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마리 다리외세크 <암퇘지>
영화 <죽여주는 여자>
소설 버지니아 울프 <파도>
케이트 밀렛 <성 정치학>

마리 다리외세크Marie Darrieussecq의 소설 《암퇘지Truismes》는 향수판매점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여성이 점차 돼지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렸다. - P119

처음에는 매력적으로 보일 만큼 살이 오르는가 싶더니 어느새 자신이 심하게 살찌며 변신하고 있음을 인식한다. 주인공은 계약서를 바라보며 매니저의 성추행을 받아들이고, 향수 가게 손님들에 대한 ‘특별한‘ 마사지를 넘어 성행위 요구까지 수용하면서 점점 돼지로 변해간다. 돼지가 되어갈수록 주인공은 말을 잃어간다. 말을 하려고 해도 혀가 굳어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인간의 언어를 잃어가고, 그렇게 생각도 잃어간다. 먹고 자고 섹스하는 생각만 한다. 가끔 다시 인간이 되면 수치심이 밀려온다. 그는 점점 잃어가는 언어들을 붙들고 글을 쓴다. 이 소설은 돼지가 쓴 소설이다. - P120

소영은 살인하지 않았다고 적극적으로 항변하지 않는다. 앞서 다큐멘터리 인터뷰에서 "진실? 사람들은 진실 같은 거 궁금해하지 않아. 다들 보고 싶은 걸 보려고 하지"라고 말했듯, 그는 사람들이 원하는 답을 주었다. 진실을 위해 굳이 나서지 않았다. 이는 아마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품위유지일지도 모른다. 소영이 담배를 피우고 초를 켜는 행위는 그가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자위행위인 동시에 품위유지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 - P132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나란히 서 있지만 각자의 정체성에 따라 다른 경험을 한다. 여성은 작가로 미술관에 들어가기보다 남성 작가의 작품 속에서 벗은 몸으로 미술관에 들어가기가 더 쉽다. - P141

돌아다니는 여성을 향한 길거리 성희롱은 이런 의식이 반영된 태도다. 돌아다니는 여자는 침범해도 된다는 생각에 유혹도 아닌 희롱이나 추행을 한다.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몸을 부비고, 따라오고, 귀찮게 말을 걸며 신상을 캐묻는다. 이러한 길거리 성희롱이 ‘문제‘임을 인식한 프랑스에서는 법적 개입을 하기로 했다. 제도적 개입이 가져올 실효성과 개입의 정당성에 대해 의구심은 있으나, 이를 문제로 인식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성희롱과 성추행 없이 길을 걷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만 있어도 일상의 삶의 질이 얼마나 획기적으로 변할까. - P148

성인 사이트를 가장한 성범죄 사이트인 ‘소라넷‘이 무려 17년 동안 있었다고 한다. 회원 수는 100만 명이 넘었다. 이 사건을 보도하며 JTBC는 "소라넷판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게 되면서 음지에서 욕망을 채우던 남성들의 불안도 커지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마무리했다.
‘욕망‘, ‘채우던‘, ‘불안‘ ………. 성범죄는 주로 (남성의) 본능과 결부하고, 나아가 이 본능과 행위 주체자를 분리해 남성 또한 ‘본능의 또 다른피해자‘가 된 것처럼 그린다. 남성의 범죄 행위를 표현하는 언어들은 항상 순화된다. - P155

소라넷 폐쇄 논의가 한참 오가자 한 남성이 내게 이렇게 말한다. "그래봐야 소용없어요. 풍선효과만 만들어요." 아, 이 말은 얼마나 끔찍한가. 풍선효과? 여기서 강간이 일어나지 않으면 반드시 저기서 일어난다고? 강간 총량 법칙이라도 있는 것인가. 이처럼 여성이 겪는 문제를 자연법칙처럼 여기며 팔짱끼고 방관하는 이들은 강간문화에 이바지하는 하나의 구성원이다. "모든 강간은 권력의 표현이다." 수전 브라운밀러Susan Brownrniller가 저서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남성, 여성 그리고 강간Against Our Will: Men, Women and Rape》에서 한 말이다. 강간은 고대로부터 남성 중심의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 P156

