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주제 아닐까? 영끌.

누구나 집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을 것 같다.

아파트에 20년째 살고 있다. 결혼하면서부터 아파트 생활을 시작했으니.

편리하지만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다. 내 집 같지 않다.

가족이 함께 살고 있지만, 그냥 숙소 같다. 집에 있으면 자꾸 집을 나가고 싶다(그래서 주말마다 탈주 중).


집 하면 어릴 때 살던 집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때는 탈출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립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옥상이 제일 그립다.

방 두 칸, 손바닥 만한 중간방(거실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좁은 집에 많은 식구. 나만의 공간은 그저 내 책상 뿐이던 곳. 그곳에서 유일하게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옥상이었다.

엄마에게 혼나거나 형제들과 싸우거나 울적하거나 빈정 상하는 일이 있으며 옥상에 올라가서 구석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울거나 원망하거나 화를 내거나 욕을 하거나. 그러다 보면 마음이 가라앉아서 다시 내려온다.

그곳이 없었다면 가출했을지도. 아니, 더 삐뚤어졌을지도.



"우리가 집안의 구석에

몸을 피하고 있을 때,
스스로 잘 숨겨져 있다고 믿는
우리의 몸 주위에 하나의
상상적인 방이 건조된다.
이 부동성의 공간은
존재의 공간으로 지적되어야 한다."

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 P3

 
















이한솔 편집자의 ‘13호를 펴내며편집자의 말. 엄마가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혼란과 어수선함과 정리되지 않음과 걱정과 우울과 짜증과 미안함과 가끔의행복 속에서 느끼는 양가감정.


엄마가 되고 나서는 혼란이 내 기본 상태다. (짧은 순간 벅차게 느끼는 엄청난 고양감과 행복 (하루의 대다수)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자기 부정과 죄책감 사이에서 몸도 정신도 쪼개진다.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어. 네가 아이 봐주는 날이잖아. 하지만 아침에 애들을 두고 나가는 게 힘들어.‘ 우리는 언제나 말이 두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배웠다. 두 번째 문장은 첫 번째 문장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일관성이 있다. 우리가 양가성을 더욱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제인 라자르, 『분노와 애정』) 무슨 일이 있어도 저녁 일찍 아이 옆에서 잠들어야 하는 중력과 새벽 알람에 총 맞은 것처럼 집을 나서기. 나도 아는 것을 찾으려 자꾸 문장을 뒤진다. "저처럼 우울한 엄마들이 진짜 있나 궁금해서 왔어요."(수미, 『우울한 엄마들의 살롱』) 하지만 읽으면 무엇이 달라지나? 다른 엄마들과는 진짜 통하는지? 비혼인 친구, 아이가 없는 동료들, 그리고 아이가 있는 남자들에게 말하는 게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아주 사적인, 집에서 일어난 이 엄청난 일들을 못 참고 터뜨리듯 말한다. 난 친구와 동료들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는 걸까? 그런데 이런 얘기를 집 밖에 해도 될까? 모든 걸 엎지른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홀로 난망함과 수치심에 빠진다. – P6~7

  















 

김영욱의 글 장자크 루소집 없는 아이’ 루소가 자식들을 다 고아원에 보냈다는 것만 알았는데루소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살짝 알게 되었다.


루소는 18세기식 부랑아다. 우선 그는 계몽주의의 철학자로서 여러 측면에서 집과 가족을 고찰한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인류학, 『사회계약론』의 정치학, 『에밀』의 교육학, 그리고 곧 다시 말할 『신 엘로이즈』의 정념론을 보라. 그는 집 혹은 가족이라는 소우주의 발생, 기능, 한계,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따진다. 그러고서 『고백』에서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까지 자전적 문학을 통해 자신이 평생 편력한 집들을 문학사의주제로 제안할 것이다. 그에게는 집이 없었다. 다시 말해 집이 많았다. 제네바에서 보낸 유년기의 집들, 보호자이자 애인이었던 바랑 부인과 누린 짧은 행복의 거처 샤르메트, 세상의 비난과 공격으로부터 그를 잠시 보호해 주었던 생피에르 섬의 외딴집, 그가 마지막 몽상의 나날을 보낸 영국식 정원의 은신처 등에는 지금도순례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 P41

