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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평점 :
저녁에 생선 가시를 발라 남편 밥 위에 올려주며 내게 그리 해주신 아부지 얘기를 했는데, 마차세가 이도순 유품을 태우던 장면을 보다가 목이 멘다. 못난이인 나를 그저 사랑해 준 사람. 갈색 점퍼를 당신 몸처럼 입고 사셨던 분. 평생 좋은 옷 한 벌 못 입힌 게 한이라며 서럽게 우시던 엄마가 양복 한 벌과 구두 한 켤레를 아부지 무덤 앞에서 태우셨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양복 위에 가지런히 놓아둔 구두가 타던 모습을, 연기냄새를 잊지 못하겠다.
지독한 가난속에서 10대 초반부터 홀어머니와 누이 셋을 책임져야 했던 고단한 삶을 살아온 청년이었던 우리 아부지는 다시, 육남매를 먹이고 입히느라 하루도 주름 펴보지 못했다. 우리네 어미, 아비가 어두운 한국 현대사에서 짊어져야 했던 질곡이 우리 아부지에게만 특별히 무거웠던 것은 아닐테지만, 곁에서 지켜보고 자란 자식 눈에는 절절하고 애끊는 일이다. 마장세, 마차세에게 아버지, 어머니 인생이 버거웠듯 그렇게도 아픈 날들이 소설에 촘촘히 박혀있다.
인민군이 서울에 진주할 때 고등학생들이 불렀다던 인민항쟁가 가사가 임화가 쓴 시에 곡을 붙인 거구나. 가사가 "일어나라 노예되기 싫은 사람들아" 로 시작하는 중국 국가와 닮았다.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 모르지만 문재인 대통령 아버지가 겪으셨다던 흥남철수 얘기가 실려있다. 그때 모습을 상상하니 끔찍하다. 동족상잔이 가슴 찢어지게 와닿는다.
"어머니 글씨는 가나다라를 겨우 엮어가면서 비틀거렸는데 혈연에서 달아나는 일의 어려움을 일깨워주었다." 라고 한 마차세 독백에 공감했다. 난 아직도 엄마가 서툰 글씨로 "이모집에서 자고 오깨(맞춤법도 틀린)" 라고 내게 쓴 별 것 아닌 메모를 지갑에 넣고 다닌다. 글씨에 새겨진 엄마가 귀엽고 가엾고 그립다.
김훈 작품은 『칼의 노래』이후로 일부러 읽지 않았다. 능력도 없으면서,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작가를 질투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독서모임 때문에 강제로(?) 읽기 시작한 소설에 여전히 시같은, 칼끝같은 감성이 살아있다. 김훈 글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내 마음대로 상상한 거지만 담배 한 모금 머금고 내뿜는 몽롱하고도 멍한 눈에 들어오는 저 먼 하늘을 닮았다.
텅 빈 몸짓으로, 허깨비로 일생을 후여후여 걸어온 사람들을 바람에 날려 이리저리 흔들거리는 빨래 그림자로, 바싹 마른 검불로 묘사한 것에 하아~감탄한다. 마동수가 몇 번이나 중얼거린 '여기가 거기인가'가 이 책 제목, 『공터에서』를 뜻하는게 아닐까. 공허하고 허무한 삶을 못견디게 힘겨워한 마동수,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 발버둥치던 형제들이, 삶의 허무를 지고 가는 우리들 모두가 짠해진다. '삶이 그러하단다.' 하고 먼저 간 이들이 속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