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우리는 모두 쓰는 사람이니까
"다른 사람의 글을 잘 볼 수 있을 때 내 글도 잘 보인다는 말을 믿읍시다. 사실 합평은 다른 사람한테 하는 말이면서 곧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는 걸 모두 잘 알고 있잖아요. 우리 모두 쓰는 사람이니까요. 그러니 아픈 말이 나오더라도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다음 글 쓸 때 반영하는 걸로 합시다. 제가 글방에 오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 P7

글쓰기는 매주 향상되지 않는다. 지지부진 지리멸렬의답보 상태가 몇 달 혹은 해를 넘기기도 한다. 매주 이토록 충실히 써 오는데 매주 이토록 쓰라린 이야기만 해야 하다니, 쓰는 이에게도 읽는 이에게도 고역이다. 어이하나 그렇다고 재미없는 글을 재미있다고 할 수는 없는 법. 글방의 유일한규칙이라면 글에 관한 한 정직할 것, 그러니 읽은 느낌 그대로 말을 하는 수밖에. 진척 없는 시간이 흐르고 흐르다 어느날 ‘점핑‘의 순간이 온다. 지난주까지와는 질적으로 완전히달라진 글이 그야말로 짜잔 하고 나타난다. 재밌는 건 글쓴이는 그 사실을 모른다는 거다. 지난주도 지지난 주도 지지지난 주도 본인은 최선을 다해 썼기 때문에, 한번 점핑한 글 - P13

은 예전의 글로 돌아가지 않는다. 점핑한 그곳에서 주옥같은 글 몇 편을 쓰고 다시 지지부진 지리멸렬의 시간을 보낸다. 다시 점핑, 하는 순간이 올 때까지. - P14

어디까지 쓸 것인가? 알고 보면 글쓰기는 용기와 관련된 행위다. 눈부신 한 편의 글 안에 전투의 상흔이 이곳저곳깊게 배어 있는 까닭이다. 견고한 질서 완고한 관습 치밀한통제를 부수고 깨뜨리고 균열을 내는 것, 글쓰기란 그런 것이므로 우리는 종종 뚝뚝 떨어지는 서로의 피를 지혈하고 깊게 베인 상처를 싸매주고 뜯겨나간 옷자락을 수선해주었다. 그 과정에서 종종 기억과 기록은 동일하지 않으며 문자 안에다 담기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했다. 말로도 글로도 복구되어지지 않는 상처, 라는 것이 있다는 것도 인지하게 되었다. 쓰는 일이란 그러므로 공적인 기억의바깥을 떠도는 배제된 혹은 은폐된 이야기를 발견하는 일일수도, 문자세계의 바깥에 존재하는 거대한 이야기의 무덤에서 부장품을 발굴하는 일일 수도, 표현되어지지 않는 것의표정을 더듬는 일일 수도 있다고 우리는 생각하게 되었다. 끝내 남는 것은 부드럽고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 이라는 게 다만 놀라울 뿐. - P15

1부. 글방이 활활발발해지는 순간
내가 쓰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글이린 이야기가 나를 이용해 생을 획득하고 이어가고 확장해가는 과정이 아닐까. 작가의 몸이란 어쩌면 이야기를 전하는 경로가 아닐까. 그 길에 꽃 피고 새 울고은성한 그늘 드리우라고 모질고 냉정하게 담금질하는 거 아닐까. 작가의 재능이란 그러므로 행운이면서 동시에 고난일 수밖에.
글방에 오는 이들에게 나는 종종 우아한 독자로 남으라고 농담 아닌 농담을 한다. 하지만 우아한 독자로 남고 싶은사람은 결코 글방에 오지 않는다. 재능의 발견이 곧 고초로 이어지는 운명에 이끌린, 자기 의지를 뛰어넘는 ‘이야기의 선택‘을 받은, 해사하고 맑은 눈망울들이 글방 문을 조심스럽게 연다. 아직 세상에 없는 이야기가 눈을 빛내며 기지개를 켠다. - P37

글이 주는 위안이란 서로 다른 여러 세계가 교차하고 충돌하고 비껴가고 엇갈리며 만들어내는 우주에 자신이 속해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누추하고 남루할 줄 알았던 내 존재가 맙소사, 다른 수많은 별들과 함께 반짝반짝 빛나고 있구나, 목격할 때다. 내 후회가 누군가의 희망이 되고 내 절망이 누군가의 징검다리가 되고 내 뜨거운 눈물에 춥고 쓸쓸한누군가가 밥을 말아 먹는다는 걸 아는 것, 글이 주는 위안일 것이다. - P46

글을 쓰는 일은 재능보다, 성실함보다, ‘용기’에서 비롯된다고 나는 종종 글방러들에게 말하곤 했다. ‘어디까지 쓸것인가‘는 ‘내 마음의 우물을 어디까지 들여다볼 것인가‘라는 말로 바꿔 쓸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차곡차곡 입력된 관습과 지식과 정치와 경제와 윤리의 체계를의심하고 살짝 깨물어 부수어보기도 하고 와장창창 깨트려버리기도 하고 심지어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가 작가라고, 나는 스스로 두려워하면서, 말하곤 했다. 16세기에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목숨을 내어놓는 일이었다. 21세기, 지금 목숨을 내어놓고 말해야 하는 건 무엇인가? 혹은 어떤 이야기를 했을 때 주류의 시스템이 이를부인하고 두려워하고 때로 작가를 위협하는가? 이야기의 핵심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위반의 대가를 치를 용기, 그것을함께 기르자고 글방 같은 걸 계속하는 거라고 예나 지금이나 나는 생각한다. - P52

"토지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서희가 두 아들에게 아버지의 성이 아니라 자신의 성을 물려주는 거야. 최서희의아들 최환국, 최윤국. 요즘으로 치자면 래디컬페미니스트인 셈이지. 급진적이기 이를 데 없지만 사실 토지를 이야기할 때 이 부분을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 박경리 작가를 여성주의 작가라고 말하는 평론가들도 거의 없지. 사실『토지』에는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등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거같아. 6백 명의 등장인물 중에 절반은 여성이니 그 캐릭터의 다양성과 혼종이 얼마나 잘 드러나겠어. 여성의 연대와 우정도 곳곳에서 일어나, 서희의 할머니인 윤씨 부인과 간난할멈의 경우는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사이지. 윤씨 부인이 동학도김개주의 아이를 임신했을 때 비밀리에 아이를 낳는 것을 돕고 끝까지 그 비밀을 지키는 사람이 간난할멈이거든."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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