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리오 휴버먼 지음 / 책벌레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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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저는 미네르바라는 분의 글을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습니다. 파일은 가지고 있지만... 하도 여러 글들에서 그 분의 글에 대한 분석들을 보다보니까, 대충 어떤 이야기를 하셨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에 막상 읽어보려고 마음을 먹게 되지는 않네요.

그래도 미네르바 님이 추천하셨다는 책들은 메모해두었습니다. 그 중에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를 한 번 다 읽었습니다.

일단, 요즘 제가 (정치)경제학 쪽의 책을 이런 저런 것들 읽어가다보니까, 책 자체가 아주 새롭게 읽혀지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과정 가운데 흑사병 같은 경제 외적 요인이 작용했다는 것과,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키는 인클로저 운동 등의 작용이 있었다는 것은 이미 많은 책에서도 다루고 있는 바입니다. 거기에 뜨거운 불길을 끼얹은 것이 산업혁명이며, 그 전초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상업혁명이기도 합니다.


뭐 그럭저럭 요약하는 것은 별다른 독후감상문이 되지 못할 터이니.

일단 책을 읽은 후의 감상은, 1930년대 한창 대공황의 파고를 건너넘던 시기의 미국 사회를 시간적 배경으로 쓰여진 책 치고는, 지금 읽어도 심정적으로 시차를 느끼기 어렵다는 점에서의 충격입니다. 책 p190 에 이런 문구가 있네요.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 정말이지 출생의 특권은 폐지됐지만 사업의 특권이 그것을 대신했다.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 귀족과 교회 세력이 그 자리를 내어준 이후에, 부르주아 세력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을 저자는 위와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신분의 특권은 없어진 대신, 그 특권은 돈을 가진 이들에게로 옮겨갔죠. 이것은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부(富)가 부(富)를 불러온다는 사실은 프랑스 대혁명의 시기인 근 220여년 전에도, 뉴딜 시기인 80여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몇천억씩 해먹어도 휠체어 끌고 유유히 법정에서 무죄 판결 받고 유유히 사라지는 행태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유명한 탈옥수 모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죠.

유전무죄 무전유죄.

이 책은 급격하게 자본주의로 대체되는 사회가, 실은 봉건주의의 어두움보다 더 큰 어두움과 모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네. 보통 이런 부류의 책들은 선동적입니다. 왜냐하면 주류의 이야기만을 다루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선동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언외언을 짚어보면 선동적임에 분명하지만, 그런 느낌만이 전부가 아닌 까닭은, 저자가 진중한 자세로 담담한 어조로 최대한 객관적으로 역사적인 경제현상을 분석적으로 기술하려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글이 주는 선동적인 느낌은, 어떻게 보면 저자의 의도라기 보다는, 그냥 현실 자체가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가능성이 더 크겠다고 할 수 있겠네요.

알고 있는 이야기가 꽤나 있음에도 이 책을 읽으면 분명히 자본주의의 주인인 자본가의 행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저자는 자본가들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제시하고 있으며, 설득력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심정적으로 무산자에 가까와서 그런지, 아니면 저자의 언외언 때문인지, 그런 설득에 설득이 되지는 않습니다.


이야기가 조금 감정적으로 흘렀는데... 이 책은 대공황을 극복하는 다양한 방법이 모색되던 시기 - 독일 등은 파시즘의 방식으로, 미국 등은 대규모 토목공사 등으로 - 의 여러 움직임들을 편들지 않고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최대한 객관적으로 담담하게 당시로서는 최신의 경제학자 이론을 소개하고 있기도 합니다. (물론, 그 속에서 저자의 언외언을 읽어내실 수도 있습니다만, 저자는 정말 담담하고 진중하게 모두의 입장으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특히, 케인즈나 하이예크 같은 이들의 이름을 현재진행형으로 만나볼 수 있는 것은 독서 중에 맛볼 수 있는 기쁜 손님 같습니다.

결국, 세계대공황이 80년 만에 다시 이 땅을 찾은 작금의 현실에서 지금 이 책을 읽어보는 분이 계시다면, 80년의 시간적 격차 따위는 무시무시한 대공황이라는 공통점 앞에서 촌음의 시각임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80년의 격차는 격차일 뿐입니다. 케인즈 이론에 기반한 복지국가이론이라든지, 대처리즘, 레이거노믹스 등의 경제 상황이 책에서 언급되지는 않으니까요. 그런 최신 현상들을 머릿속에서 지운다면 정말 지금의 현실을 이야기한다고 느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가와 화폐가치 변동에 대하여는, 올해 MB정부에서 어설프게 주장했던 환율주권론이 (지금 이 상황에서) 얼마나 서민들의 삶에 치명적인 원인이 되었는지를, 상업혁명 당시의 화폐발행 상황에 비추어 볼 수 있으실 것입니다.

소위 '낙수 효과'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하루에 열 몇 시간 씩 - 저도 (소위) 대기업을 다니면서 8시 출근에 8시 퇴근을 밥먹듯이 해도 고작 받은 임금은 하루 9시간 분 뿐이었음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네요. 자그마치 화이트 칼라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열 몇 시간 노동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 화장실도 가지 못하고 일하면서 제대로 된 임금도 받지 못했던 - 저는 그래도 나름 넉넉하게 받았습니다만... - 사람들이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물어보고 싶네요. 책의 p230에 저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산업혁명 시대에 소위 가난한 사람들의 벗이라고 일컬어지던 영국 국교회의 부주교 페일리라는 이의 말이라고 합니다.)

"오로지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개선만이 바람직한 변화다. (중략) 그리고 산업이 성공하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이룩된다. (중략) 공공질서와 평온 속에서는 (중략) 이것을 기대할 수 있지만, 그 밖의 상황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중략) 부자들의 지위나 재산을 탐하는 것, 그것들을 폭력이나 공공연한 소동과 혼란을 통해 탈취하고 싶어할 정도로 탐하는 것은 사악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이것은 영국의 노동자 계급이 혁명을 꿈꾸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을 영국의 노동자들도 받을까봐 지레 겁먹은 부주교의 언급이었다고 하죠. 그러나, 저 말 속에서 우리는 (소위) 가진 이들이 가지고 있는, 그리고 요즘 우리나라에서 상위 2%를 옹호하는 의미의 대표격인 '낙수 효과'를 반추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임금 상승은 대개 탄압에 부딪히는 의식적인 대중 행동으로'만 '획득'(p 132) 가능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결코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얻은 이윤 - 마르크스 식으로 말하면 잉여노동시간으로 낳은 잉여 가치 - 은 결코 노동자들에게 돌려주지 않습니다. 그것을 저자는 C(총자본)=c(불변자본)+v(가변자본) 의 공식으로 알기 쉽게 독자를 '납득'시키고 있습니다. 결국 R&D, 시설 증설 등으로 끊임없이 증가하는 불변자본의 양을 줄이기 위해서 자본가들은 (그나마 줄이기 쉬운) 또 다른 불변자본인 임금을 줄이기 위한 방안을 끊임없이 개발하겠죠. 작금의 비정규직 문제가 독서 중에 오버랩되었습니다.


