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정
김사인
1.
울 밑의 봄동이나 겨울 갓들에게도 이제 그만 자라라고 전해주
세요
기둥이며 서까래들도 그렇게 너무 뻣뻣하게 서 있지 않아도 되
요 좀 구부정하세요
쪽마루도 그래요 잠시 내려놓고 쉬세요
천장의 쥐들도 대거리하는 사람 이제 없다고 너무 외로워 마세요
자라는 이빨이 성가시겠지만 어쩌겠어요
살 구부러진 검정 우산에게도 이제 걱정 말고 편히 쉬라고 해주
세요
귀 어두운 옆집 할머니와 잘 지내라고 전해주세요
더는 널어 말릴 양말도 속옷 빨래도 없으니 늦여름 햇살들께서
도 고추 말리는 데나 거들어드리세요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미황사 앞
2.
죽는다는 일은 도대체 무슨 일인가요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요
버뮤다 삼각지대 같은 안 보이는 무슨 깔때기 같은 것이 있어
그리로 내 영혼은 빨려나가는 걸까요
아니면 미닫이를 탁 닫듯이 몸을 털석 벗고 영혼은
건넌방으로 드는 걸까요
아이들에게 말해주세요
마당에서 굴렁쇠도 그만 좀 굴리라고
어지럽다고
3.
슬픔 너머로 다시 쓸쓸한
솔직히 말해 미인은 아닌
한없이 처량한 그림자만 덮어쓰고 사람 드문 뒷길로만 피하듯
다니 던
소설공부 다니는 구로동 노동자 공아무개 젖먹이를 도맡아 봐
주던
순한 서울 여자 서울 가난뱅이
나지막한 언덕 강아지풀 꽃다지의 순한 풀밭
응, 나도 남자하고 자봤어, 하더라는
그 말 너무 신선하고 환해서
자는 게 뭔지 알고나 하는 소린지 되려 못 미덥던
눈길 피하며 모자란 사람처럼 웃기나 잘하던
살림솜씨도 음식솜씨도 별로 없던
태정 태정 슬픈 태정
망초꽃처럼 말갛던 태정
4.
할머니 할아버지 곁에서 귀뚜라미처럼 살다가 갔을 것이다
길고 느린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마루 끝에 앉아 지켜보
았을 것이다
한달에 5만 원도 안 쓰고 지냈을 것이다
휴대폰도 인터넷도 없이
시를 써 장에 내는 일도 부질없어
그저 조금만 먹고 거북이처럼 조금만 숨쉬었을 것이다
얼찐거리다가 가는 동네 개들을 무심하게 내다보며
그 바닥의 초본식물처럼 엎드려 살다 갔을 것이다
이제 더는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을
그 집 헐어진 장독간과 경첩 망가진 부엌문에게 고장난 기름보
일러에게
이제라도 가만히 조문해야 한다
새삼 슬픈 시늉은 할 건 없겠으나, (P.70 )
* 김태정(1963~2011) 서울에서 태어나 2011년 9월 6일 해남에서 세상을 떠났다. 시
집 [물푸레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 2004) 한권을 남겼다. 생전에 모 문화재단에
서 5백만원을 지원하려 하자, 쓸 데가 없노라고 한사코 받지 않은 일이 있다. 그의 영가
는 미황사에서 거두어주었다
계간 [창작과 비평] 2013년 가을호
- 웹진 시인광장 선정, < 2014 올해의 좋은 시 100選>-에서
식물적인 죽음
-故 김태정 시인을 생각하며
창으로 빛이 들면
눈동자는 굴광성 식물처럼 감응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빛이 희미해져갈 때마다
숨소리는 견딜 수 없이 가빠졌다
삶의 수면 위로 뻐금거리는 입,
병실에는 그녀가 광합성으로 토해놓은 산소들이
투명한 공기방울이 되어 떠다녔다
식물에 가까워지고 있는지
공기방울에서는 수레국화 비슷한 냄새가 났다
천천히 시들어가던 그녀가
침대 시트의 문양처럼 움직이지 않게 되었을 때
빛을 향해 열렸던 눈과 귀가 닫힌 문처럼 고요해졌
을때
이제 남자도 여자도 아닌,
사람도 사물도 아닌, 그 누구도 아닌, 오로지
한떨기 죽음으로 완성된 그녀
죽음이 투명해질 때까지
죽음을 길들이느라 남은 힘을 다 써버린 사람
