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개관
《제국신문》, 《독립신문》, 《대한매일신보》, 《만세보》 등 애국계몽기 매체의 ‘독자 투고‘는 여성이 읽기의 주체(독자)에서 쓰기의 주체(작가)로 전환하는 장이었다. 우리는 여성문학사 서술의 첫 장을여성들의 독자 투고로 시작하려고 한다. 이 매체들을 기반으로 한 여성들의 글쓰기는 ‘문학‘이라는 좌표와는 떨어져 있지만 정론적·계몽적 글쓰기를 통해 근대 - 민족-젠더의 교차성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남녀동권‘, 그리고 그 전제 조건으로서 교육받을 권리는 근대초기 선언문, 독자 투고, 사설을 통해 집중적으로 발화된다. 요컨대애국계몽기 여성의 글쓰기는 차이보다는 평등의 원리, 계몽과 개화라는 민족국가 담론의 주요 의제를 수용하는 양상을 보인다. - P16
김일엽과 나혜석의 소설에서 보이는 계몽의 수사학은 조선 사회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여성의 미몽 상태 등을 문제 삼으면서 이를 해결할 대안으로 개인의 자각을 강조한다. 이들의 계몽은 ‘근대민족국가‘로 수렴되지 않는다. 오히려 식민지 조선에서 근대-남성성,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지 않는 여성-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페미니즘 텍스트로서 의미가 있다. 김명순은 『생명의 과실』(1925), 『애인의 선물』(1928) 두 권의작품집을 발간하여 ‘문사‘가 아닌 ‘작가‘로서 존재 증명을 했다는 점에서 김일엽, 나혜석과 구별된다. 자신의 사생활을 둘러싼 소문에항변하기 위한 알리바이로서의 소설 쓰기에 해당하는 「탄실이와 주영이」(1924), 자전적 성격이 강한 「칠면조」(1921)가 미완인 데 반 - P23
해, 신문에 연재된 후 『생명의 과실에 개작 수록된 「도라다볼 때(1925)는 완성작이자 현실의 제약을 딛고 이를 아름다움과 문학 교양으로 승화하는 여성의 형상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P23
‘여성도 국민‘이라는 선언을 경유해 「여학교설시통문」과 「경희의 ‘여성도 사람‘이라는 선언, 즉 ‘여성-시민‘의 자리에 이른 근대-초기 여성들의 글쓰기는 계몽적 글쓰기를 젠더화했다. 김명순은 나혜석과 김일엽의 ‘신여성‘ 담론, 자유연애라는 이상을 본격적으로 문학적 글쓰기에 녹여 냈다.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의 공론장의 소문과 평가에 저항하면서 미완의 소설 쓰기를 반복하고, 문학과 지식 - 교양을 열망하는 여성을 창조한 김명순의 여정은 ‘작가‘과 ‘문학성‘을 끊임없이 의심받으면서도 이를 뚫고 나가려 한 여성문학 탄생기의 현실을 의미심장하게 보여 준다. 이처럼 근대 초기 여성 작가-지식인, 즉 ‘배운 여자들‘은 문학과 비문학의 경계를 허물고, 정론적·계몽적 글쓰기와 문학적 글쓰기의 경계를 횡단했다. 이들은 그간 남성이 점유한 근대 매체와 계몽적 목소리의 지식장을 모방하고 전유해 자신들의 이념과 욕망을 씀으로써 남성 중심의 근대 지식 질서에 균열을 내고자 했다. 특히이들의 글쓰기는 선언문의 격정적 목소리, ‘우리‘라는 여성공동체를 호명하는 청유형의 문법을 구사하면서 여성-집단지성의 범례를 제시한 한편, 식민지 조선에서 신여성이 처한 구속적 상황을 고백하고 폭로하며 미학적 글쓰기로 드러냄으로써 공론장에 글 쓰는 여성의 존재를 뚜렷하게 각인시켰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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