네. 이 책은 진중하고 상당히 객관적인 시선으로 담담하게 현상을 분석하지만, 읽고 나면 '납득'되어 버립니다.

서가에 한 권 정도 가지고 있다면 두고두고 읽어볼만한 책이고, 글의 말미 부분은 1930년대의 대공황 당시의 여러 이론들을 잘 요약하고 있으며, 이 공황의 끝은 전쟁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예측도 (명확하게는 아니지만)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제 현상들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기본 용어나 개념들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친절한 책이기도 합니다.

짧게 쓰지 않을까 했는데 글이 두서없고 공격적이며, 길어졌습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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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후정치사 - 일본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전개 커리큘럼 현대사 2
이시카와 마쓰미 지음, 박정진 옮김 / 후마니타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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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이기택 氏가 쓴 [한국 야당사]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제가 책을 샀던게 고 2땐가 그랬으니... 그 때만해도 이기택 氏가 나름대로 3김을 이을 차세대 주자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때이지 싶습니다. 그리고 92년 대선 끝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계은퇴 선언 이후에 이기택 氏는 민주당 당수가 되었고 명실상부한 포스트 김대중으로써의 면모를 다져나갈 찰나였지만... DJ의 정계복귀 선언으로 KT는 주저앉고 맙니다. 포스트 DJ였는데... DJ가 돌아왔으니.

그래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꼬마 민주당도 만들고 하면서 와신상담하다가 결국 신한국당(맞을겁니다. 97년 쯤이었을테니...)으로 흘러들어갔고, 거기서도 존재감 없이 지내다가 결국 2000년도에 민국당 창당과 총선 대패로 인해 이제 흘러간 정치인이 되어버렸습니다.

나름대로 5선 국회의원에 국회부의장 출신이지만, 노정객의 위치도 차지하지 못한 이기택 氏... 그가 쓴 [한국 야당사]는 정치에 일천한 제게는 꽤나 쏠쏠한 재미를 주는 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제헌국회 이후의 한국 야당의 다양한 이야기들과 관련자료들이 꽤나 많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야당'을 대상으로 쓴 글이라서, 이념이나 정책적인 통일성을 찾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5공 때까지의 이야기들이라서 요즘 읽기는 시의적절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정권 교체가 거의 전무했던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 최초의 민주적 정권교체는 1997년에야 가능했죠 - 야당의 역사를 조명해보는 일은 나름대로 가치있는 시도였고, 이기택 氏의 역사관에 대해서는 딱히 흠잡을 것도 주목할 것도 없지만 풍부한 야당 관련 자료들을 한데 묶어놓은 노고에 대해서는 평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현듯 이기택 氏의 책 [한국야당사]가 생각난 이유는, 요 며칠동안 이시카와 미스미 氏의 [일본 전후 정치사]라는 책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2004년 타계한 저자는 정치부기자로 근 40여년을 지내온 저널리스트였습니다. 인생의 대부분의 시기를 정치판과 정치인 사이에서 지낸 저자는, 자신이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을 저널리스트의 시각이 아니라 연대기 작가의 시각으로 풀어냅니다. 네. 책은 정말 '사실적'입니다.

각 사건에 대한 자신의 평가는 극히 배제된 채, 저자는 중요한 사건들을 중목차로 하여 간단하게 사건의 전후관계 및 일련의 추이를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건이 진행되는 가운데와 사건의 전후를 둘러보면서 관련된 당사자가 속한 집단 및 대응되는 집단들의 반응 및 주변 집단의 반응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러면서 언뜻언뜻 자신의 견해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평가는 앞에서 쓴 것처럼 짧고 간단하게만 언급합니다.

결국 개개인의 의견보다는 정당 및 제정당의 파벌들의 반응들이 주관적 서술의 대부분인 것으로 미루어, 이 책은 일본 전후 정치사라기 보다는 일본 전후 정당사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책을 통해서, 아이러니하지만 우리나라의 현재 정당 구조에 대한 생각과 전망을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일단 이 책에서는 1955년 이후 1993년 호소가와 내각이 들어설 때까지 물경 40여년을 집권해 온 자민당 일당체제가 가능했던 이유에 대해서, 혁신계열 - 사회당 - 의 전략 부재 및 안이한 목표 설정과 대응방식의 문제에 대해서 얼마 안되는 저자의 평가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회당의 섣부른 선거 목표 - 과반수 의석 확보 - 및 목표 달성 실패 이후의 무의미한 '선거 패배' 선언에 대해서, 혁신 계열의 무개념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즉, 선거 지형 상 과반 의석을 달성하기 요원한 상황에서도 일단 목표는 과반 의석으로 설정해두고, 그것을 달성하지 못하면 비록 상당한 부분의 성과 - 의석 증가 또는 절대득표수 증가 - 를 거두더라고 무의미하게 '선거 패배'를 선언하고 서기장과 위원장이 동반 퇴진해버리는 상황에 대해서 냉정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사건에 대해서, 저자는 그렇게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혁신계열이 인물난을 겪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고, 마치 2004년에 창당했던 우리나라의 열린우리당의 모습을 보는 듯해서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반년의장'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자주 당의장을 갈아치웠던 열우당의 모습은, 바로 일본 사회당이 걸었던 것과 같은 길이었습니다. 이러한 사회당과 열린우리당의 유사한 패턴을, 저는 혁신 계열 - 진보 계열 - 의 선명투쟁으로 연결해보고 싶습니다.

(소위) 보수세력이라고 하는 집단이 결여한 것중에 하나가 바로 선명투쟁입니다. 절대로 더 깨끗해지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보세력에게 선명성은 필수적입니다. 이것은 '분배'를 이야기하는 집단의 당연한 수순일 것입니다. 가급적 고루고루 나누어야 할 책임을 가진 집단이 투명하지 않다면 분배의 의의는 급감할 것입니다. 그래서 진보세력은 '더 깨끗한, 조금 더 깨끗한, 완전히 깨끗한'을 주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때 묻으면 버리는거죠.

