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지음 / 사회평론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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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시사IN]이라는 잡지의 창간독자입니다. 물론 그 전부터 보아왔던 것은 아니구요. 우연찮게 PD수첩을 통해 시사저널 사태에 관련된 탐사보도를 본 후, 마침 [시사IN] 창간 당시에 큰 결심(!)을 하고 정기구독을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어느덧 [한겨레21]과 [한겨레(신문)]까지 정기구독하는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까닭에 저는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그룹에 대한 내부고발로써의 양심선언에 대한 자세한 탐사보도를 접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수능을 치룬 연후라서 신문과는 그닥 크게 가까이 지내던 시기가 아니었던지라, 그 추이를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참 우연한 기회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김용철 변호사께서 이번에 사회평론社를 통해 [삼성을 생각한다(이하, 생각)]라는 책을 한 권 출간하셨더군요.


사회평론社의 책 중에서 기억나는 책이 하나 더 있습니다. [여러분! 이 뉴스를 어떻게 전해드려야 할까요? (이하, 여러분!)] 라는 책입니다. 전 국토를 들었다 놨다 했던 황우석 박사 및 연구팀이 가지고 있었던 윤리적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렸던 PD수첩 방송의 전후를, 당시 담당PD였던 한학수 씨가 직접 기록한 [여러분!]은, 2007년 10월 수능을 준비하는 와중에 읽으면서 제게 상당히 큰 충격을 주었던 기억이 있는 책입니다. 그러다보니까, 김용철 변호사의 [생각]을 읽으면서 여러모로 [여러분!]과 비교해보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생각]은, [여러분!]과는 다른 색깔의 책입니다. [여러분!]이 저자의 열정을 저널리즘으로 잘 세팅한 책이라면, [생각]은 저자의 체념을 지루하게 늘어놓은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용철 변호사께서 책을 맛깔나게 쓰시지는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나왔던 이야기가 마치 처음 나온 이야기인양 또 나오는 부분도 몇 부분되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이게 사실일까 싶을 정도의 이야기들이 덜 정제되어 투박하게 튀어나오기도 해서 읽는 중간중간에 불편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책 속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기가막히는 부분이 워낙에 많은데, 책을 조곤조곤 쓰셨다면 그 놀라움이 뼛속 깊이 스며들었을 이야기들이, 자주 거칠게 튀어나와서 불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생각]에 담긴 저자의 진술이 모두 사실이라면, 삼성그룹은 참 큰 실수를 하고 있는 집단임에 분명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자의 진술을 - 기억이라는 것의 불완전성을 생각한다면 약간의 오차는 있겠지만 - 신뢰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자가 진술한 삼성그룹 내부에서의 지난 10여년간 벌어졌던 상식 외의 일들이, 실은 최근 2년간 이명박 정권 아래에서 보여진 삼성그룹과 관련한 다양한 사건들의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삼성그룹의 총수인 이건희 회장이 무거운 죄를 교묘하게 피해가면서 결국은 사면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김용철 변호사의 [생각]은 그런 면에서 한국 사회가 처한 위기를 삼성그룹이라는 소위 '초일류글로벌그룹'의 옳지 못한 행태를 통해 거칠게 보여주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사회가 처한 위기와 삼성그룹이 하고 있는 커다란 실수는 무엇입니까? 제가 생각할 때, 그것은 바로 염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당한 노력 없이 가진 자가 염치없이 그것을 행사하고, 가진 자가 되기 위해 염치없는 짓을 하고, 가진 자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염치불구하고 살아가는 그런 이야기들이 두꺼운 책 한가득 적혀 있습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1997년, 우리는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은 대통령을 두지 않기 위해 투표했다고 말입니다. 가진 자의 도덕적 책무를 강조하던 이 사회는,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07년에 정반대의 선택을 하였습니다. 10년간 이 사회는 사회구성원의 윤리적 행동을 묵살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온 것입니다.

윤리라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노력한 자가 자신의 댓가를 받지만,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댓가를 충분히 거두지 못한 이들과 댓가를 나눌 수 있는 것. 즉,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의 마음가짐을 어루만지는 것이 바로 윤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것이 인간됨이고, 인간이 살아내야할 이치인 것이죠.
 

한국 사회와 삼성그룹은, 당연히 해야할 바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잘 사는 것보다 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을, 애써 외면하는 것이죠.

