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라기에는 과학 얘기는 아직 별로 없고 독립운동가들의 흥미로운 뒷얘기.
책에 언급된 하와이 이민과 인하대의 관계는 몇 년 전 월미도 여행시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알게 됨.

1902년 샌프란시스코. 안창호와 하와이

1902년 10월, 유학을 떠난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했다. 그는 미국으로 가는 배 위에서 태평양 한가운데 우뚝 솟은 화산섬 하와이를 보고 감격해 자신의 호를 ‘도산‘으로 지었다.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 길거리에서 두 사람이 상투 를 붙잡고 싸우는 장면을 목격한다. 일단 싸움부터 말리고 사연을 물었더니, 인삼을 팔던 한국 상인들 사이의 구역 다툼이 었다. 안창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지금 해야 할 일은 공부가 아니라 즉각적인 의식 개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진학을 포 l기하고 대대적인 계몽 활동과 한인촌 건설에 앞장서고 신문 을 발행하며 교포들의 단합을 이끌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 를 시작으로 미국 전역에 한인 공동체가 구성되기 시작한다. - P34

행복하게 지내던 서재필에게 충격을 준 사건 역시 3•1운동이었다. 그는 갑신정변과 독립협회의 실패 모두 한국 민중이 덜 깨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3•1 운동에서 한국인들이 보여준 의지에 감동했다. 서재필은 이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30년 전에 내가 인천항을 떠날 때에 한인들이 내 뒤를 받드려주지 않는 것을 보니까 한인들이 다 죽은 백성으로 알았었 습니다. 그러나 1919년 일어나는 것을 보니까 한인이 죽지 않고 산 백성으로 꼭 믿었습니다. 언제든지 그런 백성이 자유 독립하고야 말 줄로 참말 믿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다시 연설도 하며 선전 사업에 활동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 P43

서재필은 사재를 털어 필라델피아에 교포들을 모아 독립 행사를 열고, 다시 한국 문제에 앞장선다. 서재필의 미국인 부인은 일제의 압박과 학정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기도문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특히 둘째 딸 뮤리엘은 서재필의 비서 역할을 하며 적극 도왔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독립운동에 헌신한 결과, 한때 부유한 사업가였던 그는 결국 60세가 되던 1924년에 파산한다. 이런 와중에 서재필은 62세에 다시 의대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심지어 64세 때는 집을 저당 잡혀가며 의대 대학원에 진학한다. 조선에 전염병이 자주 일어남을 걱 정한 그는 세균학, 면역학, 병리학 등을 연구하며 학술지에 몇 편의 논문도 출판했다.
192년, 미국에서 서재필과 동업하던 유일한 박사가 귀국한다. 그를 배웅하는 자리에서 미술을 전공한 뮤리엘은 유일 한의 성 버들 유를 상징하는 버드나무를 조각해 선물했다. 유일한 박사는 이 조각에 새겨진 모양을 상표로 한국에서 의약업을 시작했다. 이 회사가 유한양행이다. - P44

1919년 응우옌은 파리에 미리 도착해 활동 중인 한국 대표단의 도움을 받기 시작한다. 프랑스 당국은 응우옌이 한국 대표단과 매우 가깝게 지낸다며 심지어 응우옌과 한국인들의 대화 내용도 기록해두었다. 응우옌은 한국 대표단의 도움으로 세계 각국 언론과 인터뷰도 진행할 수 있었다. 당시 신문들은 이 한국 대표단이 ‘대한민국임시정부(Provisional Goremment of Republic of Korea)‘에서 파견되었다고 기록한다. 나중에 응우옌 이라는 이 베트남 젊은이는 이름을 ‘호치민(Ho Chi Minh)‘으로 바꾸었고, 마침내 베트남을 독립시켰다.
3.1운동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이라는 호칭이 이렇게 국제 무대에 처음 등장하고 베트남 독립에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100년 전 우리 선조들이 그렇게 무기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얼마나 국제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2018년, 호치민의 파리강화회의 활동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프랑스 자료들이 발견되었다. ‘호치민은 한국인들이 하는 모든 일을 자신의 근 l거로 삼는다. 그는 (일제에) 저항하는 한국인의 계획을 거의 똑같이 따르고 있다‘고 당시 프랑스 경찰은 기록했다.
해방될 때까지 독립운동 자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것은 하와이 노동자들이 일당을 아껴서 모은 돈이었다. 그 총액은 1945년까지 300만 달러에 가까운 것으로 추산된다. 1954년, 이들은 미국의 MIT에 못지않은 공과대학을 설립해달라고 대한민국에 15만 달러를 기부했다. 1954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70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설립된 학교는 그들이 떠난 인천과 정착한 하와이의 첫 글자를 따서 ‘인하’대학교라고 이름 지어졌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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