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나는 창을
등지고 앉아
책을 보고
글을 쓴다.
책을 보다가,
글을 쓰다가.
문득 뒤돌아보면
날이 밝아 있다.
나무들이 서 있다. (P.77 )
-김용택 詩集, <울고 들어온 너에게>-에서
내가 태어나고 자라 살던 마을로 왔다.
내 인생이 시작되었던 곳에 도착한 셈이다.
시를 정리하면서 어디서 많이 본 듯한데,
또다른 새 얼굴들이 보여서 설렜다.
참새와 잠자리가 같은 전깃줄에 앉는다.
발등을 내려다본다.
속셈 없는 외로움이 사람을 가다듬는다.
강가가 차차 환해진다.
아버지에 대한 시를 쓰면서 편안함을 얻었다.
홀로 멀리 갈 수 있다.
2016년 9월
설중매
우리집 진돗개 이름은 개다. 이름 부를 수 없을 때를 위
해 이름 없음을 이름 삼았다. 개란 이름은 언제 어디서나
계속 태어나니까.
진돗개 똥구멍에 검은 매화 한송이 피어 있다. 개의 가
슴에도 사철 바람이 이는지, 꽃잎 살랑거린다. 개 같은 세
상! 담배 연기 길게 내뿜는데, 제 이름 부르는 줄 알고 뒤
돌아 검은 매화 보여준다. 개도 눈길 받는 구석을 안다. 욕
하는 입은 꽃이 아니야, 매화가 옴찔옴찔 속삭인다. 그가
꽃잎을 땅바닥 가까이 대니, 뒤꼍도 매화틀*이다. 울 밑도
매홧간**이다. 네가 왕이다. 개가 왕후장상이 된 적 벌써
오래지 않은가.
깨끗한 뒤끝, 사람이든 짐승이든 내남없이 한송이씩 피
어 있구나. 몸이 화분이구나. 눈발 날리는 새벽, 오래도록
찾아 헤맨 현묘(玄妙)를 본다. 가슴속 회오리가 거꾸로 처
박힌 매화의 꽃대구나. 씹고 뜯고 으르렁거리는 일들이 섣
달 눈 녹은 물을 좋아하는 매화나무 뿌리 때문이구나.
억만송이 흰 매화꽃이
검은 매화 한송이 만나려고 현현(玄玄)한 밤하늘을 뛰어내
린다. (P.59 )
간장 게장
내 이름은 밥도둑이다. 등딱지는
열번 넘게 주조(籌造)한 이각반합(二角飯盒)이다.
밥 한 그릇 뚝딱! 게 눈 감추듯 치워버리는,
이 신비한 밥그릇을 지키려 집게손을 키워왔다.
손이 단단하면 이력은 두툼하다.
복잡한 과거가 아니라 파도를 넘어온 역사다.
양상군자(梁上君子)와 더불어 반상군자(飯上君子)로
동서고금의 도둑 중에 이대 성현이 되었다.
바다밑바닥을 벼루 삼으니 먹물마저 감미롭다.
음주고행으로 보행법까지 따르는 자들이
발가락까지 쪽쪽 빨며 찬양하는 바다.
내 등딱지를 통해 철통 밥그릇을 배워라.
밥그릇은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큰 그릇이 되려면 지금의 그릇은 버려라.
묵은 밥그릇마저 잘게 부숴 먹어라.
언제든 최선을 다해 게거품을 물어라.
옆걸음과 뒷걸음이 진보를 낳는다. (P.49 )
말줄임표
바늘이 지나간 한땀 한땀은 말줄임표 같다. 말줄임표에
는 마침표가 하나씩 박혀 있다. 말줄임표 하나에 일곱 문
장, 여섯 문장은 짧고 한 문장은 길다. 소실점을 향해 박음
질된 문장, 시의 운명이다. 마침표만 오롯하다. 삶이 흐느
낄 때마다 시는 골무처럼 깜깜해졌다. 골무는 마침표를 반
으로 자른 것 같다. 마침표에 손가락을 끼우니, 몸이 숯덩
이 전집(全集)이 된다. (P.72 )
-이정록 詩集,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