그래서 안타깝습니다.

저는, 바르게 살고 싶습니다. 그것이 잘 사는 것(well-living)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다만 잘 사는 것(well-buying)에 그치는 저간의 사회의 모습이 두렵고 섬뜩하기만 합니다. 게다가, 저는 예비교사이기도 합니다. 교단에 섰을 때, 제 학생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야할지 벌써부터 겁이 납니다. 아니, 멀리 갈 필요도 없겠군요. 지금 제 뒤에서 잠들어있는 제 따놈들에게, 과연 저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이, 부유하게 사는 것보다 가치있는 일이란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설령, 말했다고 치고, 제 아이들이 커서 제게,

'그딴 식의 가르침때문에 제가 도태된 것 아닙니까?'라고 따져묻는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생각]을 읽으면서, [여러분!]을 읽을 때와는 다른, 암담한 기분을 느꼈던 이유는 바로, 황우석 박사 사태때와는 다르게, 삼성그룹이 저지른 여러 행태에 대해서는 사회가 다른 잣대를 들이대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재수익과 미래수익의 현실감일 수도 있지만...

삼성이 망하면 대한민국이 망한다.

이 말은 마치, '박정희 정권이 민주화를 지연시켰지만, 결국 경제성장을 이루어내지 않았는가?' 라는 말과 같습니다.

삼성그룹이 망해도 대한민국은 망할지 안 망할지 알 수 없습니다. 박정희 정권이었기 때문에 경제성장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입니다.

이미 사회 전체가 잘먹고 잘살게 된 2010년에, 우리는 '더' 잘먹고 잘살기위한 욕망들로 가득찬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염치가 없어지는거죠. 온 사회가 부(富)의 축적과 행사를 가장 큰 가치로 이루는 이 땅.


사필귀정이라는 말이 있죠.

김용철 변호사의 [생각]을 읽으면서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위의 사자성어였습니다. 이 사회는 바른 것을 향해 다시 전진할 수 있을까요? 저자의 체념이 묻어나는 책을 읽으면서, 저도 체념이 듭니다.

그러나, 그렇게 머무를 수는 없죠. 사필귀정일테니까.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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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자본주의
로버트 라이시 지음, 형선호 옮김 / 김영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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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자본주의(이하, 슈퍼)]는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서거하시기 전에 읽으시던 책 중 하나로 회자된 적이 있는 책입니다. 학교 도서관에 있어서 우연히 읽기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출간된 지 좀 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첫 대출자였습니다. (저도 대학생이지만) 요즘 대학생들의 지적 관심이 도대체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지적 관심이라도 있는지에 대한 묘한 호기심이 들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과연 나는 시민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가, 혹은 투자자와 소비자로서의 입장을 더 중시하고 있는가’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착한 소비에 대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지라 마트를 끊어보려고 시도한지는 거의 1년 가까이 되어가고 있으며 꽤나 성공적으로 마트를 끊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적어도 밤에 심심하면 아기들 데리고 가던 습관은 이미 벗어버렸으니까요. 그렇다고 동네시장을 찾을 만큼의 용기(!)는 없습니다. (물론, 마트도 믿을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동네시장의 물건은 도대체 저 야채가, 저 생선이, 저 고기가 어디의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3의 대안으로 생협 - 저희 가족은 한살림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 을 가고 있긴 하지만...

