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억압은 계급/민족 모순으로 환원되지 않는 남성 지배의 문제, 여성과 남성 간 권력 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 P152
사회운동 진영에서 여성활동가가 동료 남성 활동가에게 성폭력/차별/무시당하는 것은, 기존의 진보 개념으로 치자면 사소한 문제이고 전체(남성)를 위해 덮어두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여성이 겪는 차별과 억압도 정치적인 문제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이 문제는 당연히 심각한 모순이다. 마르크시스트 파시스트 집에서설거지 안 하기는 마찬가지인 것처럼, 진보 진영 내부에도 남성 중심 논리가 관통한다. 성폭력도 발생할 수 있다. 나는 ‘운동권‘ 남성이 ‘일반‘ 남성보다 성폭력을 많이 저지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더 깊은 은폐 논리와 조직 보위를 강조하는 측면에서는 운동사회에서 성폭력이 빈발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 P153
"남편이 아내를 때리다가 죽이는 것은 ‘과실치사‘지만, 아내가 정당방위로 남편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때리는 남편이 가정파괴범이 아니라, 폭력에서 탈출하는 피해 여성이나 이들을 돕는 여성운동가가 가정파괴범이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가정폭력이 범죄가 아니라 일상이며, 일탈적 사건이 아니라 규범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가 발명한 제도 중에서 가장 폭력적인 것은 전쟁이고 그 다음이 가족이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시대와 지역, 종교, 인종, 계급, 교육 수준, 일부일처제와 일부다처제를막론하고 인류가 공통적으로 경험한 유일한 역사가 있다면 그것은가정폭력일 것이다. - P154
비바람은 집안에 들어가도 법은 들어갈 수 없다는 논리가 이제까지 가정폭력을 방치 · 지지하는 논리였다. 물론 이 논리는 거짓이다. 같은 가정 내 폭력인 아동학대나 노인학대 문제에 대해서는 이러한 불개입 논리를 적용하지 않는다. 또한 호주제, 상속세, 가족계획의 예처럼 국가가 가족/사생활에 침투하는 논리는 남성 국가의 이해에 따라 선택적이다. - P156
원래 피해의식은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정치의식으로서 여성의 피해의식은 근대 이후 여성주의 의식의 발전과 더불어 등장한 아주 최근의 현상이지만, 남성의 ‘피해의식‘은 수천 년 전 가부장제와 함께 시작되었다. 여성의 피해의식이 피해자로서 지니는 사회구조적 의식이라면, 남성의 ‘피해의식‘은 가해자의 정신분열, 프로이트식으로 말한다면 죄의 투사이다. 백인의 피해의식, 자본가의 피해의식, 미국의 피해의식을 보라. 피해의 의미와 내용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권력 관계의 유동에 따라 구성된다. 지금 여성들은 수천 년 동안 ‘여자라서‘ 당연히 해왔던 노동을 거부하고, 너무도 오랫동안 당해 왔던 여성에 대한 폭력에 저항하고 있다. 폭력을 당하는 것. 폭력에 순종하는 것. 맞으면서, 강간당하면서 가해자의 앞날을 걱정하고 보살피는 것. 이 모든 것은 일종의 여성의 성역할이었다. 동성애자 인권 담론의 가시화에 따른 이성애자들의 당황과 혼란처럼, ‘권리를 침해당한‘ 남성들의 ‘피해식‘은 당연한 것이다. - P163
‘주체와 피해자의 이분법, 그리고 이러한 이분법의 성별화는, 남성 주체의 이해(利害)와 환상 속에서 구성된 ‘침묵하는 피해 여성‘이라는 관념을 낳았다. 이분법에서 각각의 범주는 겹칠 수 없는,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설정된다. 주체 아니면 피해자다. 그래서 여성이 행위자, 주체이면서 동시에 피해를 당한다는 주장을 하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피해는 곧 피해자화로 연결된다. 피해는 타자화를동반하지 않지만, 피해자는 타자화를 전제한다. 피해 여성은 남성 주체의 욕망에 의해 규정된다. 남성의 입장에서 강간당한 여성은 더럽혀진 여자이거나 ‘기껏해야‘ 무기력한 희생자지, 성별 계급투쟁의 생존자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남성의 시각이 곧 사회의시각이 된다. 특히, 성폭력 피해 여성에 대한 피해자는 가부장제사회의 가장 진부한, 가장 오래된 타자화 방식이었다. - P164