저는 선명투쟁이 잘못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더 깨끗해야 합니다. 완전히 깨끗해야 합니다. 그러나 선명성을 정치 영역에서 구현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정치력도 갖추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에도 이르게 됩니다. 예전에 김근태 전 의원의 양심선언이 생각납니다. 정치자금 받았다고 깨끗하게 밝혔지만... 그래서 김 전 의원이 얻은게 무엇이었습니까. 제가 말하고 싶은 정치력이란 자신의 더러움을 감추는 것에 대한게 아니라, 깨끗하게하되 정치력을 발휘해야 할 부분에서 그렇게 해야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어떤 분들은 아마추어리즘이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저는 깨끗한 분들이 자신의 때묻은 부분에 대해서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자중하려는 마음 때문에 보여주는 서투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야이, 열여덟 찍지마!' 라고 남사스럽게 소리지르고도 뻔뻔하게 사과 한 번 하고 제자리 지키는 이들이나, 과감하게 여기자 한 번 @#$%& 해주고도 뻔뻔하게 의원직 유지해주는 이들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다만 진보세력이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좀 그렇게 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들었습니다.

제 생각이 좀 많이 곁길로 샜는데, 이 책을 통해서 자민당 1당 체제 - 55년 체제 - 에 대한 모습들이 현재의 우리나라 정당구조와 상당부분 연계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자가 그렇게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말입니다. 자민당-사회당의 (1993년 이전 양당 구도 하에서의) 정치지형은 2004년의 한나라당-열린우리당의 정치지형과 유사하며, 2000년대 이후의 일본의 자민당-민주당 구조는 현재 한나라당 내부의 친이-친박 계열의 대립구도와 유사합니다. 또한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구 소련 이후의 정치권의 보수화 경향과, 이념이 아닌 정책의 차이 때문에 일본 정당이 분화하는 모습은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즉, [일본 전후 정치사]를 읽으면서, 우리나라의 현재 정당 구조와 정치지형을 대입해 볼 만 하다는 점에서 한 번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책을 읽기에 갑갑한 부분도 있습니다. 다양한 정치인들이 등장하는데, 비슷비슷해보이는 이름들을 꼼꼼하게 체크하면서 읽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특히 자민당/사회당의 파벌의 이합집산 및 파벌의 변화양상은 독서의 속도를 더디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당사를 통해 우리나라 정당의 추이를 비교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유추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합니다.


안타까운 부분은, 점차로 진보세력의 영역이 축소된다는 점입니다. '분배'의 키워드를 가진 진보세력이 점차 (소위) 보수세력에게 밀리는 양상은 안타깝습니다.

그렇다면 (소위) 보수세력의 가진 키워드는 무엇입니까. [일본 전후 정치사]를 읽고 난 직후의 생각이라 생각의 변화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소위) 보수세력의 키워드는 '반분배'라고 생각합니다. 즉, 분배의 반대항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는 세력이라는 말이죠. 어떤 주의나 이념이 아니라, 그냥 분배의 가치가 싫은 이들이 모인 집단이 보수세력이라고,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 진보-보수세력이 테제-안티테제라면, 왜 진테제 - 合 - 은 없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보수세력의 안티는 테제가 빠진 안티이기 때문입니다. 즉, 분배라고 하는 뚜렷한 가치관에 대한 반대항으로써의 보수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고유한 테제가 없습니다. (소위) 보수세력의 '반분배'는 주의나 이즘이 아니라, 바로 욕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합리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저열한 욕구에 기반하는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소위) 보수세력 안에는 '분배'에 대한 안티테제를 가지고 기능하는 오리지널 보수가 있는 반면에, 보수의 가면을 쓴 이들도 함께 공존하는 것이죠. 그리고 가면 쓴 이들이 더 많기 때문에 지금 여러가지 (해결되지 않는) 갈등들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분배'의 키워드보다 '반분배'의 키워드에 더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조심스럽게 생각해보자면, 역시 소유욕구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신도 언젠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기댄 분들이, 현재의 분배를 두려워 하시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분배는,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 공평하게 재분배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100을 가진 이들이 50을 내자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다만 6을 가진 이들이 0.1을 더 내고, 10을 가진 이들이 0.5를 더 내자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종부세죠. 그래서 그걸 모아서 0.01도 못가진 이들에게 다만 0.005라도 보태주자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분배를 두려워하는 이들은, 보수가 아닙니다. 다만 '반분배'에 기댄 가짜 보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책은 전체적으로 보수-혁신의 대립구도 하에서 일본의 정치사를 연대기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글 자체도 쉽고 간결하게 쓰여진 편이라서 상당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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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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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전에, [모모]를 처음 접할 때, 작가 이름이 미카엘 엔데로 번역되었었죠. 이제는 올바른 발음인 미하엘 엔데라고 불리우고 있지만, 저는 아직도 미카엘 엔데가 더 익숙하군요. 각인인가보죠.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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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적인 환상

도대체 [모모]에 설정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버럭!)

늘 강렬한 시작을 꿈꾸는 저의, 두 번째 서평입니다. 갑자기, 불현듯, [모모]에는 설정이 없다는, 아니,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그 <설정>이라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지의 군주]와 같은 치밀하고 세부적인 설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으며, 검도 마법도 없는, 단지 현실과 대비된 몽환적인 환상이 있을 뿐입니다.

설정이 없으면 글을 쓸 수 없는 이들에게, 미하엘 - 미카엘이 더 익숙한데 말이죠 - 엔데는 훌륭한 현대 환상 소설의 전범이 됩니다. 단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익숙함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소위 순수 소설의 방식인 듯 하지만, 회색 신사들과 호라 박사의 보이지 않는 대립의 비현실은 우리에게 환상의 또다른 면을 보여줍니다.


들어가면서

간단한 일화 하나.

이 책을 모 인터넷서점에서 36.5% 할인가격으로 주문했습니다. 5천 7백원. 그리고, 그 인터넷서점 자체 포인트와 OK 캐시백 포인트 적립금을 사용했습니다. 마이너스 5천 2백원.

책값이 5백원 들었습니다. (파안대소)

그리고 손에 집어든 책은, 초등학교 고학년 용이더군요. (긁적a) 과연 이 글을 초/중학생이 이해할 수 있을까?


