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딜락, 미로, 기억 궁전, 신곡

5장 미로와 캐딜락: 상징으로 걸어 들어가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길은 그곳의 풍경을 지나는 가장 좋은 방법에 - P116

대한 앞사람의 해석이다. 길을 따라간다는 것은 먼저 간 사람의 해석을받아들인다는 것, 학자나 탐정이나 순례자처럼 먼저 간 사람의 뒤를 밟는다는 것이다. 같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어떤 중요한 일을 똑같이 따라한다는 것이다. 같은 공간을 같은 방식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같은 생각을 하는 방법, 같은 사람이 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따라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의 행동을 흉내내는 연기가 아니라, 그 누군가의 영혼을 닮기 위한 노력이다. 순례가 다른 모든 보행과 다른 점은 이렇게 반복과 모방을 강조한다는 데 있다. 신을 닮기란 불가능하지만, 신이 걸어간길을 똑같이 걸어가는 일은 가능하다. 예수가 인류의 실족(Fall)을 대속하는 과정에서 가장 인간적인 모습, 발을 헛디디고 진땀을 흘리고 상처입고 세 번 넘어지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14처에서다. 하지만 이 14처가 어느 성당에서나, 아니, 아무 데서나 볼 수있는 일련의 그림이 되면서, 신도들이 따라가는 것은 이제 수난의 장소가 아니라 수난 이야기가 되었다. 성당에 그려진 14처는 신도들이 예루살렘으로 걸어 들어가는 통로,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 속으로들어가는 통로이다. - P117

미로가 기독교의 전유물은 아니지만, 언제나 모종의 여정을 상징한다. 통과의례의 여정 또는 죽음과 부활의 여정을 상징할 때도 있고, 구원의 여정 또는 구혼의 여정을 상징할 때도 있다. 그저 여정의 복잡함(길을 찾아가는 어려움, 길을 깨닫기까지의 어려움)을 상징할 때도 있는 것 같다. 고대 그리스의 문헌에는 미로가 많이 등장한다. 크레타 섬에 미노타우로스가 갇혀 있었다는 전설의 미로가 존재했던 적은 없었을지 모르지만, 그곳에서 쓰는 동전에는 크레타 미로의 형상이 찍혀 있다. 실제로 발견 - P120

된 미로들도 있다. 사르데냐에는 바위 미로가 있고, 애리조나 남부와 캘리포니아에는 돌사막 미로가 있다. 로마인들의 모자이크 미로도 발견되었다. 스칸디나비아에는 땅에 돌을 놓아 만든 유명한 미로가 500개가량 있다.(20세기까지 어부들이 출항하기 전에 미로를 걸으면 고기가 많이 잡히고 순풍이 분다는 믿음이 있었다.) 잉글랜드에는 잔디 미로가 있다. 미로는 젊은이들이 에로틱한 놀이를 즐기는 장소였다. (예컨대 여자가 중앙에 가 있으면 남자가 여자를 향해서 달렸다. 미로의 굽이굽이 도는 길은 구애의 복잡함을 상징했다.) 잉글랜드에서 훨씬 더 유명한 미로로는 르네상스 정원의 미로를 후대에 귀족적 형태로 변형한 산울타리 미로가 있다. 미로에 대한 글을 쓴 많은 저자들은 미궁(maze)과 미로(labyrinth)를 구별하면서 대부분의 정원 미로를 미궁(maze)에 넣는다.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면서 혼란스럽게 만드는것이 미궁의 목적인 반면에, 미로(labyrinth)의 길은 하나뿐이라서, 누구든 계속 걷다 보면 중앙의 낙원에 도달할 수 있고, 돌아서서 걷다 보면 들어갔던 곳으로 나올 수 있다. 미궁이 분명한 목적지가 없는 자유의지의 혼란스러움을 뜻하는 반면에 미로는 구원으로 가는 확고한 여정을 뜻한다는 것도 미로와 미궁의 차이다. - P121

이제는 책이 기억 궁전 대신 정보 저장소가 되었지만, 아직 책에는기억 궁전의 몇 가지 패턴이 간직돼 있다. 길이 책을 닮을 수 있듯, 책도 길을 닮을 수 있다는 뜻이다. 길을 닮은 책은 걷기라는 ‘읽기‘를 통해 세계를 그려나간다. 단테의 신곡은 그 최고의 예다. 영혼이 죽어서 가게 되 - P130

는 세 장소를 여행하면서 베르길리우스라는 가이드의 도움을 받는 일종의 저승 여행기라 할 수 있는 이 책에서 단테는 여행자의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멋진 장면과 흥미로운 인물을 하나하나 짚고 넘어간다. 예이츠는이 걸작이 실은 기억 궁전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실제로 이 책은 지형지물을 대단히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신곡의 여러 판본에 저승의 지도가 포함돼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신곡을 여행기(『신곡보다 먼저 나오거나 늦게 나온 무수한글들을 포함하는 방대한 장르)로 볼 수도 있다. 등장인물이 걸어가는 길이 곧이야기의 길이 되는 것은 『신곡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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