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시집은, 너의 이야기처럼 죽죽 읽히고

         어떤 소설은 너의 詩처럼 쿡쿡 아프게 읽히고

         그래서 나는 나무는 키가 큰데 꽃은 위를 향하고 있어 아래서는 좀처럼

         꽃을 보기 어렵다는 나무 상단에 튤립 모양의 연둣빛을 띤 노란색 꽃이 핀다는

         tulip tree라고도 하는, 백합나무 꽃을 생각하고 파란 수레국화를 생각하고

         계속 낑낑거리는 이웃집 개의 뭔가 애절하고 불안한 울음을 어찌할 요량도 없이

         견디고 있는 그런...속수무책의 시간인 것이다. 어쩔 수도 없이,

 

 

 

 

 

 

 

                     수레국화

 

 

 

 

 

                      오늘 이곳엔 한 사람만 빼고 다 왔습니다

 

 

                      마당엔 옛주인이 피운 꽃들 한창이네요

                      파란 수레국화를 보셨나요

                      그는 이제 올 수 없는 사람인지

                      파란색, 문득 빈자리의 색깔 같습니다

 

 

                      기억은 참 자주 밟히곤 합니다

                      멀리 있는 음식을 잡을 때 누군가 접시를 가까이 옮겨주

                   었는데

                      잠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빛깔을 없는 곳에서 보았습니다

 

 

                      오늘 이곳엔 한 사람만 있습니다

 

 

                      눈에 밟힌다는 말,

                      밟는 사람이 더 아픈 이런 장면도 있네요

                      잡담이나 웃음소리들이 겉도는 저 아래쪽은 축축한 그늘

                      파란 수레,

                      그 바퀴에 이미 추운 생이 감겨버린 듯

                      감겨서 이미 굴러간 듯

 

                      오늘 이곳엔 나만 빼고 다 있습니다  (P.20 )

 

 

 

 

 

 

                     특별한 일

 

 

 

 

 

                       도망가면서 도마뱀은 먼저 꼬리를 자르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이 몸을 버리지요

 

 

                       잘려나간 꼬리를 얼마간 움직이면서

                       몸통이 달아날 수 있도록

                       포식자의 시선을 유인한다 하네요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외롭다는 말도 아무때나 쓰면 안 되겠어요

 

 

                       그렇다 해서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아요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꼬리라도 잡고 싶은 사람들 있겠지만

                       꼬리를 잡고 싶은 건 아니겠지요

 

 

                       와중에도 어딘가 아래쪽에선

 

 

                       제 외로움을 지킨 이들이 있어

                       아침을 만나는 거라고 봐요  (P.13 )

 

 

 

 

 

 

                     선물

 

 

 

 

 

                        어떤 나라에 '눈사람 택배'라는 게 있다 하네요

                        눈이 내리지 않는 남쪽 지방으로

                        북쪽 지방 눈사람을 특수포장해 보낸다 해요

 

 

                        선물도 그쯤 되면 신비 아닌지요

                        받을 때 눈부시지만 녹아 스스로 자랑을 지우니

                        애초에 부담마저 덜어줄 걸 헤아렸겠지요

 

 

                        다시 돌아간다면 그리 살고 싶네요

                        언젠가 녹을 것을 짐작하면서도

                        왜 손가락을 걸었던지요

 

 

                        그때 그 반지, 눈사람 속에 넣겠어요

 

 

                        동그라미 두 개가 허공을 품었다 놓아준 것처럼

                        지우는 법을 가르쳐준

                        눈사람

 

 

                        그런 선물이라면

 

 

                        그런 아득함이라면  (P.70 )

 

 

 

 

 

     

                       봉봉 한라봉

 

 

 

 

 

                            모든 당신은 슬프다, 라고 쓰고 나니 그 당신들이 주렁주

                         렁 열린다

                            내가 만난 당신들 한라봉처럼 배꼽이 나왔다 배꼽 때문에

                         웃다가 결국 배꼽 때문에 울었다

 

 

                            어떤 날은 눈이 퉁퉁 부어서 나갈 수 없었는데 생감자를

                         썰어 붙여도 부은 눈은 가라앉지 않았다

                            주전자 꼭지를 닮은 배꼽, 툭 튀어나왔으므로 툭하면 아

                         팠다

 

 

                            누가 어떻게 볼까를 왜,

 

 

                            배꼽이 내장한 고감도의 전류, 건드리기도 전에 비명이

                         나오는 건 이미 닿아본 때문이겠지만

                            저마다 아파 다른 아픔도 아파

                            아픈 자리에선 나비가 꽃이 도마뱀이 나오곤 했다

 

 

                            나도 힘이 든다고 말하려다 만다

                            동족끼리 아플 때는 서로 어떻게 부비나

 

 

                            게이가 게이를 알아보듯 내 배꼽이 당신을 알아본 건데

 

 

                            모든 당신은 슬프다, 라고 쓰고 나니 정말 슬픈 일은 여

                            기까지 무사히 배꼽도 없이, 아픔도 모를 당신과 당신일 것

                            이어서  (P.73 )

 

 

 

 

 

 

                          청송 사과

 

 

 

 

 

                                전화로 주문을 했더니 그 남자는 먹기엔 그냥 괜찮다며 흠

                             있는 사과를 보내주었다

                                흠, 흠, 내 흠을 어떻게 알고서

 

 

                                어제 오늘 이미 여러 차례 떨어진 내 하관은 바닥이니 거리

                             에 떠다니는 삼엄한 얼굴은 또 무슨 생각들을 놓친 낙과냐

                                비나 번개를 만나

                                저 흠들은 자신의 몸으로 모서리를 삼킨 거지

                                그렇게 견딘 시간은 울퉁불퉁 붙고 아물어

 

 

                                과도의 끝이 닿자 이제야 길었던 통점이 떠나가고

                                뭐, 큰일이나 날 것 같았던 당신의 법도 잘려나가고

 

 

                                자른 채로 잘려나간 채로 그냥 묻어 살기에 괜찮으니 도

                             리어 면면하니

                                흠 있는 존재, 단물까지 나는 이 서사의 사랑스러움을 견

                             딜 수 없으니  (P.81 )   

 

 

 

 

 

 

                           락스 한 방울

 

 

 

 

 

                                 꽃꽂이 하는 사람이 말해주었다 꽃을 더 오래 보려면 꽃병

                              에 락스 한 방울 떨어뜨리면 된다고..... 아무리 해도 그거

                              너무 폭력적이지 않나 싶으면서 그 말 왜 솔깃해지는지 머

                              뭇거리다가 한 방울 꽃병에 떨어뜨렸다 거짓말처럼 뒷자리

                              가 말끔해졌다 저러자면 누군가는 또 얼마나 참아야 했을

                              까 너무 똑 떨어지는 이치에는 어딘지 사기치는 냄새가 난

                              다 후각을 마비시키며 이룬 거사들, 달콤하게 던져준 당근

                              들, 한 방울 떨어뜨려 애써 제자리를 확보하는 동안 꽃병 속

                              꽃은 어땠을까 락스 한 방울....... 이 세계에서는 나를 더 연

                              장하지 않기로 한다  (P.89 )

 

 

 

 

 

                                                    -이규리 詩集,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에서

 

 

 

 

 

 

 

 

 

 

 

시인 소개

 

1955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났다.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94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앤디 워홀의 생각』 『뒷모습』이 있다.

 

 

 

● 편집자의 책 소개

“여긴 아직 내색에 무심하다
그러니 꽃이여, 그저 네 마음으로 오면 되겠다”
―지상의 존재들이 빚어내는 삶의 비의에 응답하는 따뜻한 시선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저마다의 사연으로 내파(內波)되어 있는 삶의 실제 상황들”을 하나의 중심으로 환원하는 보편성에 저항하며 각 존재의 개별성을 확보해왔던 이규리 시인의 세번째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가 문학동네시인선 54번으로 출간되었다. 『뒷모습』(2006) 이후 8년 만에 펴낸 이번 시집에는 일종의 독특한 미학으로 담백함을 완성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시 서른여덟 편이 묶여 있다. 관성적으로 스쳐지나가기 쉬운 사소한 풍경에서 포착한 삶의 비의를 개성적인 시적 풍경으로 재구성했던 시인의 애정 어린 관찰력은 이번 시집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시인은 언어가 주는 소통의 착시 효과를 경계하면서 시로 재구축할 수 있는 삶의 진실을 섬세하게 더듬어나간다.

그가 커피숍에 들어섰을 때
재킷 뒤에 세탁소 꼬리표가 그대로 달려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왜 아무도 말해주지 못했을까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애써 준비한 말 대신 튀어나온 엉뚱한 말처럼
저 꼬리표 탯줄인지 모른다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상견례하는 자리에서
한쪽 인조 속눈썹이 떨어져나간 것도 모르고
한껏 고요히 앉아 있던 일
각기 지닌 삶이 너무 진지해서
그 일 누구도 말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저, 저, 하면서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7년간의 연애를 덮고 한 달 만에 시집간 이모는
그 7년을 어디에 넣어 갔을까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아니라 아니라 못하고 발목이 빠져드는데도
저, 저, 하면서
아무 말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저, 저, 하는 사이에」 전문

이규리가 포착한 삶의 순간은 씁쓸한 웃음을 남긴다. 말의 무력함을 경험하면서, 그저 목격하고 바라보아야만 하는 삶의 순간이 있음을 인정하는 시인의 ‘담담한 현실주의’는, 아프다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해지지 않은 슬픔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상견례하는 자리에서/ 한쪽 인조 속눈썹이 떨어져나간 것도 모르고/ 한껏 고요히 앉아 있”는,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에서 “각기 지닌 삶이 너무 진지해서” 그저 “저, 저,” 망설일 뿐 “말해주지 못”하는 때. 삶의 불가항력과 외로움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쓸쓸함이 담담한 어조에 배어 있다. “숨이 차서, 또 어찌할 수 없어서, 일렁이는 마음 감추려 또 괜한 말을 하는” ‘당신’의 아픈 몸을 가만히 받쳐주면서 시인은 “저 꽃 이름이 뭐지?”라고 말을 반복하는 ‘당신’의 안색에 활짝 핀 고통을 느낀다.(「해마다 꽃무릇」)

그날따라 정신없이 웃었어요 그러다가 문득
이래도 되는지
옆을 돌아보았어요

예의가 아니었나요
예의는 지나치면 안 되는 것이라 하고
너무 가두어도 어긋나는 것이라 하니

예의는 예의를 말할 수 없는 거겠어요

아무도 웃지 않을 때 웃는 건
그야말로 예의가 아니겠죠
하필 그날, 왜 옆에 있던 대형 유리가 깨졌던 걸까요

미안해요 너무 크게 웃어서

슬픈 다른 사람 생각을 못해서

파편들은 극명하게 아픔을 말해주었어요
웃음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는 듯

아마 그날,
우리는 웃지 않아야 할 때 크게 웃었던 거지요

-「예의」 전문

해설을 쓴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박상수는 이규리 시인은 “자기 웃음조차 객관적 시선으로 되살피며 사태와 그 사태를 둘러싼 관계들을 전체 맥락에서 고려”하고 있으며 자신과 아무런 관계 없는 우연조차 “자신의 몫으로 감당하며 미안함을 느끼는 이런 화자의 모습이 오래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고 말한다. “세상의 슬픈 사람을 생각하지 못하고 혼자 웃었던 걸 미안해하는 마음이 바로 시인의 마음”일 거라면서 말이다.

