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적용된 것이 바로 ‘공동가공의 의사‘와 ‘기능적 행위지배‘를 요건으로 하는 ‘공동정범‘(형법 제30조)이다. 1심과 2심의 재판부는 피고인 김ㅌㅇ이 성착취 범행에 대한 고의가 있었고, 범행을 위해 다른 공범들과 지속적으로 연락했으며, 성착취 등 범죄를 실행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조건이었던 피싱·열람 사이트의 보완·유지·보수 작업을 담당함으로써 성착취 등 범행에 본질적으로 기여했다고 보았다. 따라서 각 성착취 범행을 ‘직접‘ 실행하지 않았더라도 공범임이 인정된다고 판단해 중형을 선고한 것이다(141쪽 참조). 이는 ‘범죄단체‘ 혹은 ‘범죄집단‘으로 기소되지 않더라도, 조직적·계획적 디지털 성착취·성폭력 범죄에 가담할 경우 중형 선고가 가능하다는 선례를 남겼다. - P446

항소심 재판부는 특정된 피해자 두 명에게 지급했다는 합의금 액수도 확인했다. 나는 합의금 액수를 듣고 맥이 빠졌다. 그 정도 금액이면 반 년치 영상 삭제 비용도 되지 않는다. 그런 수준의 금전합의가 과연 피해 회복에 기여할 수 있겠는가. 수많은 형사 판결문 속에서 본, 액수가 적히지 않은 "상당한 금원을 주고 한 합의"라는 대목이 떠올랐다. 과연 ‘상당한 금원‘의 기준은 무엇인가? 금전합의가 실질적으로 감형의필수 요건처럼 되어 있는 한국의 사법 시스템에서, 합의금 액수는 어떻산정되고 있으며, 그 적절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한국 형사법 체계에서 금전합의가 제 기능을 하고 있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금전합의를 양형에 직접 반영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논의가 다양한 측면에서 진행될 필요성도 여기에 있다. - P458

더구나 재판부가 반영한 ‘합의‘에는, 합의에 응한 일부 피해자를제외한 특정되지 않은 다른 피해자들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가해자들이 다수의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성착취·성폭력을 저지르고도, 일부와 합의에 성공해 처벌불원서를 받아낸 뒤 이를 근거로 감형해달라고 읍소하는 전략은 이런 식으로 먹혀든다. 합의하지도 않았고(혹은 할 수도 없었고, 엄벌을 요구하는 피해자들의 의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특히 디지털 성범죄의 경우, 수사단계에서 피해자를 특정하기 위한 노력을 수사관들이 게을리할 때가 많다.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피해자들이 다수인 사건에서 합의를 반영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과거와 현재, 미래는 하나하나 절절히 살폈지만, 과거에 묶인 피해자의 시간은 외면했다. 검찰의 불성실하고 소극적인 입증 과정도 문제다. 피해자는 법정에서 도대체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 P460

스토킹은 강력범죄의 전조 범죄라고 한다. 단일범죄에 그치지 않 - P461

고 다수의 범죄와 결합하는 형태를 보이며, 강력범죄로 연결되는 비중이높기 때문이다. 성폭력과 신체 폭력뿐만 아니라 살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스토킹은 특히 여성 대상 살인·살인미수 사건의 30퍼센트 정도와 연관되어 있을 정도로 위험한 신호다. 나 역시 스토킹 피해자이며, 연대 과정에서도 스토킹이 동반된 강력 사건의 피해자들과 연대해왔다. 그러나 이제까지 한국 사회는 스토킹을 구애, 애정, 짝사랑 등 개인의 다소 미성숙한 혹은 적극적인 감정 표현 형태로 보고 독려하는 문화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스토킹 피해자들의 고통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거나 무시당했고, 관련 법 조항이 없다는 등의 이유로 분리해 처벌하면서 상당수 가해자가 중한 형을 피할 수 있었다. - P462

