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융자를 지원받아 지금 여러 농촌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갖가지 시설농원이나 기업농 체제는 말의 참다운 의미에서 이미 농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살아있는 농업공동체가 중심이 되지않고, 다만 자본과 기계와 화학물질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특화작물의 생산은 농업의 공업화 과정의 전형이며, 따라서 그것은 ‘흙의 문화’의 번창에 아무런 기여를 할 수가 없다. 오히려 공업화된 농업은 극심한 토양 오용으로 말미암아 궁극적으로 사막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 P87

인간의 삶에 있어서 작든 크든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일 것이다. 고통은 삶의 근원적인 조건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고통 없는 삶이란 인간에게 있어서는 불가능한 꿈일 뿐만 아니라 완전히 바람직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고통 없는, 안락한, 절대적으로 안전한 삶에 대한 희구는 그것이 배타적인 목표로서 추구될 때 도리어 삶의 온전함을 망가뜨리는 파괴적인 힘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절대적 안전에 대한 완강한 집착 - 이것은 사람의 사람다운 삶의 궁극적 조건이라 할 수 있는 ‘죽음‘을 부정하는 어리석은 기도의 또다른 표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나날의 생존이 무수한 인연의 보이지 않는 자비로움 속에서 가능한 것이라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자기를 앞세워 세계의 고요와 평화를 깨뜨리고, 나아가 자기 자신의 본성에 대하여도 심히 난폭한 공격을 해야 하는가? - P90

그러나 지금 산업사회가 자랑하는 온갖 종류의 거대한 인공구조물에는 그 체제의 본질상 그런 대책이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산업체제의 근본 문제는 부분적인 합리성을 넘어서 전체적인 국면에 대한 고려가 없다는 점인데, 이것은 쓰레기에 대한 이렇다 할 아무런 ‘합리적‘ 방책도 없이 생산의 증대만이 일방적으로 추구되는 모든 산업적 생산활동의 공통한 문제이다. 요즈음 이야기되고 있는 ‘다품종 소량생산‘이라는 새로운 전략은 쓰레기의 팽창 속도를 줄이는 데 기여하는 바가 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해결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쓰레기문제는 결국 쓰레기가 만들어지지 않는 생활방식 - 자연의 재생순환 과정에 우리의 생활을 종속시키는 것밖에는 다른 어떤 해결책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플라스틱 우유병을 적게 만든다고 될 일이 아니라 플라스틱 병 자체의 생산을 중단해야 하는 것이다. - P93

거대한 건축물은-성당 건물을 포함하여-자신의 본원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불멸의 존재가 되고자 열망하는 인간의 야심의 표현이다. 이것에 비하면 가능한 한 이 지상을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니며" 거의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것을 삶의 제1원칙으로 삼았던 인디언 부족들의 경우는 경탄할 만한 대조를 보여준다. 북미대륙에서 몇만 년에 걸쳐 인디언들이 살았지만 그 흔적은 "하늘의 구름이 땅을 스쳐가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이들의 문화가 하늘과 별과 땅과의 생생한 교감 속에서 성립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디언을 포함하여 세계의 여러 원초적 사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주요한 특성은 초월적 실재로서의신(神)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인데, 이것은 의미심장한 사실이다. 실제로, 신의 개념이 필요하게 되는 것은 자연 또는 우주와의 살아있는 관계가 단절된 이후일 것이다. 그래서 근원적인 소외를 체험하게된 인간은 바로 그 소외로 인해 자극된 권력에의 욕망-불멸에의 욕망을 신에 대한 예배라는 형식을 통하여 표현하기 시작하였고, 그 단적인 상징이 하늘을 찌를 듯한 거대한 인공구조물로 나타난 것이다. - P94

<요한계시록>의 종말론적 상황 묘사 가운데, 하늘에서 별이 떨어져 그것이 지상의 온갖 샘과 웅덩이와 강물 속으로 쓰디쓴 쑥이 되어 들어간 탓으로 세상의 삼분의 일의 물이 못쓰게 되어 무수한 사람들이 죽게된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바로 이 ‘쓴 쑥‘의 우크라이나말이 ‘체르노빌‘이라는 것이다!
묵시록적 상황은 결국 사람 자신이 만들어낸다는 얘기이다. 1986년 4월의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로 인한 방사능오염은 지금도 계속되고있다.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광대한 땅이 못쓰게 되고, 생물이 서식할 수 없는 지역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실은 피난 갔던 많은 사람들이 체르노빌과 그 부근의 고향땅으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 귀향은거주조건이 회복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타향에서의 삶을 견디지 못한사람들의 절망적인 선택이다. 고향으로 되돌아왔지만 그들은 지금 극도의 불안과 우울 속에서 집 안에 틀어박혀 지내고 있다. 오랜 세월 생명의 안식처였던 체르노빌 주변의 숲은 다시 거기에 사람이 들어갈 수 있으려면 몇백 년이 더 지나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 P96

모든 것은 설득력의 문제로 돌아온다. 아무리 현실 극복을 말하더라도 우리의 깊은 내면세계가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실제로 모든 것은 헛일이다. 사람을 진정으로 변화시키고, 움직이는 것은 그럴듯한 논리가 아니다. 우리의 온몸과 영혼 전체가 반응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쉽게 믿고 있듯이 필요한 것은 남들을 설득하는 문제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설득, 자기 자신과의 싸움일지 모른다. 우리 각자가 정말 이 어둠의 현실에 얼마나 아파하고 있는지, 오히려 이 어둠을 자신도 모르게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물어보지 않으면 안된다.
노자(老子)는 자애로움(慈)과 검소함(儉)과 남들 앞에 나서지 않음(不敢爲天下先)을 세 가지 보배로 들었다. 삼풍사고에서 변을 당한 한 희생자가족은 이렇게 말했다. "자식을 잃은 후에는 땅바닥의 벌레도 감히 밟을 수가 없게 되더군요." 아마 이것은 이번 사고를 통해서 우리가 얻을수 있었던 가장 소중한 소득의 하나일 것이다. ‘不敢爲天下先’이란 결국 벌레를 죽이지 않으려는 마음이 아닌가. 만물이 형제이며, 천지와내가 한 몸뚱이라는 깨달음에 가닿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온몸으로 감당해야 할 크나큰 충격이 있어야 하는지 모른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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