주제 : 시간을 아끼는 것이, 진실로 시간을 아끼는 것인가?

진실과 사실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갭이 있다더군요. 진실은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 주관성으로 승부하는 것이고, 사실은 의미 없는 모양 그대로의 객관성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죠.

시간을 아낀다는 것은, <사실> 어마어마한 시간을 버는 것입니다. 효율적인 시간의 관리를 위해서 우리는 필요없는 부분의 시간을 지우고 더 발전적이고 능률적인 곳에 시간을 써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 <사실> 이치에 맞고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가령, 제가 홈페이지와 웹진에 쏟는 하루 약 두 시간 여의 시간을 법학전공책을 보면서 보낸다면, 아마도 저는 회사에서 사랑받고 혹시 고시를 패스하는 놀라운 결과를 얻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그것이 행복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우리는 고려하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시간을 보내는 것이, 과연 나를 얼마나 풍요롭고 안락하게 할 수 있는가...

이 글 [모모]에서는 시간을 훔치는 회색 신사들이 나옵니다. 회색 신사들은, <계약>을 통해서 사람들의 시간을 양도 - 실은 강탈 - 받습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속의 시간의 꽃이 회색신사들의 냉동고 속에 보관되면서 회색 신사들에게 생명을 부여합니다. 이러한 양도는 사람들이 자신의 시간을 회색 신사들에게 저축하겠다는 의사의 표시가 있어야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회색 신사들은 사람들을 <속입니다>. 효율적인 시간이 그들을 행복하게 할 것으로. 자투리 시간을 없애고 생산적인 활동에 매진하면, 그들은 부유하게 되고 결국은 행복해질 것이라는...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그 사실을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효율성과 생산성은 끝도 없는 효율과 생산을 부릅니다. 사람들은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마라톤, 목적지에 도달해야 비로소 웃으면서 뒤돌아볼 수 있는데, 그래야 행복한데, 목적지가 보이지 않기에 사람들은 목적지처럼 보이는 곳을 향해서 끊임없이 달려가야하는 것입니다.

작가는,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 비효율적이고 낭비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잠깐 서서 뒤를 돌아다보라, 고. 그 순간, 우리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이 아름다운 세상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폐인... 밤새 동기들과 놀고 물마시고 - 개인적으로 술을 못하는지라... 혼자 물을 술마시듯; - 새벽녘에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난 참 폐인처럼 사는구나라는 <사실>의 인식과,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는 <진실>의 느낌이고, 그것이 바로 [모모]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행복이 아닐까요?


형식 - 몽환적 환상

[모모]는 우리가 자주 봐오던 형식적인 설정이 없습니다. 검과 마법도 없습니다. 톨킨의 이야기와는 다릅니다. 실은, 우리나라에서 이런 <미하엘 엔데> 류의 글을 찾아보기는 힘겹습니다. 고작해야 김하인 씨의 [즈무와 12세계] 정도의 글 - 그나마도 4권에서 멈춰섰죠...

그것을 <몽환적 환상> 이라고 이야기하겠습니다.

[모모]의 이야기는 기실, 우리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백 년이 지난 뒤에도, [모모]의 이야기는 공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것인 듯하나, 누구에게나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는 것, 그것은 마치 꿈과 같은 것이 아닐지요. 우리의 이야기인 듯하나, 실은 우리만의 이야기는 아닌. 우리의 것이라고 믿어지나, 우리와는 거리가 먼.

이(this) 세계로부터 탈주하여, 새로운 이(異)세계를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다른 것을 이야기하고 혹여 사람에 따라서는 틀린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것. 그것이 몽환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기어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나 다름없이 여겨지는 생경한 것, [모모]는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그 지향점이 우리 눈 앞에 선하기에 이 꿈은 우리에게 아름다울 수 있고, 우리의 목적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환상 소설의 환상은, 바로 그렇게 현실을 비추고 또 드러냅니다. 이영도 씨가 자신의 책에서 썼듯이, 꿈이란 밤의 것이면서도 낮을 지향하는 것일테니까요.


인물 - 모모, 그리고 카시오페이아

물론 많은 자들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모의 한결같은 귀기울임, 그리고 카시오페이아의 <30분 선견지명>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지내다보면, 모모가 가진 성정을 언뜻 보이는 이를 봅니다. 타인이 자신의 입으로 모든 것을 다 토설할 때까지 기다리는, 우리는 그런 자를 지혜로운 자라고 합니다. 인간은 지극히 관계 지향적으로, 그것이 어디에서 가장 잘 드러나냐하면, 바로 <수다>라는 것에서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물론 과묵한 사람도 있지만,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수다가 존재할 때, 수다(數多)한 인간들의 수다는 당연한 것이겠지요.

수다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확연하게 만드는 가장 직접적인 도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듣기보다는 말하려고 하고, 읽기보다는 쓰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지혜롭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타인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보이기를 기다릴 줄 아는 것, 그리고 사람은 자신을 <다> 드러내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기다리는 장사는 백 번 남는 장사가 됩니다. (후훗;)

모모는, 더욱더 지혜롭게도, 그것을 이용하지 않고 타인을 위한 것으로 돌려줍니다. 그래서 모모의 주변은 아름답지요.

거북이 카시오페이아의 걸음걸이를 본다면, 우리는 하나 더 배울 수 있습니다. 30분만 내다볼 줄 안다 할지라도, 사람은 자신의 걸음을 확고하게 디딜 수 있습니다. 회색 신사들의 행동을 <30분 먼저> 보기에, 거북이는 느릿느릿 걸어도 뚜벅뚜벅 걸어갈 줄 아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10년, 100년 밖을 내다보려고 안달합니까? 그렇게 먼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30분, 금새 내게로 달려오는 그 시간을 내다볼지라도 자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넘어서는 것은 과시요 과신일 뿐이죠.

게다가 뒷걸음질 침으로써 앞으로 나아가는 그 역설이라니! 우리는 때때로 물러서는 것이 앞을 향하는 수단이 됨을 거북이의 느릿한 그 걸음을 통해서 배우고 익힐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문학은 무엇인가?

감히, 가르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겠습니다. 글을 통해서 배울 수 없다면 글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자기 연민과 방관자의 삶일 뿐일겝니다.

