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지내던 특수교육 담당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장애학생들과 실습을 나갔다 돌아오던 때를 회상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 학생을 집에 내려다주고 난 휠체어를 반납하려고 가 - P92
지고 돌아가는데, 다리가 너무 피곤해서 지하철에서 잠깐 휠체어에 앉아있었어.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 시선이 너무 많이 느껴지는 거야. 모든 사람이 지나가면서 한 번씩은 날 쳐다봤던것 같아. 너무 당황스럽고 부끄러워서 5분도 못 가서 다시 일어났어." - P93
‘정상성‘에서 벗어났다고 여겨지는 이들이 특히 그렇다. 누군가 내게 부정적인 입장을 취할 때 그것은 당신의 오해이며, 나는 정당한 방식으로 삶을 살아왔고, 옳은 일을 했다고 끊임없이 말해야 하는 삶이다. 그 ‘오해‘라는 것이 타인의 삶을 전혀 이해하지 않으려는 그저 힐난일지라도 흥분하지 않고 점잖게 ‘설명‘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면 곧바로 ‘피해망상‘이라든가 ‘예민‘이라는 말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소수자의 경험과 감정은 자꾸 공적인 논의에는 포함될 수 없는 주관적이고 별거 아닌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 P107
나는 어릴 때 어른이 되면 내 ‘병‘이 나을 줄 알았다. 장애가 있는 어른들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와 닮은 사람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커가면서 내 ‘장애‘가 낫지 않는다는 것, 장애와 함께 평생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난 뒤 마흔 살이 되면 스스로 죽을 거라고 말하곤 했다. - P112
유튜브를 시작하기 전에는 주변에 장애인이 전혀 없었다. 나는 늘 비장애인 사회 속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어디에도 나와 같은 몸을 가진 이는 없었다. 유튜브를 시작하고 나서야 나와 같은 몸,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이렇게 재미있는 일인지를 처음 알았다. 장애인콜택시를 타면 허리가 울려서 아픈 것, 사람들의 무례한 행동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수학여행을 갈지 말지 고민하는 것등 평범하고 사소한 일이 나만 느끼는 게 아니라는 감각. 여태살아오면서, 나는 비슷한 ‘몸‘에 대한 공감을 처음 느껴본 것이다. 짜릿했다. - P114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고 싶어서‘ 영상을 만드는 것도 맞지만, 이 문장의 어느 한켠에도 장애인의 자리는 없다. ‘사람 - P115
들‘이라는 말, 그러니까 예상 시청자에 장애인은 포함되지 않으니까. ‘장애인들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싶어서‘라는 말은 이상하다. 나는 여태 예상 시청자라고 여겨지지 않았던 이들을 위한 영상을 만들고 싶었다. - P116
‘모두에게 따뜻한 세상‘을 외치는 ‘감동‘ 카메라 영상들은 정말 모두를 위한 영상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이 영상들이 전체하는 시청자의 자리에 장애인은 없다. 장애인이 피부로감각하는 수치와 불안은 고려하지 않았으니까. 앞과 뒤의 일은 모두 편집해버리고, 단지 ‘영웅 비장애인‘의 모습만을 보여주니까. 정말로 그 상황 속에서 장애인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고자 한다면 무엇을 고려해야 하는지,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원인은 무엇이며 우리가 어떤 사회구조를 바꿔야 비슷한 일이다시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지금 그대로의 평온한 일상이 뭔가 잘못되었으며 영상을 지켜보는 자신역시 그에 일조하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불편한 장면은 없다.그것은 ‘보고 싶은’ 슬픔이 아니니까. - P121
또한 어떤 영상들은 장애인이 ‘나 자체‘로 살아가기 어렵게 만든다. 장애는 고난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역경이라고생각한다는 말. 그 역경을 이겨내면서‘ 얻은 깨달음을 공유하는 이야기. 그 이야기에서 깨달음을 얻은 시청자들이 열광하는것은 영상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기보다 언젠가 장애를 벗어던지고 일어날 허구의 인물이다. 댓글창에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제 앞 스크린에 비치는 인간이 ‘정상‘의 인간으로 회귀하기를 바란다는 말이 쏟아진다. 꼭 노래를 들어보셨으면 좋겠어요, 세상을 보게 되시면 좋겠어요, 건강해지세요. 그들의 마음이 너무 선량해서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다. - P123
"다음에 나랑 거기 가보자. 며칠 전에 갔는데 길도 넓고 차도 많이 안 다녀서 네 생각났어." 친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앞만 보고 걷던 주영은 바닥을 내려다보며 길의 울퉁불퉁한 정도, 가게의 턱, 인도의 마감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떠올렸다. 한 사람을알아간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시선을 배워가는 것이다. 생애 전체를 이해할 수는 없어도 세상을 마주하는 방법과 감각을 알아가고 서로에게 번져가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세계가 확장된다. - P129
‘장벽이 없는 극이란 무엇일까?‘ ‘이 모든 게 의미가 있는 일일까?‘ 하는 망설임이 우리 사이에도 있었다. 충분한 정보를모두에게 전달하겠다는 목표는 실패한 것일 수도, 애초에 허상 - P137