성폭력 사건의 80퍼센트는 아는 사람에 의한 것인데, 이는 성폭력이 남녀 간의 ‘정상적인 성·사랑과 질적으로 다른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성폭력-성매매‘-아름다운 성과 사랑‘ (이성애)은 모두 불평등한 성역할 제도(gender system)의 연속선상에 존재하기 때문에, 어린이 성폭력이나 윤간 등 남성의 기준에서 볼 때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피해를 제외한 대부분의 성폭력은 가시화되기 어렵다. - P173
여성에 대한 차별을 줄여성차별이라고 하듯이, 성폭력(gender violence, violence against women)은 강간뿐만 아니라 여성에 대한 폭력 전반을 가리킨다. 1993년 유엔이 채택한 ‘여성폭력철폐선(Declaration on the Elimination of Violence against Women)‘ 1조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사적, 공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여성에대한 신체적, 성적, 심리적 해악과 여성에게 고통을 주거나 위협하는 강제와 자유의 일방적 박탈 등 성별 제도에 기초한 모든 폭력행위‘로 정의하고 있다. 1995년 제4차 베이징세계여성대회에서는 여성폭력에 대한 행동 강령을 채택하였다. - P183
한 사회에서 인권 개념이 확장되는 원인, 과정, 영역은 동일하지 않다. 인권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 자체가 사회 구성원의 이해가 동질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성별·인종 계급 등의 차별로 인해 각 개인의 삶의 조건이 다르므로, 개별적인 인간의 권리는 상충되고 갈등한다. - P191
사랑이든 성폭력이든 성매매든, 성과 사랑에 관한 인간의 실천은 특정한 제도와 규범에 의해 형성된 것이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다. 성매매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선택하지 않으면 사라질 수도 있는 사회적 관행의 하나일 뿐이다. - P193
같음의 기준이 남성의 경험에 근거한 것일 때, 여성은 남성과 같음을 주장해도 차별받고 다름을 주장해도 차별받는다. 이것이 소위 ‘차이와 평등의 딜레마‘이다. 예를 들어, 여성이 남성과의 차이를 주장하면 남성 사회는 그것을 차별의 근거로 삼고, 같음을 주장하면 사회적 조건의 다름은 무시한 채 남성의 기준을 따르라고 요구한다. ‘양성 평등’을 "여자도 군대 가라." "여자도 숙직해라."로 이해하는 것이다. - P198
한국 사회에서 노인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은, 나이 듦은 생물학적 문제라는 전제 아래 사회운동이나 정치적 차원의 문제가아니라 소외 계층에 대한 잔여적 복지정책의 시혜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노인 문제를 포함한 연령주의에 대해, 편견과 차별이라는 언어는 빈곤해 보인다. 나는 연령주의를 우리 모두의 삶을 근본적으로 규율하고 있는 심각한 혹은 ‘결정적‘인 사회적 모순이라고 생각한다. 또 여성의 나이 듦은 연령주의와 성차별의 결합이라기보다는, 여성에게 연령주의는 성별주의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 억압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것은 여성 노인, 중년 여성의문제가 연령주의로 인한 것이 아니라 성차별로 인한 것이라고 보는 ‘주요 모순론‘ 주장이 아니다. - P202
여성 노인문제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나이 듦의 의미를 살펴보는 과정의 결과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 P203
나이에 맞는 삶에 대한 문화적 규율이 워낙 막강하기 때문에 인생을 다르게 살자유, 방황할 자유가 없고 그것은 쉽게 낙오로 연결된다. 취업시 나이 제한이 당연한 규정으로 간주되는 사회에서 남과 다르게 사는 것은 곧 생존권을 위협하는 문제가 된다. (미국에서는 1967년부터 연령차별금지법에 따라 구인 광고나 이력서에 나이를 명시하는 것은 불법행위로 본다.) - P205
