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저녁의 수채(水彩)
가난한 지붕은 어쩌다가 가난한 지붕을 가졌을까 하고,
하늘펜션과 별빛펜션은 어쩌다가 하늘과 별을 가졌을
까 하고,
펜션의 반짝이는 불빛 옆, 불 꺼진 지붕들은 누가 주인
일까 하고,
계절과 계절의 경계는 수채처럼 번지고 뒤섞여
겨울인지 봄인지, 시간은 접었다가 펼치기를 반복한다
삼월에도 일어나지 않는 개구리를 깨우거나
땅을 몇 번 두드려 송이버섯을 잠에서 깨어나게도 한다
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봄을 깨우고 있는 것일까
이 세상의 모든 어휘들은 반쯤은 따뜻하고 반쯤은 차갑다
반쯤은 말랑말랑하고 반쯤은 딱딱하다
어둠의 실루엣들이 뒤섞여 흐릿해지니 좋다
겨울 지나 봄이라고 고로쇠 물 한 통 비우고 나오는데
여름과 가을이 내 몸의 연장통에서 심장을 꺼내 달아난다
심장은 지나쳐 온 천막집 의자에 앉아 뛰고 있다
불꺼진 천막집은 어쩌다가 궁핍한 추억을 가졌을까 하고
비 내리면 계절은 번지고 뒤섞여 왜 수채(水彩)가 되는
가 하고, (P.14 )
업어준다는 것
저수지에 빠졌던 검은 염소를 업고
노파가 방죽을 걸어가고 있다
등이 흠뻑 젖어 들고 있다
가끔 고개를 돌려 염소와 눈을 맞추며
자장가까지 흥얼거렸다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희고 눈부신 그의 숨결을 듣는다는 것
그의 감춰진 울음이 몸에 스며든다는 것
서로를 찌르지 않고 받아준다는 것
쿵쿵거리는 그의 심장에
등줄기가 청진기처럼 닿는다는 것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약국의 흐릿한 창문을 닦듯
서로의 눈동자 속에 낀 슬픔을 닦아주는 일
흩어진 영혼을 자루에 담아주는 일
사람이 짐승을 업고 긴 방죽을 걸어가고 있다
한없이 가벼워진 몸이
젖어 더욱 무거워진 몸을 업어주고 있다
울음이 불룩한 무덤에 스며드는 것 같다 (P.26 )
영혼이 진흙처럼 뻐근해지고
부위별 몸무게를 달아보고 싶은 날이 있다
입술과 눈동자, 젖가슴과 배꼽, 심장과 머리통
제각각 놀기도 했으니 무게도 다를 것이다
따라오는 질문에 늘 엉뚱한 대답만 해댔으니
생각도 서로 다를 것이다
한 가지 더 고심해야 할 것도 생겼다
마음이 독거로 숨어버린 건 오래전 일
밖으로 내돌린 적 없는 마음아
아직도 몸 안에서 파닥거리고 있는 거니?
더 두려운 것은
희극이나 비극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것
체중계에 올라가본다
0에서 시작된 바늘의 작은 실랑이가
결판을 내지 못한 채 오래 망설이고 있다
혼자 울고 있는 사람의 어깨처럼 흐느끼는 바늘
울음이 흐르는 곳에 나도 있다
사랑과 고통이 서로 밀고 당기며 밀봉된 곳
영혼이 피부를 찢고 나온다
수북한 털, 주름살, 검은 반점, 파란 핏줄
몸을 뒤죽박죽 색칠해놓고 있다
이 반죽덩어리에서
눈물이 빠져나가도 가벼워지지 않을 것이다
내 영혼은 진흙처럼 무거워졌으니까
그것은 살결이 터진 채로 계속 자란다
넓고 넓은 곳으로 번지고 뻗어나간다
그것의 세포는 계속 변하고 커진다
체중계는 여전히 0에서 흔들리고, (P.30 )
신인류의 식사
소년은 휴지통을 뒤져 점심을 해결했다
휴지통을 뒤지는 건 당당한 일이므로
소년은 맥도날드나 롯데리아 봉지에서
햄버거나 포테이토를 꺼내 배속에 채워 넣었다
어느 국립대학교 인문대 앞에서 본 풍경이다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다가 문득 보게 된
야구 모자 눌러쓴 소년의 늦은 점심
소문이 꽃향기처럼 훅 몰려왔다
강의실 오르는 계단은 심하게 구겨져 있었고
무덤처럼 견고하게 입을 틀어막고 있어야 할 휴지통은
여기저기 내부를 쏟아내고 있었다
소년은 마지막으로 생수를 주워 뚜껑을 열었다
딸깍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침전물이 없는 순수한 지하암반수가
그의 목구멍을 시원하게 흘러 내려갔다
아프리카를 꿈꾸는 건 어쩌면 죄!