작가는 글을 통해서 우리를 <가르치고>, 우리는 글을 읽음으로써 스스로를 가르치며, 작가에게 가르침을 되돌릴 수 있을겝니다. 그것이 문학이요,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모모]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메마르고 성급함에 대해서, 뚜벅뚜벅 묵묵하게 자신의 길을 걷는 이들이, 실은 가장 행복한 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1부 모모와 친구들
제1장 어느 커다란 도시와 작은 소녀
제2장 뛰어난 재능과 아주 평범한 싸움
제3장 폭풍 놀이와 진짜 소나기
제4장 말 없는 노인과 말을 잘 하는 청년
제5장 많은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와 한 사람만을 위한 이야기

2부 회색 신사들
제6장 똑 떨어지는 엉터리 계산
제7장 모모는 친구들을 찾아가고, 한 명의 적이 모모를 찾아온다
제8장 많은 꿈과 몇 가지 의혹
제9장 열리지 않은 좋은 모임과 열린 나쁜 모임
제10장 맹렬한 추격과 느긋한 도주
제11장 악당들의 모략
제12장 모모, 시간의 근원지에 가다

3부 시간의 꽃
제13장 그곳에서의 하루, 이곳에서의 한 해
제14장 너무 많은 음식과 너무 짧은 대답
제15장 기기를 다시 찾았다 잃다
제16장 풍요 속의 궁핍
제17장 크나큰 두려움과 더 큰 용기
제18장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바라보면?
제19장 포위된 이들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제20장 뒤를 쫓던 자들을 뒤쫓기
제21장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끝

작가의 짧은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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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사무소 김앤장 - 신자유주의를 성공 사업으로 만든 변호사 집단의 이야기 우리시대의 논리 10
임종인.장화식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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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앤장이라는 곳은 흔히 로펌으로 알려져있지만, 실제로는 로펌은 아니라고 책에서는 밝히고 있습니다. 법률사무소죠.

조악한 이해일지는 모르겠지만, 김앤장 법률사무소에는 사장이 없습니다. 개인사업자들의 모임이라고 봐야하는거죠. 그에 대한 이야기는 금새 불법과 탈법으로 옮겨갑니다.  뭐, 쌍방대리라던지, 과다수임료라던지, 세무조사를 면제받는다던지 하는 이야기들 말이죠.

거기에서부터 저자들은 작심하고 김앤장 법률사무소가 저지르는 불법과 탈법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론스타, 삼성 전환사채 및 CD 발행, 현대차그룹 비자금, 한화그룹의 아드님 비호에까지. 김앤장 법률사무소가 맡아온 사건과 그 안에서 저질러졌을 것이라 추정되는 다양한 불/탈법까지. 

 

리는 흔히 사회가 민주화될수록 법치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그런 생각은 너무 순진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법이란,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는 도구가 아니라, (법을) 아는 사람을 더 행복하게 해주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법치라는 단어를 들으면서 공평무사를 떠올리지만, 실제로 법치는 법을 아는 사람들에게만 유리할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법이라는 것은 불완전합니다. 법이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것이라는 환상을 많은 분들이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법은 인간이 겪는 아주 일부분의 사건만을 규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법의 영역이 아닌 곳은? 그 때에는 규율된 법에 근거한 '해석'이 들어가는거죠. 그리고 해석은, 규율된 법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에 따라 질적으로 구분되겠지요. 

뭐, 일반적인 모든게 그렇죠. 많이 알면, 더 잘 빠져나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법치에 속고 삽니다. 촛불집회 등의 여러 사안을 보면, 국가가 어떻게 '법적으로' 개인을 억압하는지 알 수 있잖습니까? 그런 억압의 기제로 사용되는 것이 소위 '법치'국가죠. 법은,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는 도구가 아닙니다. 물론 그래야함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법률사무소 김앤장]에서 저자들이 이야기하려는 바는, 그런 것입니다. 법을 아는 이들이 어떻게 탈법하고, 어떻게 불법을 저지르는지. 그리고 어떻게 집단화, 조직화되어 우군을 만들어가는지. 

 

책은 딱히 (사서) 읽을만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특히, 책을 읽기 전에 '김앤장에는 문제가 있을거야'라고 생각하던 사람이라면, 책을 읽고 나서는 '김앤장에는 문제가 있군'이라는 생각이 들겠지요. 결국 책을 읽으나 읽지 않으나 심정적인 변화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정의와 진리의 편에 서고 싶은 예비 법조인들이라거나, 법은 평등으로 인도하는 등불이라고 믿는 분들에게는 책이 조금 충격적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 권력에 대한, 특히 모피아를 위시한 경제 관료들에 대해서는, 끓어오르는 혐오감을 감출 수 없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나아가,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 하는 오랜 격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뜬금없는 이야기이겠지만요. 

아무튼 보이지 않는 권력은 무서운 겁니다. 어떻게 김앤장 법률사무소가 정부의 정책을 바꾸고, 거액의 자문료 및 수임료에 별도의 성공보수까지 받으면서도 잠잠히 묻어갈 수 있는지,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자신의 기득권을 확장해나가고 있는 김앤장의 모습을, 저자들의 격앙됨을 애써 참고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느낌을 그대로 전달받으면서 볼 수 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참고로 저는 구립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습니다. 모든 읽고 싶은 책을 사서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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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자국 - 드래곤 라자 10주년 기념 신작
이영도 지음 / 황금가지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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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연히, 감상글이니까, 스포일러가 넘쳐납니다. 그걸 고려하셔야 합니다. 따라서 아직 타자님의 글을 다 읽지 않으신 분들은 절대로 스크롤을 내리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D


0.

본격적인 글에 들어가기 전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제가 관리하는 홈페이지에는, 속칭 영도빠가 많은 편입니다. 따라서 이번 타자 님의 신작에 대한 소식들이 빠르게 오고 갔고, 그에 대한 기대도 많았습니다. 아울러 쓴소리도 있었다는 것을 꼭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 쓴소리는 바로, 타자 님의 작품에 열광하는 많은 독자들이 있는데, 과연 그 독자들이 타자 님의 작품에 대해서 하고 있는 것이 열광 이외에 무엇이 있는가에 대한 언급이었습니다. 즉, 타자 님의 글에 대한 평가는 왜 없는가 라는 말이었죠.