나이 듦에 대한 고민 과정을 돌이켜보면서 나는 남성들이 여성문제에 무지하거나 무관심한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 역시 20대에는 나이 문제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자기 경험을 뛰어넘어 타인, 더구나 타자의 억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특정 연령대의 ‘생산성 높은‘ 사람들이 주도하는 사회는 매우 위험하다. 그들이 노인이나 장애인, 어린이, 여성들의 경험을 이해하거나 대변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 P217
투명한 이야기도, 끝난 이야기도 없다. 모든 이야기는 말하는 이의 ‘그 순간‘의 자기 현실에 대한 사회적 해석, 체현(embodiment)의 가시물이며 정치적으로 협상하는 언어들이다. - P223
‘선택‘과 ‘강제‘의 이분법은, 특히 처벌주의 아래서는, 성판매 여성을 피해자와 범죄자로 구분하고, 여성은 범죄자가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피해를 증명해야 한다. 그리하여 피해 주장이 곧 피해자화의 과정이 된다. 남성 사회가 원하는 것은 피해받은 여성이 아니라 여성의 피해자화이다. 남성 사회가 그토록 선택과 강제를 구분하는 것은, 여성의 피해자화를 통해 남성 주체를 유지하기 위함이고(‘강제‘), 여성이 동의했다는 논리를 통해 남성 주체를 여성에게 확장, 투사하기 위해서이다(‘선택‘). 이는 성폭력 문제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그들이 성매매와 성폭력을 통해 근본적으로 원하는 것은 ‘남자 되기‘이다. - P229
가부장제에서 이성애-성폭력-성매매는 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소위‘성폭력 연속선‘ 개념은, 실제로는 성판매 여성이 아니라 중산층 여성의 섹슈얼리티 억압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성폭력 연속선 개념은 섹슈얼리티, 인종, 계급 모순을젠더 문제로 환원한다. 동의와 강제를 구분하지 않는 지나친 구조 결정적 사유는, 동의와강제를 뚜렷이 구분하는 자유주의만큼이나 현실 설명력이 없다. 여성주의는 젠더에 집중하는 근대적 사유와 여성과 여성의 차이, 즉 젠더가 다른 사회적 모순과 맺는 관계에 주목하는 탈근대적 사유를 넘나들 수밖에 없다. 때문에 여성주의 정치에서 자유주의는 계륵이지만, 동시에 자유주의는 언제나 급진적이고 언제나 절실하다. 성폭력이나 성매매는 성별 권력 관계라는 구조의 문제이기 때문에, "의사에 반한"이라는 법률 문구는 문제지만, 여전히 의사는 중요하다. - P230
여성주의 사유 방법의 출발은 "그들이 말하게 하라." 였다. 우에노 지즈코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문서화된 역사가 거의 없는상태에서 여성의 역사가 출발하다 보니, 그동안 역사는 남성에 ‘의해‘ 여성에 ‘대해’ 쓰인 문서나 재현에 의존했다. 그러나 이제까지 남성들이 쓴 것은 여성에 대한 ‘사실‘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여성에 대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환상을 갖고 있는가와 관련된 남성들의 관념을 웅변하고 있다. - P234
원리는 같다. ‘공적‘인 곳이라고 간주되는 영역에서 남성은 국가나 자본의 형태로 여성의 노동을 착취하며, ‘사적‘인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가족, 이성애 관계, 성매매에서는 관계성을 혐오하고 부정함으로써 여성의 감정노동에 무임승차한다. 성매매 ‘근절‘이 ‘불가능‘하지만, 여성주의 정치의 최후, 절대 프로젝트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남성의 의식과 무의식, 그들의 24시간을 혁명하지 않고는 사라지지 않을 남성 젠더 문제다. - P239
그러나 현재 가장 많이 통용되고 있는 ‘성매매 여성‘이라는 용어도 문제적이다. 여성은 성을 매매(買)하지 않는다. ‘팔기만 한다‘. 여성이 남성의 성을 사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남성이 여성의 성을 구매해 온 역사와 규모에 비할 수는 없다. ‘성매매 여성‘이라는 말은, 가정폭력, 배우자폭력, 부부폭력이란 용어가 아내폭력의 성별 권력 관계를 은폐하는 중립적 용어이듯이, 성매매의 명백한 남성 권력을 보이지 않게 한다. - P246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성매매를 반대하는 것은 성 보수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성매매는 성 보수주의나 윤리의 문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성매매는 기본적으로 성별 권력 관계의 문제이다. 성매매와 포르노그래피는 남성이 여성의 몸을 사용하는 것을 정상화, 정당화하는 남성 중심 시스템의 핵심이다. 성매매는 성폭력과 다르지 않다. - P249
