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칼럼의 필자는 최규남. 1932년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이 글을 쓸 당시에는 문교부 차관이었고, 새롭게 시작한 대한민국의 학제 개편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총장을 거쳐 문교부 장관이 되어 대한민국의 초기 이공계 교육에 이바지했다. 그의 기록을 찾다가 놀랍게도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 주요 국가에서 주목받던 1920년대 바로 그 시점에, 우리나라에도 상대성이론이 전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순히 소개된 정도가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서 순회강연이 열렸고,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며, 주요 일간지와 잡지 들은 연이어 새로운 과학의 탄생을 지면에 올렸다. 심지어 당시로는 최신 이론이었던 양자역학도 다루었다. 놀랍게도 이미 100년 전의 일이다. - P11
1895년 서울. 서재필의 귀국 한편, 서재필은 조선인 최초로 자전거를 탄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1890년대 미국과 유럽은 자전거 대유행의 시대였다. 그는 조선으로 귀국할 때 자신이 타던 자전거를 가져왔다. 서재필이 서울 도심을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놀랐고, 윤치호는 그에게 자전거를 배운 뒤 미국에 주문을 했다. 두 사람은 독립협회 활동을 하면서 자주 자전거를 탔는데, 나중에 보부상 무리와 대립할 때 그들이 몰고 다니던 자전거가 상대편에게 큰 위협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이 만난 서양 과학 문명은 이렇게 자전거로부터 시작되었다. 참고로 자동차를 최초로 운전한 조선인은 동학 3대 교주 의암 손병희다. - P15
그리고 의대에 진학했다. 1890년 조선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된 서재필은 1892년 컬럼비안대학(현 조지 워싱턴대학) 의학부를 2등으로 졸업하고 최초의 서양식 의사가 된다. 불과 얼마 전까지 유교 경전을 외던 선비는 이처럼 10년도 지나지 않아 미국에서 서양 과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되었다. 1894년 6월 그는 워싱턴 명망가 집안의 딸 뮤리엘과 결혼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의 사촌으로, 철 도우편국장이던 워싱턴의 거물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이었다. 이들의 결혼은 당시 《워싱턴포스트》에 실릴 만큼 미국에서도 화젯거리였다. 이처럼 갖은 시련 끝에 겨우 미국에 정착한 그가 다시 조선으로 온 것이다. 임신 중이던 뮤리엘은 오직 남편 서재필만 믿고서 대륙을 횡단하고 태평양을 건너 미지의 땅에 도착했다. - P18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의 주도로 《독립신문》이 창간되었다. 최초의 순 한글 신문이다. 서재필이 배재학당 학생이던 주시경을 채용한 덕분이었다. 《독립신문》은 창간 사설에 한글 사용에 대한 이유를 명확히 드러냈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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