저자는 1970년대 이전의 미국 사회를, 과점 체제에서 비롯된 고용안정으로 인해 중산층이 두툼하게 자리 잡고 있는 ‘황금기에 가까운 시대’로 명명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는 비록 생산의 효율성이라든지 제품의 혁신적 개선 같은 것은 별로 없는 맥빠진(!) 시대였지만, 대신에 기업은 과점 체제 덕택에 소비자들의 소비량을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고용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고, 따라서 기업이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은 노동자의 스트라이크를 방지함으로써 안정적인 생산을 확보하는 일이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인종차별 문제라든지 매카시즘의 광풍 등의 사상적 차별만 없었다면 완전히 황금시대라고 불릴 수 있을 만큼의 부의 분배가 이루어지던 시대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런 덕택에 소비자와 투자자는 큰 이익을 누리지 못하고 있기는 했습니다. 과점 체제 아래에서, 소비자는 큰 변화 없이 늘상 보이는 물품을 사야했고, 투자자는 자신들보다 노동자과 사회 전체의 이익을 더 생각(!)하는 경영진들 때문에 막대한 배당금을 받을 기회 따위는 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 이후부터 조금씩 변화하는 양상을 띄게 됩니다.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으로, 냉전시대에 국가의 지원에 의해 군비 증강을 위한 무기 개발에 여러 연구들을 하던 것을 꼽을 수 있습니다.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이렇게 개발된 것들이 자연스럽게 민간으로 넘어오게 되면서 경제체제는 큰 변화를 불러오게 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인터넷의 발달은 소비자의 다양한 needs에 귀 기울이게 하면서 한 가지 물품을 그냥 줄기차게 - 안정적이지만 변화와는 무관한 - 생산하던 과점 기업들을 당황에 빠뜨리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다양한 기술력의 성장으로 공장은 컴퓨터의 발달에 기인한 생산의 기계화를 꾀할 수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해 과점 기업의 안정성에 대응할 수 없었던 소·중규모의 기업이 틈새시장을 노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결국 생산자는 치열한 가격 전쟁 가운데로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윤리적 기업, 착한 기업 따위는 가격 전쟁 아래에 묻혀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기업은 고용인을 조금 더 쥐어 짜더라도, 조금 더 비윤리적인 방식/형태의 물품을 팔게 되더라도, 착한 가격을 만드는 것을 당면 과제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비자는 냉정하게 돌아서니까요. 그러면서 기업은 투자자의 투자에 부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맞이합니다. 투자자가 뭉쳐서 자신들의 투자에 대한 댓가를 받아내길 원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이제 ‘슈퍼 자본주의’가 도래했음을 알립니다. 그러면서 이제 ‘소비자/투자자’와 ‘시민’의 역할 사이에는 갈등이 벌어집니다. 작은 임금과 불충분한 사회보장제도로 고용인을 싸게 부려먹고(!), 윤리적으로 부적절한 물건을 팔기도 하는 기업을 보면서 불편한 마음을 갖는 ‘시민’과, 그런 기업의 행동을 통해 더 저렴한 물건을 사고, 더 나은 이득을 취하는 ‘소비자/투자자’의 갈등... 문제는 갈등의 두 주체인 ‘시민’과 ‘소비자/투자자’가 실은 두 주체가 아니라 한 주체라는 사실입니다.

기업에게는 죄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저자는 기업이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업은 더 나은 이익을 내고, 더 저렴한 물건을 팔기 위해 다만 자본주의적 본성에 충실하고 있을 뿐입니다. 삼성이 무노조경영을 하고 불법 경영권 승계를 한다고 하더라도, 거칠고 광범위한 방법으로 로비를 하고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더 저렴한 물건을 만들고 더 나은 이익을 투자자에게 돌려준다면 실은 문제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정말 문제가 없는 것입니까? 책을 읽으면서, 본질적 문제이자 해결책은 시민이자, 동시에 투자자이며 소비자이기도 한 저에게 있음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법인세를 폐지하고 회사에 대한 소송을 멈춰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법인세 대신에 투자에 대한 이익을 얻어가는 투자자의 이익금에 세금을 물리고, 비윤리적 행위에 대해 불매운동 따위를 벌일 것이 아니라, 비윤리적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법체계 아래에서는 법인도 행위주체이긴 하지만) 여러 기업의 행위가 기업 스스로 결정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기업이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수도 없는 것인데, 즉 기업의 행위와 그에 대한 책임은 기업 경영인/투자자에게 귀속되어야 하는데 현재의 법체계로는 돈은 개인이 벌고 책임은 기업이 질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저자는 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미국 기업의 광범위한 로비 행위에 대한 비용은 기업에서 나가지만, 그 기업이 얻는 이익은 투자자에게 돌아간다면 그것은 원인과 결과의 불일치일 수 밖에 없겠지요. 더 나아가, 불매운동을 해봐야 그것은 본질적인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기업이 도덕적인 경영을 해야 할 의무는 사실상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업에게 도덕적인 행위를 요구한다고 - 불매운동 따위로 - 하더라도 기업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익을 위한 집단이므로 그것을 굳이 해야 할 의무도 해야 할 책임도 없습니다. 더 근본적인 해결책은, 룰을 만드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다시 ‘시민’과 ‘소비자/투자자’를 자웅동체처럼 한 몸에 품고 있는 개인의 결정이 중요해집니다. 페어플레이를 위해서 새로운 규칙을 만드는데, 당신은 동의할 것인가? 비록 당신이 향유하는 ‘소비자/투자자’로서의 이익이 조금 - 혹은 조금 많이 - 줄어들더라도 상관없는가?