이처럼 상상이든 실제든, 여성을 매개하지 않는 군사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글은 한국 사회에서 군사주의와 성별 제도가 교직, 상호 생산되는 양상을 성 인지적 관점에서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여성주의 언어를 제외하면, 일상의 차원이든 학문의 영역이 - P264
든 기존 담론에서는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젠더(성별)는 군사주의를 작동시키는 가장 강력한 사회적 기제이다. 군사주의는 남성성, 여성성, 성별이분법 같은 개념과 문화에 의존하는, 그 자체로 성별화된 사회 현상이며, 동시에 성별 구조의 핵심을 이루는 제도이다. - P265
북한에서도 어디에서 군 복무를 했느냐에 따라 남성들 사이의 위계가 달라지며, 전방에서 근무한 남성은 후방에서 근무한 남성을 ‘원수 보듯‘ 한다. 이는 여성성을 타자화하는 노동 계급 남성의 남성성이 계급의식 형성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마르크스주의 문화이론가들의 지적과도 만나는 지점이다. 남성성에 대한 비판과 성찰 없이는 노동운동이나 평화운동이 어렵다는 것이다. 브라질의 민중 교육자 파울루 프레이리 (Paulo Freire)의 말대로, 남을 억압하는 사람은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명제는 단지,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도덕적인 언설이 아니다. 남을 억압하는 행위는 자신 안의 타자를 억압하는 행위에서 비롯된다.) - P271
이처럼 가부장제 성 문화의 특징 중 하나는 남성에게는 폭력과 성(섹슈얼리티)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남성 문화에서 강간은 대개 ‘격렬한 섹스‘쯤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이성애 섹스와 성폭력은 이질적이거나 반대 개념이 아니라 연속선상에서 행해지고 수용된다. 남성의 섹스는 폭력, 분노, 스트레스와 동반 상승한다. 남성의 성적 오르가슴과 폭력은 동일한 생리적 현상을 공유하는데, 한편으로는 욕망을, 한편으로는 공포를 추구한다. - P287
나의 실천 대상 범위는 기껏해야 나 자신이다. 여기서 ‘나‘는 사회와 대립되는, 동떨어진, 독자적인 개인이 아니라, 변화의 시작 지점으로서 ‘나‘이다.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서로에게 굴복당하거나서로를 선택하는 자들의 연속체다. 삶은 언제나 막다른 그러나꺾어진 골목과 마주하는 것이다. 나는 고유한 생물학적인 몸이 아니라, 물이 끓듯 매순간 의미를 생성하고 휘발하는 투쟁의 장소이며 외부와 구별될 수 없는 존재(social body)이다. 사회가 내게 ‘각 - P312
인‘하는 것, 이에 대한 나의 수용, 저항, 협상, 반응 사이에 내가 존재한다. 바다 위에서 세상을 보면 인간은 서로 상관없이 각자의 섬에 살지만, 바다 밑에서 보면 섬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몸은 세상과 타인에게 열려 있다. 생물이 사회에 적응해 왔다면, 이미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몸은 개별적이지 않다. - P313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주장으로 유명한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의 걸작 《미디어의 이해>의 부제는 ‘인간의 확장‘인데, 오늘날 인터넷, 휴대전화가 우리 몸의 일부이듯, 몸이 인식의 미디어(매개체)라는 이야기다. 삶은 인식 주체가 인식 대상에게로 자기 몸을 확장하는 과정이다. 인식과 발상의 전환을 경험하게 되면, 다시는 알기 이전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안다는 것은 자신의 확장된 몸에 사로잡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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