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교육과 해방

미르틸라 마이너

교육은 흑인들의 발등을 비추는 등불이자 자유에 이르는 길을 밝히는 빛이었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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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여성참정권 운동 내부의 인종주의

5장. 흑인 여성에게 해방의 의미

남의 눈의 티끌은 보면서 제 눈의 대들보를 보지 못한다는 말이 생각나는 장이다.

해방이 흑인들을 백인 여성과 ‘동등하게’ 만들었으므로 투표권이 주어지면 흑인 남성이 더 우월해진다고 믿는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과 그 외 여성들은 흑인 남성의 참정권에 절대적으로 반대했다. 하지만 노예제 폐지만으로는 흑인의 경제적 억압이 철폐되지 않고, 그러므로 흑인에게는 정치권력이 특히 긴박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한 이들도 있었다. - P125

물론 공화당은 북부군이 승리를 거머쥐고 난 뒤 여성참정권을 지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그들이 남성이라서가 아니라 정치인으로서 당시의 지배적인 경제적 이익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북 간의 군사적 경합이 남부의 노예 소유계급을 전복시키는 전쟁이라는 점에서, 이는 기본적으로 북부의 부르주아지, 그러니까 공화당 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목소리를 발견한 젊고 열정 가득한 산업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수행된 전쟁이었다. 북부의 자본가들은 국가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경제적 통제력을 손에 넣고자 했다. 그러므로 남부의 노예정치를 상대로 이들이 벌인 투쟁은 흑인 남성이나 여성의 해방을 인간으로서 지지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 P127

수정헌법 제14조와 제15조에 대한 여성 권익 운동 지도자들의 비난이 정당했는지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한 것 같다. 백인 중간계급 여성으로서의 자기 이익에 대한 방어―자기중심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방식으로 표출될 때가 많은—는 남북전쟁 이후 흑인 평등 운동과 이들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위태롭고 피상적이었음을 드러냈다. - P130

프레더릭 더글러스가 생각하기에 노예제 폐지는 명목상으로만 완수되었다. 남부에 사는 흑인의 일상에는 여전히노예제의 악취가 진동했다. 그래서 더글러스는 남부 흑인들이 새로 손에 넣은 ‘자유로운’ 지위를 단단하고 확실하게 굳힐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라고 주장했다. "흑인 남성들이 투표권을 갖기 전까지 노예제는 철폐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더글러스가 그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 여성 투표권 투쟁보다 흑인 투표권 투쟁을 전략적 우위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한 근거가 바로 이것이었다.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참정권을 노예제 청산을 위한 미완의 과정을 완수할 수 있는 필수불가결한 무기로 바라보았다. 이 순간만큼은 여성참정권이 흑인남성의 참정권보다 덜 시급하다는 주장을 펼칠 때 더글러스는 흑인 남성의 우월성을 엄호한 게 전혀 아니었다. - P131

옛 노예 소유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던 민주당은 남부에서 흑인 남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지 않을 방법을 강구했다. 그래서 많은 민주당 지도자들이 공화당의 적수들에게 맞서는 계산된 조치로 여성참정권을 엄호했다. - P135

평등권협회의 해체로 막강한 힘이 잠재되어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보잘것없었던 흑인해방과 여성해방의 동맹이 막을 내렸다. - P140

수정헌법 제14조와 제15조를 둘러싼 논란에서의 행동으로 어떤 진지한 비난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더글러스가 흑인 남성 참정권을 지지해서라기보다는 공화당 안에서의 투표권의 힘을 너무 의심 없이 신봉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 P141

남부에서 가사서비스의 가장 굴욕적인 측면 중 하나ㅡ가사서비스와 노예제의 친연을 확인해주는 또 다른 측면—는흑인 하인이 백인과 같이 있는 한 짐크로법*을 일시적으로유예했던 부분이었다.

나는 백인 아이들과 전차나 기차를 타러가곤 했고 (…) 앞자리든 뒷자리든 내가 원하는 데는 어디든 앉을 수 있었다. 백적인 남자가 다른 백인 남자에게 "저 검둥이가 여기서 뭐하는거죠?" 하고 물었는데 "아, 저 여자는 그 앞에 있는 백인 아이들의 보모예요"라는 대답이 나오면 순식간에 평화의 침묵이 찾아왔다. 내가 하인-노예-으로서 백인 남자의 객차에 오르거나 전차의 백인 남자 구역에 있는 한 만사형통이지만 옆에 백인 아이가 없어서 내가 하녀임을 증명할 수 없으면 단박에 ‘검둥이‘ 자리나 ‘유색인종 객차’를 할당받곤 한다. - P148

역사적으로 페미니스트를 포함한 백인 여성들은 가사 노동자들의 투쟁을 인정하기를 꺼렸다. 이들은 가사서비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시시포스적 과업에 관여한 적이 거의 없었다. 작금의 ‘중간계급‘ 페미니스트 프로그램에서 가사 노동자 문제가 편의적으로 누락된 것은, 그들이 부리는 가정부에 대한 착취적인 처사를―최소한 부유층 여성들의 입장에서-감추고 정당화하는 방편인 것으로 드러날 때가 심심찮게 있었다. 1902년 ‘가사 노동자의 하루 9시간 노동(ANine-Hour Day for Domestic Servants)’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쓴 저자는 고용주에게 여성 점원을 위한 의자를 비치할 것을 촉구하는 서명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한 페미니스트 친구와의 대화를 이렇게 묘사했다.

