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말했다. "장병들의 외모를 규정하고 있는 조항들은 기억에 없습니다."그가 말했다. "내 기억에도 그런 조항들은 없어. 하지만 두발과 손톱 관리에 관한 규정은 제1장 8조에 있을 거야. 그 모든 조항들이 적힌 페이지가내 눈앞에 삼삼해. 그 내용을 기억할 수 있겠나?""없습니다.""머리 길이와 깎은 모양새는 항상 동료들과 동일하게 유지하라고 나와있네.""잘 알겠습니다.""구체적인 기준들이 제시되어 있어. 알고 있나?""너무 바빴습니다." 내가 말했다. "한국에서 막 돌아왔기 때문입니다.""난 일본이라고 들었네.""일본은 귀국하는 길에 잠시 거쳤던 것뿐입니다.""얼마 동안?""12시간이었습니다.""일본에도 이발사들이 있나?" - P21
이럴수가. 이번 달엔 책을 한 권도 사지 않았다. 정기간행물 2권만 받았네. 맞나?? 추석 연휴에는 책도 좀 사고 열심히 읽어보자.
바둑 명인의 은퇴기 관전기. 라고 쓰면 무척 지루할 것 같지만.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필력은 바둑 관전기 조차도 흥미롭게 읽게 만든다. 온 마음을 다한다는 것 아니 그런 생각조차 없는 진정 명인의 경지.
하지만 나는 사진의 감정이 마음에 사무쳤다. 감정은 사진에 찍힌 명인의 죽은 얼굴에 있는 것일까. 죽은 얼굴에는 자못 감정이 드러나 있지만, 죽은 그 사람은 이미 아무런 감정도 없다. 이렇게 생각하니, 내겐 이 사진이 삶도 죽음도 아닌 듯다가왔다. 살아서 잠든 것처럼 찍혀 있다. 그러나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이것을 죽은 사람의 얼굴 사진으로 보더라도, 삶도 죽음도 아닌 무엇이 여기에 있는 듯 느껴진다. 살아 있던 얼굴 그대로 찍혀 있기 때문일까. 이 얼굴에서 명인이 살아 있던 때의 여러 가지 추억이 떠오르기 때문일까. 혹은 죽은 얼굴 그자체가 아니라 죽은 얼굴 사진이기 때문일까. 죽은 얼굴 그 자체보다도 죽은 얼굴의 사진에서, 더 분명하고 자세히 죽은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도 기묘한 일이었다. 내겐 이 사진이 어쩐지 봐서는 안 될 비밀스러운 상징처럼 여겨졌다.훗날 나는 역시나, 죽은 얼굴을 사진 찍는 일 따위, 생각 없는 것이었다고 후회했다. 죽은 얼굴 사진 따윈 남길 만한 게못 된다. 그럼에도 이 사진에서 명인의 범상치 않은 생애가 내게 전해져 오는 것도 사실이었다. - P31
"글쎄.. 실은 그때까지 쓰러지느냐 쓰러지지 않느냐가 문제인데……. 여하튼 지금껏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는 게 스스로도 신기합니다. 딱히 깊은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신앙이라 할 만한 것도 갖고 있지 않고, 바둑 두는사람으로서의 책임이라 한들 그것만으로는 여기까지 올 수 없습니다. 그럼 정신력인가 하고 생각해 봐도, 뭐랄까......." 살짝고개를 갸우뚱하며 천천히 말했다."결국은 내가 무신경한 건지도 모르겠군요. 멍하니..... 내게 멍한 구석이 있어, 오히려 다행이 아닌가 싶습니다. 멍하다는 의미는 오사카와 도쿄가 다르지요. 도쿄에서 멍하다는 건멍청하다는 의미지만, 오사카에서는 이를테면 그림에서 이 부분은 무심히 그린다거나, 바둑에서도 여기는 그냥 무심히 둔다. 뭐 그런 의미가 있잖아요?"명인이 음미하듯 하는 말을, 나는 음미하며 듣고 있었다.명인이 이만큼 감회를 털어놓는 건 아주 드물었다. 명인은얼굴 표정이나 말투에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다. 관전기자로서 오랫동안 유심히 명인을 지켜봐 온 나는, 명인의 대수롭지 않은 모습이나 말씀에 문득 감흥을 받곤 했다. - P70
죽음이 임박했을 때, 그가 보기 드물게 쓴 사소설 『나』에서 "바둑 두는 사람이 부럽다." 하고, 바둑은 "무가치라고 하면 절대 무가치이고, 가치라고 하면 절대 가치이다."라고 쓴 걸 나는떠올리기도 했다. 나오키가 올빼미와 놀면서 "넌 쓸쓸하지 않니?"라고 묻자, 올빼미는 탁자 위의 신문을 쪼아 찢어 버린다. 그 신문에는 혼인보 명인과 우칭위안의 시합 바둑이 실려 있다. 명인의 병환 때문에 대국이 중단된 상태였다. 나오키는 바둑의 불가사의한 매력과 승부의 순수함을 생각하며 자신의 대중문학의 가치를 고민해 보려고 하지만, "......그런 일에요즘은 차츰 싫증이 난다. 오늘 밤 9시까지 원고 삼십 매를 써야만 하는데, 벌써 오후 4시를 지났다.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좋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루쯤 올빼미와 노는 것도 괜찮겠지. 나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널리즘과 번잡한 것들을 위해얼마나 일해 왔던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냉혹하게 나를 대했던가?" 나오키는 무리하게 글을 쓰다 죽었다. 내가 혼인보명인이나 우위안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나오키 산주고를 통해서였다.나오키의 말년은 유령을 보는 듯했는데, 지금 눈앞의 명인도 유령인가 싶다. - P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