  














 


박진영의 글 나의 깨끗한 집 만들기’. 목요일에 한편 줌 강의에서 맹미선 편집자와 함께한 박진영의 강의를 흥미롭게 들었다. ‘가습기살균제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겪고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한국에서 화학제품의 위험을 감당하는 것은, 깨끗함, 편리함과 안전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은 소비자의 몫이란 말인가. 박진영의 탐구 시리즈 책도 읽어봐야겠다.


과학기술과 그로 인한 사회문제와 갈등피해를 연구하는 나는 DDT, 글리포세이트, PHMGCMIT/MIT와 같은 화학물질이 공장과 집 안팎에서 일으킨 피해를 수없이 보고 듣고 읽어왔다하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그런 일들은 다 모르겠고 다만 집의 더러움을 간편하고 빠르게 없애고 싶었다편의점에서마트에서인터넷 장보기에서 익히 들어온 상표의 제품은 과연 편리하고 효과가 좋았다생활화학제품이눈앞의 더러움을 없애는 동안 내가 할 일은 마스크를 끼고 환기를 잘 시키는 것 정도였다. - P78

















 

육주원의 글 이슬람 사원 짓기’. 백인이 아닌 외국인에게 배타적인 한국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대구에서 벌어진 이슬람 사원 건립 관련 갈등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멸하는 지방대를 살리기 위한 정책으로 외국인 학생을 유치하면서 외국인 학생이 자신들의 문화을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지원하지 못하고 방해하고 혐오하는 학교, 주민, 행정기관, 국가.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가.


대구 이슬람 사원 건립을 둘러싼 갈등에서 눈여겨봐야하는 것은 단지 반대 주민들의 엽기적인 혐오만이 아니다글로벌 경쟁력 제고라는 목표하에 학생들을 유치한 후 방치하는 국립대일부 주민들의 탄원서 한 장으로 무기한 공사를 중지시켜 갈등을 키운 북구청행정 소관의 문제를 운운하며 수수방관하는 대구시 등총체적인 국가의 ‘부작위가 배제적인 혐오의 집 만들기를 용인하고 있다그간 북구청경찰 등은 반대 주민들의 인종주의적 텃세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해 왔다국가 기관이 극단적인 혐오에 눈 감고 그것을 혐오가아니라 국민들이 당하는 역차별이라고 말하는 순간 반대 주민들의 인종화된 소속감의 정치가 힘을 얻었다. - P105


이슬람 사원 갈등을 취재해 단편 영화를 만들었던 경북대 학생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사원에 대해듣고 싶어 왔다는 그에게 어쩌다 관심을 갖게 됐냐고묻자 해 준 이야기다경북대 편입생인 그는 어느 날 자취하는 골목에 걸린 혐오표현 현수막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처음에는 어떻게 저런 게 버젓이 걸려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그런데 하루이틀며칠이 지나자 그 현수막 앞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다니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자 카메라를 들었다혐오가 나쁜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문제는 익숙해진다는 것이다내 일이 아닐 때는 쉽게 참아 넘길 수있다는 것이다그러는 동안 배타적이고 위계적인 집만들기텃세 부리기도 어느 순간 어쩔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혐오가 집이 되어 버리기 전에 상호 공존과이해의 집을 만들어 가는우리 안 국경을 허무는 실천이 절실하다. – P108~109


 

오은정의 후쿠시마 사태에 대한 글 후쿠시마의 주민들’, 이재임의 동자동 쪽방촌에 대한 글 쪽방의 장례식’, 김호성의 생애 마지막 돌봄과 장소에 대한 글 마지막 둥지를 찾아서등등.


이번 편은 편집자의 말부터 한편 한편이 다 흥미있는 주제여서,, 그만 줄여야겠다(??).

읽고 싶은 책들은… 역시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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