저자는 ‘슈퍼자본주의’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슈퍼자본주의에 대응하는 개개인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설파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현재 슈퍼자본주의 시대에 닥친 민주주의의 위기이자, 민주주의적 자본주의는 하나에 다른 하나가 종속된 것이 아니라 마치 수레의 두 바퀴처럼 동일한 크기와 모양이어야 한다는 것을 책 곳곳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는 이야기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자가 후기에도 밝히고 있지만, 우리는 기업이 눈먼 돈을 마구 날려가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을 로비스트를 통해 국가 - 의회 - 로부터 구매하는 데에는 조금 더 깨끗할지 모르겠지만, 민주주의 질서 아래에서 자본주의를 수행하는 데에는 조금 더 지나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아니, 얼마 전에 그 로비로 뜨겁게 나라를 달구다가 이제 흐지부지 된 삼성 로비 사건 같은 것을 볼 때, 우리나라에 로비스트는 없지만 로비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훨씬 많은 것이므로 실은 더 문제적인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수천억 로비는 증거 불충분으로 수사도 못하는 검찰이, 600만불 로비 - 진짜 로비인지 알 수도 없는 - 에 대해서는 불충분한 증거를 충분하게 만드느라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서거하신 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슬프고 분한 마음만 앞서게 되네요)

지난 총선 때의 뉴타운 광풍, 부패한 세력이 무능한 세력보다 낫다는 표현, 경제만 살릴 수 있다면 도덕적 해이 정도는 얼마든지 눈감아 줄 수 있다는 말들... 클린턴의 표현을 빌어 제 독후 감상을 마치려 합니다.

‘바보야, 문제는 민주주의야!’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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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의 헌법 에세이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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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정치 이력을 잠깐 언급하자면, 저는 2002년도에 개혁국민정당의 당원으로 입당한 전력이 있습니다. 개혁국민정당은 유시민 전 의원과 김원웅 전 의원이 제대로 된 정당정치를 우리나라 정치에서 구현해보고자 한 정당으로, 상향식 의사결정이 가장 큰 특징이었고 당비를 내는 당원들로 운영되는 '책임정당'이었다고 볼 수 있겠죠. 적어도 지금처럼 막무가내로 정당에 입당원서를 쓰는 일은 없었고, 적어도 간단하게나마 정강정책 정도는 숙지할 수 있을 정도의 책임감은 있었으니 '책임정당'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 듯 하네요.

그 개혁국민정당이, 열린우리당과 합당하고, 열린우리당은 몇몇 기억하기 힘든 정당의 이름을 전전하다가 지금의 민주당이 되어버렸고, 유시민 전 의원은 지금 당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속칭 '야인'이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그 자신은 '지식소매상'이라는 명함을 하나 파서 가지고 다니시나 봅니다. :D

 
유시민 氏 - 전 의원? 전 장관? 딱히 붙일 호칭이 마뜩찮아서 그냥 氏라고 쓰겠지만, 저는 유시민 氏에 대해서, 삼촌뻘 되시는 분이시기도 하거니와 정확하면서도 넉넉한 성품 덕택에 분명히 호감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둡니다. 호칭은...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님, 이라는 호칭은 너무 높인다는 느낌이 들고, 氏라는 호칭은 너무 객관적이고, 때로는 버르장머리 없어 보여서 난감하지만... 뭐 그렇습니다. ^^a - 의 책은 여러 편 읽은 바 있습니다. 근작이었던 '대한민국 개조론'의 경우에는 짧게나마 감상글을 쓴 바도 있습니다.

프롤로그를 넘어선다면, 읽기 쉬운, 그러나 단지 편하게 읽히지는 않는 에세이 글이 단편의 형식으로 수십개가 있습니다. 솔직히 불만입니다. 적잖이 비싼 책값에, 단편적인 소회가 절반 정도를 이루는 글을 쓰시고는, 뻔뻔스럽게(!) 지식소매상이라뇨. 이건 잔뜩 기대에 부풀어 책을 집어든 독자의 김을 새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글은 짧고 간단하게 읽힙니다. 1부에서는 헌법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과 현재의 제현상에 대한 해석을 담아내었고, 2부는 전 정부에서 권력의 핵심부에 있으면서 경험했던 여러 일들과 그에 얽힌 소회들을 담아내었습니다.

