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과 아이들에 대한 원인이 다를 수 없어 보인다. 어른도 초방받던지, 아이들에게 다른 방식의 접근을 통한 문제 개선을 꾀하든지.

과연 어린이 ADHD 증상에 대한 접근은 어떠해야 하는가.



어쨌든, ADHD가 강력한 유전인자의 영향에 종속된다고 하더라도, 결국 이 유전인자를 발현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이들을 얽어매는 강제와 강요.

생각해보면, 우리가 자유롭던 시절에는 이러한 문제가 크지
않았고, 자연스러운 성장과 발달의 노정에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 지금은?



학생들의 집중력 저하 문제에 대해 많은 교사들이 진술하고 있다. 요즘은 애들의 집중력이 옛날 같지 않아… ADHD 증상을 보이는 학생들이 많아졌음에 대한 이야기들도 종종 나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처는 천편일률적이다. 조용히 시키고, 규칙을 적용하고, 약 처방 받게 하고… 말 그대로 대처만 있는 셈이다.

필요한 것은 원인의 고구이다. 떠내려오는 시체를 치우면서, 요즘은 시체가 너무 많이 떠 내려오네, 라고 말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에 무슨 역할을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인의 집중력 문제에 관해 사람들은 보통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요인(침략적인 기술의 증가, 스트레스, 수면부족 등)을 선뜻 인정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똑같은 문제를 겪을 때, 지난 20년간 우리는 지나치게 단순한 이야기에 이끌렸다. 바로 아이들의 집중력 문제가 주로 생물학적 장애의 결과라는 것이다. - P336

(전략) 수많은 의사가 주의력 문제를 겪는 자녀들의 부모에게 하는 말, 즉 집중력 장애는 생물학적 원인에서 비롯되므로 약물을 이용한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리라 (중략) "야생에서 이런 행동을 하는 말은 지금껏 본 사람이 없습니다. 이건 말들을 부자연스러운 상황에 가두는 ‘가축화‘의 문제예요. 말들이 마구간에 갇히지 않았더라면 초기에 그런 심리적 압박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고, 끙끙이를 하게 되지도 않았을 겁니다." - P343

그가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이런 오래된 비유가 있습니다…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강가에 있다가 시체 한 구가 떠내려 오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래서 해야 할 일을 하죠. 사람들은 시체를 건져서 장례를 치러줍니다. 다음 날은 시체 두 구가 떠내려 옵니다. 사람들은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두 시체를 땅에 묻습니다. 한동안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마침내 사람들은 이렇게 묻기 시작합니다. 이 시체들은 어디에서 떠내려오는 걸까? 이 상황을 멈추기 위해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할까? 그래서 사람들은 그 답을 알아내려고 강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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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해할 수 없는 메커니즘으로 나오는 답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AI 시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러닝하는 이 녀석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잘 모르겠다. 오히려, 무늬만 AI는 훨씬 쉽겠지만(쓸모는 덜하고).

1950년대 힐의 연구원인 데렉 벤달Derek Bendall은 이렇게 회상한다. "베크만 분광 분석기 …… 문자 그대로 손잡이가 여러 개 달린 검은 상자였다. 작동하는 방법은 무척 간단했지만 늘 정확한 답을 내놓았다." 그러나 힐은 예외였다. 그의 뇌리에서 작동 원리를 수긍할 수 없는 장비는 함께 할 수 없는 쇳덩어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힐은 한 번도 전자식 저울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분동을 보면서 수평을 맞출 수 있는 저울을 좋아했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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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를 옳아요로 착각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

사람들이 즉시 나에게 동의하느냐 아니냐는 내가 하는 말이 옳은지를 보여주는 지표가 아니다. 그건 스스로 생각해야 하는 문제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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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가 평소에 뉴스를 소비하는 방식이 공포를 유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와 달리 이 새로운 방식은 관점을 유도했다.

온라인 공간을 통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많은 이야기들은 소모와 휘발의 과정을 거쳐 내게 감정의 찌꺼기만 남긴다. 이제 이해하겠다. 왜 인터넷 공간이 이리도 감정의 격한 흐름들이 넘실거리고 있는지를. 그리고 정제되고 정리된 관점을 도통 만나기 어려운지도.

프로빈스타운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한 남자가 총기를 들고 메릴랜드에 있는한 신문사에 찾아가 기자 다섯 명을 살해했다. 기자로서 그건 분명 내게 중요한 사안이었고, 평소였다면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친구들에게 문자를 받았을 것이며, 소셜미디어에서 몇 시간동안 사건을 따라가며 뒤범벅된 설명을 모아 서서히 그림을 완성해 나갔을 것이다. 프로빈스타운에서는 학살이 일어난 다음 날 죽은 나무를 통해, 알아야 할 모든 명확하고 비극적인 정보를 10분 만에 파악할 수 있었다. 갑자기, 물리적인 신문(범인이 목표물로 삼은 바로 그것)이 비범한 현대적 발명품이자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발명품처럼 보였다. 그리고 내가 평소에 뉴스를 소비하는 방식이 공포를 유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와 달리 이 새로운 방식은 관점을 유도했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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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에세이에 대해서 좀 나이브하게 여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나이브한 에세이만 창궐해대는 시대와 공간을 살아가는 덕인지도.

이런 글(에세이라 불리우는, 노력하고, 시도하고, 시험하는 글)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주장 또는 서사라는 물길들과 글자라는 섬들이 한데 모여 한 편의 작품 혹은 한 작가의 작품이라는 다도해가 된다. 페이지가 작은 만이라면, 글자는 그 위에 간격을 두고 떠 있는 부표다. 그리고 그 사이로 온갖 것들이, 설교가, 대화가, 목록과 설문이, 낱장의 인쇄물이, 한 편의 에세이로 여겨질 수 있는 한 권의 책이 흐르거나 가라앉는다. 수면 아래에는 그렇게 침전된 모래톱이 쌓여 있다. 에세이에서 특별한 억양이 들려온다면, 그 억양이 만들어지는 곳은 그 해저일 것이다. (중략)

나는 어떤 에세이, 어떤 에세이스트를 꿈꾸는가. 현실 속 저자든 상상 속 저자든, 이 장르(물론 에세이를 장르라고 부르는 건 전혀 맞지 않지만)에서 이미 실현된 본보기이든 실현 불가능한 본보기이든, 내가 그 저자와 그 본보기에게 바라는 것은 정확함과 애매함의 결합이다. (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글쓰기의 정의이기도 하다.) 또 내가 바라는 것은 가르치고, 유혹하고, 혼란스럽게 하는 형식, 이 세 가지 일을 균등하게 수행하는 형식이다. (마이클 햄버거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에세이는 형식이 아니며, 그 어떤 형식도갖지 않는다. 에세이는 에세이의 규칙을 창조하는 게임이다.") 사실 이는 에세이만이 아니라 예술이나 문학 전반에 요구되는 조건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하나의 범주가 모두를 대표하고 있으며, 내가 모든 예술 형식에 바라는 것을 이 범주가 정의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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