우린 식사의 배후를 의심해야 한다
먹을 게 많아서 저리 뚱뚱해진 휴지통이
누군가의 한끼 밥이 되는 것을
신인류의 배가 자꾸 부풀어 오르는 것을, (P.80 )
밀양 고동국
더운 날엔 차갑게
추운 날엔 따뜻하게 내놓는다는 고동국
비 내리는 일요일
식당 의자들은 비어 있었지만
나는 혼자 온 오십대 여자와 합석을 했다
식당 주인이 엄마와 딸처럼 함께 앉아 먹으라며
상을 차려 내왔다
내가 그녀 앞에 수저를 놓아주자
그녀가 조용히 물을 따라준다
그녀와 나는 서로 먹는 속도를 맞춰주며
조금 비켜 앉아 국에 만 밥을 삼켰다
주인은 비가 내려 따뜻한 국을 내놓았다고 했지만
나는 예전의 끈적끈적하고 착찹한 맛이 그리웠다
차가운 고동국은 말 못할 사랑을 품고 있다
담백하고 희멀건 국물 속에는 열망처럼
새파란 부추들이 뒤섞여 있어
슬그머니 피해가며 서러움을 삼켜야 한다
한 끼니의 슬픔이여,
상동역에서 잠시 멈췄던 기차가
다시 출발하는 그 힘을 믿어보기로 하자
낯선 여자와 모녀처럼 마주앉아 여독을 푼다
두 개의 플라스틱 국그릇이
백야(白夜)의 태양처럼 식탁 위에 떠 있다 (P. 114 )
-박서영 詩集, <좋은 구름>-에서
'실천시선' 216권. 1995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한 박서영 시인의 두번째 시집.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들의 발원지와 소실점을 찾아 그 속에 내재된 고통을 들여다본다.
그녀의 시선은 '울음의 엔진'을 찾아 '흩어진 영혼을 자루'에 담고, '심장의 마지막 직업'에 이른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평생의 고백'이 될 수 있음을, '지상의 눈꺼풀 속으로 침몰해버린 사랑'이 기나긴 생애를 증명해주는 단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음을 발견한다.
박서영의 한 마디
혼자 산책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진다. 혼자 있을 때 나는 더 수런거렸고 붐볐다. 바람이 많이 불고 비가 세차게 내린다. 밤에도 가라앉지 않는 태양처럼 안타깝고 슬픈 일들이 많다. 태양과 달이 서로를 바라보는 것처럼, 아직 오지 않았고 아직 떠나지 않은 당신과 걷고 싶다.
하나가 사라지면 다른 하나가 들어앉는 심장의 일들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만졌다. 멀리 구름들이 흘러가는 것. 새들과 꽃들. 여전히 나는 가슴 안쪽의 일들에 대해 생각하고 궁리한다.
누가 따뜻한 손을 내밀어 나는 슬쩍 두 손을 잡았다. 그 온기가 한동안 내 산책과 함께할 것이다.
좋은 구름
좋은 구름이 있다고 했다. 사진작가들은 그런 걸 찾아 떠난다고 했다. 빈 들에 나가 여자를 불렀다. 사랑스러운 여자는 화장하고 옷 차려입느라 늦게 나갔다. 사진작가는 버럭버럭 화를 냈다. 좋은 구름이 떠나버려서, 좋은 구름이 빈 들과 여자를 남겨두고 떠나버려서.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고 여자는 오래 빈 들에 서서 보았다. 사자와 치타. 새와 꽃. 눈물과 얼룩. 구름 속에서 자꾸 구름 아닌 것들이 쏟아졌다. 남자는 화가 나서 떠나갔다. 한 프레임 속에 좋은 구름과 빈 들과 여자를 넣지 못해서.
좋은 노을이 있다고 했다. 사진작가들은 그런 걸 찾아 뛰쳐나간다고 했다. 다리 위에 서서 여자를 불렀다. 여자는 또 노을이 떠나버릴까 봐 화장도 하지 않고 서둘렀다. 여자가 헐레벌떡 뛰어 노을 앞에 서자 사진작가는 또다시 화를 내며 떠나갔다. 좋은 노을이 떠나버려서, 좋은 노을이 강물과 여자를 남겨두고 떠나버려서. 땀에 흠뻑 젖은 여자는 다리 위에 서서 보았다. 사과밭 위로 기러기가 날아갔다. 몇 발의 총성이 울렸다. 붉은 구름이 흩어지고 기러기가 울었다. 노을 속에서 자꾸 노을 아닌 것들이 쏟아졌다. 이별의 순간에도 저런 멋진 장면이 연출되다니. 집에서는 혼자 두고 온 아이가 울고 있을 텐데.
여자는 바뀐 장면들을 떠올렸다. 언제나 뛰어오느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구름과 노을 사이의 핏자국. 후드득 새의 깃털들. 여자는 총성이 자욱한 빈 들판에 서 있었다. 여기저기 기러기들이 떨어지는 소리 들렸다. 빛이 쉬지 않고 풍경을 찍어댔다. 하늘의 뱃가죽에서 구름이 퍽퍽 떨어졌다. 구름과 노을과 여자의 심장이 한 프레임 속에 찍혔다. 천국의 아편 같은 구름이 빈 들에 내려왔다. 남자가 떠나자 비로소 좋은 구름이 여자의 혀 밑을 파고들었다. 키스는 얼굴의 불안을 심장으로 옮긴다. 이렇게 멋진 배신의 순간, 집에 두고 온 아이가 생각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