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다닐 때까지는 가까워진 아이들끼리 주로 불행 배틀을 했던 것 같은데. 누가 더 불행한가를 겨루려는 게 아니어도 조금만 가까워지면, 조금만 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라치면 우리는 모두 가족 카드를 꺼냈다. 가능하면 불행한 쪽으로, 과잉되었던 면도 취해 있던 면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 집이 IMF 때 망해서, 이런 - P231

인트로는 흔했다. 아빠 씨발놈이 술만 처마시면 패서, 하고 시작하는 이야기도 간혹 있었다. 사실 우리 엄마 아빠 별거중이거든, 하고 조심스럽게 내미는 카드도 있었다. 밝고 단순하고 귀엽던 수영도 우리 부모님 이혼했거든, 난 엄마랑 살고, 하는 얘기를 할 때면 항상 조금씩 긴장하는 얼굴이 되곤 했다. 그때의 나는, 우리는그게 중요했다. 자신이 지닌 불행들, 억울하고 슬프고 답답한 일들이 이제 그런 이야기는 거의 듣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그런 곳에 있다. - P232

선배 저는요…… 사실 사람들이 좋아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리고 그 사람들이 저를 좋아한다는 게 좋아요. 이런 걸 좋아한다는 사실이 너무 촌스럽고 의존적이고 속이 빈 것 같다는 걸알면서도 그래서 그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가끔 이렇게 털어놓고 싶어져요. 저는 누군가를 좋아하고 누군가가 저를좋아하는 일이, 몹시 중요해요. 한없이 그쪽으로 몰두하면 좋지않을 걸 알아서 계속 경계하고 그 외의 것들로 균형을 잡으려고노력해도………… 제가 하는 그 모든 일의 밑바닥에는 끈질기게 그생각이 들러붙어 있어요. 본령처럼요. - P240

그렇게 말하며 현정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자세가 불편했지만 꾹 참았다. 이렇게 삼삼오오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이들중 어디선가 또, 비슷하게, 이런 식으로 숨겼던 마음들을 서로서로 이야기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표면과 내면이 같고 싶은데, 그건 정말 잘 안 되는 거구나. 취한 듯 물기어린 현정의 말에 나도 그래, 라고 말하지 못했다. 네가 좋아, 라고도. - P242

저 레즈비언이에요.
어?
뭘 그렇게 놀라요?
아니 나는.....…
현정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샤넬 든 레즈비언은 처음 봐서.
망했다. 망했다고 생각했다. 그 말 한마디로 현정이 나에게 지니고 있던 손톱만큼의 호감, 어쩌면 동료의식, 어쩌면 호기심,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 따위는 한 줌 재가 되었겠지…..

- 쉬운 마음 - P245

모르는 사람에게 새가 예뻐요! 하고 말을 건 것이다. 남자는 기쁜 웃음으로 답했다.
감사해요! 많이들 잘 못 보시던데…
못 본다고요? 그렇게 잘 보이게 얹고 다니면서? 뭐 독특한 모자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긴 하겠네요…… 그런 웅얼거림은 속으로 삼켰다. 속마음을 모두 소리내어 얘기하는 무례한 사람이고 수지 않았다. 남자는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남자가 어깨를 들썩이면 남자의 머리에 앉은 새도덩달아 조금 푸드덕 했지만 남자의 머리에 박아넣은 발이 절대로떨어지지 않았다. 남자는 묘기를 부리며 읊는 대사처럼 나에게 말을 건넸다.
자기만의 동물을 가진 사람들은 많잖아요.
나는 그 말에 또 한번, 나답지 않게 질문을 해버렸다.
자기만 보이는 동물을 가진 사람들은요?
있겠죠. 소수여도, 모두 같은 걸 보는 건 아니니까요. - P256

나는 사자의 큰 앞발과 큰 혀를 보고 웃었다. 그루밍이지. 몸을씻는 거지. 다 안다. 사자는 흐흥 하고 나를 따라 웃고는 너도 해줄까? 말하는 듯한 표정과 몸짓을 지어 보였다. 카펫만한 혀가 가까이 와서 나는 으악 아니아니, 하고 몸을 밀어 뒤로 물러났다. 삐치려는 사자를 달래며 나는 말했다.
내가 할게.
그러고는 손으로 (혀로는 아무래도 무리니까) 그루밍하듯 머리끝부터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머리를, 어깨를 팔을, 가슴을, 두허벅지와 다리를 먼지 털듯 탁탁 치며 쓸어내고 꾹꾹 눌러 쓰다듬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닦아내는 것 같기도 했다. 물 없이 세수하는 모양새로 얼굴도 손으로 만져보았다. 진짜 고양이세수네.
진짜 기분 좋아지네.
한결 낫다. 고맙다.
나의 인사에 사자는 갈기를 한번 부르르 털었다. 아주 풍성하고따뜻한 향이 나는 갈기였다. 나 이제 안 와 나는 어쩐지 사자가그렇게 말할 것을 알고 있었고, 괜찮아, 했다.

- 침묵의 사자 - P287

나주에 대하여』에서 우리가 만난 인물들이 앞서 소개한 연구에 참여했다면 모두 이십 퍼센트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상상할 수 있는 타인의 마음 상태가 다른 사람들보다 많다. 하지만 더 많은 마음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 더 쉽게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이 볼 수 있는 사람은 많은 것들을 보기 때문에 더 넓은 상처에 노출된다. 나주에 대하여』에 수록된 여덟 편의 소설은 타인의 마음을 잘 읽는 사람들이자신 앞에 놓인 마음들을 읽기 위해 끊임없이 마음과 마음 사이를오가며 만든 발길의 흔적들로 빼곡하다. 목적지는 점점 많아지고길은 정해져 있지 않으며 시간은 제한되어 있으니 방황은 필연적이다. 방향에 최단 거리는 없다.

해설, 마음 이론 - P294

못생긴 마음들을 쓸 때 나는 이상하게 행복하다. 그것을 솔직하게 쓸 수 있어서, 회피하지 않을 수 있어서 좋다. 나는 대체로 확신과 용기가 없는 채로 살아가는데, 소설을 쓸 때만은 용기가 생긴다. 이런 마음을 써도 돼. 확신도 생긴다. 이렇게 쓸 거야. 소설은 나에게 그런 것을 준다. 지레 포기했던 것들을 가능하게 한다. 나는 언제나 상황에 따라 변하는 나의 무른 질감이 싫었는데, 소설을 쓸 때의 나는 그보다는 조금 단단해지는 것 같다. 나는 소설이 나에게 가져다준 이 단단함을 사랑한다.

- 작가의 말 -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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