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 작지만 단단한 바위섬이 하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나는 ‘빅토리 노트‘를 펴볼 때마다 나의 태어남을 기뻐하고, 작고 연약한 나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보듬어준 누군가가 세상에 있었음을 문장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해마다 더욱 누렇게 바래어가는 종잇장 사이에서 인생의 비밀은 더욱 값지게 숙성되어 가는 듯하다. - P9
지금도 그렇지만 ‘헤어빨‘이 없으면 인물이 안 난다. - 이옥선
우리 엄마는 너무 정직해서 탈이다. 내가 방송에 나오거나 어디 실린 인터뷰 사진을 엄마에게 보내면 ‘니 눈 부었네‘ ‘머리가 웃기다‘ ‘눈썹이 진해서 어색함‘ 등등의 답이 온다. 그냥 칭찬거리를 좀 찾아서 얘기해주면 안 되는지. 서운할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까지 이런 대쪽 같은 정직함을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 김하나 - P61
종이나 쇳덩이도 먹는 아이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지경이었을 때, 그때는 독박육아나 산후우울증 이런 용어도 없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는 감정에 휩싸였는데 여전히 아이들을 사랑하고 조금이라도 잘못되지 않을까 싶은 불안한 마음으로 살았다. 그러면서도 이제 두 살 반 된 아이와 7~8개월쯤 된 아이 둘을 데리고꼼짝달싹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니까 내가 마치 감시자 둘이 딸린 감옥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 온종일 "맘마 먹자" "까까 줄까?" "쉬~, 똥 쌌니?" 이런 베이비 토크만 계속하다 보니 나 스스로 내가 한때 대학에 다녔고 누군가의 선생이었던 시절이 있었나 싶어졌다. 그냥 어른하고 말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4B 연필 씨는 평일에 제때 제정신으로 들어오는 날이 거의 없었다. - P65
요새는 뭐든지 스스로 하겠다고 고집이다. 우유도 컵을 들고 직접 먹겠다고 하면서 내가 먹여주면 안 먹겠다고 고개를 살레살레 흔들고 그러다가 컵 고리에 손을 잡고 들고 마시다가 앞가슴에다 쏟아버리곤 한다. 밥을 먹을 때도 하나야 들고 있는 숟가락에다 엄마가 떠먹이는 숟가락, 두 개가 필요하단다. - P93
"똥 똥‘ 하며 손가락질을 하는구나. 정말 귀엽다." 마루에 똥을 누고 가리켜 보이는 것을 정말 귀엽다고 생각하다니도대체 부모의 마음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나는 우리 고양이들이 간혹 똥을 매달고 들어와 거실에 떨어트리면 기겁하는데. 그러니 엄마가 마음에 안 들 때면 내가 마루에 똥을 눠도 귀여워해준 사람이었음을 잊지 말자. - 김하나 - P100
"쾌활하고, 적극적이고, 고집쟁이고, 귀엽고, 착하고, 예쁘다." 위에 저렇게 패악질을 부리고 난장판을 만든 나의 만행을 다 서술한 뒤 "착하고, 예쁘다"로 끝나다니? 누군가는 습관적으로 쓴 것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의 엄마는 습관적이고 인사치레 같은 말을 안하는 분이다. 종종 서운할 정도로 가차 없다. 오냐오냐 스타일과도 거리가 멀다. 이 일기에서도 엄마는 『난중일기』풍의 문체로 사실들만 간명하게 썼기 때문에 엄마가 실제로 저 모든 행패에도 불구하고 나를 착하고 예쁘게 보았던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 P107
인구 정책요즘 사람들은 짐작이나 할 수 있으려나. 지금은 출산율이 낮아서 야단이지만 45 년 전 그때는 정부 시책으로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구호 아래 인구 억제 정책을 썼는데 우리는 어진 백성이라 정부시책을 잘 따랐다. 둘만 낳았고 불임 시술도 했다. 주공아파트를 분양할 때 불임 시술서를 내면 당첨될 확률이 높단다. 후에 진주까지 가서 서류를 떼 오기 귀찮아서 포기했지만, 그때는 낙태 수술을 하는 것은 정말 별일도 아니었고 필요하면 누구나 쉽게 낙태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정부가 낙태를 두고 불법이네 합법이네 왈가왈부하며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도구로 쓰니, 여자들이 용어 자체를 ‘임신중지‘로 바꾸고 계속 투쟁을 해서 겨우 합헌을 끌어냈다. 이걸 보면 우리 같은 시대의 여자들은 ‘정부가 참 별꼴이네. 언제부터그렇게 여성 건강을 생각해주고 태아의 인권을 생각했다고‘ 싶다. - 이옥선 - P113
나는 철이 늦게 든 편이었고, 가족의 입장을 배려하는 경우는 예민한 엄마의 잠을 신경 쓰는 것 외엔 거의 없었다. 만약 철이 일찍 들어 모든 가족을 배려하는 성격의 아이가 있다면 그아이는 어른스럽다는 칭찬은 많이 듣겠지만 자라서 남모를 고충을 가지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는 항상말했다. "새근이 너무 일찍 나는 건(철이 너무 일찍 드는 건) 좋은 것만은 아니야. 철모르고 지 하고 싶은 거 하겠다고 씌우기도(고집부리기도) 하고 그래야지." 음, 그래서 엄마가 끝끝내 철이 안 든 아빠를 데리고 이혼을하네 마네 하며 평생 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 김하나 - P125
이 일기의 중간쯤부터 필체가 바뀌고 문장의 느낌도 다른데 눈치채셨는지. 이 페이지는 아빠가 썼기 때문인데 나는 알지 못한 새 일어난 사건이고 하니 아빠보고 쓰라고 해서 생긴 일이다. - 이옥선 - P152
또 뭘 사달라고 조를 때 "엄마가 내일 사줄게" 그런 소리를 자주하니까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엄마 이게 내일이야?" 하고 물어본다. 그러면 엄마가 "아니야 내일은 하룻밤 더 자야 되고 이건 오늘이야" 하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지만 잘 이해가 안되는 모양이다. 며칠을 계속 내일에 대한 질문을 하더니 이젠 그만둔 모양이다. 밖에 나가서 ‘개새끼‘라는 욕을 배워가지고 화가 많이 나면 아무나 보고 개새끼라고 하는 바람에 한번은 아빠에게 혼이 난 적이 있었단다. 성질도 사납고 고집불통에다 자존심이 강해서 매를 맞기도 하지만 인정이 많고(만약 오빠가 매를 맞거나 하면 엄마에게 항의를 하고 같이 울기도 한다) 건강하고(키는 작지만 오동통하다) 정말 정말 귀엽다. - P221
"500원짜리나 천원짜리는 엄마에게 다 주고동전으로 한 개 주면 좋아한다." 아직 어려서 그렇지 크면 자연스레 경제 관념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던엄마는 성인이 되어서도 돈 개념이 너무 없는 딸이 슬슬 걱정이 된나머지 돈은 중요한 것이라고 자주 일깨워 주려고 했다. 이때에도 인용구가 동원되었는데 앞서 말한 『조개 줍는 아이들』의 일부분이다. "돈이란 중요한 거예요. 돈으로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죠. 좋은 차, 모피 코트, 하와이 여행이나 보석을 말하는 것은 아니에요. 독립, 자유, 품위, 배움, 시간같이 진짜로 소중한 걸 살 수 있으니까요." 나는 40대 중반이 되어서도 여전히 친구들로부터 ‘돈등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지만 덕분에 돈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돈의 가치에 대한 나의 생각에 단단한 틀이 되어준 문장이다. - 김하나 - P2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