혐오의 공식화는 ‘그래도 된다‘는 의식을 정당화하며 슬금슬금 일상에 스며든다. 그렇지 않아도 ‘정치적 올바름‘ 따위는 피곤한데, 정치인이 앞서서 속마음을 대신 말해주면 두 팔 벌려 환영할 사람들이 많다. 특히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라면 진정성을 떠나 정치적 언어라도 제대로 구사하기를 원한다. 페미니즘이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는 일은 그 자체로 꼭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다. 위선도 자꾸 연습하면 어느새 태도가 몸에 배어 결국 그 사람의 일부가 된다. - P158

16년 동안 의붓딸을 성추행한 남성은 "의붓딸을 상대로 한 것으로 불특정 3자에게 다시 성폭력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높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고작 징역 3년을 받았고 전자발찌도 부착하지 않았다. 요양원에서 일하던 분을 만난 적이 있는데, 요양보호사들이 할아버지보다 할머니가 많은 곳을 선호한다며 "어떤 할아버지들은 기저귀 갈아줄 때 자꾸 보호사들 엉덩이를 만지고 이상한 짓을 해요"라고 한다. "안 끝나요. 여든이 넘어 기운 없이 누워 있는 와중에도 그런 짓을 해요. 죽어야 끝나." - P160

인간(남성)과 인간(남성) 사이의 폭력은 보편적으로 그냥 폭력이다. 하지만 여성을 향한 ‘인간‘의 폭력은 대부분 가정 폭력, 데이트 폭력이라는 별도의 영역으로 넘어가면서 가정 문제와 연인 문제라는 사적 영역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간다. 폭력을 대하는 우리의 인식 체계는 이 사적 영역 앞에서, 정확히는 ‘여성이 겪는 문제‘ 앞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창으로 여자를 위협한다는 어원을 지닌 ‘위엄 위’처럼, 여성을 짓눌러야 이룰 수 있는 위엄이 남성성을 구성하고 있기에 여성을 향한 남성의 폭력은 남녀 ‘관계‘의 일환으로 여긴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비대칭적 구조이고 법, 문화, 논리, 심지어 윤리이며 인간의 도리다. - P165

가정에서, 귀가 중에, 애인과 이별할 때, 마트에서, 직장에서,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폭력에 대한 공포는 여성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여성들이 이 일상의 공포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자 남성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만들지 말라며 불쾌해하는 목소리가 크다. 그렇다면 여성들이 ‘잠재적 피해자‘로 조심하며 사는 습관은 당연한가. 공포의 발생 맥락과 사회가 약자의 공포를 어떻게 정치적으로 활용하며 지배하는지에 대해 무지하면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는 쓸모없는 분노만 늘어난다. 여성에게 조심할 것을 강요하는 습관이 바로 공포의 일상적 활용이다. - P166

소설가 김훈은 《남한산성》 100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여자를 생명체로 묘사하는 것을 할 수는 있지만 역할과 기능을 가진 인격체로 묘사하는 데 서투르다"고 말했다.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여성은 인격이 있는 존재라는 인식이 없는 사회에서 남성은 창작의 영역에서나 현실에서나 아무 여자나 그냥 죽인다. 인격이 없는 존재이기에 관계를 끝낼 권리가 여성에게는 없다. ‘안전이별‘이라는 말이 있을만큼, 연인 사이였던 관계가 끝을 보려고 할 때 폭력이 발생하는 일이 잦다. - P170

