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고유어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한자어와 다른 외래어는 우리말 속에서 갖는 언어학적 가치가 다르다. ‘시인‘의 ‘시‘는 시정, 시집, 시심, 시문학, 서정시, 서사시와 연결되고, ‘시작‘의 ‘시‘는 시동, 시말, 시원, 시조, 시종, 시초, 개시와 연결되어 그물망을 형성하지만, 시니피앙, 시니피에‘의 ‘시‘는 우리말에서 무엇인가. ‘능기나 기표와 달리 ‘시니피앙‘은 우리말 속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으며, 고립된 말들은 그 수가 아무리 많아져도 한 언어 체계 전체에 깊이를 만들지 못한다. 그물망과 연결 고리를 갖는 낱말은 그 자체를 설명하는 힘도 그 그물망에서 얻지만 더 나아가서는 그 그물망을 풍요롭게도 한다. 한 낱말은 항상 다른 낱말에 의지하여 그 뜻을 드러낸다. (순우리말 학술 용어 다듬기가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도 한자어만큼 강한 그물망을 확보하지 못한 데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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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예리한 설교자가 "악마의 가장 교묘한 술책은 그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에게 믿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결코 잊지 말라"고 말했을 때였다. 이 말은 악이 늘 평범한 얼굴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온갖 미명을 동원하여 받들고 있는 제도와 관습 속에 교묘하게 숨어들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 P72

교수들은 지금 내가 처음 교수 생활을 할 때보다 10배 정도 논문을 더 쓴다. 그래서 인문학이 그만큼 발전했는가. 양적으로는 그렇다. 다만이런 말을 덧붙여둘 필요가 있다. 옛날에는 연구자들이 적어도 자기 분야에서는 다른 연구자들의 논문을 열심히 읽었으며, 누가 어떤 논문을 썼는지 알고 있었다. 지금은 다른 연구자의 논문을 열심히 읽지 않는다. 논문을 읽는 사람은 쓴 사람 자신과 두세 명의 심사자뿐이라는 말도 있다. - P99

노래로 불러야 할 서정과는 아무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숫자도 그것이 섬의 수와 연결될 때는 시적 환기력을 지닌다. 캐나다와 미국 사이 세인트로렌스강과 온타리오호수가 만나는 지역의 1860여 개 섬을 가리키는 ‘사우전드 아일랜드‘는 샐러드 드레싱의 이름으로도 사용된다. 사람들은 세상살이의 번뇌와 오욕으로부터 보호된 세계가 바다로 격리된 섬에는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 P102

사람은 산업 역군이기 전에 사람이고 국가의 간성이기 전에 사람이다. 어떤 정책이나 정치적 이념에 맞게 사람을 교양하려는 시도는 벌써 사람을 배반한다. 사람이 국가나 제도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나 제도가 사람을 위해 있다는 것은 지극히 명백한 진실이고, 그래서 잊어버리기 쉬운 진실이다. 학생들의 인성 교육을 위해 국정교과서로 국사를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혹시라도 부총리의 마음속에 있다면, 그는 자신의 인성부터 깊이 성찰해야 할 것이다. - P113

소포클레스는 이 전설로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만들었다. 내용은 동일하나 이야기하는 방법이 같지는 않다. 물론 비극의 삼단일법칙, 단일한 장소에서, 하루 이내의 단일한 시간에, 단일한 사건을다뤄야 한다는 규칙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연극은 가뭄과 역병에시달리는 나라 테베의 궁정에서, 오이디푸스 왕이 백성들의 탄원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시작하며, ‘제 아버지를 죽이고 제 어머니와결혼‘하여 나라에 재난을 불러온 추악한 범인을 찾아내는 수사 과정을 거쳐, 왕이 바로 저 자신인 범인을 색출하여 처단하는 것으로 끝난다. - P115

이렇게 말하니 모파상이 전하는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이 떠오르는 것이 당연하다. 플로베르는 제자 모파상에게 "온 세상에 완전히 똑같은 두 알의 모래나, 두마리 파리나, 두 개의 손이나, 두개의 코가 없다"는 진실을 말하고 나서 "어떤 인물이나 사물을 단 몇줄의 문장으로 뚜렷이 개별화하고 다른 모든 인물이나 사물과 구별될 수 있도록 표현하라"고 했다. - P118