네. 그렇기에 유시민 氏는 자신을 지식소매상이라고 한 것이겠죠. 말 그대로 도매로 여기저기에서 떼어온 재료들을 잘 가공해서 판매하는. 딱 그 정도입니다. 소라는 동물이 가진 본질적인 구조와 성향을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육회 맛은 느낄 수 있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조금 안타까웠다고 할까요?

일전에 '개념어사전'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화장실에 두고 읽었었죠. 틈틈이, 짧게 끊어지는 글들을 읽으면서 가졌던 느낌 같은 것을 이번의 '후불제 민주주의'를 읽으면서 느꼈습니다. 특히, 책의 목차 중에 '최장집'과 '장하준'이 있는데, 저자는 앞의 두 분에 대한 저작 중 근작인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와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기반으로 비판적 글쓰기를 하고 있는데, 문제는 제가 두 책을 다 읽었고, 두 분의 책을 조금 더 읽었다는데에 있습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나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비롯한 장하준 교수의 일련의 저작물에 대해서, 유시민 氏의 평가는, 그 옳고 그름을 차치하고, 기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이에게는 '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라는 정도의 느낌이지 그 이상의 사유를 이끌어내는 정도의 역할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개념어사전'이라는 책도 그랬고, '후불제 민주주의'도 그렇고... 얼치기 법학도로서 헌법에 대해서 들었던 수업들을 생각하면서, '아! 이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구나!' 정도로 끝나버린다면... 독서 이후의 안타까움은 참 크다고 말씀드릴 수 밖에 없겠습니다. 자꾸 지식도매상과 지식소매상의 음식 맛을 비교할 수 밖에 없다는 안타까움은, 어찌보면 저자가 전작들 - '거꾸로 읽는 세계사' 라던지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같은 책 - 에서 여러 재료를 잘 섞어서 아무도 만들어내지 못했던 새로운 사유를 이끌어내었던 모습과 자꾸 비교되는 안타까움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책은 쉽게 읽힙니다. 그러나 다루는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 2MB 정부의 뻔뻔한 역주행 - 책은 편하게 읽히지 않습니다. 그건 저자가 아니더라도, 이런 범주의 책을 누가 썼더라도 아마 편하게 읽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요즘 시대가 그러니까요. 그런 탓에 평균값은 하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다만, 프롤로그는 정말 읽을만 합니다. 많은 분들이, 우리나라 민주화가, 서구의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났던 여러 사건 사고들 없이 다만 단순하게 이식된 민주화이기에, 민주적 절차를 수행함에 있어서 서구 사회가 그들의 민주적 정당성을 획득해 나가면서 다양한 계급의 동의를 얻었던 것과 같은 절차 없이 다만 민주화라는 이름만 빌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런 현상을 '후불제 민주주의'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무너져내린 독일의 제 2제국의 뒤를 이은 '바이마르 공화국'이 충분한 민주적 절차 없이 사회민주주의 공화국을 세운 것이, 1931년 나찌당의 총선 승리로 귀결되면서 혹독한 후불의 댓가를 치루었던 것처럼, 우리나라도 투쟁의 댓가로 얻어낸 민주주의의 정당성이 있지만, 이것이 일반 시민과 유리되어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시민이 그 댓가를 치루어야 할 것이며 지금 그 댓가를 치루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됐거나, 이런 민주주의의 댓가를 후불로 치루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댓가를 치루는 방법이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위해 시민들이 연대하는 것임을 저자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 부분만 가슴 깊이 새기더라도 책은 그 값어치를 오롯이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누구와 연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담은 부분이 글의 1, 2부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렇다면... 글의 핵심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이며, 본문은... 다만 그에 대한 실례이자 증명일 뿐인가요...? @.@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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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과 진보당 - 한 민주사회주의자의 삶과 투쟁 커리큘럼 현대사 3
정태영 지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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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봉암은 사형당하기 직전 옥중 성명을 통해 "우리 동지들은 현실의 포로가 되지 말고 우리의 이념을 살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근본적으로 진보 세력은 인간의 이성적 노력이 만들어낼 수 있는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현실의 포로가 된다는 것은 진보가 아니라는 말과 같다. 그러나 현실의 포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서문, p14)  
   