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 판타지 안에서는 다양한몸을 상상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길 바랐다. 내가 느낀 안전함의 감각을 또 다른 타지의 몸들이 느끼길 바라면서. - P138
<소극장판-타지>는 막을 내렸다. 후련하다면 후련하고 아쉽다면 아쉬운 작품이었다. <소극장판-타지>는 국립극단의 첫장애연극, 나는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공연한 최초의 장애인 배우가 되었다. ‘첫‘이라는 타이틀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 장애를 가진 이는 자꾸만 ‘최초‘ 혹은 ‘첫걸음‘이라는 메달을 목에 걸곤 하니까. 꾸준히 해도 자꾸 첫걸음만을 내딛게 된다고, 보름 연출은 말했다. - P138
그리고 고등학교 때부터 전동 키트를 장착한 휠체어를 타게 되었다. 혼자 이동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의 태도, 하고 싶은 일, 눈높이와 세상에 맞서는 마음가짐이 급속도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내 힘으로 휠체어를 움직이게 된 순간 세상이 확장되는 기분을 느꼈다. - P147
내가 몸을 생경하게 인식하게 된 것은 장애가 아니라 ‘여성‘의 몸에 관심을 가진 순간부터다. 어린이책 베스트셀러Why 시리즈는 《똥》 그리고 《사춘기와 성》 편만 유난히 닳아있다는 유머가 있는 것처럼, 나 역시 그러한 호기심 어린 발달 과점을 착실히 겪어온 어린이였다. 똥 이야기에 까르르 웃는 시기를 거쳐 가슴이나 생리 같은 것에 관심이 생긴 나는 <사춘기와 성》 편을 아주 (좀 많이) 정독했는데, 그 책에 나오는 여성의몸이 내 신체를 들여다보게 한 계기가 되었다. - P161
그러다 《어쩌면 이상한 몸》이라는 책을 만났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 그러니까 20년 전 장애인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많은 것들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장애가 있는 여성의몸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었다. 30대부터 60대까지의 ‘언니‘들 이야기였다. 이 책의 맨 앞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장애여성: ‘장애 여성’이라고 띄어서 표기할 경우에 ‘장애’가 ‘여성‘을 수식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장애여성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이야기하고, ‘수식어-명사‘라는 구분이 하나로 연결된 언어로 이해될 수 있도록 붙여서 ‘장애여성‘으로 표기했다. - P171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의 오해였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기록으로 남기는 데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내가 경험해야 했던 ‘치료‘가 어떤 목적이었든 잘못된 행동이었다는 것은확실히 말할 수 있다. 다음 치료 자세로 넘어갈 때마다 "지우야, 선생님이 잠시 여기에 손을 올릴게"라고 내가 확인할 수 있도록 전달한 이후 동작을 이어가는 치료사들을 만난 뒤 나의해석을 좀 더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수혜자와 피수혜자의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치료 과정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 맺음이란 그런 것이다. - P180
혼자만의 질문으로 간직하기엔 물음표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나는 이 경험과 문제의식을 담아 영상으로 만들었다. 영상 속 나는 화재 대피 훈련으로 불 꺼진 텅 빈 교실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져 있다. 이 영상이 업로드된 이후 우리 학교는엘리베이터가 비상시에도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담임선생님은 내게 사과의 말씀을 전해주셨고, 나는 12년만에 처음으로 다음 비상 대피 훈련부터 아이들과 함께 참여했다. 소방청에서는 장애인을 위한 대피 매뉴얼을 전달해주기도 했다. 나 말고도 모든 이가 ‘상식‘에 포함되는 대피 방법을 숙지할 수 있기를. - P206
"야, 뭘봐!" 소리를 친 것은 주영이었다. 나는 너무나 당황해서 주영을 바라보았다. 주영은 나를 오랫동안 응시하던 사람에게 정확히 시선을 두고 화를 내고 있었다. 붐비는 곳이었고 서로를 지나치는 상황이었기에, 날 쳐다보던 이는 이내 시선을 피하고갈 길을 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어떤 균열을 느꼈다. 화를 내도 된다는 것, 불쾌한 시선의 원인은 내 몸에 있지않고 허락 없이 쳐다보는 저 사람에게 있다는 것이 마음에 단단히 새겨지는 기분이었다. 야 뭐해, 싸움 나면 어떡해. 그 애를 말리는 척했지만 그 호통에 누구보다 신난 사람은 나였다. - P217
나의 소중한 공동체, 사회학과 ‘악반‘에서 ‘당연한 내자리‘를 찾는 경험도 했다. "행사 진행 시 고려해야 할 신체적 특성이나 식이 지향 등의 사항이 있을까요?" 새내기 안내 전화를 받았을 때 내게 닿은 질문이었다. 이것이 나와 이상한 공동체, 악반의 첫 만남이었다. 장애를 언제 밝혀야 할지 망설이고 있던 나는 "네, 제가 휠체어를 타고 있어서요. 행사 장소에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라고 대답했다. - P244
너무나 당연한 일. 가고 싶을 때 가고, 가고 싶지 않을 때가지 않는 것은 내게 당연한 일이 아니었는데, 그 순간 내게도 가능한 일임을 깨달았다. 함께하려면 뭔가 ‘더‘ 해야 하는 부담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세상의 많은 것이, ‘더‘ 준비해야 하는 것이 아닌 이제까지 ‘덜‘ 준비해왔던 일인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 ‘덜‘들을 찾아 모두가 당연한 자리를 누릴 수 있도록 보충하는 일이다.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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