한 줄 문틈을 그은 불빛이 빗장 같아
불 켜진 아이 방 앞에 서서
늦은 시각을 벌컥 열지 못하겠다

자주 먼 곳을 향하는 아이를 훔쳐볼 때
슬그머니 끼이던 낯선 공기
백합나무도 제가 피운 꽃등은 못 보겠지
내가 짚어볼 수 없는 저 아이의 미열은
이제 나무의 것일까

-「꽃나무의 미열」 부분

백합나무는 tulip tree라고도 하며 나무 상단에 튤립 모양의 연둣빛을 띤 노란색 꽃이 핀다. 나무는 키가 큰데 꽃은 위를 향하고 있어 아래서는 좀처럼 꽃을 보기 어렵다. 이는 존재에 대한 탁월한 비유로 읽힌다. 자식과 부모는 혈연으로 맺어진 누구보다 긴밀한 사이이지만 그럼에도 서로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스스로 자기의 존재를 책임져야만 하는 고독, 시인은 그 아이의 “쓸쓸한 먼길”을 이해하고 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방문을 열고 나오는 아이에게 “또 짐짓 이마를 짚으며/ 음, 음, 날씨 얘기나 꺼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려깊은 배려가 서로에게 보낼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아닐지 시인은 가만히 되묻는다.

“어떤 나라에 ‘눈사람 택배’라는 게 있다 하네요/ 눈이 내리지 않는 남쪽 지방으로/ 북쪽 지방 눈사람을 특수포장해 보낸다 해요// 선물도 그쯤 되면 신비 아닌지요/ 받을 때 눈부시지만 녹아 스스로 자랑을 지우니/ 애초에 부담마저 덜어줄 걸 헤아렸겠지요// 다시 돌아간다면 그리 살고 싶네요/ 언젠가 녹을 것을 짐작하면서도/ 왜 손가락을 걸었던지요// (…)// 그런 선물이라면// 그런 아득함이라면”(「선물」)이라는 구절처럼, 우리는 녹을 것을 알면서도 손가락을 걸고는 하지요.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아리게 하지만, 저는 끝까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래요. 당신의 시집이 우리에게 선물처럼 도착해서 이렇게 녹아 없어지지만, 여기엔 이런 것이 바로 삶이라는, 당신의 수긍과 지혜와 안부와 토닥임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죠.
―박상수 해설 「러블리 규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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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3 22: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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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4 2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14 0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14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14 0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14 2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14 05:0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옛 주인이 있기 앞서도 꽃은 피고,
새 주인이 있을 적에도 꽃은 피다가,
언제까지나 한결같이 곱게 피면서
집도 마을도 향긋하게 밝히지 싶어요.

씨앗으로 오래오래 이어지면서..

appletreeje 2014-05-14 23:09   좋아요 0 | URL
예~ 모두 씨앗으로 오래오래 이어지면서
기억도 눈빛도 삶도, 다 향긋하게 밝히리라 믿습니다~*^^*

하늘바람 2014-05-14 08:57   좋아요 0 | URL
수레국화 슬픈 마음이 어리다가 기억이 밟힌다는 구절에 잠시 밟히는 기억들을 접습니다 화창한 하루네요

appletreeje 2014-05-14 23:12   좋아요 0 | URL
저도 잠시 밟히는 기억들을 접게 한 그런 시였습니다.^^
정말 화창한 하루였어요. 그래서 더욱 막막했지만요..

하늘바람님! 평온하고 좋은 밤, 되세요~*^^*

2014-05-15 15: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16 0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진 2014-05-18 16:23   좋아요 0 | URL
트리제님, 오랜만이에요 ㅎㅎ

항상 트리제님이 뽑아 써 주시는 시는 가슴을 툭툭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어요.
제가 소장하고 있는 시집에서 그런 시들을 찾아보려고 해도 잘 읽히지 않던데...
차분하게 마음을 열고 읽으면 다가오겠죠.

appletreeje 2014-05-19 04:32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정말 오랜만이네요 ㅎㅎ
고3이라 열공하시느라 힘이 많이 드시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알라딘에도 오시고 안부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년에는, 소이진님이 좋아하시는 시들을 차분히 즐겨 읽으시겠지요.^^
언제나 영육간 건강하시길 빕니다~*^^*
 

 

 

 

 

새벽에 눈 뜨자마자  내 눈(眼)이 되어준 안경을, 이제야 벗고 잘 준비를 한다.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몸속에 있던 어떤 울음이/ 더듬이 길게 빼고 연신 어디 먼 별 쪽으로/

제 소리를 송신하고 있었던 게다/ 내 몸이 울음의 집이었던 게다/ 한 심재휘 시인의 '울음의 집'

을 읽다가 ,

 

그리고/ 머리는 떼어 그냥 머리맡에 놓은 채/ 달아오른 프라이팬 옆에 놓여 있어도 꿈꾸지 않는,/ 오늘 하루만이라도 잠시/ 저 달걀 같은 잠을 자보고 싶다.. 처럼

나도 오늘밤은 '달걀 같은 잠'을 자고 싶다.

 

그리고 '세월이 가면' 설익게 술을 마시고/ 서투르게 노래방에 들렸다가 돌아와/ 깊게 잠든...

밤이 올것인가.

유빙流氷, '흐르는 방'과 "심재휘 시인을 생각하면 소슬한 '적산가옥' 한 채가 떠오른다는"

이홍섭 시인의 말을 떠올리며, 나는 또 '달걀 같은 잠'을 기다린다.

오늘도 '그림자와 이별하다' 처럼,  전나무 숲속의 자작나무 한 그루, 같이 하루를 살았다.

내일은 아니, 다시 오늘은 또다시.. 효과 빠른 종합 감기약 같은 하루를 살 것이다.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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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도 없이

-북쪽마을에서의 일 년

 

 

 

 

밤새 오한으로 몇 개의 뼈가 차고 서럽더니

새벽쯤 되어서야 몸이 따뜻해진다

그때쯤 얼핏 꿈에 들었겠지

보고 싶었던 사람들도 많았구나

만화경 속처럼 피었다 지는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 날 불러 서둘러 돌아보니

머리맡 알람이 운다

빌린 잠을 잔 듯 어릉대는

어수선한 꿈 얘기는 잘 생각이 나지 않고

 

 

아직 창밖은 희미하여 옛날 같은데

잠자리에 누운 채 눈을 떠보면

식지 않은 몸만 내 것인양

물위로 오롯이 떠오르고 있다

꿈속의 그 많던 사람들 물 밑 아득히

가라앉으며 멀어지고 있다

어느 먼 바람에 잔물결이 잠시 일었다 자고

끝도 없이 넓은 어둠의 수면 한가운데 모로 누워

내 검은 손 하나 오래 쳐다보는 새벽

 

 

 

 

 

북쪽마을의 봄나무

-북쪽마을에서의 일년

 

 

 

 

간혹 북쪽마을에까지 다다른 나무들이 있다

어느덧 그곳에서 숲을 이룬 나무들이 있다

봄이 와도 꽃을 피우지 않는 나무들이 있다

며칠 어지간히 따가운 봄볕에도

쉬 꽃을 내놓지 않는 나무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길의 끝을 묻지도 않는 나무

 

 

한 차례 더 몰아칠 눈 폭풍의 봄들을

이들은 얼마나 지나왔던 것일까

서둘러 피운 꽃들을 잃고 돌아서서

몇번이나 울었던 것일까

북쪽마을에는 오월이 와도

꽃을 피우지 않는 나무들이 있다

묽지도 않고 깊지도 않은

연둣빛 그늘에 슬픔의 뿌리를 묻고

두리번거리며 가슴속의 꽃을 매만지기만 하는 나무 

 

 

 

 

 

얼음 평원

-북쪽마을에서의 일년

 

 

 

 

따뜻한 공중을 그는 왜 떠났을까

거미 한 마리가 자작나무 숲 속 물웅덩이의

얇고 투명한 살얼음 위를 걸어

건너편 기슭으로 가고 있다

 

 

그가 걷던 허공에도 물웅덩이가 있고

때로는 살얼음이 얼겠지 하지만 저 거미

오늘은 지상의 얼음 평원을 건너가고 있다

 

 

물의 일기를 쓰듯

가다 서고 가다가 돌아보고

깨어질 것 같지 않은 후회의 평원을 걸어

집으로 서둘러 돌아가는 긴 두려움의 문장

 

 

저녁이 온다

더욱 밝아지는 자작나무 숲 어딘가의

이제 막 불이 들어올 집을 나와

그는 왜 아직도 얼음 평원 위를 걷고 있나

 

 

흐르느라 바쁜 물 같은 목숨들은

얼고 나서야 투명하게 제 속을 드러내지

훗날 얼음 한 조각이 녹듯

외로운 영혼이 가족들 곁을 맴돌지라도

지금은 물웅덩이를 다 건너

삐걱거리는 계단을 밟고 올라

드디어 끈끈한 저의 영토에 들기 전까지

거미에게 세상의 모든 길은 살얼음이리라

 

 

 

 

 

징검돌 위에서

 

 

 

 

맑은 날인데

개울물이 뜻밖에 빠르고

징검돌들은 얼굴을 가린 채 젖어 있다

상류 쪽 먼 산기슭에는 언젠가

구름이 몰려오고 비가 왔겠다

종내에는 비도 그치고 세월은 흘렀겠다

 

 

한데 어찌하여 그날의 빗소리는 이곳까지 흘러왔나

눈 감은 징검돌 사이에서 왜 소리 죽여 울고 있나

 

 

지나간 어느 먼 날에

처음 발 앞에 돌을 놓으며

개울을 건너가려던 한 사람 있었겠다

마음을 점점이 떨어트리고

기어이 개울을 건너간 사람이 있었겠다

 

 

서로 손을 잡을 수도 없고 거둘 수도 없는

징검돌 사이의 쓸쓸한 간격을 따라갈 때

어느덧 익숙한 보폭 아래로

사무치도록 투명한 물이 흘러갈 때

지울 수 없는 물의 무늬들만 흘러가지 못할 때

 

 

이런 날은 내 가슴속에도

물을 건너가던 사람 하나

자꾸 그리워지겠다

 

 

 

 

 

옛사랑

 

 

 

 

도마 위의 양파 반 토막이

그날의 칼날보다 무서운 빈 집을

봄날 내내 견디고 있다

그토록 맵자고 맹세하던 마음의 즙이

겹겹이 쌓인 껍질의 날들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마르고 있다

 

 

 

 

 

중국인 맹인 안마사

 

 

 

 

상해의 변두리 시장 뒷골목에

그의 가게가 있다

 

 

하나뿐인 안마용 침상에는 가을비가

아픈 소리로 누워 있다

 

 

주렴 안쪽의 어둑한 나무 의자에 곧게 앉아

한 가닥 한 가닥

비의 상처들을 헤아리고 있는 맹인 안마사

 

 

곧 가을비도 그치는 저녁이 된다

 

 

간혹 처음 만나는 뒷골목에도

지독하도록 낯 익은 풍경이 있으니

 

 

손으로 더듬어도 잘 만져지지 않는 것들아

눈을 감아도 자꾸만 가늘어지는 것들아

 

 

숨을 쉬면 결리는 나의 늑골 어디쯤에

그의 가게가 있다

 

 

 

 

 

 

                                     -심재휘 詩集, <중국인 맹인 안마사>-에서

 

 

 

 

 

 

 

 

 

 

 

 

 

'문예중앙시선' 32권. 낭만적이고 쓸쓸한 목소리로 기억에 얽힌 시 세계를 노래해온 심재휘 시인이 7년 만에 새 시집을 묶었다. 1997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현대시 동인상 수상 시집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부는>과 <그늘>을 펴내며 '유년 시절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애착과 그리움을 그려냈다'는 평을 받아온 심재휘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특유의 소슬한 기풍이 돋보이는 시편들을 선보인다.