개성 있고 흥미로운 작품을 많이 남긴 이만희 감독이 1964년에 만든 영화 <검은 머리>는 영화의 미학적 성취와 별개로 성폭력에 대한 당대의 관념을 잘 드러낸다. 폭력 조직에서 ‘보스의 여자‘인 문숙은 어느 날 강간을 당한다. 강간 피해자이지만 ‘다른 남자와 간통을 한‘ 것이나 다름없이 여겨지고, 조직의 원칙에 따라 문숙은 ‘처벌‘을 받는다. 보스는 문숙의 얼굴에 커다란 상처를 남기도록 지시한다. 이후 문숙은 앞머리를 늘어뜨려 얼굴에 남은 흉측한 상처를 가리고 산다. 또한 강제적으로 강간 가해자와 함께 살게 된다. 이는 여성 주인공의 불행한 신세로 그려지지만, 이러한 ‘문화‘가 여성에게 폭력적이고 착취적임을 비판하는 시각은 물론 담겨 있지 않다. 여성주의 관점으로 작품 앞에 설 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분열은 바로 작품의 미적 매력과 별개로, 여성이 처한 부당한 위치를 모르는 척 지나갈 수 없다는 점이다. - P173

루크레티아 Lucretia는 고대 로마시대의 대표적 ‘열녀‘에 해당한다. 고대 로마의 마지막 왕의 아들 섹스투스가 그를 강간했고, 귀족 신분인 루크레티아는 당시 ‘정숙한‘ 여성들이 행하는 가장 윤리적인 선택을 한다. 바로 자살이다. 남편과 가문, 피해자의 명예를 지킨다는 명목 아래 강간 피해자의 자살은 하나의 도덕규범이었다. 애초에 이 강간은 남편인 콜라티누스와 강간범이자 왕의 아들인 섹스투스 사이의 내기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로마는 결혼한 여성들도 애인이 있는 경우가 많았으나, 루크레티아는 남편이 자랑스러워 할 정도로 ‘정숙’했다. 섹스투스는 이러한 루크레티아를 남편이 없는 틈을 타 협박과 무력을 이용해 성폭행했다. 루크레티아는 피해를 입은 뒤 남편과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복수를 부탁하며 자결한다. 남편의 친구인 브루투스는 앞장서 왕가를 몰아내고 공화제를 실시한다. 브루투스는새로운 로마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래서 루크레티아 강간 사건은 부패한 로마 왕정을 몰아내고 새로운 공화정을 세운 하나의 계기로 여겨진다. - P175

반면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는 당시 드물게 성폭행 사건을 고소한 여성이다. 아버지는 그를 가해자와 결혼시켜 명예를 회복하려 했다. 길고 고통스러운 재판을 견디며 그는 결국 이겼고, 가해자와 결혼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성폭행 피해자로 남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남겼다. 17세기에 활동한 젠틸레스키는 오늘날에 와서 더 활발하게 재발견된 작가다. 화가로서 자화상을 남기고,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Judith Beheading Holofernes〉처럼 남성에게 피해자로 남지 않는 여성의 강렬한 모습을 그렸다. - P177

좌우를 막론하고 사회의 정책을 주도하는 ‘고소득, 고학력‘ 남성들의 가부장적 의식 수준은 심각하다. 현실 정치는 21세기, 가정에서는 19세기, 표현의 자유는 ‘나만’ 미국 기준으로, 밥상은 한국의 전통(?)에 따라, 여성의 몸은 나를 위한 재생산 도구.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굴절시켜 자기 편한 대로 재조립하는 남성들의 좌우합작이다. 이런 의식을 가진 이들이 배웠다는 이유로 요직에 두루두루 있다. 한심한 정책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 P183

여성에게 성관계가 임신,출산,육아까지 고민을 이어지게 만든다면 남성들에게 성관계는 욕구의 주제를 맴돈다. 정작 ‘비도덕’은 여기에 있다. 흔히 성폭력도 ‘남성의 성욕‘의 문제로 접근한다. 성폭력을 공유하던 사이트인 ‘소라넷‘ 폐쇄를 두고 소라넷 지지자들은 음란물을 볼 자유를 주장했다. 여성이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도 남성의 욕망을 걱정하느라 여성의 생명은 뒷전이다. - P185

태아를 함께 만든 남성은 ‘비도덕‘의 화살을 피해간다. 의사와 여성 사이 ‘불법적 거래‘만 남는다. 이 거래에서조차 여성은 의사의 위험수당을 감당하느라 더 많은 돈을 지불한다. 피임, 육아, 낙태가 ‘여성 문제‘가 되는 그 자체가 사회의 비도덕성을 보여준다. 그 남자는 어디에 있나. - P187

