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반대로 보기
에밀리 브론테 지옥의 바이블 <폭풍의 언덕>
앞부분 <폭풍의 언덕>과 <프랑켄슈타인> 유사점 설명
설명은 어렵고, 인물들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서로를 향한 강렬하고 지독한 연결성은 기억난다.

이렇듯 다른 점도 있지만, 『프랑켄슈타인』과 『폭풍의 언덕』은 많은 중요한 점에서 유사하다. 한 가지는 둘 다 수수께끼 같고 당혹스러우며, 어떤 의미에서 총체적으로 문제적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각각의 경우, 소설의 미스터리는 (많은 비평적 논란의 중심이 된) 형이상학적 의도와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하나는 스릴러이고 또 하나는 로맨스인) 두 ‘대중‘소설은 많은독자들에게 소설의 카리스마 넘치는 표면적 이야기가 복잡한 존재론적인 심오함, 정교한 비유의 구조, 모호하지만 강렬한 도덕적 야망을 드러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숨기고 있다는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특히 이 점은 두 작품이 공유하는 좀 더 단순한 특징으로 나타난다. 두 작품 다 우리가 프랑켄슈타인』에서 ‘증거적 서사 기법‘이라고 불렀던 것을 사용하고 있다. 이 기법은 낭만주의적 이야기 구사 방법으로, 똑같은 사건을 보는 서로다른 관점의 아이러니한 괴리뿐만 아니라, 표면적인 드라마와 작가가 감추어놓은 의도 사이에 내재하는 아이러니한 긴장을 강조한다. 사실 이런 기법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폭풍의 언덕』은 『프랑켄슈타인을 의도적으로 모사했다고 볼 수 있다. - P459

『폭풍의 언덕』과 『프랑켄슈타인』은 증거, 특히 문자화된 증거에 공통으로 관심을 보인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두 작품 모두 대부분의 소설보다 훨씬 더 의식적인 문학성을 보여주며, 상징적이면서도 극적인 플롯 조성) 활동으로서 책과 독서에 가끔은 거의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 P460

메리 셸리를 연구할 때도 똑같은 질문을 해야 한다. 울스턴크래프트-고드윈-셸리 집안처럼, 책을 매개로 현실에 접근하는 것, 친족의 책을 읽고 자신의 독서와 자신이 연관되어 있다는 느낌을 품는 것이 브론테 집안의 습관이었다. 따라서 외롭지만 야심에 찬 요크셔의 가정교사 세 명을 커러, 엘리스, 액턴이라는 엄연하게 양성적인 3인조로 변모시킨 것은 공동의 행동이자 가족정체성의 주장이었다. - P461

우리는 브론테 자매들에게 문학 활동과 문학적 증표 둘 다 매우 중요했다는 사실을 통해 그들이 메리 셸리와 공유했던 또다른 문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프랑켄슈타인』의 불안한 창조자처럼 『폭풍의 언덕』, 『제인 에어』, 『와일드펠 홀의 거주자』를 쓴 저자들도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었다. 셸리처럼 에밀리와 앤 브론테도 너무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이 많은 사람들의 증언이나 문서를 통하지 않고서는 어머니에 대해 알 수 없었다. 고아와 무일푼 상태를 강조하는 『프랑켄슈타인이 어머니가 없는 책인 것과 마찬가지로, 에밀리 브론테의 모든 소설도 어머니의 부재, 고아 신세, 결핍에 대한 강렬한 감정을 드러낸다. 특히 『프랑켄슈타인』과 마찬가지로 『폭풍의 언덕』에서도 문학적 고아라는 문제는 작가로 하여금 증거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기원의 문제에도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따라서 가부장적 문화에서 은유적으로 고아라고 할 수 있는모든 여성 작가들이 ‘우리는 어떻게 추락했는가? 잘못된 법칙에 의해서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문학적인 해답을 찾고 있다면, 메리 셸리와 에밀리 브론테 같은 어머니 없는 고아들은 그질문에 대한 사실적인 답변을 대체로 찾은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소설들은 여성 특유의 문학적 강박관념을 강렬하게 재연하고 있기 때문이다. - P462

『폭풍의 언덕』은 사실상 (『프랑켄슈타인이 형이상학적 스릴러인 것처럼) 형이상학적 로맨스이기에 때로는 사람이 아니라 힘이나 존재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 P463