새 시집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장면들은 낯선 이국의 풍경들이다. 이번 시집의 절반은 시인이 캐나다에서 체류할 때 쓴 '북쪽마을' 연작시로 이루어져 있다. '참 알 수 없는 것들로만 가득한 머나먼 하늘 아래'에서 시인은 '집 없는 자의 눈처럼 좁고 깊은' 우물에 비친 풍경을 써 내려간다.

이 이국적인 풍경을 담은 시편들을 두고 해설을 쓴 이홍섭 시인은 "이국 풍경 속에서만 자신의 내면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시인이 현재 몸담고 있는 현실과 불화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라 평하며 "그를 생각하면 소슬한 적산가옥 한 채가 떠오른다."라고 덧붙였다.

점령지에서 적국 사람들이 살던 집을 뜻하는 적산가옥은 숙명적으로 이중국적을 껴안은 건축물이다. 오랜만에 새 시집으로 찾아온 심재휘의 언어는 적산가옥과도 같은 이국적이고 투명한 슬픔의 정서로 빛난다.

 

 

 

가끔씩 내 귓속으로 돌아와
둥지를 트는 새 한 마리가 있다
귀를 빌려준 적이 없는데
제 것인 양 깃들어 울고 간다

열흘쯤을 살다가 떠난 자리에는
울음의 재들이 수북하기도 해
사나운 후회들 가져가라고 나는
먼 숲에 귀를 대고
한나절 재를 뿌리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열흘 후는
울음 떠난 둥지에 아무것도 남아 있질 않아
넓고 넓은 귓속에서 몇 나절을 나는
해변에 밀려 나온 나뭇가지처럼
마르거나 젖으며 살기도 한다

새소리는
새가 떠나고 나서야 더 잘 들리고
새가 멀리 떠나고 나서야 나도
소리 내어 울고 싶어진다

―「지저귀던 저 새는」

 

 

 

 

 

시인의 말 

 

 

 

세월이 많이 지났다

 

모든 것이 다 한곳을 바라볼 필요는 없다

 

 

 

슬픈 눈을 지닌 개를 데리고 걸어도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미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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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3 0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3 1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4-05-03 06:41   좋아요 0 | URL
요즈막은 자작나무에 새 잎이 돋고
앙증맞게 고운 자작꽃도 필 무렵이에요.

숲에서 자라는 나무는 웬만하면 무리를 이루는데
이 가운데 자작나무는
혼자서 조용히 자라는 모습을 곧잘 보곤 해요.

참 그렇군요.

appletreeje 2014-05-03 10:09   좋아요 0 | URL
아..자작나무 새 잎도, 앙증맞게 고운 자작꽃도
보고 싶네요~
자작나무 책상에서 책도 읽고,
자작나무 침대에서 잠도 자고 싶구요..*^^*

2014-05-03 1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3 1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에 근무했던 직장에 인사차 잠깐 들르니 선배님이 충청도에서 온 나를 보자 생각났다는 듯 얼마 전 주말여행에서 겪은 일을 들려주신다. 선배는 정해진 목적지 없이 서해안고속도로를 따라 가다가 때 되면 시골 식당에서 점심 먹고 차 마시고 올라올 계획이었단다. 충청도 땅에 들어서 점심때가 되어 톨게이트를 빠져나가 국도변 식당엘 들어갔다. 벽에는 열두어 가지의 메뉴가 붙어 있었다. 제일 쉽게 맨 앞에 붙어 있는 것으로 정했다.

 "버섯전골 주세요."

 "그거 안되는 디유."

 주문 받으러 온 주인 아저씨가 겸연쩍어했다.

 "그래요? 그러면 그다음 거 좋겠네. 두부전골로 하죠. 2인분 주세요."

 "그것도 안되는 디유."

 이쯤 되면 슬슬 짜증이 나게 마련.

 "아니, 안 되는 건 뭐 하러 써 붙여 놨어요?"

 주인장 하는 말,

 "그냥유."

 '그냥'이란다. 뭐 더 할 말이 있겠는가? 거의 포기 상태로 인내심을 발휘해 한 번 더 물었다.

 "그럼 되는 게 뭐 있어요?"

 그런데 주인장, 또 한 번 일격을 가한다.

 "뭐가 잡숫구 싶으신 디유?"

 속 터진다. 여태까지 말했잖아요!

 "하여튼 충청도 사람들 알아줘야 해"

 이 한마디로 선배가 나를 놀린다. 그런데 사실은 선배도 오리지널 충청도 사람이다. 그려, 그게 충청도여. 우리는 너무나 공감이 되어 한참을 웃었다.

 

 

 시골로 내려와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서울  생활에 길든 내가 이곳 사람들과 생각하는 방법에서부터 표현하는 방법까지 완전히 다르다는 일종의 문화충격이었다. 그래서 초기에는 오해도 많았다. 이렇게 말해서 이렇게 하면 그 사람이 원한 건 그게 아니란다. 나는 일껏 생각해 준다고 한 말에 상대방이 화를 내며 덤빈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이 서운하단다. 그들을 이해하게 되고 척 하면 척으로 받아치게 되는 데에는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언젠가 동네 어른 몇 분을 모시고 식사 대접을 하려고 읍내 식당엘 갔다.

 "뭐 드시겠어요?"

 "아무거나 먹지 뭐."

 "그래도....뭐 좋아하세요?"

 "그냥 알아서 시켜."

 어른들은 굳이 내 마음대로 결정하라 하신다.

 "알았어요. 갈비탕 어때요? 괜찮아요?"

 "그러지 뭐. "

 "여기 갈비탕 넷 주세요."

 여기서 끝나면 충청도 아니다. 주문 받고 종업원 막 돌아서려는데 한마디 하신다.

 "이 집 그거 별룬디."

 으악?

 '예'도 아니고 '아니오'도 아니고, 속내를 가늠하기 힘든 이런 표현법을 다른 지방 사람들은 '줏대 없고 음흉하다' 비아양거리기도 하지만 그건 몰라서 하는 말이다. 줏대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줏대가 너무나 확실하다. 아무리 바깥에서 폭풍우가 휘몰아쳐도 속에다 꽉 잡고 있는 것은 절대 놓지 않는다.

 "뭐 먹고 싶냐?"

 재차 물어보는 것도 듣는 사람은 속 터질지 모르지만, 그래도 '내 마음대로가 아닌 당신 뜻에 따라 해줄 수 있는 데까지는 해 주겠다'는 작은 성의 표시가 아닌가?

 그렇다고 이제 이런 대화에 당황하지 않는다. 아니 이 단수 높은 충청도식 대화를 즐긴다. 나도 제법 이들에게 물들었나 보다.  (P.71~75 )  / 내 고향은 충청도예유

 

 

 

 특히 포토샵은 서울에서도 배우려고 시도했다가 보름 만에 포기한 적이 있었다. 서울 학원엘 가보니 수강생이 주로 20대 젊은 사람들이었고 학원 프로그램도 그 사람들에게 맞추어져 있어서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더구나 쌀쌀맞은 강사는 예정된 속도로 빠르게 진행하면서 조금 뒤쳐지는 학생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곳은 분위기가 편안하기 그지없다. 수강생들은 주로 나이드신 분들이다. 나는 그래도 직장생활하면서 문서 작성이나 인터넷은 하던 수준이었으니 열등반에 배치된 보통 학생이라 할까?

 "지발 이거는 누르지 마세유. 이거 누르면 파레트 다 없어져유. 그럼 이거 찾다가 한 시간 걸리는 기유. 알았쥬? 까딱하면 그렇게 되니께 조심해유."

 강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저쪽에서 한 할머니가 손을 든다.

 "아니 내 건 이게 왜 없어졌대. 선생님?"

 "이거 누르지 말라구 그랬잖유."

 교실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고 나이 먹은 학생들은 그런 실수 안 하려고 바짝 긴장한다.

 "이거 누르면 없어진다고 했슈, 안 했슈? 했쥬? 없어지면 리셋하면 된다고 했슈, 안 했슈? 했쥬? 이렇게 입이 아프게 말해 줬는데 왜 며칠만 지나면 또 없어졌다고 난리유. 지발 까먹지 마유."

 "네!"

 대답은 우렁차도, 다음 날이면 또 까먹고 선생님을 불러 대는 어르신들. 그때마다 강사 선생님은 쫓아가서 바로잡아 준다. 이곳에서 태어난 토박이 예산 사람인 젊은 강사는 완전히 시골 어르신들에게 눈높이가 맞추어져 있어서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인내심을 발휘한다.

 나는 여유로운 이 공부가 참 좋고 나날이 하나하나 새롭게 배워 가는 기쁨에 행복해하고 있다. 군청에서 배운 포토샵 실력을 발휘해 '풀각시 뜨락'(http://blog.never.com.hyoshin4858)이라는 나의 블로그를 멋지게 장식하고 전국의 다양한 사람들과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나가는 것도 나에겐 크나큰 즐거움이다.  (P.77~79 ) /  컴퓨터와 보너스

 

 

 

 

                                                   - <풀각시 박효신의 봄 여름 가을 겨울>-에서

 

 

 

 

 

 

 

 

 

 

          어제부터 비가 내리는 날 마음도 그렇고 요즘은 뭔가를 하고 있어도 정신이 없고

         뭔가를 읽어도 잘 집중을 하지 못하는 그런 날 속, 아침에 병원엘 갔다 오니 잠시후

         반가운 선배께서 보내 주신 책선물이 왔다. 서둘러 열어 보니 <상뻬의 어린 시절>

         <풀각시 박효신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앵두 익는 마을>, <중국인 맹인 안마사>와

         <풀씨를 심는다는 것>, <호야네 말>.  정다운 말씀이 한가득인 편지.

            다 편안히 읽을 수 있는 책들이다. 요즘은 읽어야 할 책들이 거의 다 무겁고 생각을

         많이 하며 읽을 책들이라 책을 읽고 있어도 뭔가 마음이 어둡고 힘이 들었는데, 지난번

         모임때 이런 나의 마음를 눈치채시고 편안하고 즐거운 '환기'를 하라고 골라 보내주신

         마음 같으셔서 한층 더 감사하고 기뻤다.

           <상뻬의 어린 시절>은 그러지 않아도 읽고 싶어서 도서관에 들어 오면 대출하려 기다

          린 책이었는데 직접 비닐을 뜯고 책장을 열어 보니, 설레고 멋진 그림들과 마르크 르

         카르팡티에와의 인터뷰, [이런,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겁니다.]의 빼곡하고 긴 글들이

         읽어 보기도 전에 마음이 짜르르...하다.