'굉장하다!' '놀랍다!' 이런 감탄사만으로 점철된 평가 말구요. 굉장한데 왜 굉장한가, 놀라운데 왜 놀라운가, 같은 평가 말이죠. 작품활동을 시작한지 10년이 지나서 이제 10주년 기념작을 낸, 게다가 과작(寡作)의 작가라고는 볼 수 없을만큼의 작품을 출판한 - 10년 동안 드래곤라자, 퓨처워커, 폴라리스 랩소디, 눈물을 마시는 새, 피를 마시는 새 총 5편의, 분량도 상당한 글을 두드렸다면 분명히 과작은 아니겠죠 - 작가에 대해서, 작품과 작가에 대한 평가는 왜 이렇게 박하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정말 작가에게 열광한다면, 그 열광의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저는 그런 지적에 별다르게 할 말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냥, '이제 10년이 지난 작가이니, 작가에 대한 독자들의 평이 조금 더 다양하고 본격적으로, 그리고 조금 더 체계적으로 쏟아져 나올 것이다' 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번의 [그림자 자국]이, 타자 님에 대한 본격적인 조명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편으로, 쓴소리를 건네주셨던 분에게 변명아닌 변명을 드리자면... 타자 님의 작품은 읽으면... 비평할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특히 (개인적으로) [폴라리스 랩소디]는 아직 어줍잖게나마 비평글을 써내려갈 엄두도 나질 않는군요. 다른 작품에 대해서는 어줍잖게나마, 체계도 불분명하고 내용도 빈약하고 논리성도 상당히 결여한 글을 썼지만... [폴라리스 랩소디]는 한 5, 6년째 마음만 먹고 있고 글 읽는 횟수만 늘리고 있을 뿐이지 체계적인 글을 쓰질 못하겠네요.

그런 이유가, 타자 님의 글을 읽다보면 독자의 자세가 아무래도 분석적이 될 수 밖에 없어서 그렇지 않나, 이번 [그림자 자국]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더욱더 하게 되었습니다. 글이 마치 보물찾기처럼 얽혀있어서, 한참 글을 읽다가보면 새로운 보물을 발견하는 듯한 기분에, 보물을 하나 더 발견하려고 글을 읽지, 글이 독자의 삶에 던지는 주제에 천착하지 못하다보니까, 타자님의 글이 그렇다보니까 더더욱 그렇지 않나라는 변명을 해봅니다. 그러면서 어줍잖은 감상을 시작해봅니다.


1.

이영도 氏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 라고 물어본다면, 저는 단호하게 '이영도 氏는 어떻게하면 인간이 서로를 더욱 더 사랑할 수 있게 되는가에 모든 관심이 있다'라고 말하겠습니다. [눈을 마시는 새(이하, 눈새)]에서는 그 관심이 케이건의 말을 통해 너무 적나라하게 표현된 편이고, [폴라리스 랩소디(이하, 폴랩)]에서는 하리야 선장과 파킨슨 신부의 말을 통해 세련되게 표현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명의 열렬한 독자로서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작가의 그런 의도가 작품을 더할 수록 너무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작가가 한 innerview에서 언급하였다시피, 감상론이라는 것은 딱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한국인의 감상법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 것이죠. 특히 어떤 목표를 가지고 쓰는 글들과는 달리, 소설 장르의 글은 백인백색의 감상이 튀어나오게 마련입니다. 독자는 모두 다른 별을 바라보죠. 그들이 바라보는 별이 같은 방향일 수는 있어도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작가의 글은 권수가 늘어날수록, 그 글 속에서 점점 같은 별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작가의 주제를 향한 인식이 글로는 상당히 투박하게 드러남으로써, 독자는 갈림길에서 갈등할 기회를 잃었다는 느낌 말입니다. 물론, 기껏 읽었더니 이게 도대체 무슨 글인지도 모르겠는 글이라면 정말 '대략난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마치 등산객이 산 정상을 바라보지만 올라가는 길을 찾지 못해 버둥거린다면 그건 문제가 있는 글이겠지요. 그러나 산 정상을 오르기 위한 다양한 경로와 흥미로운 과정이 있다면, 그 정상에 올라 별 흥미로운 것을 못느끼더라도 등산에 대한 호감을 가지는데는 무리가 없습니다. 작가의 근작들은,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흥미로운 과정과 끝내주는 정상에서의 탁트인 시야는 있지만, 경로는 하나뿐인 그런 느낌입니다. 한 편으로는, 작가가 자신이 가진 이야기의 주젯거리를 섣불리 버리지나 않을까 내심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흔히 그런 경우 있잖습니까? 작가의 변신. 저는 이영도 氏가 어떤 식으로 변신할지 두려운 부분도 내심 있었습니다. 사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작가의 주젯거리를 상당히 좋아하는 바라, 바라기에는 작가가 자신의 주젯거리를 조금 더 '세련된' 방식으로 이야기에 실어주기를 바란 것이 사실입니다.

이번 [그림자 자국(이하, 그자)]는, 더 두고 읽어봐야 하겠지만, 그런 면에서 어중간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산은 옅은데, 길은 짧은데, 흥미로운 과정은 너무 많고, 경로는 다양하지 못합니다. 작품 속에서 작가의 (인생에 대한) 질문을 듣기보다는, 작가가 던지는 수수께끼를 푸느라고 정신 없이 퍼즐 조각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모양새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짧은 시간 동안 책을 두 번 가량 읽었지만, 작가와 속내 있는 대화를 나누지는 못한 듯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작가가 선사하는 모닝스타(강렬한 반전)는 독자에게 충분한 의미가 되고 있습니다. 작가는 글에서 국가에 대한 의미있는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최초작인 [드래곤 라자(이하, 드라)]에서 작가는 신화로서의 바이서스를 멸망시켜버렸습니다. 길시언 바이서스의 죽음은 바로, 마법검을 쥐고 소를 타고 다니는 기사의 낭만이 종막을 고했다는 신호죠. 이제 국가는 신화와 전설로 통치되는 곳이 아닌, 제도와 법으로써 통치되는 공간으로 바뀝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저의 어줍잖은 감상 [드래곤 라자]를 읽고, 에 적은 바 있습니다.)