위니프리드 제린에 따르면 밀턴은 패트릭 브론테가 즐겨 읽던 작가 중 하나였다. 따라서 셸리가 밀턴을 비판한 사람의 딸이었다면, 브론테는 밀턴을 찬양하는 이의 딸이었다. 그러니헤겔의 정/반의 법칙에 비추어보았을 때 셸리가 밀턴의 성 혐오적 이야기를 반복하고 재진술하는 길을 선택한 반면, 브론테는 그런 이야기를 수정하는 길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어울린다. 사실상 『폭풍의 언덕』과 『프랑켄슈타인이 공유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실낙원』의 문제이고, 두 작품의 가장 큰 차이는 밀턴의 신화에 대한 작가들의 태도다. 셸리가 밀턴의 충실한 딸로서 그의 이야기를 명료하게 다시 말했다면, 브론테는 반항적인딸로서 밀턴의 신화적인 서사를 과격하게 수정(심지어 번복)한다. - P464

그것은 마치 에밀리가 샬럿에게 ‘너는 낭만적 사랑에서 남자가 지배적인 요소라고 생각하지? 지배적인 것은 여자임을 보여주겠어‘ 하고 말하는 것 같다. 물론 샬럿 자신은 에밀리의 수정적 성향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다. 래치퍼드보다 100년도 더 앞서, 『셜리』의 여자 주인공 (‘에밀리가 더행복하게 살았다면 그런 모습이었을‘ 이상적인 인물)은 밀턴에 대해 영국 소설에서 최초의 의도적인 페미니즘 비평이라 할 수있는 말을 한다. - P470

샬럿은 『폭풍의 언덕』 저자가 (브론테의 찬미자인 에밀리 디킨슨을 인용해 말한다면) ‘천국의 왕국을 찾아서 / 반대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P470

이 문단은 심리극 같은 ‘연극‘이란 삶에 필요한 것임과 동시에 집안일처럼 일상적인 활동임을 제시한다. 다리미질과 대안적 삶의 탐험이란 똑같은 종류의 ‘업무‘다. 그것은 아마 앤 브래드스트리트와 에밀리 디킨슨, 그리고 환상을 쫓는 그 밖의 다른 주부들이 인정했을 법한 독특한 여성적 사고다. - P473

전체성, 존재의 충만함, 양성성 같은 말이 불가피하게 떠오른다. 앞으로 드러나겠지만 이 셋은 다 캐서린에게, 더 정확하게는 캐서린-히스클리프에게 적용된다. - P484

그럼에도 캐서린의 개인적인 천국은 밀턴의 에덴처럼 캐서린이 규정한 ‘지옥‘의 위협으로 둘러싸여 있다. 예를 들면 캐서린이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천국의 수평선에 떠 있던 유일한 구름인 어두운 가부장제의 멍에를 벗어던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조금이라도 가졌다면 그것은 틀린 생각이었다. 역설적이게도 늙은 언쇼의 죽음과 함께 에덴처럼 ‘다소 야만적이고 무모하고 자유로웠던‘ 캐서린의 소녀 시절도 끝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한때 양성적이었던 아이가 처음으로 ‘홀로 놓이게될’ 분열된 세계를 열어놓는다. 하지만 장자 상속이라는 가부장적인 법에 의해 아버지의 죽음은 진정한 상속인인 힌들리의 권력을 증대시켰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이 새로운 아버지는 소설 속에서 캐서린의(그리고 히스클리프의) 타락과 그로 인한 몰락을 불러온다. - P487

사춘기에 이른 아이들은 왜 부모를 의붓아버지, 의붓어머니처럼 보기 시작하는가? 사춘기의 위기를 다루는 동화에 양부모가 어김없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그런 현상이 뿌리 깊게 널리 퍼져 있음을 시사한다. 이 현상을 설명하는 한 가지 방법은 아이가 자신의 부모를 성적인 존재로 의식할 만큼 성장하면 부모는 실제로 ‘본래‘ 부모 자신들보다 더 사납고 (힌들리와 프랜시스의 경우처럼) 좀 더 어려 보이기조차 한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캐서린 언쇼의 경험을 뒷받침해준다. 이제 진정으로 이해할수 있게 된 부모의 섹슈얼리티가 아이를 괴롭히는 만큼 아이 자신의 성적인 자각이 부모를 혼란스럽게 하기 때문에 부모는 확실히 점점 더 위협적으로 (말하자면 더 ‘짜증내고‘ ‘폭군처럼‘) 되어간다. - P491

이 단순하지만 폭력적인 에피소드의 이미지들은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 캐서린이 성숙한 여자의 섹슈얼리티로 내던져짐과 동시에 거세되었음을 암시한다.
어떻게 소녀가 ‘여성이 됨과 동시에 거세될 수(다시 말해서 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위의 이미지들이 의미하는 바가 상당히 프로이트적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는 바보 같은 질문이리라. 엘리자베스 제인웨이와 줄리엣 미첼이 말했듯, 프로이트적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적 의미에서도 (음경 선망을 암시하는) 여성성이 거세를 의미한다는 주장은 매우 적절해보이기 때문이다. 제인웨이는 프로이트의 중요한 논문인 「여성의 섹슈얼리티」(1931)를 논평하면서, ‘어떤 여성도 음경을 빼앗기지 않았다. 여성은 처음부터 그것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 P496