            오래 전부터 알아 왔던 임의진 목사님의 <앵두 익는 마을>,을 2001년 초판으로 가지고

         있는데 이번에 새 개정판으로 예쁜 새 옷을 입고 다시 와 반가웠고, 심재휘 시인의

         <중국인 맹인 안마사>와 김형오 시인의 <풀씨를 심는 다는 것>, 이시영 시인의 <호야

          네 말>은 기다렸던 시집들, 그리고

          < 풀각시 박효신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처음 만나는 책인데 20대 후반에 계획한 꿈으로 준비를 하고 2007년에 예산으로

          내려와 시골살이를 온몸과 온마음으로 즐겁게 꾸려나가는 풀각시 박효신 님의 글을

          제일 먼저 읽기 시작했는데...쭉 읽다가 '바비를 사랑하는 시골 할머니'에 와서는

          바비킴(사실 '바비'라 해서 첨에는 '바비인형'으로 알았다.) 과 콘서트장에서 함께 찍은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대박~ 거기엔 왠 화사하고 예쁜 할머니가 활짝 웃고 있었다는.

          더욱 새로운 마음으로 읽어 나가다, 방금 전에 읽게 된 저 '내 고향은 충청도예유'에서

          빵! 터져버렸다. 아참..요즘의 우울하고 무기력하기만 하던 마음이 스르르 나도 모르게

          식당 주인장 표현대로 "그냥유."다.  어려운 시간들이지만 누구나 "그냥유."의 마음이

          되기를 빌어 보며, 오늘은 저녁 약속 때문에 여기까지만 읽는다.

           고맙습니다!!  즐겁고 감사히 잘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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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타교

 

 

 

 

                       개성엔 낙타교, 그러니까 고려 적 아랍 상인들이 장사하

                    러 와서 말을 매놓았다는 다리가 있었다고 늘 자랑하곤 하

                    시던 박완서 선생님, 어릴 적 어머니 앞에서 떡국에 쓰일

                    새알을 곱게 못 빚으면 강화로 시집보내겠다고 "강횃년'

                    이란 말을 처음 들었다며 웃으실 땐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

                    가 흐르고 양 볼엔 간혹 홍조를 피우시곤 하였다.  (P.12 )

 

 

 

 

 

                          금빛

 

 

 

 

                           2014년 1월 중순, 강원도 깊은 산 소나무 군락지에 금빛

                        새 한마리가 날아와 커다란 알을 낳고 사라졌습니다. 소나

                        무 숲이 그 알을 받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서로 키를 높이

                        는 바람에 일대는 한동안 지상에서 붕 떠올라 금빛으로 환

                        하게 눈부셨습니다.  (P.13 )

 

 

 

 

 

                      BYC

 

 

 

 

                        깔끔하게 단장한 구로디지털단지역을 지나다보니 BYC,

                        옛날의 백양메리아스 야트막한 벽돌색 건물이 보인다

                        한때 내 바로 아래 여동생이 일했던 곳

                        매서운 기숙사 사감의 눈빛과 밤마다 졸리운 잔업노동에

                        시달리다

                        결국은 폐병을 얻어 쫓겨났지

                        얼어붙은 한 겨울의 새벽길을 걸어 걸어

                        조용히 내 하숙방 문을 두드리던 여동생 얼굴이 생각난다  (P.15 )

 

 

 

 

 

                          상(床)밥집에서

 

 

 

 

                        과대평가된 시인들이 있는가 하면 과소평가된 시인들이

                           더 많다

                              그중의 한분과 '정겨운 상밥집'에서 상밥을 먹었다

                              살아온 이야기를 하는 그의 목소리는 나직나직하고 조용

                           했다

                              나도 나직나직 조용해지면서 오랜만에 나 자신으로 돌아

                           온 듯 했다  (P.40 )

 

 

 

 

 

                         찬(讚) 김정남 선생

 

 

 

 

 

                            양재역 12번 출구 앞에서 우연히 김정남 선생을 만났다.

                         평생을 별다른 직업 없이 살아온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동

                         네를 한바퀴 돌며 골목을 깨끗히 쓸었다고 하는데, 세상엔

                         이렇게 그림자처럼 조용한 분들이 있으시다. 칠팔십년대

                         인권 탄압이 있는 곳엔 그가 늘 뒤에 있었으며 변호사를 대

                         신해 쓴 '변론'만도 아마 수천 페이지가 넘을 것이다. '박

                         종철 사건'도 보이지 않는 그의 손에 의해 처음으로 밝혀졌

                         다. 그러나 역사는 이런 분을 잘 기억해주지 않는다.  (P.41 )

 

 

 

 

 

 

                          절

 

 

 

 

                               서초중앙하이츠빌라의 머리가 하얗게 센 경비아저씨는

                               저녁이면 강아지와 함께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인사

                            를 한다

                               세상엔 이렇게 겸손한 분도 있다  (P.43 )

 

 

 

 

 

 

                          호야네 말

 

 

 

                                이렇게 비 내리는 밤이면 호롱불 켜진 호야네 말집이 생

                             각난다. 다가가 반지르르한 등을 쓰다듬으면 그 선량한 눈

                             을 내리깔고 이따금씩 고개를 주억거리던 검은 말과 "얘들

                             아, 우리 호야네 말 좀 그만 만져라!" 하며 흙벽으로 난 방문

                             을 열고 막써레기 담뱃대를 댓돌 위에 탁탁 털던 턱수염이

                             좋던 호야네 아버지도 생각난다. 날이 밝으면 호야네 말은

                                그 아버지와 함께 장작짐을 가득 싣고 시내로 가야 한다.

                             아스팔트 위에 바지런한 발굽 소리를 따각따각 찍으며.  (P.46 )

 

 

 

 

 

 

                            민병산 선생

 

 

 

 

 

                                  남루를 걸치고 다니다 음식점 입구에서 내쫓기던 철학자

                               가 있었다. 관철동의 민병산 선생. 그는 청주 대부호의 아들

                               로 태어났으나 결혼도 하지 않고 일생을 겸손한 가난뱅이

                               로 살다 어느 새벽 아무도 없는 방에서 홀로 숨졌다. 거리

                               의 후배들이 와서 그의 모자와 책들을 정리하고 글씨들을

                               챙겼다. 나도 그중의 한점을 갖고 있는데 서체가 그를 닮아

                               남루하면서도 깨끗했다.  (P.60 )

 

 

 

 

 

 

                                손님

 

 

 

 

                                   은희경 님이 리트윗해 올린, 지리산 반달가슴곰 25번 녀

                                석이 법계사 공양간 창문에 다리를 척 걸치고 제집처럼 익

                                숙하게 쌀을 훔치고 있는 모습이 재밌다. 엊저녁 설거지해

                                엎어놓은 스님의 단출한 부엌살림 그릇들과 낮은 타일 벽

                                에 걸린 빨간 고무장갑도 모두 말없이 정결하다. 그리고 새

                                벽 예불을 드리다가 가만히 돌아앉아 이 장면을 찰칵 카메

                                라에 담았을 스님의 안 보이는 미소까지 환해서 참 보기에

                                좋으시다.  (P.85 )

 

 

 

 

 

                                춘천

 

 

 

 

                                    소설가 오정희 씨가 서울 나들이를 위해 춘천 역사에 들

                                 어서면 어떻게 알았는지 금테 모자를 눌러쓴 귀밑머리 희

                                 끗한 역장이 다가와 이렇게 인사한다고 합니다.

                                    "오 선생님, 춘천을 너무 오래 비워두시면 안됩니다."

                                    그리고 측백나무 울타리 가에서 서울행 열차의 꽁무니가

                                 안 보일 때까지 배웅한다고 합니다.

                                    아, 나도 그런 춘천에 가 한번 살아봤으면!  (P.112 )

 

 

 

 

 

                             자매처럼

 

 

 

 

                                  일요 미사가 끝난 용산 성당 원효로 쪽, 영하의 추위 속에

                               온몸을 털목도리로 감싼 자그마한 체수의 할머니 두분이

                               자매처럼 손을 잡고 가파른 빙판길을 조심조심 내려가고

                               있는데, 그들의 꼭 잡은 두손이 얼마나 정겹고 따스해 보였

                               던지 성모께서도 고개를 길게 빼어 한참을 내려다보시었다.  (P.128 )

 

 

 

 

 

 

                              잠들기 전에

 

 

 

                                     눈이 올 것만 같은 겨울 저녁,

                                     반달가슴곰이 졸린 눈을 비비며 아주 순한 산등성이를

                                   바라본다.  (P.129 )

 

 

 

 

 

 

 

                                                           -이시영 詩集, <호야네 말>-에서

 

 

 

 

 

 

 

 

 

 

 

 

 

결빙의 현실에 온기를 더하는 시의 불꽃

맑고 투명한 서정 속에서 더욱 빛나는 강인한 시정신으로 한국 현대사와 문학사를 관통해온 이시영 시인의 신작 시집 <호야네 말>이 출간되었다. “현실에 맞서 시대의 진실을 세심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밀도 높은 서정이 다양한 형식 속에 조화롭게 어우러진 뛰어난 시정신의 소산”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박재삼문학상’과 ‘만해문학상’을 연거푸 수상한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창비 2012) 이후 2년 만에 펴내는 열세번째 시집이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서정과 서사를 아우르는 독특한 감성의 어법으로 단형시, 산문시, 인용시 등 변함없이 다채로운 형식을 선보이며 삶에 대한 애정과 웅숭깊은 자기성찰이 깃든 ‘오래된 노래’를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직나직 들려준다. “짧은 서정시라 불리는 독특한 시 형식에 ‘스스로 그러함’을 드러내는 영원한 순간들의 미학”(오철수, 발문)이 현란한 수식 없이 간결하고 명료한 일상적 언어에 녹아든 단정한 시편들이 묵직한 울림과 잔잔한 감동을 자아낸다.

동양파라곤아파트 동쪽 정원 측백나무 옆/고양이 세마리가 나와 자울자울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데/그중 두 놈은 흰 배에 검은색 등이고/나머지 한 놈은 완전 호랑이 색깔이다/그런데 저렇게 평화로울 수 있다니!(「평화롭게」 전문)

삶의 순간, 찰나에서 길어올린 영원의 미학

이시영의 시는 짧지만 긴 여백 속에 큰 울림이 있다. 냉정하다 싶을 만큼 차분한 감성과 극도로 절제된 언어로 사물의 현상과 실체를 에두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정확히 꿰뚫어보는 시선이 더없이 예리하면서도 한편 따뜻하다. “설치류의 작은 이빨이 단단히 박혀 있”는 “밤톨 하나”(「석양 무렵」), “비 온 뒤 하늘에서 씻겨온 세모래 위에/가지런히 찍힌 어린 새의 발자국”(「첫」), “언 땅속에서” 전신을 다해 “찬란한 봄을 머금고 있”는 “개나리 한 뿌리”(「조춘(早春)」)에서도 생의 경건함과 자연의 이법을 포착해내는 시인은 “모든 탄생하는 것들의 고요”(「신생」) 속에서 생명의 위대함과 신비로움을 통찰하며 사소한 자연 현상을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시켜 바라보는 놀라운 예지력을 보여준다.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내리는 남극의 싸우스조지아 섬, 턱끈펭귄 암컷이 둥지에 품고 있던 알을 부리로 톡톡 깨자 기다렸다는 듯이 껍질을 뚫고 나오다가 옆으로 쓰러지는 새끼 턱끈펭귄. 고개를 젖혀 비린 눈을 뜨자마자 어미를 향해 한껏 벌린 입이 저 아래까지 빨갛다.(「입」 전문)