이제 [그자]에서 바이서스는 또 한 번의 멸망을 예언받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바이서스는 국가로서가 아닌 가문으로서의 바이서스가 멸망합니다. 그러나, 사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자주 이런 장면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미국에서도, 그리고 작년 말에 우리나라에서도 왕들이 자신의 권위를 잃게 된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중세적 시대 배경'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작품을 보다보니까 독자들은 작가의 모닝스타를 줄기차게 맞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바이서스의 멸망은 왕가의 교체를 상징하는 장치입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의 중세적 프레임은 국가와 통치자를 하나로 보고 있는데 익숙합니다. 그리고 그런 프레임은 책을 볼 때만 유효하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작가는 독자를 거세게 한 대 내려칠 수 있는 것이죠. 바로 우리의 제한된 프레임을 일깨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그자]에서도 그런 모닝스타들이 여지없이 작렬하고 있습니다. 가령 바이크를 타고 고글을 쓰는 이루릴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중세적 프레임 바깥에서 난데없이 등장한 작가의 장치는 독자를 깜짝 놀래키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작가가 이렇게 독자의 선입견을 파고드는 방식은 독서 행위에 유의미함을 줄 수 있는 기제가 됩니다. 그것이 다만 말초적이기만 하다면 금방 싫증이 나겠지만, 이영도 氏의 그런 방식은 비록 아직은 지엽적임에도 분명히 독자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자극할 수 있는 부분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작가가 독자에게 주는 긍정직인 발전의 양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마법이 신화가 되고 모험이 고전이 된 시대에, 바이서스 인간들은 '공존'이라는 단어 또한 옛사전 속에나 나올만한 단어로 치부하면서 마치 지금의 우리네 삶처럼 바쁘게 휘돌아가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의미있는 부닥침이 있습니다. 위험은 가능성만으로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보다 성공은 희망만으로도 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그런 의미있는 부닥침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희망만으로도 성공을 추구하는 목소리들은, 희망에 온통 기대이질 못하고 무언가 확실한 희망을 소망합니다. 마치 [퓨처 워커(이하, 퓨워)]의 할슈타일 후작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보다 희망이 더 중요하다는 말은 허언일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희망이라는 것은 원래부터 성공을 담보하는 수단이 아닌,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랑이 결혼이나 득자/녀의 수단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절망은 희망의 전제조건도 아닙니다. 절망한 자만이 희망을 꿈꾸지는 않습니다. 희망은 그것을 꿈꿀 자들이 아무런 이유나 원인없이, 어떤 결과도 바라지 않고 희망을 꿈꿉니다. 그러나 [그자]에 나오는 모든 인간들은 희망 후의 성공을 원합니다. 그래서 예언자를 다그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족들을 전쟁에서 잃은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서, 확실한 성공을 담보하기 위한 도구로 희망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그런 희망은 결코 인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미 v. 그라시엘이 할슈타일 후작의 구원이 되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그 대척점에는 '예언은 폭력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예언자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는 고루한 사람입니다. 위험할 가능성이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아무 짓도 하지 않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자신의 예언이 얼마든지 폭력적인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예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바이서스에뿐 아니라, 우리네 삶 속에서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얼마전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왔던 글이 생각납니다. 몇 백명이 한 날 한 시에 시간을 정해서 시험을 봐야하는데, 모두가 되는 시간에 딱 한 사람이 불가피한 사정으로 시험을 볼 수 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저 한 사람만 희생을 감수하면 모두가 편할 수 있는데, 라면서 희생을 암묵적으로 강요한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요즘은 그런 시대죠. 팍팍한 시대. 그래서 나의 한 마디가 99퍼센트 상대방에게 폭력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1%의 성공을 희망하면서 내뱉는. 그래서 요즘의 시대에 예언자같이 고루한 이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정말 신화가 되고 고전이 되어버린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반드시 있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요즘은 '노블리스 오블리제' 같은 단어들이 고루한 단어가 되어버린 것이겠지요.

결국 인간의 삶은 공존의 가능성을 시험받습니다. 성공을 희망하는 인간과, 위험의 가능성때문에 미래를 잃을 위험에 처한 드래곤은 자신들의 생을 걸고 무의미한 대결을 펼칩니다. 팽배했던 고립주의 때문에 드래곤은 인간과 맞닥뜨리지 않았지만 하늘이 열린 상태에선 더 이상 그럴 수는 없습니다. 드래곤과 인간은 무시무시하게 충돌하게 됩니다. 지금 이 시대의 곳곳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처럼 말이죠. 그것은 무가치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드래곤은 미래를 잃었고, 인간은 현재를 잃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화해의 탁자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바로 '드래곤 라자'의 자질을 가진 인물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자]에서 예언자는 그림자 지우개에 의해 무화(無化)하게 됩니다. 예언자의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예언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데, 그 빈 곳에는 드래곤과 인간의 공존을 돕는 '드래곤 라자'의 자질이 자리잡습니다.

무화한 아버지의 아들, 그는 결국 아버지 없는 아들입니다. 그러나 사생아는 아닙니다. 아버지가 인지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도는 우리가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는 구도입니다. 바로 기독교의 예수님 이미지와 같은 것이죠. 아버지 없이 어머니만 있는 예수님. 그렇게 기독교의 예수님 이미지를 떠올린다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가장 먼저 연결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예수님의 사랑은 소통이 있는 것이었죠. 사랑을 위해서 반드시 함께하는... 그래서 성경 속에서 예수님은 세리와 창녀들, 그리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시죠. 자신이 매개가 되어서 모든 사람들을 소통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작가가 꿈꾸는 삶은, 모든 인류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인으로 인정하면서 그 속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사는 삶은 아닙니다. 작가는 종교가 없으니까요. 그러나 작가의 글은 종교적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작가가 이야기하는 소통을 통한 사랑의 메시지는 종교적이니까요. 그리고 작가는 마음 더듬이가 긴 인간과 상처입은 드래곤처럼 인간은 당연히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서고 싶어하는 개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더욱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테니까요.


3. 시간은 미래에서 과거로 흐른다

한 편으로, [그자]는 미래에서 과거로 흐르는 시간의 이야기를 그대로 닮아오고 있습니다. [퓨워]가 그랬었죠. 시간은 미래로부터 과거로 흘러온다. 인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미래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었죠.

작가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자]에서도 미래는 변하지 않습니다.

늙은 왕이 젊은 왕으로 바뀌어도, 그는 에이다르 바데타에게 죽습니다. 프로타이스가 지워짐으로써 에이다르 바데타를 살리지 못하(ㄴ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그래도 젊은 왕이 에이다르 바데타에게 죽는다는 사실은 변함 없습니다. 미래는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실은 예언자의 예언이 (어떻게든) 그대로 이루어짐을 통해 명확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언자도, 미 v. 그라시엘처럼 놀라지 않은 놀람을 놀라야하고, 슬프지 않은 슬픔을 슬퍼해야하고, 이미 기쁜 기쁨을 기뻐해야합니다. 이미 다 알고 있기에. 그런 것은 인간(본연)의 삶일까요?

