몇 권을 두었습니다. 요즘에는 날씬하고 세련되고 다양한 기능의 프린터기가 많이 나오는 모양이지만 제 것은 오래 되어서 덩치가 큽니다.
집에 온 아들이 책상의 삼분의 일은 차지한 그 프린터기를 보고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아둔 돈이 있으니 제 마음에 드는 걸로 새로 한 대 사라고 했습니다. 새 것, 단정한 것,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저의 취향을 아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눈시울이 잠시 뜨거워졌습니다. 물론 새 프린터기를 사주겠다는 아들의 말에 감동한 것 보다는 이게 가족이구나, 오래 멀리 떨어져 있어도 엄마의 취향을 잊지 않고 엄마에게 좋은 것으로 선물하고 싶어 하는 아들의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고장이 나면 그때 사달라고 사양을 했습니다. 아들은 제가 나이만 먹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잔가지들을 쳐내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했을 겁니다.
여느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나 역시 세상의 징검다리를 조심하며 건넜지만 가끔은 발을 빠뜨리기도 했습니다. 세상 속에 있는 갈등과 아픔, 시련, 고통들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모든 강들을 건너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다가 두어 해 전, 친한 친구를 암으로 먼저 보내고 나서 많이 아팠습니다. 거기에서 헤어 나오고 보니 세상이 조금은 다르게 보였습니다. 더 너른 집, 더 기름진 음식, 더 비싼 옷, 더 좋은 그릇들은 이미 이전의 의미를 상실하였습니다. 그런 것들을 추구하느라 얼마나 시간을 재촉하며 살았는지 모릅니다. 누구나 행복은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은 합니다. 그러면서도 탐욕을 버리지 못합니다.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퇴장을 할 때는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제 친구는 먼저 가면서 저에게 큰 선물 하나를 주고 갔습니다. 비우고 나눠야 행복해진다는 깨달음입니다. 채우려는 욕망에는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가질 만큼 가지고도 늘 결핍을 느낍니다.
세 개의 방 중에 중간 방에 서재를 마련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방문이 있는 벽과 나머지 두 벽에 열 두 개의 책장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한 면은 커다란 창문입니다. 방 중앙에 큰 책상 두 개를 놓고 보니 방문 앞과 창문이 있는 쪽에 꼭 한 사람이 누울 수 있는 두 개의 작은 공간이 생겼습니다. 창이 있는 잠자리에서 눈을 뜨니 그 깡총한 커튼 아래로 창틀 가득 파란 하늘이 걸려 있습니다.
이 작은 공간이 제가 우리 집에서 가장 사랑하는 곳입니다. 마치 『소공녀』의 세라가 쓰던 그 다락방 같습니다. 가끔은 이 작은 다락방에 남편을 초대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공간이 좁으니 둘이 친밀하게 누워 나란히 하늘을 바라보며 가슴 뛰던 시절을 마음껏 그리워해보아야겠습니다. 앞으로 또 어떤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자람의 행복은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을 작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