‘서정시를 쓰기 어려운’ 팍팍한 시대를 올곧은 정신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시인은 “모든 결빙(結氷)의 시절”(「십이월」)인 현실을 직시하며 그 속에 감추어진 세계의 진실을 드러내는 데 온 힘을 쏟는다. 암울한 시대의 어둠을 밝히며 진실한 삶을 오롯이 지켜온 시인은 편을 가르거나 누구를 따돌리지 않고 서로 어울려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 “국경도 없고 경계도 없고 그리하여 군대나 경찰은 더욱 없는” “그런 ‘나라’ 없는 나라”(「‘나라’ 없는 나라」)를 꿈꾼다. 저마다 “시린 가슴을 안고”(「대지의 잠」)서 하찮고 여린 삶을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젖은 어깨”와 “더운 발자국”(「2호선」)에 따뜻한 위로와 온기를 불어넣으며 시인은 언젠가는 “살아봤으면”(「춘천」) 좋을 세상이 오리라 기대하며 “세상이 그렇게 빨리 망하진 않을 것”(「조춘(早春)」)이라는 희망의 불꽃을 지핀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남대문 광역버스 정류장/발가락이 삐져나온 운동화를 신은 노숙자 하나가/가로수에 기대어 떨고 있었다/안 보이는 손 하나가 다가와 그에게/따뜻한 천원짜리 한장을 쥐여주었다(「겨울 아침」 전문)

그런가 하면 시인은 “결빙의 현실을 데우기 위해 과거라는 샘에서 온기를 훔쳐”(박형준, 추천사)와 “영원한 대지의 자식들”(「옛날엔」)이 부르는 ‘오래된 노래’를 조곤조곤 들려주기도 한다. “저녁을 먹고 나면” “동구 앞 정자나무들 아래 모여/전깃불 화안한 읍내를 바라보곤 하였”(「소년들」)던 유년 시절, “동구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오래된 팽나무”(「정자나무」)와 “그날밤 우리들 허리며 가슴을 적시며 흐르던” 섬진강의 “그 따스한 밤 강물”(「밤 강물」)과 “겨울이면 뜨거운 김을 뿜어내고 여름이면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쉼 없이 솟구치던 그 샘”(「찬샘」) 등 가슴속에 간직해둔 사연들을 회상하며 시인은 기억의 지층을 더듬어 내려가 사람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아늑한 추억의 풍경 속으로 잠긴다.

일머슴처럼 손 크고 덩치 큰 울 어매 곡성댁, 마당에 어둑발 내리면 쌀자루 보릿자루 옆구리에 숨겨 몰래 사립을 나섰네. 그때마다 쪽찐머리 고운 해주 오씨 우리 큰어머니 안방 문 쪽거울에 대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셨네. “니 에미 또 쌀 퍼서 나간다.” 저녁이 다 가도록 밥 짓는 연기 오르지 않는 동무 집이 많던 시절.(「밤마실」 전문)

이시영 시인은 삶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사람에 대한 애정 또한 각별하다. 그래서 그의 시는 쉽게 가슴을 울릴 만큼 ‘인간적’이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어릴 적 어머니 앞에서 떡국에 쓰일 새알을 곱게 못 빚으면 강화로 시집보내겠다고 해 ‘강홰년’이란 말을 처음 들었다며 웃으실 땐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흐르고 양 볼엔 간혹 홍조를 피우시곤 하였다”는 박완서(「낙타교」), “이대로 이대로는 절대 보낼 수 없”던 “문구 형님” 이문구(「이대로는」), “남루를 걸치고 다니다 음식점 입구에서 내쫓기던 철학자” 민병산(「민병산 선생」),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가면/풍로를 아예 길바닥에 내놓고 입김 호호 불어가며 밥 지어주던” 아내와 “독립문 밖 외로운 아파트”에 살았던 박정만(「독립문 밖」), “선량한 키에 그 누구도 속일 수 없을 것 같은 서늘한 눈매”를 지녔던 박목월(「애월(涯月) 지나며」) 등 그리운 얼굴들을 애틋한 마음으로 호명한다.

소설가 오정희 씨가 서울 나들이를 위해 춘천 역사에 들어서면 어떻게 알았는지 금테 모자를 눌러쓴 귀밑머리 희끗한 역장이 다가와 이렇게 인사한다고 합니다./“오 선생님, 춘천을 너무 오래 비워두시면 안됩니다.”/그리고 측백나무 울타리 가에서 서울행 열차의 꽁무니가 안 보일 때까지 배웅한다고 합니다./아, 나도 그런 춘천에 가 한번 살아봤으면!(「춘천」 전문)

시력 45년, 한평생 시의 외길만을 걸어온 시인은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문학적 열정을 가다듬으며 여느 젊은 시인 못지않은 왕성한 활동으로 시단의 중진으로서 듬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세상엔 이렇게 겸손한 분”(「절」)과 “그림자처럼 조용한 분들이 있”으나 “역사는 이런 분을 잘 기억해주지 않는”(「찬(讚) 김정남 선생」)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시인은 “나직나직 조용해지면서 오랜만에 나 자신으로 돌아”(「상(床)밥집에서」)와 지나온 삶을 반추해본다. 이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아직도 어린아이의 마음을 간직하고 싶은 평범한 시인”(시인의 말)으로서 온화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선한 눈빛과 순정한 마음이 새잎에 돋는 이슬방울처럼 “금빛으로 환하게 눈부”(「금빛」)시다.

양들이 조심조심 외나무다리를 건너 귀가하고 있습니다/곧, 저녁입니다(「곧」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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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4-28 18:10   좋아요 0 | URL
박효신 님 책이 새로 나왔군요.
꾸준히 그 시골에서
예쁘게 살아가시는구나 싶네요.
날마다 새롭게 웃고 노래하는 삶이라면
이렇게 때때로
예쁜 책을 빚어서
우리들한테 베풀어 주실 테지요.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
이렇게 철마다 다른 빛을 노래할 적에
그분 삶도
우리 삶도
곱게 빛나리라 느껴요.

appletreeje 2014-04-28 18:22   좋아요 0 | URL
예~ <바람이 흙이 가르쳐 주네>의 내용을 바탕으로 그후로 계속 썼던 글을
더한 책이라 합니다.^^
책속에 들어 있는 이야기들이 겉멋이나 감상적인 그런 글이 아니라
오랫동안 준비하고 실현한 시골살이 삶의 이야기들이 참으로 생생하니
읽는 사람들까지 새롭게 웃고 힘을 다시 낼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책이네요~

"나름 오랫동안 준비하고 내려왔기 때문에 시골 생활이 내 생각과 큰 차이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구요. 자연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게
나를 감동시켰어요. 100만큼 행복할거야 생각했는데 실제로 살아 보니 200이
훨씬 넘게 행복하니까요."
여는 글,의 마지막 말씀이 참으로 마음에 진하게 와 닿았습니다~*^^*

2014-04-28 1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29 0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28 2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29 0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29 0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29 0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1 15: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1 16: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다파출소, 소망의원, 해바라기미용실, 카페루카, 여주쌀집, 해운대성당. 골목 입구에 늙은 소나무가 서 있는...구부정하게 굽은 등으로 나를 업어주던 할머니를 닮은 소나무를 지나 바닷가 이차선 도로. 선셋모텔, 퀸스모텔, 글로리아호텔, 씨클라우드호텔, 그리고 황금호밀빵집 앞에 놓여 있는 빨간자전거를 타고 달려. 해변의 가로등이 켜지고 검은 고양이가 어두운 공원의 벤치 밑으로 기어드는 밤이 다가와...저녁 식사가 끝난 여덟 시에서 아홉 시 사이. 해변로 뒷골목 소문난복국집 앞...을 읽다가 이곳의 동선과 그 기억을 함께 했던 옛사람들과의 시간을 잠시 아직 잠에서 덜깬 눈,같은 아렴풋하고 뿌연 마음의 골목길로 그림자처럼 소리없이 걸어다니는 듯한 그런 오후.

 어디론가 떠나야할 것 같은 시간들인데 어딘가에 도착해도 여전히 마음은 허방을 딛고 다닐게 분명해 집어들고 읽고 있는 <그 길 끝에 다시>. 그러다가 뫼르소가 마리와 레몽과 함께 가고 있는 81쪽의 그 거리가 마음에 겹쳐지고 , [상투어를 다시 생각하다]까지 읽은 <담벼락에 대고 욕이라도>가 내내 주는 묵직하고도 뻑뻑한 안도감의 그 책을 다시 바라보며, 허기를 채울 음식을 떠올리다 아침에 남은 오물렛을 먹을까 생각하다 그것도 내키지 않아 그냥 굶기로 생각하는 오후.

 어제는 특별한 날마다 맛있는 음식들을 만들어 우리를 늘 불러주시는 님의 생신날. 뚜레쥬르의 다행히 마음에 들어 샀던 케익과 함께 선물로 드렸던 <이영애의 만찬>과 그리고 푸른 꽃을 그려 만든 작은 카드. 그리고 그곳에 참석 못한 수줍움을  잘 타는 어느 사람의 생일이 전날이었음을 전해 듣고, 새 선물을 준비할 시간이 없어 갖고 있는 책들중에서 그 사람이 즐겁게 읽을만한 두 권의 책을 카드와 함께 전달을 했는데 어떻게 잘 받고 좋아했는지..<아름다운 선물>과 그래도 재밌게 읽은 <열게 되어 영광입니다>. 18세기 런던의 대니얼 버턴의 해부학연구소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추리소설이 다소 어수선하기도 했지만, 에드워드와 나이절과 시인을 꿈꾸는 소년 나이선의 그 마지막 길의 끝이 깨끗한 지평선의 끝, 같아 마음에 들었다.

 자꾸 졸음이 끝없이 쏟아지는 듯한 시간들이다. 저녁에는 다시 미팅이 있고, 어느 책에 관한 의논들을 끝내고, 다시 각자의 이야기들과 술들을 마실 그런 시간들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책의 어떤 풍경들을 만나 이 메모를 끄적이고 있는데. 자꾸 밀린 졸음이 쏟아지니 이제 잠시 조금, 짧은 잠을 자야하는 그런 오후, 사는 것은 늘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어제 받은 강은교의 시집이 오래동안 나와 깊이 함께 하리라는 그런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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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벨 서점

 

 

 

 

                아마도 너는 거기서

                희푸른 나무 간판에 生이라는 글자가 발돋움하고 서서

             저녁 별빛을 만지는 것을 볼 것이다

 

 

                글자 뒤에선 빼꼼히 입술을 내밀 것이다

                혹은 꿈길이 머리칼을 팔락일 것이다

 

 

                잘 안 열리는 문을 두 손으로 밀고 들어서면

                헌책들을 밟고 선 문턱이 세상의 온갖 무게를 받아 안고

             낑낑거리고 있는 것을 볼 것이다

 

 

                구불거리는 계단으로 다가서면

                눈시울들이 너를 향해 쭈뻣쭈뻣 내려올 것이다

 

 

                그 꼭대기에서 겁에 질린 듯 새하얘진 얼굴로 밑을 내

             려다보고 있는 철쭉 한 그루

 

 

                아마도 너는 그때

                사람들이 수첩처럼 조심히 벼랑들을 꺼내 탁자에 앉는

             것을 볼 것이다

                꽃잎 밑 다 닳은 의자 위엔 연분홍 그늘들이 웅성이며

             내려앉을 것이고

 

 

                아, 거길 아는가

                꿈길이 벼랑의 속마음에 깃을 대고

                가슴이 진자주빛 오미자차처럼 끓고 있는 그곳을

                남몰래 눈시울을 닦는, 너울대는 옷소매들을, 돛들을,

             떠 있는 배들을

                배들은 오늘 어딘가 아름다운 항구로 떠날 것이다   (P.9 )