2021년 10월부터 시행된 ‘스토킹 처벌법‘은 처음 법안이 발의되었던 1999년 이후 22년 만에 생긴 스토킹 관련 법이다. 드디어 스토킹범죄에 공권력이 개입할 근거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 법안은 여러 한계 때문에 개정 등 보완 작업이 필요하다. 우선, ‘반의사불벌죄’로 규정되었기에 가해자가 신고를 막거나 고소 취하와 합의 등을 강요할 가능성이 크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100미터 이내로 접근하는 것을 금지하는 ‘긴급응급조치‘도 100미터라는 물리적 거리가 피해자를 안전하게 보호할 만한 거리인지 의문이다. 게다가 최대 6개월의 기한도 너무 짧고, 가해자가 이를 어기더라도 과태료 처분에 그쳐 실효성이 없다는지적도 나온다. 또한 피해자보호명령*이나 신변안전조치 규정이 없고, - P463

직장생활을 하는 피해자의 경우 고용 상태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하는 불이익처분금지 등의 조치도 미흡하다. - P464

‘n번방‘은 디지털 매체의 발달과 한국 사회의 강간문화가 결합되어 나타난 대표적인 디지털 성폭력 범죄다. 한국은 디지털 인프라가 비교적 잘 갖추어진 국가이며, 현세대는 ‘디지털 네이티브‘로 불릴 만큼 삶 자체가 디지털과 밀착되어 있다. 문제는 올바른 인터넷 문화를 만드는 데 한국 사회가 제대로 신경 쓰지 않았다는 데 있다. 현세대는 합성을 이용한 ‘지인능욕‘ 등의 디지털 성폭력을 범죄가 아니라 놀이의 하나로 받아들일 만큼 디지털 성폭력에 대한 인식이 매우 희박하다. 여성혐오와 성차별을 기반 삼아 여성을 인격체가 아니라 통제 가능한 객체로 파악하며, 그 통제를 위한 효과적 수단으로 디지털 성폭력을 적극 활용한다. 디지털 성폭력을 여성에 대한 ‘징벌‘로 보며, 이를 통해 피해자들을 억압하고, 그것을 다른 남성들과 공유하며 인정받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 P479

한 시간 정도 이어진 선고 과정을 기록하다가 ‘디지털 네이티브‘라는 표현이 판사 입을 통해 나왔을 때, 순간 멈칫했다. 원래 해당 판사가 판결문을 쓰는 데 공을 들인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디지털 네이티브‘는 2020년에 DSO 전 활동가들, 리셋현 활동가들과 함께했던 젠더법연구회 판사들과의 인터뷰나 사법연수원 강연 등에서 언급한 용어였지만, 바로 그해 성착취·성폭력 사건의 판결문에 등장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재판부(울산지법 형사11부: 박주영, 김도영, 정의철)는 ‘디지털 네이티브’와 이 세대의 여성 아동·청소년·장애인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왜 그들이 온라인 랜덤채팅을 하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조건만남’으로 이어지는지, 그 과정에서 ‘자발성‘의 외피를 둘러쓴 성매매가 어떻게 ‘성착취‘로 연결되는지 상세히 언급했다. ‘합의‘와 관련해서도 합의 과정·내용·금액 등을 구체적으로 살폈을 때 피해자의 진의에 의한 것인지 - P487

그 배경이 의심된다고 했다. ‘자발성‘을 앞세운 피고인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순수한 자발적인 성매매란 없고, 특히 청소년 성매매는 성착취다"라고 규정하며, 피고인 측이 주장하는 ‘자발성‘이란 자발성을 가장하거나 길들여진 것(그루밍)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 P488

반성폭력 운동은 늘 성공하지도, 바로 변화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시간에 파묻힐 경우 변화를 체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활동에 회의감을 느끼고 체념하며 냉소적인 태도를 취한다. 변화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운동은 생명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활동을 하면서 그 활동이 시스템 변화로 이어지는 사례들을 많이 전하려 노력 중이다. 당장은 보이지 않아도 바뀐다. 우리가 바꾸고 있고, 바꿀 수 있다. - P490

형사사법 절차는, 사법 시스템은 성폭력 피해 이후 피해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길 중 하나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길은 험로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길을 따라 걸어도 목표한 곳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나도 그 길에서 말, 시간, 자리를 되찾지 못하고 도착 지점에서 승소했다는 판결문 하나만을 받았다. 이렇게 ‘법대로‘는 최선의 선택지가 되기엔 아직 불안하고 거칠며 좁은 길이다. - P5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