인간은, 비록 미래가 고정되어 있다 할지라도 뚜벅뚜벅 걸어야하는 존재입니다. 어두운 미래를 알기에 좌절하고 멈춰야하는 존재가 아니라, 비록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고 할지라도 바로 지금 사과나무를 심어야하는 존재입니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 미래를 알아야 하는 존재는 (본연의) 인간됨이 아닙니다. 인간은 미래가 고정되어 있을지라도 오늘을 힘차게 살아내야 하는 존재입니다. 알게된 미래에 맞춰서 살아야 하는 수동적인 인생은 스스로에게 허락할만한 것이 아닙니다.

작가는 무릇 인간이 그래야만 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내일 인육을 먹게 되더라도. 바이서스가 멸망을 향해 가더라도. 오늘 우리는 뚜벅뚜벅 걸어야 한다는 인간 본연의 마음가짐을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비단 강요이겠습니까. 희망은 성공을 향해 올라가는 사다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살아있기에, 혹시라도 미래가 고정되어 있더라도, 우리의 절멸이 당연한 것일지라도, 희망할 의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니까.


4. 그림자의 프로타이스한 자국

[그자]에서는 그림자 지우개라는 신비한 마법용구가 하나 등장합니다. 글의 전개에 핵심적인 소도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림자 지우개는, 인간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립니다. 전작인 [드라]에서는 영원의 숲이 나옵니다. 스스로를 의심할 때 스스로의 일부가 조금씩 파멸되어 버리는. 결국 자신을 잃게되는 공간으로 영원의 숲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자]에서의 그림자 지우개는 타인에 의해서 인간 존재 자체가 창세 전부터 무효화되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자신의 자신에 대한 폭력이 아닌, 타인의 자신에 대한 폭력 앞에서 인간은 무기력하게 지워질 수 없습니다. 그 때 자신을 일깨우는 것은 지워진 자신 속의 흔적, 그림자 자국입니다. 그 자국이 단순한 찌꺼기라면 그것은 어떤 변화도 수반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본질적인 남다른 부분이었다면, 그래서 타인에게 깊숙히 각인되었다면, 그 자국은 자신을 오롯이 회복할 수 있도록하는 기제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인간이 '프로타이스' - 프로타이스는 글 속에서 독특한 존재로 제시된 드래곤의 이름입니다. (너무) 쉽게 표현하자면 이단아입니다. 그래서 글 속에서는 '프로타이스하다'는 표현을 남다르게 행동한다, 정도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며, 글 속에서는 마치 엄친아같다 같은 형용사화된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 하게 걸어가기를 소망합니다. 작가의 전작인 [피를 마시는 새]에서 스카리 빌파라는 인물이 그렇게 독자를 화나게 하면서도 사랑을 받았는지를 생각해보면 유추가 쉽지 않을까 싶습니다. 떼쟁이. 인간은 떼를 써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변화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변화시켜야 하니까요. 미래가 고정되어 있기에 현재를 고정해야하는 삶의 비극은 미 v 그라시엘과 예언자라는 인물들을 통해서 충분히 넘겨보았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어떤 인간도 미래를 알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미래가 고정되어 있던 아니던 인간은 끊임없이 떼를 써야 합니다.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변화와는 다른 방향으로 '변질'되어가는 세계에 대해서 말이죠.

작품 속에서 황금드래곤인 아일페사스에게 가미가제를 날리는 바이서스 왕국을 보면서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저는 [드라] 감상글을 통해 신화 시대를 뛰어넘은 국가가 이제 비로소 틀지어진 형태로 다스려지게 되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본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국가가 변질된다면? 그 변질의 한가운데에는 애국심이라는 그럴듯한 논리가 있습니다. 개인 본연이 국가라는 거대한 집단 속에서 도구화되는 그 순간, 프로타이스는 없습니다. 그 현장 한가운데에는 변질된 '나는 단수가 아니다'가 있습니다. 내가 단수가 아니라면 복수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단수가 아니지만, 나는 하나입니다. 오롯한 하나가 되기위해 나는 단수가 아니어야 합니다. 그러나 존재로써의 단수가 아닌 존재가 아니라, 다만 인간이 수량으로써 단수가 아닌 존재가 된다면, 그것은 국가가 인간을 도구화해버린 변질의 의미죠.

그래서 인간은 반항해야합니다. - 그래서 인간은 프로타이스해야 합니다.

칼 헬턴트의 전쟁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5.

이영도 氏의 최신작인 [그자]를 읽다보면 그의 전작(前作)들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자]에서 전작의 흔적을 찾기란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언자의 전지성은, 미래를 보는 무녀인 미 v. 그라시엘 그리고 판데모니엄의 하이마스터인 노래의 불꽃 벨로린과 닮아 있습니다. 희뿌연 여명 전에 먼저 떠오르는 황금빛 드래곤은, 새벽의 사수가 쏘아 맞추었던 첫 일출을 연상시킵니다. 인간의 (조금 더 크고 자체적인 폭발력을 갖춘) 화살들이 첫 일출을 쏘아 떨어뜨리는 것까지. 따라서 [폴랩]에서 오스발이 '이 새벽에 두 태양 중 하나는 떨어져야 한다'고 말할 때의 그 느낌과도 맞닿아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왕비와 동거(!)하는 화가에게서 [마시는 새 연작] 속의 군령자를 떠올렸다면... 제가 너무 과민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자]는 분명히 전작들의 향취가 많이 묻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당연하겠지만) 초기 두 작품인 [드라]와 [퓨워]의 것이 가장 진하죠. 발탄의 이름과 '말과 함께 친구 타기' 만으로도 작가의 작품에 익숙한 독자들은 즐겁습니다. 하물며 테페리의 프리스트가 야물딱진 골조를 세운, 초장이 탐정의 추리소설이라면 아마 작품을 읽으면서 자신의 [드라]와 [퓨워]의 첫 독서를 추억하게 될 것입니다.

작가가 자신의 첫 작품 출간 10주년 만에 낸 기념작은, 따라서 독자에게 바치는 헌사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제게 [그자]의 의미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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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2008-12-06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가 아는 어떤 분이 글 밑에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을 붙이시던데....동일인이시겠죠?^^

하리야 2008-12-06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그그... 그렇겠죠? :D 아직 저런 꼬릿말을 다는 이는 저 외에는 본 적이 없습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