 

 

 

 

 

 

                혜화동

                         -황혼을 위하여

 

 

 

 

 

                  가끔 그리로 오라, 거기 빵들이 얌전히 고개 숙이고 있

               는 곳, 황혼이 유난히 아름다운 곳, 늦은 오후면 햇살 비

               스듬히 비추며 사람들은 거기서 두런두런 사랑을 이야기

               한다

                  그러다 내다본다, 커다란 유리창으로 황금빛 햇살이 걷

               는 것을, 그러다 듣는다, 슬며시 고개 들이미는 저물녘 바

               람 소리를

 

 

                  오래된 플라타너스 한 그루 그 앞에 서 있다. 이파리들

               이 황혼 속에서 익어간다, 이파리들은 하늘에 거대한 정

               원을 세운다

                  아주 천천히 날아가는 새 한 마리, 실뿌리들은 저녁잠

               들을 향하여 가는 발들을 뻗고

 

 

                  가끔 그리로 오라, 거기 빵들이 거대한 추억을 곁에 함

               초롬리 서 있는 곳

                  허기진 너는 흠집투성이 계단을 올라간다

                  이파리들이 꿈꾸기 시작한다  ( P.14 )

 

 

 

 

 

 

               불멸

                      -J에게

 

 

 

 

                 네가 버린 담뱃갑

                 네가 버린 구겨진 편지지

                 네가 버린 일회용 종이컵

                 네가 버린 껌종이, 이리 쿵덕 저리 쿵덕

 

 

                 네가 버린 손목시계

                 네가 버린 거대한 기억

                 네가 버린 어스름

                 네가 버린, 심연을 떠다니는, 이리 쿵덕 저리 쿵덕

 

 

                 너로 하여 빛났던 저 잡풀

                 너로 하여 빛났던 저 모래바람 입은 안개

                 너로 하여 빛났던 저 땀의 혀, 이리 쿵덕 저리 쿵덕

 

 

                 네가 버린 틈새

                 네가 버린 상징

                 네가 버린 고래의 날개 삼 천 리, 내 살에 덮여

                 이리 쿵덕 저리 쿵덕

 

 

                 오래된 수저 끝에서, 이리 쿵덕 저리 쿵덕

                 흩날리는 것들 가슴에 매달려, 이리 쿵덕 저리 쿵덕

 

 

                 네가 버린 영원

                 네가 버린 어머니의 먼 목소리

                 네가 버린 일기의 마지막 장

                 네가 버린 여름날 정오, 이리 쿵덕 저리 쿵덕

 

 

                 네가 버린 신

                 네가 버린 신념들

                 네가 버린 흩날리는 해방

                 네가 버린 자유, 접시 위에 누워, 이리 쿵덕 저리 쿵덕

 

 

                 네가 버린 곰국

                 네가 버린 김 오르는 선반

 

 

                 네가 버린 꿈의 연기 긴 사진들

                 네가 버린 불타오르는 책상, 이리 쿵덕 저리 쿵덕

 

 

                 흩날리는 불멸 가슴길 깊이 흐르니

 

 

                 어디에도 없는

                 어디에나 계시는 너

                 이리 쿵덕 삼 천 리

                 저리 쿵덕 삼 천 리   (P.11~13 )

 

 

 

 

 

 

                   주소

 

 

 

 

                  호젓한 밤 푸른 주소를 자꾸 써본다

                  무릎 끓고 자꾸 써본다

                  새벽을 잔등에 업어 재우며 자꾸 써본다

                  하오의 우체국에서 부친다

 

 

                  우체국엔 참, 창도 많다

                  휘어진 출생들이 들락거린다 쓰러진다

                  휘어진 주검들이 들락거린다 쓰러진다

 

 

                  편지지들이 소리 지른다

                  휘어진 주소의 몸 열려고 소리 지른다

 

 

                  나도 소리소리 지른다

                  자꾸 소리소리 지른다

                  가슴을 떠나보내며 소리지른다

                  창이 되어 소리소리 지른다 날아오른다 푸드덕푸드드덕  (P.40 )

 

 

 

 

 

 

                     너에게

 

 

 

 

                    너에게 밥을 먹이고 싶네

                    내 뜨끈뜨끈한 혈관으로 덮힌 밥 한 그릇  (P.44 )

 

 

 

 

 

 

                   떠돌이별 하나가

 

 

 

 

                                   바리가 걸어간다/ 바리가 걸어간다/ 푸른 지평

                                 선 황토 치마 벌리고/ 한 모랭이 지나 푸릇푸릇

                                 빵 사이로/ 두 모랭이 지나 불긋불긋 빵 사이로/

                                 바리가 걸어간다/ 바리가 걸어간다

 

 

 

                          영원은 즐거이 밤공기를 흔들었다, 집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영원 소리에 놀라 몸을 움추렸다, 모두 접속하고

                       있었다, 잠의 꿈속으로, 꿈의 접속으로, 식탁도, 가스레인

                       지도, 빨래대도, 컴퓨터도, 분리수거 쓰레기봉투도, 선반

                       들도, 즉석 해물탕도, 나도

 

 

                          밤의 얼굴은 부푼 빵 같았다, 즐거이 비누들도, 접속하

                       고 있었다

                       즐거이 라면들도 기나긴 선반에 업혀 접속하고 있었다

                       즐거이 커피도 기다림에 숨죽인 서랍에 안겨 접속하고

                       있었다

                       즐거이 새우도 마른 등 굽어 접속하고 있었다

 

 

 

                               바리가 걸어간다/ 바리가 걸어간다/ 푸른 지평

                              선 황토 치마 벌리고/ 한 모랭이 지나 푸릇푸릇

                              빵 사이로/ 두 모랭이 지나 불긋불긋 마른 새우

                             사이로 바리가 걸어간다/ 바리가 걸어간다

 

 

 

                            접속은 이 별의 미덕, 혹은 이별의 미덕

 

 

                            그 끝에 매달려 있었다니, 희망빛 떠돌이별 하나가, 혹

                        은 희망빛 도돌이표 하나가  (P.49~50 )

 

 

 

 

 

 

                       꽃술

 

 

 

 

                         저 불빛들을 어쩔 것인가

                         온몸이 눈이 되어 빛을 핥고 있는

 

 

                         보고지고  보고지고

 

 

                         꽃술 뛰어내림 보고지고  (P.62 )

 

 

 

 

 

 

                      미래

 

 

 

 

                         섬은 공손히 생각한다

                         철쭉꽃 벼랑 가슴에 받쳐 안고 공손히 생각한다

                         두 발 찬물에 담그고 공손히 생각한다

 

                         일찍이 나의 것이었던 너, 미래  (P.62 )

 

 

 

 

 

                       흙

 

 

 

 

                                      눈물이 눈물의 자식을 낳아

                                      퍼덕퍼덕 눈물의 자식을 낳아

 

 

                             마치 흐르는 물을 꼭 움켜쥐고 있던 자갈들처럼, 마치

                          날아가지 못해 안달하던 거위들처럼, 마치 흙의 주름 사

                          이에 슬며시 커지던 번개들처럼

 

 

                             흙이여, 내 잔등에 업히는 소멸들이여

                            흑흑 흐느끼는 탄생들이여, 부활들의 질주여

 

 

                                      눈물이 눈물의 자식을 낳아

                                      퍼덕퍼덕 눈물의 자식을 낳아   (P.67 )  

 

 

 

 

 

                      서면

 

 

 

 

                                       바리가 걸어간다/ 바리가 걸어간다/ 푸른 지평

                                    선 황토 치마 벌리고/ 한 모랭이 지나 화살표 사

                                    이로/ 두 모랭이 지나 화실표 사이로/ 바리가 걸

                                    어간다/ 마음 떨며 바리가 걸어간다

 

 

 

                           휘날리는 저물녘 속 저 등불

                           찢어진 페이지 사이 미처 닦지 못한 저 눈시울

                           눈물자욱도 짙어라, 저 황금빛 옷고름

 

 

                           휘날리는, 휘날리는 등꽃 터널 사이로

                           휘어진 길 사이로 사이로

                           삶의 알람 소리에 주춤거리는 저 임종 사이로 사이로

                           두리번두리번

 

 

                           부스스  샛눈 뜨는 판자벽을 지나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너무 넓은 천국을 지나

                           먼 것은 가까운 법

                           가까운 것은 멀디멀어

 

 

                           몸부림치는 희망을 걸어 걸어

                           구원, 그 먼 입술을 걸어 걸어

 

 

 

                  

                                        바리가 걸어간다/ 바리가 걸어간다/ 푸른 지평

                                     선 황토 치마 벌리고/ 한 모랭이 지나 화살표 사

                                     이로/ 두 모랭이 지나 화살표 사이로/ 바리가 걸

                                     어간다/ 마음 떨며 바리가 걸어간다   (P.88~89 )

 

 

 

 

 

 

 

                                                   -강은교 詩集, <바리연가집>-에서

 

 

 

 

 

 

 

 

 

 

 

 

먼 길 떠나 집으로 돌아온 바리데기의 노래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강은교 시인의 열세 번째 시집이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되었다. 저자는 이번 시집에서 부모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도처를 헤매는 바리데기 이야기를 통해 개인적 아픔과 시대의 고통을 노래하고 있다. 시집 전체가 ‘바리’의 여정을 따라가듯 구성되어 있어서 각 시편들은 노래의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서사적 성격이 뚜렷하다. 그래서 이 시집은 시인의 개인적 상실의 기록을 넘어 좀 더 보편적인 ‘바리(들)의 사랑 노래’로 읽힌다.

애달픈 기도들이 헤매는 이 들판 위에서

“그땐 몰랐다/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그땐 그걸 몰랐다.”
지용문학상을 수상한 강은교 시인의 시 「너를 사랑한다」의 한 구절이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사별한 남편 시인 임정남을 추모한다. 시인은 담담한 어조로 이별 후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사물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삶의 진실함을 노래한다.
이번 시집 『바리연가집』에서 J 또는 L. J. N.이라는 이니셜로 호명되는 그, 시인 임정남은 강은교 시인의 대학 동기이자 문학의 길을 같이 걸어온 친구, 연인이며 동반자였다. 그는 결혼 후 아내의 생명을 건 긴 투병의 시간을 함께했다.