진보세력을 정당으로 결집시키는 일은 어찌보면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숙원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민주주의의 꽃이 정당정치라고 한다면, 우리나라에서 이렇다할 정당정치의 이상을 구현해본 기회가 지난했던 일이 첫번째이며, 그 와중에 대화와 타협의 정신을 담당할 진보적 축이 없었던 것이 두번째의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책을 쓴 저자가 언급하다시피,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처럼 보수적인 정당이 보수적 프레임 안에서 대화와 타협을 해나가는 정당구조를 가져왔기 때문에 여러가지 진보적 정책이 선보일 기회가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근년에 이르러서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진보적 색채를 띄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엄밀하게 그들이 진보적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에 대한 판단은 이 책 [조봉암과 진보당]을 읽으면서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울산에서 이루어지는 '현실포로적' 행태를 보면서 더욱더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50년대 활동하던 구세대 진보 세력은) 대다수가 정치 경험이 비교적 적은 '지사형'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또한 작품에 있어 남과의 타협이나 조화에 익숙하지 못한 완고한 편집증 활동가들이었다. 동일한 조직에서 활동해본 일이 없던 이들은 (4.19 직후 1960년의) 7.29선거에 참패한 뒤 쉽게 분해되어 자멸했다. 오늘의 민주노동당은 이들의 실패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p261)
 
   

오랜 망명생활을 거쳐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를 썼던 홍세화 氏가 자신의 책에서 이야기했던 '관용'의 정신이 지금의 진보정치판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진보성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는 활동가들이 한세대 앞을 내다보지 못한 채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지지 못한 채 지금처럼 끊임없이 백가쟁명한다면, 우리나라에서 진보의 정치는 요원할 것입니다.  
 
모든 혁명은 이름도 빛도 없이 스러져간 이들에게 기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진보당보다는, 1956년의 제 3대 대통령 선거에서 200만표를 득표하여 23%의 득표율을 기록했던 죽산 조봉암 선생 - 23%라는 득표율 이상을 기록했던 대통령 후보자는 지금까지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이승만, 박정희,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 이외에, 이회창 후보와 정동영 후보 이외에는 없습니다 - 에게 조금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상태에서 독서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조봉암 선생에게는 따뜻한 애정이 담긴 - 그래서 냉정하거나 객관적이지는 못한 - 서술이 이루어져있고, 진보당에 대해서는 진보당의 역사를 (문서적으로) 복원하며 분석하려는 서술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행간언에서 조봉암 선생의 여러 약점들을 읽을 수- 인간적이랄까... 혹은 행정적인 면보다는 지사적인 면이 강하달까... 혹은 (자칫 잘못하면) 기회적이라고도 읽을 수도 있겠고, 외톨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반면에 유연한 정치적 움직임과 중도를 추구하는 자세는, 양보를 죽음으로 아는 지금의 세태에 한 번 쯤은 되새겨 볼만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1공화국 당시 자유당과 민주당의 보수적이며 정권 지향적인 정치 프레임 속에서, 짧지만 큰 자취를 남겼음에 분명한 진보당과 조봉암 선생에 대하여, 저자의 바램대로 정당한 평가의 기회가 주어지기를 이 책을 읽어가면서 저도 바라게 되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보수적 프레임이 (거의) 전부인 이 시대에서 사회적 민주주의 (혹은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말이 어떻게 인지될지 궁금합니다. 실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 프레임 자체도 이미 보수로 굳어진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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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조건
도리스 컨스 굿윈 지음, 이수연 옮김 / 21세기북스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오랜만에 집중해서 - 그러나 자그마치 한 달 여의 시간을... - 읽을 수 있었던 책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인 에이브러햄 링컨에 대해서 많은 단편적인 지식들을 가지고 있지만, 현 미국 대통령인 오바마가 이 책을 취임 전에 읽었다는 외신기사를 보고, '링컨'이라는 인물에 조금 더 다가서보자는 생각에서 책을 읽어볼 시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책의 절반 정도는 지난 한 달 여간, 책의 나머지 절반 정도는 이번 주 화요일 저녁과, 어제 저녁에 읽었네요. 아무래도 링컨이라는 인물이 드러내는 진정한 가치는 '남북전쟁'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남북전쟁 시대를 그린 중간 이후 부분이 조금 더 집중력있게 읽힌 것은 사실입니다.