캐서린이 나중에 넬리에게 말하듯, 캐서린에게 히스클리프는 ‘나 자신보다 더 나같은‘ 사람이다. 히스클리프의 실질적인 굶주림은 더 위험한, 그래서 더 무서운 캐서린의 정신적인 굶주림을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에서 캐서린이 당한 부상은 히스클리프의 건강과 힘에 가해진 치명상을 의미한다. 한때는 양성적이었던 히스클리프-캐서린은 이제 서로 격리된 채 가부장제가 합의한 힘, 즉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의 린턴 집안과 그들의 밀사인 하이츠의 힌들리와 프랜시스가 합의한 힘에 의해 정복당하기 때문이다. - P501

남성적 교양소설의 최종적인 목표가 성공적인 자아 발견이듯이, 여성 교육의 최종 산물은 불안한 자기 부정임을 브론테는 암시하고 있다. 캐서린, 혹은 모든 소녀들은 자기 이름을 알지 못하고, 따라서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 될 운명인지알 수 없다는 것만을 배운다. - P502

도덕성이란 유효한 선택의 기회가 존재하는 경우에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았듯이 캐서린에게 유의미한 선택의 기회란 없다. 캐서린은 오빠의 결혼 때문에 워더링 하이츠에서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로 쫓겨난다. 캐서린은 그곳에서 이성과 교육, 예의범절의 아가리에 갇힌 채, 선택의 여지 없이 에드거와 결혼해야했다. 에드거 외에 결혼 상대는 없으며, 숙녀는 결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캐서린이 에드거에 대한 사랑을 정당화시키는 장면은 ‘나는 그의 발아래 있는 대지를, 그의 머리 위에 있는 공기를, 그가 만지는 모든 것을, 그가 하는 모든 말을 사랑한다‘[9장]) 우아하고 낭만적인 고백을 신랄하게 풍자한다. - P503

이런 풍자는 캐서린이 받은 교육이 젊은 숙녀에게 적절한 문학적낭만주의를 주입하는 데 상당히 효과적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모든 에너지를 아버지/연인/남편의 카리스마와 동일시하는연약한 ‘여성성’이 문학적 낭만주의다. 히스클리프와 결혼하면자신이 ‘격하될 것이라는 캐서린의 변명도 캐서린이 받은 교육의 불가피한 산물이다. 캐서린이 숙녀로 추락하는 동안 히스클리프 역시 여성의 무력함에 해당하는 위치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캐서린은 여자 되기가 타락이라면 여자처럼 되기는 더 심한타락임을 정확하게 배운 것이다. 따라서 밀턴의 이브가 이미 타락했기 때문에 어떤 의미 있는 선택도 할 수 없었던 것같이 (물론 밀턴은 이브의 선택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한다)캐서린에게도 진정한 선택이란 없다. 문화가 본질적으로 가부장적이라면 여성은 타락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그들은 타락할 운명이기 때문에 이미 타락한 것이다. - P504

앞으로 나오겠지만 히스클리프가 ‘천국 같은‘ 응접실 안으로 들여오는 사탄적인 반항은 가부장제에 해롭고 가부장제가 불편해하는 무시무시한 병원균을 가지고 있다. 그 병원균은 캐서린과 이저벨라 같은 여자들이 도주와 굶주림, 끝내는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자신들의 역할과 집 안에 감금된 상황에서 도망치게 하는 원인이다. - P509

『폭풍의 언덕』곳곳에 편재한 굶주림의 모티프와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이미지가 담고 있는 의미에 주목한다면, 에드거와 히스클리프의 핵심적인 대결이 부엌을 배경으로 벌어진다는설정은 우연 이상의 의미를 띤다. 어떻든 이 에피소드 바로 다음에 C. P. 생어가 캐서린의 ‘단식 투쟁‘이라고 부른 장면과 캐서린의 유명한 광기 장면이 나온다. 플라스의 또 다른 시행은자아 축소의 느낌을 묘사하는데, 이런 느낌은 자신이 하나의 역할과 기능, 그리고 일종의 걸어 다니는 복장으로 축소되어버렸다는 캐서린의 깨달음과 일치한다. ‘나는 얼굴도 없다. 나는 자신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광기의 장면에서 캐서린이 거울에비친 자신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는 사실은 세상과 캐서린을 연결해주던 끈이 헐거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캐서린은 넬리에게 자신은 미치지 않았다고 말하며 만일 자신이 미쳤다면 ‘나는 네가 정말로 시들어버린 노파고, 나는 페니스톤 절벽 아래있다고 생각할 거야. 그런데 지금은 밤이고, 탁자 위에 있는 촛 - P512