서류의 빈칸을 채워나가다가
변호사는 그 남자의 직업란에 이르러
무직이라고 썼다
그 여자는 항의하였다, 그는 무직이 아니라고, 시인이며 꽤 유명한 민주 운동 단체의 의장이었다고,
얼굴이 대리석 계단처럼 번들번들하던 변호사는 짐짓 웃었다, ‘법적으로는 무직이지요, 취미라든가 그런…….’
그 남자는 순간 한쪽 팔 떨어져 나간 문이 되었다
먼 사막에서 불어오는 황사에 섞여 우둔한 먼지가 되었다
아물아물해지는 그들의 젊은 시절
황금빛 키스
아물아물해지는 그들의 자유
황금빛 키스
_ 시 「詩, 그리고 황금빛 키스」 부분

시인의 연인이자 남편, 동지이자 ‘70년대’라는 동인을 함께한 시인 임정남은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지만 현실에서는 제대로 설 자리가 없었다. 시에 나오듯 이혼 사유서에 ‘무직’으로밖에 기재될 수 없었던 사람, 시인으로서도 시집 한 권 남길 수 없었던 사람을 강은교 시인은 어떻게 추모해야 할까.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한 사람이 일상적인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죽은 자를 잊어야 한다. 죽음에 관한 각종 의례는 죽은 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산 자를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도(哀悼)라고 부르는 이러한 행위는 늘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죽음보다 강한 무언가가 망자에 대한 기억을 붙든 채 영영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날 나는 그걸 발견하였지
당신이 버리고 간 시는 총 다섯 편이더군
그때 눈이 왔었는지, 만년필로 쓴 시가 눈물방울에 얼룩져 있었어

(중략)

이젠 금빛으로 누래진 어떤 문학잡지 골짝 깊이 누워 있었어, ‘진보연합’이라고 쓴, 귀퉁이가 닳을 대로 닳은 봉투에 소중히 담겨서

꿈은 담기는 것, 영원의 봉투에 소복이 소복이 눈송이 또는 눈물 송이로 담기는 것
_ 시 「봉투」 부분

프로이트는 한 논문에서, 애도 작업의 요체는 ‘산 자가 떠나보낸 자에 대한 감정적 애착을 단절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해야만 산 자는 죽은 이에게 쏟았던 에너지를 다른 대상에 다시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러한 애도 작업을 스스로 거부하거나 외부의 방해로 충분히 이루지 못한 경우 산 자는 죽은 이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 사랑하는 이가 없는데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그에 대한 적절한 의미화가 사회로부터 부정되었을 때, 남은 자는 바닥없는 나락에 빠지게 된다. 애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자의 삶은 헤맴의 연속이다.

버림받은 자에서 구원자로, 바리데기의 귀향

이번 시집에는 강은교 시인의 추억이 담긴 장소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곳은 “희푸른 나무 간판에 生이라는 글자가 발돋움하고 서서 저녁 별빛을 만지는” 곳이며, “빵들이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곳”이다. 그러면서도 그곳은 “그리운 동네 외딴집이고, 누추한 가방이고, 낡고 낡은 구두”와 같은 곳이다. 바로 그곳에 “영원토록 변방인 그, 또는 영원토록 구원인, 희망인, 항상 너무 늦게 도착하는 그”가 살고 있다. 이처럼 아름답지만 이제 추억이자 지나간 시절이 되어버린 그곳을 기억하는 시인은 타인의 죽음뿐 아니라 언젠가 닥칠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다. 그래서 시인은 평생을 괴롭혀온 몸의 경련을 잠시나마 잠재워주는 “내 평생의 연인들―딜란틴과 바리움, 테그레톨, 라미탈”과 같은 약의 이름을 부르며, 고통이 있음으로써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삶의 비의(悲意)를 생각해본다.

나의 척추에 장미잎이여, 무지개 마차여
빛의 탯줄을 뿌려라
무지개 마차의 발자국 소리 하이소프라노로 사각사각
은빛 철로를 가고 있으니
기다려라, 기다려라
빛의 탯줄을 끄는 힘이 나의 혈관 기슭에 스미는 것을
경련은 나의 스승, 나의 시, 나의 마지막 첫사랑

오늘 석 달 치 항경련제를 처방받았으니 6월 22일까지 나의 목숨은 유예되었다
_ 시 「나의 거리―강은교 씨를 미리 추모함」 부분

그러나 몸의 경련은 약으로 다스릴 수 있을지언정 정신의 경련은 어떻게 할 것인가. 허무 의식과 죽음 충동이 시인의 초기 시를 지배한 주요 동력이었다지만, 자신의 죽음을 미리 추모할 수 있는 ‘여유’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시인에게 드리워진 허무 의식은 갑자기 찾아온 병마(病魔)와 아이와의 이별, 아버지의 부재, 남편과의 사별이라는 개인적 체험과, 오랜 세월 자유가 억압된 사회 경험에서 온 것이다. 시인이 첫 시집에서부터 선보인 연작시 ‘비리데기(바리데기) 旅行의 노래’는 그래서 시인의 눈앞에 펼쳐진 절망과 허무를 뚫고 나아가려는 의지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 시인이 버려진 자이자 자유의지의 상징인 바리데기를 호명하는 이유는 그녀야 말로 인간이 자기 존재의 근원에 던진 한 물음에 스스로 마련한 해답, 구속과 제한을 벗어나려는 문제의식, 생사의 한계를 초극하는 자유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운조가 걸어간다/운조가 걸어간다/푸른 지평선 황토치마 벌리고/한 모랭이 지나 은빛 냄비 사이로/두 모랭이 지나 은빛 국자 사이로/운조가 걸어간다/마음 떨며 운조가 걸어간다

이제 그가 올 시각
비애로 불룩한 여행 가방 끌고 그가 올 시각
좁고 좁은 골목길
낱낱이 가파른 발자국 소리처럼
이제 그가 올 시각
오래된 천장 밑 깊고 깊은 지하 방
흘깃흘깃 떨고 있는 창틀 아래로
-「발자국 소리」 부분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버려졌으나 그 버려짐의 운명을 사랑으로 전환해낸” 바리의 노래. “가장 일찍 버려졌기에, 가장 깊이 잊혀졌기에” “가장 멀리 걸어가고 가장 오래 사랑하는 자”가 된 바리는 한 개인의 삶과 죽음의 한계를 넘어 인간이라는 제한된 목숨, 그 애처로운 몰골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유자가 되어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다.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처와 암울한 시대적 우울로부터 먼 길을 돌아 비로소 집으로 돌아온 바리, 그녀의 손에는 자신을 버린 이들을 살리기 위한 ‘살살이 꽃’, ‘숨살이 꽃’이 들려 있다.

 

 

 

 

 

 

 

 

 

 

 

펼친 부분 접기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읽고 있는 이 책들이... 나와 함께 하여 

           감사하고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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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4-23 15:56   좋아요 0 | URL
사월 한낮에 마음을 노랗게 물들이는
고운 책들과 함께
따사로이
노래 부르는 하루 누리셔요..

appletreeje 2014-04-23 16:13   좋아요 0 | URL
예~ 감사합니다.
함께살기님께서도
고운 마음의 노래 부르시는
남은 오늘 되셔요...^^

2014-04-23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24 0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23 2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24 0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늘바람 2014-04-24 10:57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님 저도 더불어 마음에 생각과 뜻을 담네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appletreeje 2014-04-25 10:02   좋아요 0 | URL
저도 늘 감사드려요~ 하늘바람님께서도 행복한 하루 되시길요~*^^*

2014-04-24 1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25 1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25 17: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25 17: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의 장례식

 

 

 

 

 

                         바다로 가기 위해 가진 모든 책을 버렸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곳으로 가기 위하여

                         수천의 문장을

                         버리는데 육조 혜능이 게송을 들려주고 굴원이

                         리어카를 밀어주었네.

                         나 두 대의 오토바이를 양쪽에 세운 뒤 네트를 만

                      들고 하는

                         냉장 창고 서기들의 족구 시합에 참석하기도 했네

                      킬킬거리며

                         멘델레예프가 적당한 도수를 만들어 황제에게 바

                      쳤다는

                         보드카에 취해 밤새 서기들이 추는 오징어 춤 해

                      파리 춤을

                         구경하였다네

                         새벽이 되자, 서기들은 다시 생선을 기록하고

                         나는 버린 1.5톤의 책들 속 멸치 떼처럼 튀어 오

                      르던

                         명징한 문장들을 지우려 애썼다네

                         나 이 바다로 오기 위하여 책을 버렸네

                         더 이상 숨을 수 없는 곳으로 가기 위하여

                         수천의 시들을 버리는데

                         휠덜린이 요양 병원 창가에서 내다보고

                         김소월이 자신의 시 [비단안개]에 누가 곡을

                         붙였다며, 불법 테이프를 건네주었네

                         나 책 한 권 가진 게 이제 없다네 이 장례식엔

                         아무도 조문 오지 않고 킬킬 빨간딱지를 가지고 온

                         집달리만 도대체 책들을 어디다 버렸냐고

                         고함을 지르고 있다네  (P.26 )

 

 

 

 

 

 

                        해파리

 

 

 

 

 

                             해월(海月)이라고도 불렀답니다. 바다의 달, 정약

                          전은 유배지에서 얼굴과 눈도 없이

                             치마를 드리워 헤엄을 친다고 기록하고 있습죠.

                          달이 치마를 드리워 세상의

                             사람을 어디론가 어디론가 알 수 없는 이끌림과

                          당김을 향해 가게 하듯 오롯이

                             바다가 뒤집어져야 해파리 떼들이 다시 사라지겠

                          지만 오늘은 시월의 달이 너무 부풀어

                             저 빛의 치마를 견딜 수 없군요. 그래요. 떠나온

                          곳의 미련처럼 오늘은 해파리 떼도

                             몰려왔군요.

 

                             그래요. 가고 있는 길의 두려움처럼 바다에 수만

                          의 달빛 치마자락들이 꽃잎처럼

                             멀어져 있군요. 저 꽃잎들의 간 곳을 내가 새롭게

                          기록한다면 달빛 하나 바람에

                             훅, 날려 당신 자는 곳 창가에서 휘날릴까요.  (P.34 )

 

 

 

 

 

 

                        文魚

 

 

 

 

                        자신의 이름 앞에 글월 문 자를 붙여놓다니, 문어

                           야말로 문학적 생선이로군. 생김새 자체가 글월처럼

                           무언가 말하려 하니까, 고작 몇 마리 새끼를 살리기

                           위해 6개월이나 10만 개의 알에다 산소를 넣어주고

                           지키다 죽다니, 문어야말로 가장 화학적인 생선이로

                           군. 도깨비 화자였던가. 생이 죽음으로 화할 때, 화

                           한다는 건 도깨비의 다리를 건너가는 것. 허물을 층

                           층나무 4층에 벗어두고 간 매미는 어디로 갔을까. 살

                           아 있으되, 살아 있을까, 갸우뚱거리는 날들에 질주

                           할 수 있는 오토바이와 바다를 곁에 두고 고무대야

                           에서 철퍼덕 탈출에 성공한 저 문어 바라보는데 폐

                           암말기인지도 모르고 글월 문 자 그대로, 어시장 50

                           년 여장부인 그대로 새벽 수협공판장에서 쇠수레를

                           짚고 서 있는 안화점 여사  (P.36 )

 

 

 

 

 

 

                          임연수

 

 

 

 

 

                               사람이 된 생선이 있다

                               임연수라는 바다 생선인데 함경북도에 사는 임연

                            수라는

                               이가 잘 낚았다 해서 임연수라고 부른다 임연수가

                            임연수를

                               먹은 셈인데, 임연수는 참 맛있는 생선이라

                               손님들이 매일 불러 사람 이름을 얻었다

                               임연수 씨, 당신과 포장마차에서 독대해

                               오늘 또 한잔

                               당신은 사람처럼

                               나는 한 마리 임연수어처럼

                               누가 누구를 먹었는지 모를 때까지  (P.50 )

 

 

 

 

 

 

                            명태

 

 

 

 

                                당신을 바라보는 마음이, 내 옛 첫 마음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눈물을 뚝뚝 흘리며

                                복사꽃 그늘에서 바다로 걸어 내려간 일이거나

                                흐려진 바다 상회들의 거리를 배회하며

                                노가리 코다리 명태 동태 황태 북어로 따로 이름

                             불리며

                                뜯기거나, 얼리거나, 바람에 실리거나

                                얼어 바닥에 내팽개쳐지는 일이거나,

                                가끔은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일만큼이나

                                횟집 수족관 유리에 비치는 것이었는데

 

                                당신이 아는 사랑을 나에게만 얘기해주길

                                나는 속앓이도 접고 바랐었는데

 

                                오늘은 첫 마음 같은 이름 그대로 남고 싶어

                                불러보는 명태  (P.77 )

 

 

 

 

 

 

                             갈치

 

 

 

 

                                     (저 빨랫줄에 널린 갈치는 바닷물이 마르면 뼈와 살

                                 이 자연히 분리된다네. 세월이 마르고

                                    말라 당신과 내가 서로를 잃어버렸듯이)

 

                                    바다를 향해 낡아가는 냉동 창고의 천막과 함께

                                 사람의 그리움은 그리움대로 닳고 닳아서

                                    속까지 다 긁혀 내버려지고 바람에 말라가는 갈

                                 치처럼 이젠 생의 비린내도 거의 없이

                                    널려 있다네.  (P.79 )

 

 

 

 

 

 

 

                          우해에서 [우해이어보]를 읽다

 

 

 

 

 

                                     김려 선생의 옛 바다, 2백 년 전의 그 바다에 왔

                                  어.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참다가 나는

                                  다 잃었다고 말하기로 했고 하마트면 우해에서 사방

                                  까지 잃을 뻔했어.