친구가 말했다. "가게 점원들은 하루에 열 시간씩은 서 있어야 하잖아. 그 아가씨들 지친 얼굴을 보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존스 부인." 내가 말했다. "네 가정부는 하루에 몇 시간 서 있지?" - P155

"왜? 모르겠는데." 친구가 놀라며 말했다. "대여섯 시간 정도 아닐까?"
"가정부가 몇 시에 일어나?"
"여섯 시."
"그리고 밤 몇 시에 일을 마무리하니?"
"아, 여덟 시 정도, 일 거야, 보통."
"그럼 열네 시간이잖아.…."
"… 우리 가정부는 앉아서 일할 때도 많아."
"무슨 일을 할 때? 빨래? 다림질? 걸레질? 침대 정돈? 요리? 설거지? (…) 아마 너희 집 가정부는 밥 먹을 때랑 채소 다듬을 때 두 시간 정도 앉아 있을 거야. 그리고 한 주에 나흘은 오후에 한 시간 휴게 시간도 있겠지. 그러면 너희 가정부는 하루에 최소한 열한 시간을 서 있고 그동안 계단도 숱하게 오르내려야 하지. 내가 보기엔 너희 집 가정부가 그가게 점원보다 더 딱한 거 같은데."
나를 찾아온 친구는 눈이 번들대고 뺨이 붉어져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집 가정부는 일요일엔 저녁 식사가 끝나면 맨날 쉰다고." 친구가 말했다.
"그래, 그치만 점원은 일요일엔 종일 쉬잖니. 제발 내가 서명하기 전엔 떠나지 마. 점원들이 앉을 수 있게 되는 걸 나보다 더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이 페미니스트 운동가는 자신이 반대하는 억압의 수명을 자기 손으로 연장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이 여성의 모순적인 - P156

행동과 지나친 둔감함에는 이유가 있다. 하인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인간보다 못한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철학자 헤겔(Hegel)에 따르면 주인-하인(또는 주인마님-가정부) 관계의 역학 속에는 하인의 의식을 지워버리려는 부단한 노력이 내재한다. 이 대화에서 언급된 점원은 임금노동자, 즉 최소한 자신의 고용주와 자신의 노동에서 일말의 독립성을 보유한 인간이었다. 반면 하인은 오직 주인마님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노동했다. 어쩌면 그 페미니스트는 자기 하녀를 자기 자아의 단순한 연장으로 보았기 때문에 자신이 억압자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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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줄 지어 선 차를 지나쳐 산길로 들어섰다. 초입인데도 숲이 울창했다. 우리 일행들 외에는 오가는 사람도차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곳에 묻히고 싶을까? 아무도 없이 적적하게 깊은 산속에 홀로 아버지는 백운산에 가장 오래 있긴 했지만 이산저산 떠돌며 48년 겨울부터 52년 봄까지 빨치산으로 살았다. 아버지의 평생을 지배했지만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던 건 고작 사년뿐이었다. 고작 사년이 아버지의 평생을 옭된 건 아버지의 신념이 대단해서라기보다 남한이 사회주의를 금기하고 한번 사회주의자였던 사람은 다시는 세상으로 복귀할 수 없도록 막았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작 사년의 세월에 박제된 채 살았던 것이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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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짓가랑이에 붙은 먼지한톨조차 인간의 시원이라 중히 여겨 함부로 털어내지 않았던 사회주의자 아버지는 마침내 그 시원으로 돌아갔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참으로 아버지답게 마지막까지 유머러스하게. 물론 본인은전봇대에 머리를 박는 그 순간에도 전봇대가 앞을 가로막고 서 있다고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민중의 한걸음 한걸음이 쌓여 인류의 역사를 바꾼다는 진지한 마음으로 아버지는 진지하게 한발을 내디뎠을 것이다. 다만 거기, 전봇대가 서 있었을 뿐이다. 무심하게, 하필이면 거기. 이런 젠장. - P16

"고 선상님을 잘 알그마요."
그제야 어머니의 눈빛에서 경계가 사라졌다. 사회주의자답지 않게 어머니는 낯선 사람, 낯선 것에 대해 경계가심하다. 어머니에게는 익숙한 것 오래된 것이 좋은 것이다. 그중 가장 익숙하고 좋은 것이 사회주의이고 동지들일 뿐이다. 어머니는 몇시간 전 세상 떠난 아버지가 북한을 비판하면 파르르 날을 세우던, 누가보면 천생 사회주의자였다. 그런데 기실 어머니의 사회주의란 첫사랑, 좀더 풀어쓰자면 여자도 공부를 할 수 있는 세상, 가난한 자도 인간 대접받는 세상에 불과했다. 신자유주의 대한민국도 그 정도는 해준다. 그러니까 어머니에게 사회주의란그저 지나간 첫 남자가, 지나갔음으로 가장 그리운, 뭐 그런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넓게 울던 어머니는 눈 촉촉이 젖은 황사장을 그 이상의 촉촉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아직은 약간의 경계를 품고. - P21