불 두 자루가 까만 찬장을 흑석처럼 빛나게 한다는 걸 알고 있어‘라고 말한다. 그런 뒤 ‘이상해. 저기에 얼굴이 보여‘ [12장] 하고 덧붙인다. 물론 아이러니하게도 그 방에는 ‘까만 찬장‘이 없고 거울만 있을 뿐, 캐서린은 거울에 나타난 자신의 이미지를부인하는 것이다. 이제 캐서린의 분열은 히스클리프와 떨어져있을 때 겪었던 심리적 분열을 훨씬 넘어서 몸과 이미지(또는 몸과 영혼)가 분리되는 지경에 이른다. - P513

[1장] 가장 교양 있는 여자도 무력하기는 마찬가지기 때문에 여자들은 록우드는 히스클리프든 똑같이 남자들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 P523

건강하게 양육하는 넬리는 어떤 의미에서 이상적인 여자, (에밀리 브론테의 시각이 아니라 말하자면 밀턴의 시각에서) ‘일반적인 어머니‘로 보인다. 샬럿 브론테의 『셜리』에서 셜리/에밀리가 밀턴을 비판한 핵심 구절을 다시 살펴본다면, 우리는 틀림없는 넬리 딘의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밀턴은 최초의 여자를 보려고 했다‘고 셜리는 말한다. ‘그러나 캐리, 그는 그녀를 본 것이 아니었어. […] 그가 보았던 것은 그의요리사일 뿐이야. […] ‘최상의 진미를 위하여 어떤 선택을 할것인가‘로 골치 아팠을 요리사일 뿐이야. - P527

히스클리프가 ‘여성적‘이라는 주장은 처음에는 미친 소리처럼, 또는 터무니없게 들릴 것이다.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듯, 히스클리프의 외형적인 남성성은 운동선수 같은 체격과 군인 같은 자세뿐만 아니라 숙녀다운 이저벨라에게 어필한 바이런적인성적 카리스마로도 확실하게 논증된다. 우리가 알고 있듯 에드거는 분명히 연약함에도 사실은 가부장적이지만, 히스클리프가차남의 남성성이나 가부장제의 전형적인 이단아와 같은 대안적인 남성성에 해당하지 않을 이유는 없는 것 같다. 물론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에드거가 기존의 천사의 방식으로 남성적이듯, 히스클리프도 분명 사탄적인 추방자의 방식으로 남성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좀 더 뿌리 깊은 연상의 측면에서 (차남, 서자, 악마 들이 여성들과 연합하여 천상의 폭정에 맞서 싸운다는 점에서, 고아는 여성이고 상속자는 남성이라는 점에서, 육체는 여성이고 정신은 남성이며 대지는 여성이고 하늘은 남성이며 괴물은 여성이고 천사는 남성이라는 점에서) 히스클리프는 ‘여성적‘이다. - P531

사르트르적인 의미에서 여자의 남자와 자율적인 여성은 하나의 완전한 여자가 된다. - P533

소설의 후반부에서 히스클리프의 개략적인 목표는 합법성을 전복시킴으로써 문화에 자연의복수를 가하는 것이다. - P535

‘메리 셸리는 브론테가 전복시키려고 애썼던 밀턴의 여성 혐오를 반복하고 있지만, 그녀 또한 추방당한 사람의 의지가 내포하는 위험한 잠재력을 이해하고 있었다. 메리 셸리의 잃어버린 이브는 괴물이 되었고, ‘그’ 또한 사회 구조에 파괴적이었다. 19세기 후반에 다른 여성 작가들도 밀턴의 악령과 싸우면서, 이브의 억누를 수 없는 의지를 말살하겠다고 위협했던 가부장제와 그에 대한 여성들의 대응 수단이었던 마녀 같은 분노를 검토했다. 예를 들면 조지 엘리엇은 『플로스강의 물방앗간』에서치명적인 양성성을 그리는데, 이는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이 성취한, 죽음을 통한 사랑을 기이하게 패러디하는 것 같다. ‘죽음 - P552

을 통해’ 매기와 톰 털리버는 ‘분리되지 않는다.’ 그들이 달성한 결합은 엘리엇이 그들을 위해 상상할 수 있는 것 중 유일하게 믿을 만한 결합이다. 왜냐하면 삶에서 매기는 단념의 천사가 되었고, 톰은 근면의 단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문화의 풍경 절반을 휩쓸어버리는 홍수 때문에 죽는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처럼 여성적인 자연은 저항하고 있으며 계속 저할 것이다. - P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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