예술가는 남이 가지 않는 다른 길을 간다는 말이 있다. 그 다른 길은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추상적인 것도 아니다. 당신이 저 상투적인 ‘살랑살랑’ 대신 다른 말을 써 넣는다면 당신은 벌써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벌써 예술가다. - P119

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책은 도끼라고 니체는 말했다. 도끼는 우리를 찍어 넘어뜨린다. 이미 눈앞에 책을 펼쳤으면 그 주위를 돌며 눈치를 보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읽는 것에 우리를 다 바쳐야 한다. 그때 넘어진 우리는 새사람이 되어 일어난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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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03-18 15: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있는데 아직 읽지 않았어요. 살 때는 당장 읽을 것처럼 샀는데,,, 다른 사람 글 보며 반성;;;;;

햇살과함께 2022-03-19 09:10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저도 공감합니다. 살 때는 당장 읽고 싶은 마음으로 사지만, 사고 나면 새로운 책들이 더 재밌어 보인다는.. 잡아 논 물고기 같은 거죠~
원래 이 책을 지금 읽을 계획이 아니었는데, 책상 위에 읽으려고 쌓아둔 책보다 좀 나중에 읽으려고 책장에 꽂아둔 책에 또 흥미가 생겨서...ㅎㅎ 맘 가는 데로 읽는 거죠~
 

우리가 반대파를 용인하게 되는 저 민주주의의 핵심적 단계는 우리가반대파를 용인함으로써 오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민주 발전의 결정적인 순간을 통과했기 때문에 반대파를 용인하고 관용할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이 단계들은 선후 관계가 아니라 동시적 관계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때에도 최소한 쌍방이 모두 민주 발전을 염원하고 민주화의 온갖 노력을 존중한다는 전제나 조건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관용과 용인이 무엇을 위한 용인이고 무엇을 위한 관용인지 모호해질 것이며, 끝내는 그 노력이 딛고 설 바탕 자체가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 P25

잔칫상에 반드시 홍어가 놓여야 하는 것은 막걸리 안주로 홍어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적당하게 삭힌 홍어 한 점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가 어금니와 볼 사이에 그것을 밀어넣고 제대로 빚은 막걸리를 마시면 무어라고 설명할 수 없는 맛이 난다. 그래서 ‘홍탁‘이라는 말이 생겼다. 막걸리 없는 홍어회는 완전한 홍어회가 아니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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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면 원궤도를 도는 행성의 움직임, 역행과 순행을 꽤 잘 설명할 수 있다. 당대에는 현명한 제안이었겠지만, 오늘날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전원‘은 복잡한 가정을 억지로 끼워 맞춰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을 비유할 때 언급되는 슬픈 운명을 맞이했다. 설명은 간단할수록 좋다는 ‘오컴의 면도날’ 개념의 대척점이라고나 할까. 태양을 중심에 두고, 행성의 공전 궤도로 원이 아니라 타원을 도입하면 간단히 끝날 일이다.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얘기지만 말이다. - P200

별들은 스물여덟 개의 별자리, 28수로 묶어두었고, 동방의 청룡, 서방의 백호, 북방의 현무, 남방의 주작이 각각 7수씩을 맡고 있다. 28수는 윷놀이 말판에서도 볼 수 있다. 말판을 잘 보면 한가운데 칸 주위로 28개의 칸이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이 북극성과 28수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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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들이 좋았다. 남들이 보기엔 저게 대체 뭘까 싶은 것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들,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정치적 싸움을 만들어내지도 않을, 대단한 명예나 부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요, 텔레비전이나 휴대전화처럼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바꿔놓을 영향력을 지닌 것도 아닌 그런 일에 열정을 바치는 사람들, 신호가 도달하는 데만 수백 년 걸릴 곳에 하염없이 전파를 흘려보내며 온 우주에 과연 ‘우리뿐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무해한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들이 동경하는 하늘을, 자연을, 우주를 함께 동경한다. - P13