17~18세기 영국에서는 여성들의 커피하우스 출입을 금했기 때문에 여성들이 남장을 하고 커피하우스에 가기도 했다. 커피 한 잔을 공공장소에서 마시기 위해 펼치는 위험한 모험이다. 여성에게 금지하는 것은 ‘커피‘가 아니라 커피를 ‘보이는 장소에서 마시는 행위‘다. 여유와 쾌락을 느끼는 여성을 금지하는 행위다. - P207

그 자리가 누구의 자리냐에 따라 침입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소수자들의 모임 장소는 연대와 사교, 나아가 저항의 공간이다. 모임에서는 관계와 함께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유통시킬 수도 있다. 이러한관계와 언어라는 힘이 형성되지 못하도록 소수자의 장소는 지속적으로 공격받는다. 성소수자들의 경우 많은 시간을 제 정체성을 숨기는데 사용한다. 그렇게 관계 맺기를 방해받으며 고립을 강요당한다. 사회의 약자와 소수자들은 시간의 빈곤과 공간의 박탈을 일상적으로경험한다. 예를 들어 대중교통에서 임산부의 자리, 트랜스젠더의 화장실 사용 문제는 바로 일상에서 박탈당하는 ‘사소한‘ 공간을 둘러싼권리 투쟁이다. 페미니스트 지리학자인 린다 맥도웰 Linda McDowell은 "장소는 경계를 규정하는 규칙들을 구성하는 권력관계를 통해 만들어진다. 누가 어떤 공간에 속하는지, 누가 제외되어도 괜찮은지 등을 정해준다"고 했다. 성소수자가 ‘벽장‘ 속에 갇혀 있다거나 여성에게 ‘유리천장‘이 있다는 은유도 모두 공간에 빗대어 차별의 개념을 담은 표현이다. - P224

몸을 통한 구별은 차별의 기초를 형성한다. 혐오는 갈수록 오락이 되어간다. 혐오를 ‘표현‘할 ‘자유‘는 소극적 침묵의 도움을 받아 은근슬쩍 만개한다. 차별받는 대상에 대한 의도적 무시가 지속되면서 정말 무지 덩어리가 되어버린 이들과 싸워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자기만의 방‘을 위한 투쟁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 P225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가득한 《파도》는 부유하는 ‘나‘를 정착시키지는 못해도 부유하는 시간을 견딜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마치 여섯 명의 자아로 분열된 버지니아 울프의 영혼이 새겨진 듯한 작품 《파도》. 독백과 독백이 뒤섞이며 삶의 이야기는 직조된다. 출렁이는 의식과 이리저리 왔다 갔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인간의 삶이 파도와 같다. "너에게 대항하여 나 자신을 내던지리라, 패배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으며, 오 죽음이여! 파도는 해변에 부서졌다." 버지니아 울프의 이 묘비명은 《파도》의 마지막 문장이다.
여섯 명의 주인공 중 특히 소설가를 꿈꾸는 버나드의 독백은 나와 타자 사이에서 어떻게 뒤섞여 살아야 하는지 갈등하는 모습을 잘 드러낸다. "달에서도 나무에서도 충분한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나는, 사람과 사람의 접촉이 전부이지만, 그러나 그것조차도 잡을 수 없는, 너무도 불완전한, 너무도 연약하고, 너무도 외로운 나는, 거기에 나는 앉아 있다." - P228

‘미친 여성‘이야말로 가부장제가 자신의 존속을 위해 우선적으로 세울 수밖에 없는 금기인 것이다. 가장 상투적인 일반화의 옷을 입고 실행되는 금기 - 이것이 여성의 ‘미친/들린‘ 상태의 야누스적 얼굴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탄생시켰던 독일어에서 ‘미치다verrückt sein‘는 어원적으로 ‘자리를 약간 이동하다‘를 의미한다. 있으라고 한 자리, 혹은 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자리에서 조금 벗어난 자리에 있는 것, 이것이 바로 ‘미친‘ 상태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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