개 이름 같은 아리는 내 이름이다. 아버지가 활동했던 백아산의 아, 어머니가 활동했던 지리산의 리를 딴 이름 덕분에 나는 숱한 홍역을 치렀다(사실 아버지가 주로 활동한 곳은 백아산보다는 백운산이었다. 그런데도 백아산의 아를 따온 것은 백운산의 백이나 운이 여자아이 이름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그러니까 제아무리 남녀평등을 주장했다 한들 반봉건시대에 태어나 가부장제의 그늘을 아주 벗어나지는 못한 반봉건적 사유의 발로였던 것이다). 학교에서나 관공서에서나 고아리, 내 이름을 말하면 아유, 이름이 참 예쁘네, 얼굴도 참・・・・・・ 하면서 나를 쳐다보았고 이내 말줄임표가 뒤따랐다. 나는 아리라는 이름 따위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 딱 벌어진 어깨에 소도 때려 - P29

잡을 듯 강건한 육체를 지닌, 그러니까 혁명전사의 딸에참으로 걸맞은 육체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흔한 경숙이혜숙이 같은 이름이었다면 감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당황과 모멸의 순간을, 나는 당신들의 청춘을 기념하고자 했던 부모 덕분에 어쩔 수 없이 감당하며 살아왔고, 살아내는 중이었다. - P30

어찌 됐든 잘되면 자기 덕, 못되면 아버지 탓. 작은아버지가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는 생각이 든 순간 전화기 너머로 흐르는 정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작은아버지는 평생 형이라는 고삐에 묶인 소였다. 그 고삐가 풀렸다. 이제 작은아버지는 어떻게 살까? 작은아버지는 지금쯤 빈속에 깡소주를 들이붓고 있을 것이다. 일흔 가까운 나이에 처음으로 마주친 형 없는 세상, 탓할 사람 없 - P41

는 세상이 두려워서 두려움을 이기고 작은아버지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찾아와줄까. 설령 오지 않는다 해도 아버지는, 마루에 우두커니 앉아 동생의 모진 말을 묵묵히견뎌내던 아버지는, 이번에도 타는 속을 소주로 달래며, 나는 모르는 씁쓸한 인생의 무언가를 되새기지 않으려나, 하면서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보았는데, 아버지는 당연히그거사 니 사정이제, 모르쇠로, 나는 어딘지 모를 어딘가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게, 아버지의 사정은 아버지의 사정이고, 작은아버지의 사정은 작은아버지의 사정이지, 그러나 사람이란 누군가의 알 수 없는 사정을 들여다보려 애쓰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아버지는 그렇게 모르쇠로 딴 데만 보고 있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뭐 그런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오늘 작은아버지가 미국의 유명 아나운서 처벅이 죽은 그날처럼 취해서 차라리 대자로 널브러지기를, 그래서 올 수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했다. - P42

별것 아닌 기억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내가 모르는 아버지, 혁명가가 아닌 순간의 아버지, 거기서 어린내가 발견한 것은 뻔한 남자들과 다르지 않은 뻔한 행동이었다. 나이 든 뒤에도 나는 하동집을 지날때마다 고개를 외로 꼰 채 굳이 외면했다. 내가 외면한 것은 하동댁이아니라 위대한 혁명가의 외피 속에 감춰져 있을지 모르는뻔한 남성의 욕망이었을 것이다. 그때 아버지는 감옥에있었고, 나는 아버지가 정의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위대한 혁명가라고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어야만 했다. 그래야 감옥에 있는 아버지를 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 P66

고통이든 슬픔이든 분노든 잘 참는 사람은 싸우지 않고 그저 견딘다.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 들고일어나 누군가는 쌈꾼이 되고 누군가는 혁명가가 된다. 아버지는 잘못 참는 사람이다.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가 득세하는것도 참지 못했고,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하라는봉건잔재도 참지 못했으며, 가진 자들의 횡포도 참지 못했다. 물론 두시간의 노동도 참지 못했다. 그런데 얼어 죽을 것 같은 고통은, 굶어 죽을 뻔한 고통은, 생사의 고비를함께 넘은 동료들이 바로 곁에서 죽어가는 고통은 어떻게 견뎠을까? 신념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내려와봤자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뿐이라는 지극히 절망적인 현실 인식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 P68

진정한 사람은 싸우지 않는다. 가타부타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싸우지 않는다. 똑똑한 아버지가 그건 몰랐다. 그래서 아버지는 분이 머리끝까지 차 싸움에 임하는 사람을 절대 이기지 못했다. 그런 아버지가 총을 들고 백운산과 지리산을 누빈 역전의 용사라는 게 나는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총을 메고 산이나 뛰어다녔겠거니, 발은 빠르니까, 그 시절의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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