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호의 철학적 관점의 글. 어렵지만 흥미롭다.

전현우 - 독점으로 향하는 급행열차

무엇이 그 문제인가? 독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플랫폼의 논리는 독점을 지향한다. 이른바 빅테크의 강고한 지위를 떠올려 보라. 카카오톡의 올가미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독점의 문제는 플랫폼 논의에서 그리 주목되지 않았다. 나는 양면시장(two-sided market) 개념이 플랫폼 논의에서 간과되었기 때문에 이런 빈틈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 P61

이 철도망에서 사회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네트워크 효과에 의존하고, 이 효과는 망이 클수록 커진다. 노선이 많을수록 열차로 갈 수 있는 곳도 늘어나니까. 그런데 이들 노선을 환승하기 쉽게 만들려면 모든 노선을 하나의 사업자가 운영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이처럼 사업자가 하나일 때 효율이 극대화되는 상황을 자연독점(natural monopoly)이라고 한다. 망을 하나의 사업자로 통합하면 이용자로서는 두 사업자의 망을 환승할 때 생기는 거래 비용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고, 공급자로서는 중복 투자를 방지하여 효율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망 산업은 설비규모가 큰 만큼 규모의 경제도 성립한다. 철도는 이모든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산업이다. - P70

김민호 - 플랫폼들의 갈라지는 시공간

쇼츠나 릴스의 가쁜 호흡에 익숙해진 사람은 롱테이크가 많은 영화를 느긋하게 감상하는 데 곤란함을 겪고, 세 줄 요약에 익숙해진 사람은 장문을 읽어 내지 못한다. 이런 정황은 흔히 지구력의 결핍이나 긴 호흡을견뎌 내지 못하는 개개인의 초조함으로 진단되곤 하지만, 길고 짧음에 입각한 이런 진단은 사태의 복잡성, 더 정확히는 복수성을 개인의 역량 부족으로 치환한다. - P80

관건은 단순한 장단이 아니라 상이한 호흡들의 공존이다. 무언가가 그저 길기 때문에만 힘든 것이 아니다. 일본만화에 젖은 사람이 DC코믹스에 진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면, 프랑스 철학에 익숙한독자가 독일이나 영미 철학 텍스트에 진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면, 이는 그것들이 서로전혀 다른 리듬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어느 한 플랫폼의 특정한 콘텐츠가 아니라 잠재적으로 언제나 쇄도하는 플랫폼‘들‘이 우리를 독촉하며, 우리의 시간은 그것들 사이에서 분열되고 있다. 리듬들 사이를 항해하기 위해서는 언제든 스스로의 시간성을 바꿀 채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실로 피곤한 것은 긴호흡 자체라기보다는 이 채비에 기울이는 상시적 노력이다. 역으로 이제 필수적인 문해력(‘디지털 리터러시‘)이란 긴 텍스트를 읽어 내는 능력 같은 것이 아니라 파편적이거나 체계적인 이 다종의 리듬과 호흡들에, 서로 다른 ‘시간들‘에 적절하게 자신을 동기화시킬 수 있는 능력일 것이다. - P81

비선형적 읽기가 일상적으로 실현됐다. 총괄적 체계 속으로 회집되지 않는 파편들이 한꺼번에 제공되는 그물망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선형적으로 쓰지 않고 선형적으로 읽지 않는다. 우리는 더 이상 텍스트에 체계적 일관성을 기대하지 않는다. 분석은 단편적 감상들로 대체되고 종합은 감상들의 병렬로 갈음되며 단문은 단순한 미감이나 취향을 넘어서 시대의 미덕이 된다. 이것은 우리 개개인의 무능력이 아니라 세계라는 관념 자체의 갱신과 결부되어 있다. 세계는 조물주라는 저자가쓴 체계적이고 일관된 책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산만한 글의 파편들로 표상된다. - P83

원근의 삭제는 플랫폼의 이상이다. 원근이란 순정하고 객관적인 3차원 공간으로 환원되지 않는 관점적체험의 심도로, 나와의 상호작용 가능성의 질서를 표상한다. 나는 멀리 있는 막대한 태양을 내 눈앞의 조그만 나무보다 더 큰 것으로 체험할 수 없다. 이것은 내가 2미터 앞의 나무와는 금방 충돌할 수 있지만, 1495억 9787만 700미터 떨어져 있는 태양과는 쉽게 그럴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각종 플랫폼들은 태양을 손바닥 위에 가져다주는 걸 목표로 삼는다. ‘마켓컬리’ 광고가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집의 식탁이 곧 이탈리안 레스토랑이고 초밥집이며 프렌치 다이닝이다. 그런가 하면 ‘버블‘이 제공하는 것은 직접적인 친근함의 가상이다. - P84

김유민 - 알고리즘을 대하는 자세

이 글은 루치아노 플로리디의 정보철학에 기대어 인간과 인공지능이 공존하는 세계상을 그려 보고, 그의철학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의규범적 관계를 탐구한다. 나는 인간이 인공지능 기술을사용할 때 이루어지는 의사 결정의 양도가 가치 판단의 양도를 함축할 가능성이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P96

루치아노 플로리디는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인간과 세계를 정보의 관점에서 재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플로리디는 현대 정보통신의 발달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력의크기를 문명사적 전환의 수준으로, 즉 ‘정보 전환‘으로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지성사에는 급진적 전환이 세 번 있었다. 첫째,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둘째, 인간이 모든 생명체의 중심이 아니라는 다윈적 전환, 셋째, 인간의 이성이 투명하고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프로이트적 전환. 그리고 그는 네 번째 전환은 인간이 자신을 정보 존재자(informational entity)라고 인식하는 정보 전환이라고 명명한다. 정보 전환과 정보 존재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전제하고 있는 인식론적 방법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 P97

정보 세계의 번영을 윤리적 좋음으로 설명하는 것은 인공지능을 선두로 하는 정보통신기술의 번영이 인간 삶의 번영을 조력할 것이라는 입장의 철학적 근거가된다. "글쓰기를 제일 잘하는 저자는 챗지피티도 인간도 아닌 챗지피티를 통찰력 있게 사용하는 인간"이라는 플로리디의 주장은 그의 정보윤리학이 지향하는 규범 질서는 정보통신 기술의 활용을 바탕으로 정보 세계 자체를 번영시키는 것이라는 해석을 뒷받침한다. - P101

기존의 기술이 인간의 신체 편의성을 향상시키는데 주력했다면 인공지능은 인간의 정신 편의성을 향상시키는 데 중점을 둔다. 의사 결정하기, 알기, 기억하기 처럼 지능과 관련된 일을 나 대신 하게 한다. 이러한 지능 활동의 외주화는 인간이 입력하고 기계가 출력하는 일방향 관계가 아닌, 기계 또한 입력하고 인간에게 특정 출력을 기대하는 양방향 관계를 맺게 한다. 인공지능이 구현된 시스템은 사용자가 기술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결정하고 통제한다. - P105

또는 나의 취향을 잘 분석하여 나에게맞춤화된 결과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모든 알고리즘은 필연적으로 가치 편향되어 있고, 알고리즘 뒤에서 작동하는 의도는 ‘나‘의 복지와는 무관하다. 지속적으로 특정 가치 판단이 전제된 의사 결정에 의존하는 것은 나의 정신 활동에 대한 통제와 자유를 의도치 않게 자발적으로 헌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플랫폼에서 어떤 게시물을 보고 무엇을 살지 선택할 때 누군가의 가치 판단에 끊임없이 영향받고 있음을 지각하는 것은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되 독립적인 정신 활동을 영위할 균형의 시작점일 것이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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