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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의 대명사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585
오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5월
평점 :
아침달에서 나온 <나는
이름이 있었다>에 이어 두번째로 읽는 오은 시인의 시집. ‘주황’에서 ‘주황’으로. ‘있었다’에 이어 ‘없음’에 대해. ‘이름’에 이어
이름 없는 ‘대명사’에 대해.
이 시집에는 총 58편의
시가 실려 있고, 제목은 다음과 같다.
그곳 3편
그것들 6편
그것 16편
이것 1편
그들 9편
그 9편
우리 9편
너 4편
나 1편
시집 제목처럼 대명사로만 작성된 시 제목.
첫 번째 시와 마지막 시가 가장 좋았다. 특히, 마지막 시. 그런 날이 있다. 혼자 있고 싶어 화장실에 가서 나오고 싶지 않은 날. 내 앞에서도 웃을 수 없는 날.
그곳
"아빠, 나 왔어!" 봉안당에 들어설 때면 최대한 명랑하게 인사한다. 그날 밤 꿈에 아빠가 나왔다. "은아, 오늘은 아빠가 왔다." 최대한이 터질 때 비어져 나오는 것이 있었다. 가마득한 그날을 향해 전속력으로 범람하는 명랑. - P9
나
혼자 있고 싶을 때는
화장실에 갔다
혼자는
혼자라서 외로운 것이었다가
사람들 앞에서는
왠지 부끄러운 것이었다가
혼자여도 괜찮은 것이
마침내
혼자여서 편한 것이 되었다
화장실 거울은 잘 닦여 있었다
손때가 묻는 것도 아닌데
쳐다보기가 쉽지 않았다
거울을 보고 활짝 웃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입꼬리가 잘 올라가지 않았다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볼꼴이 사나운 것처럼
웃음이 터져 나왔다
차마 웃지 못할 이야기처럼
웃다가 그만 우스꽝스러워지는 표정처럼
웃기는 세상의
제일가는 코미디언처럼
혼자인데
화장실인데
내 앞에서도
노력하지 않으면 웃을 수 없었다 - P135
솔직히, 아직, 오은 시인의 시보다 인간 오은이 더 좋은 상태다(물론 이 정도 거리에서).
언젠간 오은 시인의 언어 유희를 맘껏 즐기는 날이 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