일기 속에는 두려워하는 내가 있다. 졸업할 수는 있는까 두려웠고, 졸업 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려웠다. 어쩌면 졸업 후의 더 큰 두려움을 유예하기 위해 수료생의 고뇌에 천착했는지도 모른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도중에그만두지 못했던 것은 떠날 용기가 없어서였다. 그러나 남은 채 버텨내는 데도 역시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떠난 이들은 남지 못한 게 아니라 남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고, 남은 이들은 떠나지 못한 게 아니라 떠나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이제는 안다. 어느 쪽을 선택했든 묵묵히 그 길을 걸으면 된다는 것을, 파도에 이겨도 보고 져도 보는 경험이 나를 노련한 뱃사람으로 만들어주리라는 것을. - P31

별까지의 거리 구하는 공식이 (겉보기등급)-(절대등급)으로 시작하는데, 밝은 별이라 절대등급이 음수인 경우를 예제로 주었더니 마이너스가 두 개 연달아 나오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진지한 얼굴로 물어오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360도보다 2파이가 편한 자연과학 전공자가 있었다. 0보다 작은 수를 쉽게 뺄 수 없는 학생과 멈춰 있는 축구공도 제대로 못 차는 내가 무엇이 다른가, 같은 깨달음을 얻으며 한 주 한 주가 흘러갔다. - P39

학자들은 교류를 통해 지식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기록을 발표한다. 지역적으로 가까운 사람들끼리만 학문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멀리 있는 학자들과도 교류하기 위해서 편지 형식을 취했던 것이 오늘날 논문의 전신이다. 논문에서는 과거 다른 사람이 발견하고 연구하고 논했던 내용을 정확히 밝히며 인용한다. 남의 업적을 내 것인 양하는 태도는 국가나 가족에 대한 긍지를 느낄 때나 쓰는 것이요, 남의 글 베끼기는 타자 연습할 때나 하는 일이다. - P59

알고는 있지만 설명하기가 어려울 때도 모른다고 하고,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을 때도 모른다고 한다. 확답을 잘 하지 않고, 그럴 가능성이 높거나낮다고만 한다. 우린 항상 잘 모른다. 자연은 늘 예외를 품고 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사실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 그것만이 언제나 어디서나 진실이다. - P95

의심하는 것이 직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의 문제에도 다양한 각도에서 의심하고, 그 답을 구하려 애쓰며, 답을 찾은 뒤에도 과연 답이 하나뿐인지또다른 측면에서의 답은 없는지 계속해서 의심하는 것, 그것이 과학자가 하는 일이며 해야 하는 일이다. 그걸 머리로는 안다. 연구실 책상에 앉아 있던 시간의 대부분은 내가 방금 한 일과 조금 전에 한 일과 한참 전에 한 일을 의심하는데 썼으니 몸으로도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회가 내게 과학자‘라는 이름표를 달아 연구실 밖으로 나오게하자마자 어설픈 확신의 말을 의심도 없이 내뱉다니. - P96

특히 쉬운 단어일수록 번안하기가 힘들다. 예를 들어, ‘힘’이나 ‘일‘은 일상생활에서 너무 많이 쓰는 말이라 중고등학교 과학 수업시간에 그 정의를 처음 배울 때는 오히려 낯설다. 어떤 수험생이 메모지에 ‘인생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다‘라고 써서 책상에 붙여놓자 이과생이 와서 속도에는 이미 방향 개념이 들어 있다며 ‘속력‘으로 바꿔 쓰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남의 일이 아니다. 아는 교사가 환경 교육 자료를 공들여 만들면서 초록별 지구‘라고 써놓은 것을 보고 지구는 별이 아니라 행성이라고 했다가 이래서 이과생은 안 된다며 의절당할 뻔했다. ‘행성‘에 이미 별 성星자가 들어가지 않느냐는 지적에 딱히 반박할 말도 없었다. 참고로 천문학에서 별은 행성, 위성, 혜성 같은 천체를 제외하고 스스로 빛을내는 천체를 말한다. - P120

해 지는 걸 보러 가는 어린 왕자를 만난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장미 옆에서 가로등을 켜고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 왜 슬픈지 캐묻지 않고, 의자를 당겨 앉은 게 마흔세번째인지 마흔네번째인지 추궁하지도 않고, 1943년 프랑스프랑의 환율도 물어보지 않는 어른이고 싶다. 그가 슬플때 당장 해가 지도록 명령해줄 수는 없지만, 해 지는 것을 보려면 어느 쪽으로 걸어야 하는지 넌지시 알려주겠다. 천문학자가 생각보다 꽤 쓸모가 있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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