이 책은 링컨의 평전은 아닙니다. 물론 링컨에게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지만, 책의 원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1860년 미국 대통령선거 공화당 후보 경선에 참가하였던 라이벌들에게서 책은 시작되고 있습니다. 독특한 구성이지만, 책의 서두에는 링컨과 슈어드, 헤이스와 베이츠의 입장에서 1860의 공화당 후보 경선에 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네 명의 인물의 과거사로 거슬러 올라가 그들의 배경과 성장과정 및 정치적 성향과 민감한 이슈에 대한 견해를 차근차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굳이 책의 저자가 이런 구성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이 책을 통해 남북전쟁 당시의 정치적 상황 및 남부와 북부의 대립점을 명확하게 하면서, 특히 노예해방 편에 섰던 네 명의 공화당 인물들의 정치적 스펙트럼이 약간씩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이 네 사람이 어떻게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를 조율하면서 남북전쟁에 북부의 승리를 가지고 왔는지를 잘 드러내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노예해방의 견해를 가졌지만, 가장 급진적이었던 헤이스부터 가장 보수적이었던 베이츠까지 조금씩 다른 스펙트럼을 어떻게 조율하고 양보해나가는지에 대한 일련의 과정들이 잘 드러납니다.

그러나, 결국 책이 페이지를 더해갈수록, 저자는 팀의 리더인 링컨의 진가를 드러내게 됩니다. 이러한 링컨의 진가는 제임스 러셀 로웰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 가장 잘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결국엔 국민을 억압하게 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여론에 대한 깊은 이해는 가장 큰 정치적 능력이다. (중략) 링컨은 여론과 완벽하게 교감했으며, 적절한 시기를 찾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p635)  
   

링컨은 전쟁의 어려운 국면에서, 신중하게 시기를 조율하고 자신의 내각을 조율하다가,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시의적절한 결정을 내렸음을 이 책의 모든 부분을 통해 우리는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런 링컨의 탁월한 결정력은 링컨이 여론의 흐름과 시대의 흐름이 가장 적절하게 교차하는 점에서 늘 정확한 결정을 했다는 것으로 입증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링컨의 능력은, 그의 내면에 깊이 자리잡은 헌법의 이상에 대한 신뢰와 끊임없는 신중함, 그리고 그의 정직하고 온화하며 유쾌한 성품 때문임을 책에서는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만 여론을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여론이 잘못된 방향을 택하고 있다면 신중하게 여론의 흐름이 바뀌기를 기다리면서, 정직하게 헌법의 이상에 대한 신뢰를 드러내면서 온화한 마음가짐으로 기다리는 것이 바로 링컨이 재임기간동안 보여주었던 모습입니다.


책의 마지막에 링컨의 죽음에 대한 언급, 그리고 링컨과 함께 팀을 이루었던 내각 및 주변인물들에 대한 에필로그는 짧지만 강렬합니다. 특히 전쟁장관 스탠턴이, 앤드류 존슨 - 링컨의 부통령이었다가 대통령직을 승계한 - 과 대립했다는 짧은 언급 뒤에서, 헌법의 정신 아래에서 남부를 포용하려던 링컨의 정신을 제대로 수호하지 못한 존슨 대통령에 대한 격렬한 안타까움이 보이는 듯하여 가슴 아팠습니다. 그리고 충성스러웠던 스탠턴이 자신에게 주어졌던 영광을 누리지 못하고 급사한 부분까지. 또한 링컨의 저격이 이루어지던 그 시간에 암살 기도 속에서 큰 부상을 입었던 슈어드가, 대통령의 죽음을 -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가운데 - 눈치채고 그의 부재를 담담하게 슬퍼하던 장면도.

아, 그리고 시어도어 루즈벨트 시대의 국무장관이었던 존 헤이가, 링컨의 1기 재임기간 동안의 그의 비서였다는 것도 몰랐었네요. (흐음)


이 책을 읽으면서 지도자가 가져야 할 덕목은 단지 단호한 결정력이 아니라, 단호한 결정력 이전에 신중하게 여론의 흐름을 찾고, 헌법의 대의와 이상에 따라, 정직하고 신실하게 자신과 자신의 팀을 다루는 것임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한 번 읽고 말 책은 아니라는 생각을 강하게 해보았습니다. :D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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