모든 발걸음이 멈추고
멀리서 수레국화 한 송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P.58 )
- 나희덕 詩集,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에서
어느 물푸레나무 시인의 죽음
그녀의 마지막 계절은 어땠을까
뿌리 뽑아 씻어 들고 서울 떠나 해남으로 간
물푸레나무 한 그루 처녀
여린 가지 곱게 빗어 넘기고
치맛단 잡고 개울 건너듯 뿌리 여며 쥐고
미황사 그늘 속 깊은 자궁으로 돌아간 물푸레나무
태어날 때 아픔은 어미의 것이었지만
돌아갈 때 아픔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어서
뼛속 깊이까지 통점을 키운 물푸레나무
꽃이 피어도 몸이 아팠네
바람만 불어도 몸이 아팠네
낙엽이 지거나 눈이 내려도 몸이 아팠네
통점을 사랑해서 한 잎씩 따서 물었다네
통점을 사랑해서 한 뿌리씩 베어 물었다네
아플 때마다 용케도 마음이 나았네
꽃이 피어 아파서 마음이 나았네
바람 불어 아파서 마음이 나았네
낙엽 지고 눈이 내려 마음이 나았네
어느덧 그에게도 마지막 계절이 오고
아플 때마다 몸이 조금씩 사라지고 마음이 나았네
마지막 계절이 소진 됐을 때
태아처럼 웅크리고 작아지던 그도 소진되었네
물푸레나무 한 그루 처녀
물푸레나무 한 꽃의 아이
물푸레나무 한 잎의 태아
최선을 다해 사라져갔네 (P.62 )
-안상학 詩集,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에서
면벽24
-오래전 작가회의 사무실에서 만났던 김태정 시인의 부음을 듣고
미황사 아래 어디
해남 송호리 어디
무릎께만 한 땅거미도 슬금슬금 기어들던
푸성귀 널어논 마당을 지나
어느 독거노인 집 건넌방에 겨우 세 들어 살던
깍지 낀 손을 풀었다 쥐던
흙바람 벽면에 툭 던져 놓은
창 넓은 흰색 민모자 하나
낡고 허름한 추리닝 한 벌
텅 빈 액자 자국 하나
벽면에 홀로 남겨놓고
꼭 그렇게 떠나려고 했으리라
친구도 혈육도 세간 살이도 통장 잔고도 집 한 칸도
어떤 소식도 없이
(.....)
그녀는 그렇듯 떠났으리라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그녀의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을 돌아보고
느릿하게 또 돌아보며 (P.112 )
-강세환 시집, <앞마당에 그가 머물다 갔다>-에서
웹진 시인광장 선정, <2014 올해의 좋은 시 100選>을 읽으며 서문에서도 미리
밝혔듯, 작년 한 해 시단의 특징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로 시가 무척 길어졌다.
작년 수상작인 김신용 시인의 '잉어'에 이어 올해는 김이듬 시인의 '시골 창녀'
가 2014 올해의 좋은 시, 상을 받았다. 수상자와의 대담 중, 본명인 '향라(香羅)'를
필명인 '이듬'으로 바꾼 사연이 나온다. 2001년 [포에지]에 투고해 당선이 결정된 후,
나남출판사 [포에지] 편집부에서 연락이 왔다는. 본명인 '향라(香羅)'를 필명으로 바꾸기
를 제안해서 몇 번 거부하다가 다시 태어난다는 기분으로 필명을 고민하다, "순우리말인
'이듬'의 사전적인 뜻은 '바로 다음의' '다시, 거듭'이고 두벌'이란 뜻도 있어요. 음...진흙
을 초벌한 후 불에 두 벌로 구우면 훨씬 단단해지잖아요."
이곳에 실린 100편의 시들을 읽다가, 김사인 시인의 '김태정'이란 시를 반갑게 만나고
며칠을 내내, 마음에 넣고 다녔다. 지난번 읽은, 나희덕 시인의 '식물적인 죽음'과
함께. 세상에는 이렇게 살다 간 사람도 있구나...이런 사람도 있었구나, 하며.
무나물과 새로 담근 물김치로 소주를 마시며, 김태정 시인의 말간 얼굴을 자꾸만
떠올리는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