 

 

                                     흰 등대와 붉은 등대

 

 

                                     나는 생선상자를 뜯어 아, 아, 아, 아, 하는 적어들

                                 의 입들과 으, 으, 으, 으, 하는 조기 새끼들의 입들

                                 과 끝끝내 입을 열지 않고 꾹 다문 채 얼어서도 죽

                                 어서도 침묵하는 고등어와 돔 들의 비명을 보여주고

                                 들려줬어.

 

 

                                    선생은 옛 바다, 암컷과 수컷이 죽어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원앙어와 능어, 계도어, 도알, 양타, 표어,

                                 노로어, 영수, 토묵 이런 물고기들을 들려줬지. 지금

                                 은 없는 것들.

 

 

                                    모든 사라진 것들에 향배(向拜)   (P.84 )

 

 

 

                                      *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는 담정 김려가 유배지인 진

                                     해(오늘날의 마산 진동)에서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어보로 1814년

                                     에 정약전에 의해 저술된 [자산어보]보다 약 11년 빠른 것으로

                                     알려졌다.

 

 

 

 

 

 

                              도마 소리

 

 

 

 

                                    된장은 끓고

                                    양파를 써는지, 조개를 바르는지, 마늘을 빻는지

                                    아득한 도마 소리

                                    아닌 듯 들려와

 

                                    그 도마 소리 들은 지 오래

                                    정신병원 요양병원 십수 년 창가에만 있다가

                                    결국은

 

                                    울 엄마

 

                                    괘안타 괘안타

 

                                    그 도마 소리 참 깨끗하고 맑은 소리

 

                                    다시 들려와

 

                                    그 소리 들리는 꿈에서

                                    한 백 년은 깨어나지 않는 꿈을 꾸었네

 

                                    집밖에는 봄꽃이 모두 몸 달아 달리고 있었네  (P.113 )

 

 

 

 

 

                                                             -성윤석 詩集, <멍게>-에서

 

 

 

 

 

 

 

 

 

 

 

 

 

 

“다 자라면 스스로 자신의 뇌를 소화시켜버린다”

퍼덕이는 힘이 서러워 의식을 지워버려야 했던 절망의 체험들
부둣가 사람들의 육성과 비릿한 갯내 녹아든 삶의 기록

또 하나의 곡절을 시로 승화시키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시어에 삶의 신산스런 목소리와 날것의 냄새를 덧입히는 시인 성윤석이 어시장 ‘일용잡부’가 되어 돌아왔다. 이 시집에는 시인이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배달 오토바이를 타고 부둣가를 누비며 틈틈이 쓴 시 74편이 수록되어 있다. 극장을 드나들던 소년(『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 동네』, 문학과지성사, 1996)은 묘지 관리인(『공중 묘지』, 민음사, 2007)을 거쳐 지금은 남쪽의 한 바닷가 도시(마산)에 정착해 있다. 스스로를 ‘잡부’라 칭하는 시인은 어시장에서 냉동 생선상자를 배달하거나 냉동생선을 손질하는 일을 하고 있다. 시인은 그렇게 한동안 시를 잊고 지내다가 그곳의 상인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던 중 모처럼 시심을 일으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 시집에는 멍게를 비롯해 문어, 상어, 해월(海月, 해파리), 사람이 된 생선(임연수), 빨간고기(적어), 호루래기(오징어의 새끼) 등 많은 수산생물들이 주요한 시재로 등장하는가 하면 요구, 통발, 유자망, 딸딸이 등 일상에서는 보기 힘든 어로 도구들도 자주 보인다. 문학평론가 오형엽은 이를 두고 성윤석이 자연 생태의 한 극단을 통해 현재와 과거의 체험을 증폭시키고 있다고 분석한다.

결국 성윤석 시의 비밀은 ‘체험의 강도’와 ‘실험의 밀도’가 강력하고 집요한 ‘기억’의 힘에 의해 합체되면서 두 몸이 아니라 한몸을 이루는 데 있을 것이다.
―오형엽 해설, 「체험의 강도와 실험의 밀도」 부분

 



어시장 ‘일용잡부’가 채록한 서러운 물고기들의 어보(魚譜)

 


이번 시집에서의 성윤석은 약 200년 전 진해(마산 진동의 옛 지명)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당정 김려가 우리나라 최초의 어족 도감 격인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를 쓰던 모습과 닮았다. 시인은 스스로를 부둣가에 유폐하고 수면 위로 끌려나와 퍼덕이는 생선처럼 불가능한 것을 갈구하지만,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는 그 서러운 힘은 삶의 비릿함만 더할 뿐이다. 희망은 너무 멀리 있고 슬픔만이 번민의 몫으로 돌아오는 상실감에도 불구하고 가 닿지 못할 빛은 감당하기 어려운 밝기로 시인을 향하고 있다. 달이 너무 환해 무서운 월명기(月明期)에 심연으로 깊이 숨어드는 바다짐승들처럼 시인은 세계의 명징함을 피해 끊임없이 침잠하는 중이다. 그렇게 시인은 오늘도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괴로워 의도적으로 의식을 지워내고 있다. 독자는 침잠의 그 어느 지점에서 시인의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던 격렬한 투쟁이 일순 정지하고 시의 미학이 절정으로 치닫는 것을 보게 된다.

 



멍게는 다 자라면 스스로 자신의 뇌를 소화시켜버린다. 어물전에선
머리 따윈 필요 없어. 중도매인 박 씨는 견습인 내 안경을 가리키고
나는 바다를 마시고 바다를 버리는 멍게의 입수공과 출수공을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지난 일이여. 나를 가만두지 말길. 거대한 입들이여.
허나 지금은 조용하길. 일몰인 지금은
좌판에 앉아 멍게를 파는 여자가 고무장갑을 벗고 저녁노을을
손바닥에 가만히 받아보는 시간
―「멍게」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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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3-29 16:33   좋아요 0 | URL
바다에서 살던 숨결이 뭍으로 올라와서 시인을 만났네요.
예나 이제나 바닷가에는 바닷내음 나누는 시인들이 살았겠지요.

appletreeje 2014-03-29 18:48   좋아요 0 | URL
예~ 시인의 시들 덕분에,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바닷고기들과 바닷내음을 흠씬 잘 즐겼습니다.^^

비로그인 2014-03-29 17:07   좋아요 0 | URL
올려주신 여덟 편의 시 모두 하나같이 마음에 듭니다. 시의 맛을 위한답시고 천연조미료만 고집한 흔적도 없고 애써 연민을 구하는 듯한 노력도 하지 않은 것 같아 더욱 좋은 시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근데 요구, 통발, 유자망, 딸딸이(?) 같은 '어구'를 제목(아니 소재?)로 한 시들은 의도적으로 쏘옥,
빼신 건...가요? ^^


appletreeje 2014-03-29 19:18   좋아요 0 | URL
ㅎㅎ 컨디션님께서 마음에 드신다니 참 좋습니다~
체험하지 않은 관념이나, 정서 등으로 쓴 시가 아니라 저도
참으로 마음에 들고 좋았어요.^^

말씀하신 '어구'들을 제목이나 소재로 한 시들을 의도적으로 쏘옥,
뺀 건 아니구욤 마음에 들었던 시들을 올리다 보니 어쩌다 그렇게 됐네요.^^
'요구'는 갈고리처럼 생긴 도구인데 경험만 있으면 할머니들도 거뜬히
생선궤짝을 찍어 당기는 도구이구요, '통발'은 장어를 잡으러 바닷속에 넣어 두고
'유자망'은 그물, '딸딸이'는 생선상자를 나르는 쇠수레라고 시에 씌여있어요. ㅎㅎ

그나저나 오늘 저녁은 싱싱한 멍게를 안주로 찬 소주 한잔 하고 싶네요. ㅋ

2014-03-29 17: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9 1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착한시경 2014-03-29 19:20   좋아요 0 | URL
기분이 좋은 날도 우울한 날도...시는 상황에 따라 읽혀지니 참 좋으네요~대전은 하루종일 비가 와요,,,전 외출하는 차 안에서 이 시를 읽고 있답니다~

appletreeje 2014-04-01 13:43   좋아요 0 | URL
오늘은 날씨가 참 화창하여 꽃천지,시지요~?^^
착한시경님! 늘 좋은 날 되세요~*^^*

후애(厚愛) 2014-04-01 13:56   좋아요 0 | URL
올려주신 시들 참 좋습니다.^^
<해파리> 시가 마음에 와 닿네요..
늘 좋은 시들 올려주셔서 감사드려요~!!!

오늘도 행복한 오후 되세요~*^^*

appletreeje 2014-04-01 14:46   좋아요 0 | URL
ㅎㅎ 감사합니다~*^^*
늘 함께 읽어주셔서 제가 더 고맙고 즐겁지요~
<해파리>, 바다의 달...저도 참 좋았어요..^^

후애님! 오늘도 봄꽃들같은, 좋은 하루 되세요~*^^*

보슬비 2014-04-02 21:51   좋아요 0 | URL
시를 읽으며 많이 웃었어요. ㅎㅎ참 재미있는 시들이예요.
오늘 아침에 임연수 구어먹었는데.. ㅋㅋ

생선을 가지고 이렇게 시를 짓다니 시인들의 감성은 못 따라가겠어요.

appletreeje 2014-04-02 22:04   좋아요 0 | URL
저도 늘 시인들의 그 빛나는 감성은 못 따라가겠더군요~
그래서 詩人,인가 봐요.^^

저도 내일은 울 보슬비님께서 드신, 임연수를 구어야겠어욤~ㅎㅎ

하늘바람 2014-04-03 00:24   좋아요 0 | URL
생활고로 아끼던 책을 다 팔았다고 속상해하던 선배가 떠오는 시네요

appletreeje 2014-04-03 21:22   좋아요 0 | URL
정말 그 선배분 너무나 속상하셨겠어요..ㅠㅠ
이덕무의 <책만 보는 바보>에서도, 집에 쌀과 땔감이 다 떨어져 책을 팔고
속상해하던 친구를 위로해 주기 위해 자신도 아끼던 책을 또 팔아
그 친구의 집에서 함께 술을 마시는 이야기가 있는데...문득 그 생각이 나네요,,

오늘은 비가 하루종일 내리고, 그래서인지 몸도 마음도 좀 춥네요,,
하늘바람님! 따뜻하고 좋은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